컬러-화이트 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마헤레 다리(Magere Brug)
암스테르담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목제 개폐교이다. 전설에 의하면 강 양쪽에 살고 있던 한 자매가 서로 보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보다 못한 건축가 마헤레가 여기에 다리를 지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는 나라 전체에 운하가 거미줄보다도 더 조밀하게 뻗어 있고, 그런 운하 위의 교통수단으로써 배가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배들이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개폐교를 지었다고 한다. 현대 건축공법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다리가 지어졌을 당시 1671년에는 획기적인 기술에 속했다. 다리는 나무로 비교적 단순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낮에 보면 평범하지만 저녁이 되면 조명으로 인해 매우 아름답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개폐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는 남프로방스의 아를에 있다. 공사가 시작되고 시사회가 끝나고 리노베이션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도 도일은 절대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을 했어도 받지 않았겠지만 은재는 모든 일이 끝날 무렵,
도일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마헤레 다리 앞으로 나와 달라는. 새벽 안개가 걷힐 무렵, 그 남자는 찬 바람을 맞으며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도진을 다 용서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를 이해는 했다. 하나뿐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인 아버지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협박에 또다른 협박, 그리고 한번 범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다시 발목이 잡힌 동생의 안전..은재 역시 만일 동생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라면 크게 다른 선택을 하진 못했을 터였다. 용서까진 힘들어도 용납은 되었다. 그리고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 이유가 동생들을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보복을 당했다고 하니 그 부분에선 죄책감이 안 들 수는 없었다. 내가 더 빨리 나섰어야 했어. 왜 더 빨리 나서지 못했을까. 뭐가 그렇게 두렵고 겁나서. 이렇게 떨쳐버리고 헤쳐나갈 수 있는데. 울컥 눈물이 솟았지만 약속장소로 향한 은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일에 파묻혀 모든 걸 잊어버리는 게 능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 늦었네요. "
" .........."
" 그때처럼 서은재 표정이 이런 건 별룬데. "
" 그때처럼...이라뇨? "
다리 위에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남자가 씩 웃었다. 그때도 그랬죠. 팬던트를 보며 우는 얼굴로. 서은재가 참 싫었는데 그때부터 마음에 콕 박혔던 거잖아. 뭐만 해도 이뻐보여가지곤. 은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헤레 다리에서 도일 씨를 만난 기억이 없는데요? 은재의 말에 도일이 그 동그란 입술로 빙긋 소리내어 웃었다. 아, 드디어 서은재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구나.
절대로, 결단코 다시는, 안 볼 줄 알고. 도일의 말에 은재는 순간 울컥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사실 그는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었다. 형 일 때문에 죄책감이나 책임감 따위로 움직인다고 해도 바뀌는 상황 같은 건 없었다. 곧 주주총회 열려서 회사 일은 마무리될 거야. 윤지선 이사장님 연락 왔어. 곧 주주총회에서 대표 해임건 상정될거고 결정되고 나면 합병 절차 밟자시는군. 애시당초 나한테는 맞는 그릇 아니라 회사엔 뜻도 관심도 없다고 하셨어.
어짜피 프로젝트로 꾸려진 팀이라 같이 움직이는 게 맞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회사가 합병되고 리노베이션이 잘되어야, 동생들을 찾는 일이 더 원활해질 거라는 게 이사장님 뜻이셔. 도일의 설명 앞에 은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 외숙모...잠깐 눈을 감아내린 눈이 뜨거워졌다. 아마 자신에 대한 마지막 배려, 책임감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보다 더 깔끔한 처리일 수는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리노베이션이 성공했지만 대원그룹을 깨긴 역부족이니까.
" ..말했지만, 이걸 도일 씨가 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난 도일 씨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내 일이예요. 당신 일이라고 끌어다 부치지 말아요. 여기까지 와준 걸로 책임감은 충분히 다했다 생각해요. "
" 누가 책임감이래? 누가 형의 일 때문에 죄책감 운운해서 이러는 줄 알아? "
도일은 속상함이 솟구친 듯 은재를 쳐다보았다. 순간, 바람이 휘날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어지럽히고 갔다.
어떻게 너는,
그 순간에도,
잠깐의 찰나에도..
그렇게 힘든 삶을 버겁게 네 혼자 다 짊어지고 가야 했던 건지.
아아니,
앞으로도, 너는 이 무거운 짐들을 내 원죄인 마냥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거잖아. 제길.
" 혼자 지는 것보다, 둘이 낫잖아. "
" ......... "
" 나 죄책감 없어. 형이 저지른 일은 형이 스스로 속죄하겠다 했으니 그 뿐이야. 나 형 대신해서 서은재한테 속죄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형의 죄는 형의 죄일 뿐이야. "
" .........! "
네가 조금이라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생각하면..
숨도 쉬기 힘들어져.
그 먼지만한 짐도, 티끌도 다 내 꺼야.
네 꺼가 되게 하지 않을 거다.
" 힘들잖아. 그걸 잠깐 내려놓고 나한테 기대달라고 하는 것 뿐이야. "
" ......왜요. "
" 뭘 물어. 하늘만큼 땅만큼, 내 목숨보다도 더 서은재를 사랑하니까지. "
" ........!!!! "
아.
아아........
아,
하느님....
너무 덤덤해서 마치 아침 먹었어요 물어보는 것 같은 일상적인 말투로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도일을 보자 은재는 그만 숨도 쉬기 힘들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좀 그만 해. 동생들부터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저 악귀같은 서 회장 손아귀에 있는 어린 수완이 구해야 할 것 아니야. 악귀들이 다 먹어치운 대원그룹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이제 헤매는 거 그만하고 나 밀어내는 것도 그만해 줘. 나도 해봤어. 이게 길이 아닌가 싶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봤어. 나는 한 순간도 못 참겠는데 나 밀어내는 척 그만 해. 왜 그러고 살아야 해. 나는 서은재 없인 한 순간도 못 참겠고 서은재는 나한테 기대기만 하면 되는데.
말하는 도일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그냥 나한테 오기만 하면 되는데. 도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은재에게 내밀었다. 괜찮아 은재야. 그냥 오면 돼. 이제 그만 힘들어 해. 널 지켜준다 끝까지 사랑하자, 이런 사탕발림 같은 말 안할게. 그냥 함께 헤쳐나가자는 말 밖엔 못해.
그것 하나는 약속해.
더는 혼자 놔두지 않을게.
그건 자신 있어.
그 말에 울컥하여 달려온 은재가 도일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리노베이션을 성공시키는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면 안겨서 펑펑 울었을 터였다. 그 악귀같은 서 회장이 암스테르담으로 와서 뻔히 자신을 협박하며 수완이를 들먹였을 때 기대어 또 울면서 우리 수완이 좀 어떻게 구할 수 없냐고 매달렸을 터였다. 드디어 기다리던 사표를 던졌던 날, 또 그에게 안겨 울면서 너무 힘들었다고 투정이라도 부렸을 터였다. 남들은 다 하고 살았던 그거, 서은재는 몇십년 동안 단 한번도 하지 않았으니까 좀 하라는 거였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속속들이 내 자신보다 나를 그렇게 다 알 수가 있는건지. 내가 어디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를. 그의 뜨거운 품 안에서 은재는 다시 무너지듯 울고 있었다. 엉엉....어엉엉....한번 터지기 시작한 오열이 멈출 줄 몰랐다. 그의 형이 서 회장과 강 대표의 마수 앞에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사실은 은재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걸 혼자 버텨냈으니 충격과 상처를 혼자 감당해야 했다. 만일, 도일을 만나기 전 은재였다면 다 감당하고 견뎌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도일을 만난 후의 은재는 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안온한 보호와 따뜻한 신뢰와 든든한 지지 앞에서 또 무너졌더랬다.
괜찮아. 수완이는 괜찮아. 그 녀석 생각보다 강해. 그리고 역시 서은재 동생이야.
......무슨 소리예요?
강 대표가 끈질기게 서 회장에게 접촉했는데 그게 조금만 빨랐어도 우리 리노베이션 성공 못했어. 분명히 서 회장이 중도에 포기시켰을 테니까. 무사히 성공시킨 거, 강 대표 연락을 서 회장이 못 받아서야.
그게 어떻게,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아무리 연락이..
누가 중간에 끊지 않았으면 서 회장이 연락 못 받았을 리 없겠지.
........!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도일의 품에서 빠져나온 은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도일은 빙긋 웃었다.
" 일단 밥부터 먹자. 서은재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 배고파. "
* * * * * * * * * * * * * * * *
리노베이션이 성공하고 암스테르담의 건축업계엔 큰 파란이 불었다. 조이델 오너 강진형 대표가 사임하고 아내이자 이사장인 윤지선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초고속 이혼 절차가 이뤄지자마자 조이델과 레이체의 합병 소식으로 들끓었다.
리노베이션을 성공시킨 프로젝트의 주역들이었다. 강진형 대표가 사임했다로 공식 발표는 끝이 났지만 사업적인 제휴다, 경영권 싸움에서 밀려난 거다, 말들이 많았지만 공식적인 발표 사이로 쉬쉬하는 말들로는 개인적인 소송에 휘말려 전권을 다 빼앗기고 신뢰를 잃은 강 대표가 리노베이션 주역인 서은재 실장한테 밀려났다는 설이 파다했다. 합병이 공식화되자 레이체의 대표인 도일은 합병된 회사 이름을 새로 지었다. <솔베이지>. 그리고 솔베이지 로고 문양은 무당벌레가 그려진 팬던트 모양이었다. 리노베이션의 성과로 전세계의 화제성을 휩쓴 신생 건축회사의 등장에 모두들 냄비처럼 들끓었다. 은재와 도일이 공동 대표가 되었고, 은재와 도일의 젊은 나이를 가늠해 봤을 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회사의 잡일을 도일이 처리하는 사이, 은재는 암스테르담을 떠날 준비를 하는 윤 여사를 만났다. 짐을 빼고 이삿짐 차가 몇 대가 싣고 나가느라 은재가 살았던 윤 여사와 강 대표의 집은 바쁘기만 했다. 은재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그래도 윤 여사는 은재를 맞이했더랬다.
무슨 일이야. 한참 합병 문제로 바쁜 사람이.
...언제 떠나세요..?
이 이삿짐 빠지면 바로. 이삿짐 빠지는 거 보고 가려고 출국 늦췄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평생 암스테르담에서만 사셨잖아요. 굳이, 암스테르담을 떠날 것 까지야..
네덜란드에 있을 거라는 것만 알아 줘. 난 네덜란드가 좋아. 평생 여기서 살았는 걸.
.........조이델이 가지고 있는 외숙모 지분은 그대로예요. 언제든 원하실 때 쓰실 수 있어요. 이사회의 권한도 모두 외숙모가 가
지고 계세요.
그럴 필요 없어. 애초에 내 것도 아니고 그 인간 것도 아닌데.
.......
네 부모님이 가지신 걸 그 놈이 빼앗아서 자기 것인양 가지고 있었던 거지.
....
표정 보니까 이미 알았던 것 같구나.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은재를 보며 지선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내 남편의 사회적 위치, 경제적 권한을 모두 몰수했지만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일거야. 내 남편이 지금 치뤄야 하는 죄값은 강간죄, 폭행죄, 영아유기죄 같은 경범죄가 많다는 거지.
그놈을 완전히 감옥에서 썩게 하려면 살인죄 정도여야 할 텐데 그런걸 짊어질 만큼 멘탈이 단단한 놈이 아니야. 다 빠져나갔을 거야. 법으로 그놈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얼마 안 돼. 하지만 경제적 권한을 모두 몰수했으니 당분간 네 손발을 묶진 못할 거다.
지선의 말에 은재가 촉촉히 젖은 눈으로 지선을 올려다보았다. 지선은 그제서야 빙긋 웃었다. 그동안, 너와 네 부모님께 입은 은혜를 잠시나마 이런 식으로 갚는다고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그리고 그 사람. 오로지 스물네시간 네 걱정 뿐이라, 어찌나 이번 리노베이션을 꼭 네 공로로 해야 한다고 피를 토하고 나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는지. 차도일 대표 좋은 사람이야. 너한테 정말로 잘 된 일이야. 지선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의 집을 나온 은재 앞에 도일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 안하고 혼자 나온 건데 어떻게 알았어요? 은재는 이른 아침 일찍 도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을 나섰었다.
" 그것도 모르면 서은재 남편 될 자격 없지. "
" 칫.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회사도 이제 벌려놓고 결혼이 뉘집 애 이름이어요? "
" 그래도 이제 못 물러. 뼛속까지 내 꺼니까. "
" 기막혀. "
도일의 차를 타고 오던 은재는 문자 알림음이 오자 핸드폰을 켜 보았다.
새 메시지 01
축하해요.
재결합이 역시 짜릿한 법이죠.
- 경유
경유의 문자를 보자 어이없다는 듯 은재가 도일을 힐긋 노려보았다. 배신자. 어떻게 아냐 싶었는데 이렇게 곳곳에 스파이 심어뒀었구만? 은재로부터 경유의 문자를 확인한 도일은 소리내어 웃었더랬다. 아니 일터에 있어서 아예 내 얼굴도 안본게 몇 주인데 그럼 어떡해. 경유 씨가 중간에 고생 많이 했지. 도일의 신나는 웃음소리에 은재는 기막힌 표정이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보고싶어서 끙끙 앓았는데요. 팀원들 단톡방에 올라오는 차도일 근황보고만 보고 살았지. 대화 하나하나 사진 하나하나 다 저장하면서. 은재의 말에 도일은 은재의 손을 꼭 잡은 후 손등에 쪽 소리나게 뽀뽀를 했다. 걱정 마. 이제 걱정 안해도 돼. 도일의 청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도일에게 안 잡힌 한쪽 손으로 휴대폰을 든 은재는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은재 고마워. 배신자는 나중에 봐. 톡톡히 갚으마.
경유 차 팀장님 좋은 사람이잖아요. 안 잡으면 선배만 손해
은재 잘났다 잘났어.
은재 서울은 하늘 예뻐?
경유 선배가 봤던 것 만큼?
은재 하늘이 어떤지 볼 여력도 없었어. 수완이 보느라 얼마나 울었는지 하늘까지 볼 새도 없었어.
경유 걱정 마요. 이제 곧 다시 행복해질 테니까요.
은재 빨리 와. 네 자리 덥혀놨어. 빨리 안오면 네가 아끼는 수면베개 치워버린다.
은재 아직도 올 마음은 없는 거야?
경유 가요. 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은재 오케이.
경유 선배.
은재 응?
경유 회사 이름 마음에 들어요. 너무 좋아요. 내 스카웃 성공한거 회사 이름 덕인 줄 아세요.
메신저 채팅 창을 닫은 은재는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바보같은 깍쟁이 계집애...
경유가 솔베이지에 합류하기로 결정난 후, 공 부장과 의논 끝에 내린 결정은 민제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도일의 전화 한 통에 민제는 당연히 합류하겠다 했다. 이미 경유가 오기로 한 상황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에 매진하고 있던 민제는 어짜피 레이체 소속 조명 디자이너였으니 자연스럽게 <솔베이지>에 합류했고,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팀원들이 솔베이지의 팀원들이 되었다. 말하자면 리노베이션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역들이 모두 모인 조합이라, 다들 주목하고 있었다.
이제 남겨진 일을 수습하는 일만이 남았더랬다. 오랫만에 집을 찾은 민제의 방문에 조선주 여사와 시은은 눈이 동그래져서 민제를 쳐다보았다. 민제의 소식은 tv나 매체에서만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리노베이션이 대박을 쳤고 업계에서 이번 프로젝트 조명을 디자인한 민제가 얼마나 많은 걸 이루어냈는지를. 다시 돌아온 아들이 반가우면서도 선주는 일부러 민제가 인사를 하는데도 모르는 척 했고, 시은은 예전과는 달리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인사드리려고 왔어요.
도일 형의 새 회사로 들어가요. 그래도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자신을 보러온 줄 알았던 민제의 보고에 선주는 울컥한 듯 아들을 노려보았다. 결국 네 맘대로 할 거라는 거지. 걔도 오니? 오겠지. 그 회사에서 만난 거잖아. 걔를 만나는 한 넌 영원히 내 아들일 수 없다. 선주의 단호한 말에 민제는 그대로 맞받아쳤더랬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아들일 수 있고 아들이 아닐 수 있다면 더 이상 엄마한테 제가 필요없는 거겠죠.
" 서민제! "
" 말 그대로 인사 드리러 온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시길 바랄게요. "
" ....너 그게 무슨 소리야. "
" 20년을 엄마 둘째 아들로 살았고, 엄마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한번쯤은 그 사람을 포기하기도 했어요. 그거면 저는 엄마 아들로써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왔다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가진 걸 다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내가 행복한 걸 바라지 않는 엄마와 같이 있는 건 내 삶이 너무 아까워서요. "
" 서민제!!!!!!!!!!!!!!! "
" 잘 지내세요. 건강 잘 챙기시구요. "
" 민제야!!!! 민제야, 잠...잠깐만. 영원히 이 엄말 안보겠다고 할 참이니? 성경유 때문에?!!! "
눈에 핏발이 선 채 악을 쓰는 선주를 두고 민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뒤에선 물건을 집어던지는 선주의 악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기시켜 놓은 차로 향하던 민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나온 시은이었다. 시은이 부르는 소리에 민제는 걸음을 멈추어 섰다. 오빠 잠깐만.
"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났어. "
" .........."
" 난 오빠만큼 그렇게 대단히 용기가 있진 않나 봐. 내가 치졸하고 비열했다는 거 인정해. 나는 우리가 완벽한 짝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
" .........."
" 오빠랑 성경유 씨가 헤어진 채로 살아가는 걸 봤어. 남을 불행하게 하고 살아갈만큼 철면피는 아니야. 나는 그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리고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님을 보니, 정신 차렸어. 예전의 나 아니야. "
" 알아. 다시 예전의 유시은으로 돌아와줘서 고맙다. "
마치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는 덤덤한 말투의 민제를 보자 시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줌마 옆에 있는 거 예전엔 오빠를 붙잡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나 한참 사춘기 때 방황할 때 유일하게 가족으로 대해준 사람이 아줌마와 오빠들이었어. 민우 오빠를 잃은 아줌마를 봤을 때 느꼈어.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구나.
아줌마 옆에 있으면서 내가 더 위로받았어. 오빠와 상관없이 아줌마 옆에 있어서 내가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성경유 씨랑 경쟁하거나 다시 오빠랑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 아냐. 그렇게 하려다가 날 망치고 말았는 걸. 지금은 아줌마가 민우 오빠 때문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긴 힘들어도 아줌마한테도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혼자 계시는 것보단 누군가 옆에 있어준다면 나을 것 같아서. 아줌마도 아줌마 스스로를 사랑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래야 그때 얼마나 성경유 씨한테 상처를 줬는지 스스로 아시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내가 깨달았던 것처럼. 시은의 말에 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를 다 하고 나니 이제 여자를 기다리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시은과 엄마의 일은 이제 훗날로 미뤄둬도 될 것 같았다. 이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보기로. 그리고 이제 기다렸던 여정을 해 보기로. 사무실 출근을 눈앞에 둔 민제는 씩씩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 서울행 티켓 하나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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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패스같긴 했지만 자신의 수족이나 다름없던 강진형 대표가 모든 전권을 빼앗기고 리노베이션 전권마저 서은재에게 빼앗긴 후 이혼까지 당하고 경제력을 모두 박탈당한 채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쫓겨나 수억대의 소송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서 회장은 오랫만에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회사 이름이 솔베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갑자기 회사 이름이 뭔 말도 안되게 감성적이냐고 흉을 봤었는데 그 계집애가 tv에 나와서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노래라고.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자주 들려주셨던 노래라 절대 잊을 수가 없다고. 저 계집애가 동생들을 찾고 대원그룹을 되찾으려고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만만히 본 것은 오산이었다.
계집애 하나라 그냥 찍어누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더랬다. 그 열 일곱의 계집애가 칼을 갈고 17년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내내 그 계집애는 tv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목이 드러나는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노출 때문이 아니었다. 목이 훤히 파인 옷을 입는 이유는 무당벌레 팬던트가 그려져 있는 목걸이가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부모가 들려줬다던 노래. 솔베이지의 노래가 흐르는, 무당벌레 그림이 그려진 팬던트..서 회장은 은재가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지자 화를 참지 못하고 컵을 tv를 향해 던졌더랬다. 서은재를 위시한 <솔베이지> 팀은 그냥 구성된 게 아니었다. 전 세계를 강타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의 주역들이었다. 이제 대원그룹이 아니라 젊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영 한 세대교체가 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눈치는 있었다. 서 회장은 천천히 모든 흐름이 은재로 향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어. 강 대표 하나 제거되었다고 내 수족들이 다 잘려나간 게 아니야. 널 만만히 본 건 내 인정하지. 애송이. 하지만 거목같던 네 아비도 쓰러뜨린 게 나야. 절대 넌 날 만만히 볼 수 없다.
이제 어쩔 거예요?
....
회사도 차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당신에게 덤빌 건가본데,
무슨 개소리야!
만만히 볼 게 아니예요. 죽은 서 회장이 맏딸에게 후계자 수업을 얼마나 착실하게 시켰다구요. 열 일곱 고딩에게 벌써 대원전자 인턴쉽 얘기까지 꺼내던 양반이예요. 그 정도면 그만큼 따라오고 있단 얘기고.
17년 전이야. 대원그룹과 한참 떨어져 있는 애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겠어.
그런 애가, 이뤄놓은 성과를 좀 봐요. 리노베이션이 얼마나 대성공을 했는지 대한민국 사람 모르는 사람이 없다구요.
........이 사람이 근데,
이젠 수완이만으로는 안심 못 해요. 당신도 반격을 해야죠!
수완이가 있어. 수완이가 있어서 절대 날 건드리지 못해. 걱정 마.
그 수완이가 당신 아들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거죠. 만일, 지 누나랑 애비 존재를 알기라도 하면,
어허! 그 입 조용히 못 해?
서 회장의 부인이자 수완의 양모인 장석희 여사는 남편만큼이나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고 욕심 또한 차고 넘치는 교활한 여자였다. 전 세계에서 은재를 주목하는 속도가 달라지고 있었다. 은재가 돌아온다는 것은 지금 서 회장과 장 여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을 빼앗긴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수완의 이야기에 이르자 서 회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아내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오히려 장 여사가 더 적극적이었다. 걱정 마요. 수완이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고 고용인들 쉬는 타임이라 아무도 없어요.
그나저나 말 좀 조심해. 수완이가 눈치라도 채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막을 방법 없어요? 은재가 한국 들어오는 건 막겠다고 자신 만만해 했잖아요.
...조 의원 쪽은 별 얘기 없어?
아직요. 그쪽은 세빈이 때문에 바쁘죠. 애가 병치레가 잦잖아요. 애 병 수발 때문에 계속 파리에 머문다고 하더군요.
잘 살펴봐. 지완이를 세빈이 짝으로 두게 하려면 당신 지금부터 바빠야 해. 세빈이가 벌써 고 3이야. 부지런히 의원님 사모님께 눈도장 찍으라고. 대원그룹에 혹여나 문제가 생기면 의원님 도움 반드시 받아야 해. 그리고 지완이가 의원님 사위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당신도 잘 알테니까.
걱정 마요. 세빈이랑 지완이가 얼마나 가까운 사인데요. 그 염려는 붙들어 매라니까요.
아내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서재의 문을 열고 김 비서가 들어와 인사하며 목례했다.
" 이사회가 소집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회사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내와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서 회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이사회라니? 내 허락도 없이 무슨 이사회가 열려? 서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난감해하던 김 비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 회장님의 유언장 공증 문제로 변호사가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회사로 향한 서 회장은 회의실 문을 박차고 열었지만 이미 회의가 마무리 된 상태인지 서 회장을 보고서도 이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놈의 이사회 노친네들 전부 다 갈아엎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전 회장의 사람들을 다 갈아치우면 의심스러워 할까봐 일부러 남겨둔 것이 화근이었다. 서 회장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상석에 앉았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이사회라뇨. 이미 변호사 공증 문제는 마무리된 것 아니던가요. 총수인 제 재가도 없이 이사회가 열린 적도 있답니까.
일부러 노인들을 다독이랴 서 회장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지만 지난 번 은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계속해서 서수철 회장의 그림자를 드리우던 이사장은 회의록을 덮으며 손깍지를 꼈다. 서은재 씨가 리노베이션 미국 지사 일 쪽도 담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미국 시장이 뚫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면서 왜 아직까지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저희 이사회 쪽은 그게 의문이군요. 새 회사를 설립한 인물들이 모두 이번 리노베이션 성공의 주역들이라고, 유럽 건축학계가 젊은 피로 수혈될 거라 하더군요. 그럼 그 누구보다도 우리 대원그룹이 나서서 저들과 조인트를 맺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늦습니까. 이사장의 말에 서 회장은 자존심이 물 속으로 처박히는 느낌이었으나 애써 이를 악물었다. 건축업계에 새로운 애들 잠깐 반짝하고 뜨는 게 어제 오늘 일인가요. 리노베이션만 할 것도 아니고 잠깐이겠죠.
그 잠깐이 전 세계에 리노베이션 입찰 경쟁을 따낸 사람들이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 서 회장님의 장녀이구요.
....그 애는 이 회사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리노베이션을 성공시키기 전의 일이죠. 저희 이사회는 서은재 실장의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인재는 모셔오는 게 우리 대원의 모토 아니던가요. 그리고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유언장 공증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유언장이 공증되면 서은재 실장이 회사에 갖는 권리가 아주 많이 커질 거고, 그 전이라 해도 지금 서은재 실장은 우리 대원과 공조하고 있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입니다. 당연히 이사회에서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하지요.
이사장님, 이런 중요한 얘기를 어떻게 제게 말 한마디 언급도 없이..
사실상 이 부분은 서 회장을 통할 필요는 없지요. 전 회장님의 유언장 공증 문제는 지금 임시 총수인 서 회장님이 굳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서요.
이사장님!!!!!!!!!!!!!!!!
처음 회사의 대표직을 수행할 때 약속하셨던 걸로 아는데요. 최고 결정권자의 총수가 정해질 때까지 이 회사를 맡기로.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이 회사를 위해 얼마나 헌신해왔는지 잘 아시면서 왜 이렇게 제 뒷통수를 치시는 겁니까!
서 회장은 이제 이성을 잃고 이사장한테 아예 덤벼들 기세였다. 이사장은 천천히 손의 깍지를 꼈다. 암스테르담의 강진형 대표가 수상한 말을 떠들고 다닌다고 하는군요. 대원그룹의 총수 명령을 받았을 뿐이라고.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이지요.
암스테르담에서 건너온 불명확한 일이라 다 사실이라 믿기는 어렵습니다만, 이번 리노베이션은 우리 대원그룹에서도 사활을 걸 정도로 막대한 프로젝트임은 다 아실 겁니다. 심지어 투자는 우리가 제일 많이 했는데 서 회장이 외면하고 있는 바람에 모든 공로는 다른 나라에서 가져가게 생겼구요. 회사에서의 능력은 물론, 강 대표와 연관된 루머부터 바로잡는게 순서 아닌가 싶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 보트라도 입고 탈출하실 거라면 말이죠. 이사장은 차가운 눈으로 서 회장을 노려보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회장실로 온 서 회장은 핸드폰을 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서은재!!!!!! "
- 안녕하세요. 전화가 늦으셨네요.
" 너지. 네가 꾸민 일이지!!! "
- 뭔진 모르겠지만 화가 굉장히 많이 나셨네요. 좀 가라앉히시는 게 어때요?
" 대원그룹의 총수는 나야. 임시직 따위가 아니라고!니가 날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강 대표 하나 끌어내린 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더 큰 오산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많아. "
-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넌 어짜피 내 근처도 못 와. 나한텐 수완이가 있어. "
- 당신은 수완이 못 건드려. 그 앤 그렇게 나약한 애가 아니야. 당신은 당신 이용 가치 때문에라도 수완이 절대 건드릴 수 없을 거야.
" 누가 수완이 건드린대? 다치게라도 한대? 단순히 그것만이 수완이를 흔들 수 있는 건 아니지.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
- !!!!!!!!
" 여기까지하고 그만 까불어. 수완이가 내 수중에 있다는 거 명심해라. "
전화를 끊은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서 회장의 말이 맞긴 했다. 강 대표의 전권을 회수했지만 강 대표가 강간 소송에 휘말리지 않았더라면 이정도로 그를 끝내는 것도 어려웠을 터였다. 실제로 강 대표가 사주를 받아 은재 형제들을 떨어뜨려 놓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더랬다. 강 대표가 아니라 하면 그만이었고, 서 회장은 그걸 걸고 넘어지고 있는 거였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아무 증거도 없다고. 수완을 걸고 넘어지는데 은재는 온 심장이 다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었음에도 은재는 마음이 아팠다. 서 회장 말이 맞았다. 수완은 여전히 서 회장을 친아버지라 여기고 있는데다 수완을 직접 해꼬지하는 건 아니더라도 수완을 괴롭히는 방법은 많았다. 더 나서면 수완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건 그 뜻 같았다. 그저 수완이가 강하게 잘 견뎌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은재가 서 회장과 전화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도일은 은재가 전화를 끊자마자 어깨를 떠는 것을 보았다. 도일이 일어나기도 전 은재는 고개를 돌려 도일에게 달려와 와락 안겼다. 소리내어 흐느끼는 게 느껴지자 도일의 마음도 아팠다.
" 괜찮아. 전부 다 토해내 버려. 넌 그래도 돼. "
" 우리 막내, 우리 수완이는....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 혹여나 마음에 상처라도 주면, "
" .....내가 겪어본 서수완은 강한 아이야. 서은재 백 명보다 훨씬 더 강한 애야. 지켜 봐. 그리고 널 흔들기 위해선 수완이를 걸고 무슨 말이든 했을 놈이야, 서수철 회장은. 그래야 네가 멈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수완이를 지금 당장 건들 수 없는 건 그자도 마찬가지야. 누구보다도 지금 수완이가 필요할 테니까. 널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수완이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 하지만 정말, 정말 아프게 하면...."
" 우리가 빨리 처남과 처제를 찾고 돌아가야지. "
" ........."
도일은 울먹이는 은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오스트리아에서 연락이 왔어. "
* * * * * * * * * * * * * * * * * * * * *
서울 곳곳을 돌아본 경유는 막 인천공항에서 출발지를 정한 다음이었다. 시간이 좀 남았으니 공항 대기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의자에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던 경유 옆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에 긴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익숙한 향기가 났다. 블루벨벳버드. 커피향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눈물이 왈칵 솟을 것 같은 그 향기.
경유는 놀란 눈으로 옆자리의 남자를 쳐다보았고, 야구 모자가 벗겨지면서 환한 미소가 드러난 민제가 야구 모자를 경유에게 씌워 주었다. 민제에게 꼭 맞는 모자라 경유의 얼굴을 다 덮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컸다. 여행가시나 봐요? 어디로 가세요. 민제가 장난을 치듯 부드럽게 웃자 야구 모자를 손에 받아 든 경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왜 궁금해 하시는데요. 경유의 물음에 민제가 자신의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었더랬다.
저랑 가는 곳이 같을까봐서요.
민제의 손에 들린 티켓과 경유의 손에 들린 티켓을 본 민제가 경유의 손에서 티켓을 가져와 비교해 보았다.
암스테르담
출발지가 같았다. 민제는 손을 뻗어 우는 경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안 울고 있어야지 이건 반칙인데. 말하는 민제의 목소리도 목이 메어 있었다. 우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던 경유는 스스로 눈물을 닦았다.
누가 같이 간댔어? 어디서 김칫국이야. 일어나요. 할 일 많아. 리노베이션은 이제 시작이야. 미국 진출했으니 할 일이 산더미라고. 도착하자마자 브리핑 시작할테니 비행기 안에서 놀 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브리핑 예습해. 다시 잘 아는 프로패셔널한 성경유로 돌아오자 민제는 그런 경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린 새로 시작해요. 아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민제의 말에 민제의 품에서 경유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비행기 안으로 손을 잡고 들어가던 민제와 경유는 서로를 쳐다보며 환하게, 정말 처음인 것처럼 환하게 웃었더랬다.
" 참, 선배랑 차 팀장님은 결혼식도 미루고 도대체 어딜 간다는 거야? 둘다 휴가까지 내고. 한참 회사 일로 바쁜데. "
" 나도 잘은 몰라요. 비엔나로 간다는 것만 들었는데. "
" 비엔나? 오스트리아? "
같은 시각, 민제와 경유가 나란히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던 시각, 비엔나 공항에 내린 은재와 도일은 공항을 나서고 있었다.
- 비엔나 글로스터 보육원에서 열 여섯살쯤 되는 한국인 남자 소년을 받은 적이 있답니다. 1주일 동안 굶고 거지로 오인받아 채찍으로 맞아 죽기 일보 직전인 아이여서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하는군요.
도일이 수많은 비엔나의 고아원과 보육원을 뒤진 결과 날짜와 인상착의에 부합하는 인물에 근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생들을 찾기 위해서는 동생들이 사라진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형의 노트에는 동생들을 찾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서지환. 은재의 두 살 차이나는 남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비엔나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실족사로 처리된 남동생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찾아야 했다. 그리고 없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야만 했다. 비엔나 공항에 내린 도일은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왠 그림자와 어깨를 훅 부딪혀야 했다. 아, 미안합니다.
도일은 어깨를 부딪힌 상대를 향해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고개만 숙여 인사를 했다. 부딪힌 상대가 뭘 떨어뜨렸는지 물건을 줍고 나서 아주 잠깐이지만 떨어뜨린 물건이 망가진 곳이 없는지 살폈더랬다. 아, 혹시 뭘 떨어뜨리셨나요? 죄송합니다. 도일이 한번 더 서툰 독일어로 인사했으나 상대방 남자가 익숙한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게 느껴졌다. 일단 혼자 기다리고 있을 은재 생각 때문에 도일은 황급히 돌아섰고, 어딘지 익숙한 멜로디 소리에 도일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 저 소리는 분명히 그 소리인데.
솔베이지의 노래..
도일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수많은 관광객들과 사람들 틈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도일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은재가 기다리는 대합실로 뛰기 시작했고, 도일이 뛰어가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던 아까 어깨를 부딪힌 남자가 손에서 팬던트를 만지작거리며 팬던트에 그려진 무당벌레를 쓰다듬었다. 망가질 뻔 했네. 익숙한 한국말로 말한 남자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더랬다. 팬던트를 열어보니 조금 전처럼 솔베이지의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팬던트 밖에 새겨진 글자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조금 약해지고 있었다.
1989. 3. 21 서 지 환
팬던트 뚜껑을 닫은 남자가 천천히 뒤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재와 도일이 있는 곳에서 아주 천천히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또 낯선 먼 이야기들 사이로.
컬러-화이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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