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Loving You


 

 

 







완전히 알몸이 된 시은은 잠이 든 민제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 방법뿐이야. 오빨 내 걸로 만들고 말 거니까. 절대로 그 여자에게 뺏기지 않을 거야! 시은은 온 몸을 밀착했다. 그도 남자였으니 술김에 사고친다고 해도 그는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니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은이 눈을 꼭 감은 사이 술에 취해 완전히 뻗었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입에서 똑바른 말이 튀어나왔다. 놔. 민제의 목소리는 술에 취하지도 필름이 끊기지도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내가 등돌릴 땐 옷 다 입고 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사람 부를 테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미 민제는 등을 돌린 채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심지어 진짜 사람을 부를 기세처럼 전화기도 들고 있었다. 민제는 한번 하면 하는 사람인줄 알고 있었다. 수치심은 아까 전부터 느낀 상황이라 시은은 겨우 파자마를 위에 걸쳤다. 모욕감과 수치심은 누가 느껴야 하는데. 시은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벌개진 채 옷을 입었고, 시은이 옷을 다 입는 소리가 나자 민제는 뒤돌아섰다. 애초부터 술에 취한 일 따위는 없었던 듯 너무 멀쩡해 보였다. 

 


알고 있었어? 


.....


내가 이렇게 다 무너져서 오빠한테 하는 거, 언제부터 알았어?


라운지 바에서 주저앉았을 땐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건 사실이야. 네가 혼잣말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깼어. 


......


옷 입었으면 가. 내가 먼저 나갈게. 



심지어 너에게 실망했다는 둥, 다신 보지 말자는 둥 그런 인사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인사가 없어 시은은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먼저 떠나는 민제를 따라 호텔을 허겁지겁 따라나서야 했다. 그 여자 사표썼어. 이번만큼은 서은재 팀장도 그냥 수리할 거란 의견이야. 단단히 결심한 것 같다고 했어.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그 여자, 이제 끝이라고. 본인이 손 털고 가기로 한 거야. 그러니까 오빠도, 

 


"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


" 사표썼다니까. 그 여잔 오빨 안 좋아해. 버린 거야. 본인이 인정했잖아! "


" ......... "


"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집착할 필요 없어. 그럴 가치도 없는 여자야! "

 


짜악 - ! 

 


악을 쓰고 독한 말을 퍼붓는 시은을 보다 못해 뺨을 때린 민제는 이를 악물고 시은을 노려보았다. 오빠...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만지며 시은은 민제를 돌아보았다. 모르고, 실수로 때린 것이 아니었다. 때리고 난 민제의 눈이 젖어 있었다. 아픔, 

 

슬픔, 상실감, 그리고 허탈한 분노..정말로 민제가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게 느껴진 시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손을 댄 적도 없지만 저런 눈으로 본 적도 없었다. 뺨을 때리고 돌아서는 민제의 앞을 다급히 가로막은 시은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끝일 순 없어. 이대로 끝낼 순 없다고...시은은 민제의 앞을 가로막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 제발 정신차려. 

 

 

 

 

 

 


그래. 호텔에서 이런건 내 실수야. 잘못했어. 정말 오빠를 붙잡고 싶어서 그랬어. 오빨 너무 사랑하니까. 오빠가 망가지는 게 싫었어. 오빠가 그 여자에게 휘둘리는 게 너무 미치게 싫었어. 그 여잔 오빨 잊었고, 오빨 지웠고, 오빨 이용했다는 걸 인정하고 돌아선지 오랜데 오빠만...잊지 못하니까 너무 싫었어! 

 


유시은. 


.........!!!


다시는, 내 눈 앞에 띄지 마. 


오빠!!!!


...다신 보지 말자. 

 


그 말을 하는 민제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정말이었다. 민제가 성경유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 한번도 저런 눈을 한 적이 없었다. 시은의 절망어린 표정을 뒤로 하고 민제는 천천히 돌아섰다. 시은의 절규가 등 뒤에 꽂히는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시은이 조금 전 호텔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한 건 감정적인 폭력이었다. 민제는 그제서야 엄마와 시은이 얼마나 자신에게 감정적인 폭력을 강요해왔는지 깨달았는데, 자신에게도 이럴진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엄마와 시은이 얼마나 경유에게 막 했을지 너무나 뻔히 잘 보였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도 가혹했는데 안 보는 앞에서 얼마나 그 사람을 밟았을 것인가. 

 


바보. 
네가 얼마나, 어떻게 버티다가 항복한 건지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아픈 거, 내가 슬픈 거, 내 가슴 찢어지는 것만 너무 눈에 보였어.

바보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픈 거 알아. 
성경유가 얼마나 힘든걸 꾸역꾸역 참아왔는지도.
그리고 네가 다 감당하기 위해 비수는 온 몸으로 다 맞으면서 나한테 등 돌린 것도.

바보야.
그러니까 제발 그만 울고 나한테 와 줘. 
경유야....


 












- 사표 수리될 거야. 공사 시작해서 마무리되는 것까지만 보면 바로 수리돼. 그동안은 본사에서 추이 지켜보고. 인수인계 시작해도 돼.

 



드디어 때가 오고 있었다. 은재의 허락이 막 떨어진 참이었다. 경유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은 민제와 헤어지겠다고 생각한 다음에 바로 내린 결정이었고, 은재의 프로젝트를 위해 기다려 준 셈이었다. 사표가 수리될 거라는 은재의 연락을 받은 경유는 천천히 회사를 나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경유를 회사 앞에서 쭉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경유는 민제를 보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잠깐 서 있다가 빠르게 계단을 내려서서 민제를 지나쳤고, 

 

민제는 그런 경유의 앞을 가로막았다. 민제에게 길이 막힌 경유가 움찔하며 민제를 쳐다보았고, 경유를 강하게 막지는 못했지만 민제는 온 몸으로 경유가 못 가게 막은 셈이었다. 경유는 그런 민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고 마지막 퇴근이예요. 이제 인수인계만 남았다고 공 부장님께 들었을 텐데요. 아직 프로젝트 시공 전까진 시간이 남아있지만 의례적인 절차일 뿐이죠. 경유의 말에도 민제는 요지부동이었다. 도망가는 건 해결책이 아니예요. 이렇게 도망가듯 떠나는 건 비겁하고요. 날 선택해 달라고 강요는 안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떠난다고 다 답은 아니예요. 독한 척 하고 떠난다고 해서 내가 성경유 잊을 거라는 생각은 안하는 게 좋아. 그러면 그럴수록 난 평생 너 못 잊고 기다릴 거니까. 민제는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포기시키려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수 쓰지 마. 그 어떤 방법에도 난 절대 안 움직여. 성경유가 흔들리는 게 보일수록 난 더 파고들 테니까. 

 


서 대리님! 


널 포기하는 법 따윈 모른다고. 


서 대리님..! 


그건 우리 형도 동의했을 거야. 형의 생각은 몰라도, 절대 성경유를 혼자 두는 일에 동의했을 리 없거든. 


.....!!!


지금 형이 살아있다고 해도 결국 난 널 사랑했을 거야. 형이 없어서 널 좋아하게 됐거나, 형의 대용품으로 우리 둘이 이뤄진게 아니란 소리야. 


.........아니예요. 민우 씨가 있었으면 민제 씨도 나를,


서민우 대용품이라서 날 좋아했다는 말 안 믿어. 누굴 바보로 알아요? 


..........! 


하지만 강요는 안 해. 기다리기로 했거든.


........난 끝났어요. 얼마가 될줄 알고, 기다린다는 거예요. 무작정?


성경유니까. 



민제는 그저 벽이었다. 단단한 콘크리트였다. 경유를 향한 마음이 변치 않는다는 걸 보여준 셈이었다. 민제를 돌아본 경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그를 너무 사랑하고 있었다. 독하게 말로 밀어내고 있지만 경유의 한 겹 남은 이성이 점점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왜 안된다고만 하는 것일까. 그를 선택하고 그를 선택한 죄값은 자신이 받겠다고 했는데. 그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나 많이 보고 싶고 또 사랑하는데 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뤄져야 하는 것 아닌가..

 

경유는 애써 주먹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변치 않는 자신을 향한 민제의 마음 때문에 흔들리고 또 흔들렸더랬다. 민제를 향해 걸음을 옮길 찰나, 악을 쓰는 목소리가 민제와 경유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입구 계단 쪽에 서 있는 조선주 여사였다. 

 

 

 

 

 

 

 

 

 

 

경유의 표정도 사색이 되었지만 민제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달려온 선주는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 답지 않게 완강한 힘으로 경유를 향해 달려들 기세였다. 민제가 막지 않았더라면 선주에 의해 경유는 또 폭행 아닌 폭행을 당했을 터였다. 

 

내 아들에게서 떨어지라고 했지! 달려온 선주를 간신히 민제가 막았지만, 선주는 활화산 같은 눈으로 경유를 노려보았다. 당장 떨어져! 네가 두번이나 내 아들을 잡아먹는 꼴, 그 꼴은 못본다. 내 손으로 민우를 보냈어. 민제까지 그렇게 만들 순 없어. 

 

 

 

 

 

 

 

 

 

어떻게 네가..너에게 두번이나 내 아들을 뺏길 순 없다구! 소리지르는 선주를 향해 오히려 경유는 단단한 표정으로 선주를 쳐다보았다. 걱정 마세요. 오늘이 마지막 출근날이라 들른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이런 폭언 들을 이유가 없어요. 한번만 더 제게 손대시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경유의 말에 선주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기막힌 표정이었다. 네..네가 어떻게, 내가 눈이 삐었었구나. 이런 애를, 이게 네 본색이었던 거지. 내가 널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네가 이런 본색이라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선주는 펑펑 울면서도 독설을 멈추지 않았고, 상처받은 경유의 표정을 차마 볼 자신이 없는 민제가 그런 선주를 노려보았다. 그만해요, 제발. 그만하시라구요! 

 


" 민우가 널 선택했을 때 끝까지 반대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다. "


" .........! "


" 죽는다고 해도 절대 늬들이 약혼하게 두는 게 아니었어..."


" 엄마!!!!!!!! "


" 네가 민울 잡아먹었지. 민우 인생을 망친 네가 민제까지 그렇게 두게 하진 않을 거야! " 

 


그 말은 결정타였다. 아니,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그 말엔 엄마를 만류하던 민제도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었고, 애써 선주의 독설에 참고 또 참고 있던 경유도 폭발했는지 선주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고아라는 말에 이어 널 선택한 게 천추의 한이라니. 경유는 참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선주는 그런 경유를 보며 선을 한참 넘고 있었지만 경유와 민제가 같이 있는 걸 보자니 좀처럼 침착하기가 힘들었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선주를 돌아본 경유는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민우 씨를 사랑했었어요. "


" 허, 지금은 그 동생을 사랑하고? "


" .....어떻게 되었던 당신은 날 비난할 수 없어요. 당신한테 조롱받을 이유가 없다구요. "


" 성경유!!! "


" 다신 제게 이런 모욕 주시는 거 참지 않을 겁니다. "


" 얘가 진짜...."


" 당신이 절 진짜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민우 씨 엄마였으니까요. " 


" ....! "


" 민우 씨가, 그리고 서 대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당신도 좋은 사람일 수 밖에 없다구요. "


" ...... "

 


경유의 차분하지만 물기 어린 말에 민제는 경유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내 어머니가 사랑하는 여자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걸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그제서야 알았다. 형...이럴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해...민제는 어쩌지도 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고,

 

경유는 비틀거리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더랬다. 여전히 씩씩거리던 선주는 아예 아들을 잡을 기세로 민제를 돌려세워야 했다. 이 회사 그만두라고 했지. 아니, 아예 건축 일을 관 둬. 그게 낫겠다. 너 예전에 하던 운동을 다시 해도 되고. 아니, 

 

 

 

 

 

 

 

 

 

이 회사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 그냥 엄마도 암스테르담 지긋지긋하니 시은이 있는 뉴욕으로 이사 가자. 거기 가서 넌 시은이 아빠 회사 다니고, 시은이랑 나랑 오손도손 새로 시작하는 거야. 선주의 말에 민제는 눈을 내려감았다. 벽이었다. 

 

답이 없었다. 더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곡된 시선에 사로잡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선주 때문에 더는 경유가 상처입게 놔둘 수 없었다. 선택은 자신이 해야 했다. 우는 눈으로 엄마를 향해 돌아선 민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은 로스쿨을 갔고 나는 하고 싶어 하는 체대를 갔지만 형은 로스쿨을 가기 싫어했어요. 형은 아버지 꿈처럼 건축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했죠. 하지만 엄만 처음부터 반대했었어요. 형은 착한 아들이고 난 반항만 하는 아들이었으니까 형은 엄마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죠. 형이 로스쿨 박사 학위를 따고서야 엄만 형이 건축 디자이너가 되는 걸 반쯤 허락해 줬어요. 

 

그때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지만. 아마 경유는..형이 온전히, 처음으로 원한 처음이었을 거예요. 엄마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경유를 허락한 거 아니라는 걸 알아요. 형의 약혼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건 알 수 있어요. 방금 전 그 말은 경유 뿐만 아니라 죽은 형도, 그리고 엄마까지도 모조리 모욕하는 말이었어요. 엄마는 스스로 지금 얼마나 망가져 가고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왜곡된 시선에 사로잡혀 시은이만 부르짖고 있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 애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방패를 쓰면서 나한테 감정적 폭력을 휘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요. 민제의 말에 선주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황당한 표정이었다. 너 말이 되는 소릴 해.  시은이가 어떤 앤데. 오직 너밖에 모르는 착하디 착한 애가 뭐? 뭘 해? 시은이가 어떤 앤데 너한테 해꼬지 비슷한거라도 할 줄 아는 애야? 네 가슴에 상처를 내는 건 시은이가 아니라 성경유야! 너야 말로 정신 차려! 선주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민제는 뒤돌아섰다. 시은이를 안 보는 게 지금은 시은이를 위한 길이예요. 그게 시은이가 자신을 덜 망치는 길이라구요. 그 애는 점점 망가져가고 있어요. 엄마두요! 

 


민제야....!


제가 엄마 아들이기는 해요...? 이렇게 목줄 죄고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고 사사건건 내 가슴에 상처를 내는 게 엄마인데두요?!!!!


..........!


난 형처럼 다 엄마한테 숙이고 살진 않을 거예요. 절대로. 


서민제!


...엄마의 욕심을 위해 모든 걸 다 희생하면서 살지 않을 거예요. 

 


어안이 벙벙한 채 아예 주저앉은 선주를 두고 민제는 천천히, 하지만 느리지 않게 입구 정문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영영 영이별이었다. 





 

 

 

 




* * * * * * * * * * * * * *

 


그날 밤 아예 이사부터 갈 생각으로 집도 내놓고 바삐 움직이던 경유에게 민제의 연락이 닿은 건 자정을 갓 넘겼을 시각이었다. 낮에 그 난리가 나고도 경유는 민제를 만나러 집 밖으로 나와주었다. 다행이네. 안 나오면 창문에 돌이나 던지면서 밤새도록 민폐에 시위하려고 했더니. 민제의 힘없는 농담에도 경유는 웃지 않았다. 민제를 돌아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서로간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짐 싸던 중이야. 할 말 없으면..경유의 말에 민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경유를 쳐다보았고 민제와 눈이 마주친 경유는 입을 다물었다. 내내 울고 온 길이었는지 눈두덩이가 붓고 아직도 눈이 빨개져 있었다. 

 

 

 

 

 

 

 

사실 나는 자신이 있었어요. 엄마를 설득할 자신. 당신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오늘 아침만 해도 계획이 있었죠. 암스테르담을 떠나는 기차표를 사고, 성경유 손을 잡고 이 세상 끝까지 여행을 하는 걸로. 곳곳에 좋아하는 곳도 가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성경유는 지금은 내 말을 안듣지만 결국 내 손을 잡아줄 거라 생각했죠. 내가 성경유를 못 놓겠으니까. 너무 너무 사랑하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가 있어요. 포기라는 건, 딱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이 너무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내내 저렇게 힘겹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 그걸 감당하는 당신을 지켜보는 나는 또 얼마나 평생을 괴로울까 싶었어요. 내 선택 때문에 당신이 더 힘든 걸 보기가 힘들어서. 민제의 말에 경유는 입술을 달싹였더랬다. 나 때문이면 당장 내일부터 회사 안나오겠다는 말 하지 말아요. 회사 관두는 것까지 막진 않겠어요. 이 프로젝트, 서 실장님과 차 팀장님한테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당신이 더 잘 알겠지만. 그 두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 나보다 더 성경유가 제격이야. 실장님이 말씀은 안하셔도 얼마나 빈자리가 크겠어요. 내가 본사로 갈게요. 나 대신할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내가 레이체 본사로 갈 거예요. 사표는 냈다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까지 실장님 옆에, 우리 팀장님 옆에 있어주세요.

 

그래도 경유 씨가, 아니 부팀장님이 우리 프로젝트에서 갑자기 빠지는 건 손실이 너무 크니까. 처음으로 호칭을 불렀다. 부팀장님이라고. 그제서야 외면하던 고개를 들어 민제를 쳐다보던 경유는 가슴에 구멍 하나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 곳곳이 느낄 수 있었다. 온통 부은 눈을 쳐다보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은 못 해요.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온 심장을 할퀴는 거짓말까지 해 버리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나 이기적인 거 알아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근데 성경유 힘들어도 내가 먼저야. 당신도 당신 생각만 하는데 나도 이번엔 내 생각만 할래요. 세상에서 성경유를 제일 사랑해. 죽은 형이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안 뺏길 자신이 있었어요. 근데 차라리 내 몸을 장작으로 쓰면 썼지 네가 우는 건 못 보겠어서. 엄마 용서해달라는 말은 안할게요. 하지만 이제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상처란 단어는 이제 성경유가 생각하지 않는 걸로 해 줘요. 행복한 생각만 하고, 즐겁게 소리내어 웃고, 좋은 생각만 할 것. 민제의 말에서 자신을 놓기로 했다는 게 느껴졌다. 

 

기다렸던 말이었으나 더 심장이 두 갈래로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민제는 할 말을 다 해서 시원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울고 웃느라 민제는 경유와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눈 앞이 흐려져 제대로 고개를 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더랬다. 

 


" 잘 지내요. 아프지 말고. 그만 울고. " 

 


울기는.
네가 더 많이 울면서. 
아니, 너무 우느라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볼 거면서.

 


애써 마음을 담고 참느라 경유 역시 얼굴이 엉망이었다. 흐려졌던 얼굴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중이었다. 울던 민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서 있었고, 이별이 목전에 왔다는 걸 알게 된 경유는 천천히 민제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번엔 민제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 마. 

 


" 손끝이라도 닿으면 진짜 내가 못 멈출 것 같아서. " 


" .......... "


" 내가 더는 못 견딜 것 같아서, 그 때는 진짜...그땐 진짜 널 데리고 어디 외딴 섬에라도 나를 것 같아서 그래. "


" ........ "


" 잘 지내. 아프지 마. 내가 없는 곳에선 더 아프지 마. "


" 민제 씨도요. "

 


민제의 우는 얼굴 위로 경유는 겨우 한 마디를 보태었다. 돌아서는 민제의 모습이 차 속으로 사라졌고, 민제가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 완전히 점이 되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던 경유는 그제서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갈이며 쓰레기 같은 것이 발에 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왜 그렇게 상처를 주고 싶어했을까...

 


주저앉은 경유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아아.
내 사랑.

나의 흔들림 없는 내 사랑. 
민제야....




 

 

 

 

 

 

 

 





암스테르담 공항에 내린 서수철 회장 일가를 조이델 강 대표 비서 측에서 보낸 사람이 나와 최고급 호텔로 서 회장 일가를 초대했다. 짐을 풀자마자 서 회장의 부인인 장석희 여사는 서 회장을 아예 잡아 끌었다. 옆방에선 두 아들들이 서로 짐을 푸는 중이었다. 석희는 남편을 거의 잡아당겨야 했다. 당신이 후발로 출발하라길래 어쩔 수 없이 출발하긴 하는데 기숙사에 처박혀 있는 놈은 왜 다시 끌어다 붙여요? 이게 어떤 자린데 여기에 수완이가 끼냐고. 석희의 히스테리에 서 회장은 목소리가 새어나갈까봐 호텔 방문을 잠그기까지 했다. 이번 일 중요성 내가 또 당신한테 다시 설명해야 해? 왜 수완이 데려올 수 밖에 없는지. 

 

서 회장의 말에 석희는 더 발을 동동 굴렀다. 알아요. 그러니까 더 데려오면 안되지. 서은재가 뭔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지 동생 데리고 있는 거 알면 어떻게라도 데려가려고 난릴거 아뉴. 서 회장은 석희가 금방이라도 뭔 짓을 벌이기라도 할까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대지. 우리가 수완이를 데리고 있는 걸 알아야 아무  짓을 못해. 우리한테 수완인 보험이자 인질이야. 

 

 

 

 

 

 

 

 

 

절대 서은재는 우리가 수완일 데리고 있는 사이에는 그 어떤 짓도 못해. 그리고 수완이가 우리 수중에 있다는 거, 수완이가 우릴 친부모로 알고 수완이가 우릴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봐야 허튼 짓 못할 거야. 그리고 그런 이유인 것도 있지만 대외적으로 수완이가 꼭 필요한 자리야. 죽은 내 형님인 서 회장 가족 얘기를 불식시키려면 수완이 카드를 써야 해. 변호사가 그렇게 나오는데 우리가 선대 회장님 유지를 받들어 오너 가족이 되었다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어. 서 회장은 불만에 가득찬 아내를 다독였다. 내일 오전에 기자회견에 준비해. 오늘 나가서 지완이 옷 살 때 수완이꺼랑 똑같은 걸로 사. 

 


여보! 미쳤어요? 걔한테 내가 왜 옷을 사줘. 


똑같은 걸로.


여보오!!!!


이거 그냥 행사이기만 한 거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주시하고 있어. 한 명이 뒤쳐지는 모습 보이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겠어? 이때까지 해온 연극 다 도루묵으로 만들고 싶어? 당신 그걸 원해? 다시 아무것도 없는 빚투성이의 수습직원으로 돌아갈까 다시? 

 

..........

 


이를 악문 석희는 남편의 말에 동조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누린 건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 전 선대 서 회장이 누리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락하고 평화롭고 부유한 생활을 오랫동안 누려왔으니 다시 돌려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아들 지완이를 위해서라도 그건 절대 안될 말이지. 절대로. 남편인 서 회장만큼이나 야심이 남다른 석희는 이를 악물며 지금의 수모를 참고 또 참으리라 생각했다. 내 아들인 지완이한테 물려주기 전엔 어림도 없는 일이야. 대원그룹은 우리의 것이야. 

 

 

 

 

 

 

 

 

 

 

서 회장 일가가 호텔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스튜디오의 은재에게도 막 전해진 참이었다. 진실을 알고 스튜디오로 돌아온 은재는 멘탈이 반쯤은 실성한 듯 나가 있었다. 계속 도일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받을 수도 없었다. 아니, 도일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며칠째 물도 한 모금 못 마신 채로 버텼다. 회사로 출근하는데 이틀째 잠 한숨 못잤으니 사람 얼굴일 리 만무했다.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는데 누군가 끌어당겨 폭 안아 주었다. 그였다. 그의 얼굴도 만신창이이긴 마찬가지였다. 도일인거 안 은재가 필사적으로 도일을 밀어냈지만 힘이 없는 은재가 다시 비틀거리자 그런 은재를 도일이 다시 끌어당겼다. 

 


일단 병원부터 가자. 가서 주사 맞고 누워. 그게 순서야. 


......놔요. 


서은재!


이것 좀 놓아요. 

 


온 힘을 다해 손을 놓은 은재는 고개를 들고 도일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도 없었다. 도일은 차마 고개도 못 드는 은재 앞을 가로막아야 했다. 그래도 얘기해. 서로 얘기하고 우리 형 사과도 받아. 그러니까..

 


" 사과 받으면, 용서하면...내 동생 찾을 수 있어요? "


" ......은재야. " 


" 그러면 할게요. 당장 우리 동생들 찾아서 내 눈 앞에 데려오면 백번이고 다 용서해줄 테니까! " 


" ......... "


" 못하죠. 못할 거예요. 그럴 사람이 열 일곱살 짜리 남자애를 길바닥에 버리고 아직 열살도 안 된 애들을 유럽으로 팔아넘기진 못했을 테니까. "


" ..........서은재. "


" 당신 형은 사람 아니예요. 사람이 아니니 짐승이겠죠. " 

 

" ........! "

 


거의 주저앉은 은재는 온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매일 계속되는 악몽을 꾸는 기분을, 도일 씨는 알아요..?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면서 온 손이 짓무르도록 고아 명단을 찾아보느라 시력도 나빠졌죠.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아이들 웃음소리만 들어도 감전된 것처럼 아무 일도 못하겠는 기분 알아요? 살아는 있는걸까. 무사하긴 한 걸까. 아니, 안 무사하면 어쩌지. 

 

불행하게 자랐으면 어쩌지. 밤새도록 그 기도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도일 씨가 어떻게 알겠어요. 눈을 내려감은 은재는 그제서야 도일을 올려다보았고, 말간 은재의 시선 앞에 도일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은재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지금 전화를 받을 정신도 아니었지만 은재는 도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전화를 받아들었다. 서은재입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놈이었다. 이 일의 모든 원흉. 원수. 

 


- 너와의 약속대로 암스테르담에 직접 왔다. 이제 만나야지?


" ............ "


- 혹시 네가 서운해할까봐 선물도 준비했단다. 


" 선물이라뇨. "


- 수완이가 왔다. 


" !!!!!!!!!!!!! " 


- 그럼, 이제 제대로 된 협상을 해보실까요, 서은재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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