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행복한 우리 집(Happy My Home)

 

 

 


2020 조이델-레이체 합작 리노베이션 공개 시사회 
(주) 대원그룹 

 

 

 



드디어 몇개월간의 피나는 노력 끝 결실이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선 대원그룹 이사진들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원격화면으로 이 시사회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고, 조이델과 레이체의 임원진들 역시 이 거국적인 시사회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철저히 보안에 부쳐져 있었다. 하다못해 조이델의 대표인 강진형 대표마저도 진짜 이 프로젝트의 숨은 뜻을 알지 못했다. 모든 결과물은 이 스튜디오를 이끌어온 은재와 도일만이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사회 공개만을 기다리던 서 회장은 벌써 석 잔째 얼음물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역대급 결과물이라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설령 이 프로젝트가 결실이 안좋다 해도 수많은 프로젝트 중 하나일 뿐이예요. 너무 염려 마세요. 상상 이상으로 긴장하는 서 회장에게 임원진들 중 하나가 위로했지만 서 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곧 공개 시간이었다. 결과물을 모르기 때문에 서 회장은 더더욱 입술이 바짝 메말랐다. 손깍지를 낀 채 심장이 요동치던 서 회장은 등에 진땀이 바짝바짝 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결과물이길래 이렇게 꽁꽁 감추지 서은재.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도대체 넌 뭘 견디면서 살아온 거지. 

 

 

 

 

 

 

 

 

 

 

이젠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대원은 내 것이고 넌 수완이가 있는 한 발이 묶여서 아무것도 못할 거다. 승부수를 띄울 수도 없어.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대원그룹은 내 것일 뿐이야. 서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긴장된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상대는 아직 햇병아리였지만 그래도 한 가닥 불안감이 남아 있다면 서대식의 장녀라는 점이었다. 그 사건은 17년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다른 형제들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은재는 알거 다 알기에 충분한 열 여덟 성인이었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 너무 늦었어. 

 


서 회장은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니 좀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시사회 시작합니다.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암스테르담과 실시간으로 원격 연결된 프로젝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웅장하고 시크한 느낌을 생각했던 이사진들의 눈에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모더니즘 추구하는 지상 최대의 지상주거복합시설이 이번 프로젝트의 맹점 아니었던가? 왠 집? 다들 웅성거리는 와중 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서 봤더라, 왜 저 건물의 구조가 익숙한 느낌이지? 어디서 봤다고 생각했는데. 

 


2020년 지상 최대의 지상주거복합시설 <<라헤(Rache)>>를 소개합니다. 

 


정원이 있고 풀밭이 있는 조감도 위로 화려하고 시크하고 모던한 건물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동화를 연상케 하는 건물이었다. 시사회를 위해 준비한 듯 어느 가족의 그림이 프로젝터 안으로 들어오자 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아무도 서 회장의 돌발행동에 관심이 없었다. 가족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나이가 지긋한 이사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회장님이시다...! 아 회장님....!!! 회장님 가족이셔..! 전 회장님이란 소리에 다들 임원진들이 웅성거렸고, 이사회에서 가장 나이가 지긋하면서 영향력이 큰 이사장은 눈물을 머금은 채 감동한 표정이었다. 가족의 조감도를 시작으로 이번 프로젝트의 맹점은 따뜻한 가족이 사는 집, 을 표방한 것이었다. 

 


콰앙-!!!!

 



부들거리는 주먹을 내려친 강 대표는 암스테르담 개인 집무실에서 노트북을 집어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래서 은재가 숨겼던 거야. 이래서 기를 쓰고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려고 난리를 쳤던 거군. 서 회장은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냐고! 너무 세게 주먹을 쥔 탓에 아픔이 느껴졌지만 강 대표는 이를 악물었다. 조용히 견딜 줄 알았더니 은재의 반격이 생각보다 타격이 클 터였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은재를 차도일이라는 놈에게 뺏길 순 더더욱 없었다. 

 

강 대표는 아예 프로젝터를 끄라고 할 판이었지만 모여든 투자자들과 이사단들의 눈치가 심상찮았다. 대박입니다. 일반적인 모던한 건물에서 벗어나 따뜻한 집과 가족을 표방한 신 주상복합건물이라니...벌써부터 기자들 반응도 좋고, 모였던 투자자들한테도 반응이 아주 핫한 모양이예요. 서울에서 원격으로 보고 있는 투자자들 반응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역시 서 실장이네요.

 

 

 

 

 

 

이번엔 부피가 커서 성공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역시..이번 프로젝트가 우리 조이델을 유럽 최고의 건축업계로 만들어 줄 겁니다. 대박입니다, 대표님. 이사단들의 환호와 열띤 분위기에 강 대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돼. 이건 막아야 해. 회의실을 바져나온 강 대표는 서 회장에게 직접 걸었지만 지금 전화를 받을 리 만무했더랬다. 

 

 

" 발을 빼시겠다..? "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준 강 대표는 다시 비서를 돌아보았다. 차도진 사장한테 연결해. 이제 슬슬, 물 안에 있는 개구리한테 돌을 던질 때야. 경고를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일단 차로 칠 수 밖에 없겠지?





 

 





" 그럼 저 그림이 전 회장님 가족을 그린 그림이란 말입니까? 캬...정말 인상적인 프로젝트가 되겠네요. 의미도 있구요. "


"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암스테르담 조이델 건축회사의 서은재 실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연결합시다. "


" !!!! "

 


나이든 이사장이 들뜬 마음으로 나섰고 이미 투자자들의 반응이 아주 핫하다는 실시간 보고가 뒤따름에 따라 서 회장은 점점 인상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판에, 전 서 회장 일가의 가족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무조건 막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다. 이래서 서은재가 몸을 숙이고 낮추며 기다렸던거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치밀하게 계획해온 작품이었다. 은재가 할 수 있는 건 이런거 밖에 없었겠지. 서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사회에서 전 서 회장과 아주 가까웠던 이사장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너무 안일했어. 방심했다고. 

 

저 늙은이가 의결권만 없었어도 그냥 내쳐버렸을텐데. 서 회장은 애써 침착해지려 애쓰며 이사회를 돌아보았다. 이제 시사회도 끝났는데 굳이 암스테르담 쪽과 전화 연결할 필요까진 없을 듯 합니다만. 서 회장이 운을 띄웠지만 머리가 희끗한 이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들어보고 싶군요. 

 


....!


전 회장님의 가족을 모티브로 잡은 게 보통 일은 아닌데, 어떻게 기획하고 잡았는지 들어봐야, 이 프로젝트에 거액을 투자한 대원그룹이 어떤 컨셉으로 홍보하고 나아갈지 알게 될 듯 한데요.

 

....이사장님!


안 그렇습니까, 서수철 대행 회장님. 


....


아니면 그 이유를 들어보면 안 되는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

 


노회한 이사장의 날카로운 눈빛에 서 회장은 입을 다물었고, 시사회가 끝난 프로젝터에 점점 선명해지는 얼굴이 인사를 하며 자막으로 이름이 리스트업 되었더랬다. 

 


조이델 건축회사 실장 서 은 재 

 

 


" 서은재..........? 아니 설마......... "

 


이사장의 동공이 확장되며 손을 가리키자 암스테르담 스튜디오에서 모든 직원들과 함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은재가 옆에 서 있던 도일과 눈이 마주쳤고, 도일은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모든 직원들과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해온 사람들이 모두 든든하게 은재의 양 옆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은재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반갑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인 서은재 입니다. 옆에 같은 공동 책임자인 차도일 팀장이 함께 있습니다. 오늘 보여드린 이미지를 바탕으로 내일부터 바로 시공 설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완공은 6개월에서 최대 1년까지로 보고 있으며 안전하고 튼튼한 건물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재의 말에 은재를 찬찬히 뜯어보던 이사장은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더랬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부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사장의 말에 은재는 이 순간만을 기다린 듯 주먹을 꽉 쥐었고, 은재를 쳐다보던 서 회장 역시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과, 제발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기다린 사람의 차이였다. 오랫만이네요 아저씨. 17년만이죠. 

 


너 정말 은재니...? 네가 정말 은재야...?


네 아저씨. 제가 돌아가신 서길만 회장님의 장녀, 서은재 입니다. 



눈을 질끈 내려감은 서 회장과는 달리 이사회엔 큰 충격의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지켜봐 주세요, 엄마. 아빠. 이제부터가 시작이예요. 이제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게 될 거예요. 이건 시작일 뿐이예요. 저 파렴치한 짐승이 가져갔던 모든 걸 다 되찾아 오고 말 거예요. 은재는 리노베이션된 가족 사진을 가리켰다. 대원그룹이 지지하고 있는 그룹의 모토가 "따뜻한 집과 직장,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죠. 가족같은 사원들, 그런 사원들이 있는 회사. 돌아가신 전 회장님이 내세우셨던 슬로건이기도 하죠. 그 슬로건을 시작으로 진행한 리노베이션입니다. 가장 행복한 가족, 을 모티브로요.

 

은재의 설명에 모두들 감탄과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건 초대박입니다. 우리 그룹의 모태를 모티브로 한 프로젝트라니..그 어떤 때보다 반응이 역대급일 겁니다! 이사진들도 난리가 났더랬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노회한 이사장은 묵묵한 얼굴로 은재를 쳐다보았고, 은재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 리노베이션 시사회에 나온 이 가족 도안이 앞으로 이 프로젝트에 나올 모든 시안과 브로셔에 대원 그룹의 미래를 의미하는 가족의 도안이 찍혀 나올 겁니다. 자체 굿즈도 마찬가지구요. 

 

 

 

 

 

 

 

볼펜, 폰케이스, 에코백, 컵홀더, 티셔츠, 이 모든 게 대원의 모든 프로젝트의 첫 구심점이 될 겁니다. 은재의 말에 서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일을 이렇게 진행합니까! 내 재가도 없이! 불허하겠습니다. 서 회장의 말에 은재는 서 회장의 분노를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회장님께서 준비가 미흡하셨나봅니다. 분명히, 계약서 9항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차후 진행되는 모든 프로젝트에, 이 리노베이션 시안이 모두 찍혀 나온다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 중 하나였죠. 

 

회장님께서 미처 놓치셨나 봅니다. 아니면, 이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결정적인 사유를 드시는 게 아니라면 그대로 진행해도 될까요. 땅 땅 땅...은재의 완벽한 판정승이었다. 모두들 환호와 웅성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회의실의 문을 누군가 열고 들어섰고 서 회장이 금방이라도 때려부실 사람처럼 노려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중요한 회의 중인거 안보여?!! 서 회장의 노성에도 불구하고 어쩔 줄 모르는 비서 뒤에서 안경을 고쳐 쓴 남자가 두꺼운 서류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은재도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이었다. 

 


"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대행 회장님. 대원그룹 전속 고문변호사 함승진입니다. " 

 


변호사? 아니 변호사가 여길 왜...? 서 회장은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함변을 쳐다보았고, 함변은 모두에게 짤막하게 인사한 후 프로젝터 속 은재를 보자 미소를 지었더랬다. 함변을 단숨에 알아본 은재의 어깨가 떨리자, 옆에 서 있던 도일은 은재의 어깨를 두드렸고 은재가 도일을 돌아보며 뭉클한 눈이 되어 눈가가 어느덧 촉촉해졌더랬다. 

 


...아저씨예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 변호를 해주던 아저씨요. 17년 전 사고의 책임을 물어 서수철 회장이 계약 파기를 한 뒤 이민을 떠나셨었죠. 


...........! 



도일에게 작게 말한 은재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한 채 프로젝터 속 함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서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변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넌 이제 대원그룹의 변호사가 아니야. 17년 전 사고 책임을 지고 넌 영원히 제명됐어.

 

더 이상 우리 그룹의 공식 변호사가 아니란 뜻이야! 서 회장의 말에도 함변은 아무렇지도 않게 서류가방 속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자리에 앉았더랬다. 전 대원그룹 변호사로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대행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17년 전 그룹 변호사직에서 제명되었죠. 하지만 회사 변호사로서 제명된 것이지 전 회장님 일가의 변호사로서 제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전 회장님 일가와의 계약이라 대행 회장님은 권한이 없으십니다. 다시 말해, 이미 성인이 된 서은재 씨의 공식 변호사로서, 전 회장님의 지분과 유산에 변동이 있어 유언장을 공개하려고 합니다. 전 회장님의 유언장은 함 변호사만 아는 일이었다. 그렇게 서 회장이 손에 넣고 싶어했던 유언장이기도 했지만 그룹 변호사에서 제명된 후 함변은 아예 자취를 감춘지 17년만이었다. 프로젝터 속 은재를 바라보던 함변은 미소를 지었다. 새 유언장 속 마지막 챕터를 다시 공개합니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제 10장. 서길만 회장의 다섯 자식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된 후 회사와 관련된 일은 

다섯 남매가 모두 모이면 그룹의 모든 지분을 상속하게 된다. 

 


콰앙 - ! 

 


" 이건 말도 안돼! 날조된 거야! " 

 


서 회장은 본분도 잊고 그자리에서 펄펄 날뛰었다. 말하자면, 회사에 관련된 일을 서 회장의 자식들 중 포함된다면, 성인이 되었다는 전제 하에 서길만 회장의 유산과 지분이 모두 상속된다는 건, 그 말은 서 회장이 남긴 지분과 유산은 은재를 비롯한 네 남매 말고는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서길만 회장 소유의 회사 지분이 은재와 동생들에게 모두 상속권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현재 서수철 회장은 회장 대리인이었다. 은재와 동생들이 장성할 때까지 이 회사를 잠시 맡아두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17년 전 은재는 어리다는 이유로 암스테르담에 보내져 외삼촌이 양육하게 되었고, 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영구 실종 상태였다. 개거품을 무는 서 회장과는 달리 프로젝터 속 은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함변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쓰신 유언장이라구요..? 은재의 말에 함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암스테르담으로 가겠습니다. 이제 은재 씨는 공식적인 대원그룹의 상속 지분이 있습니다. 은재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숙였고, 도일이 그런 은재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 주었다. 고개를 숙인 은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 * * * * * * * * * * * * * * * * * * * * *


[단독] 대원그룹 전 서길만 회장의 장녀 서은재 양, 17년만에 모습 드러내
[헤드라인] 유럽-서울 잇는 지상 최대 규모의 건축 리노베이션 주인공 '대원그룹'의 상속녀! 

 


" 어...? "

 


학교에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타던 수완은 버스 정류장에서 핫한 헤드라인 뉴스를 검색하다가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사실 회사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몰랐다. 뉴스 기사로는 은재가 전 대원그룹 회장의 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대원그룹 회장님은 우리 아버지인데..그럼 사촌지간이란 얘긴가? 돌아가신 회장님이 큰아버지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남 같은 생각이 안 들었나봐. 상속 어쩌고 하는 얘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은재의 기사를 보던 수완의 입가에 슬몃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집, 행복한 가족을 모토로 한 건축 설계라..저 누나 다운 생각이야. 어떻게 이렇게 딱 내 마음에 딱 드는 집을 만들었을까. 리노베이션 그림이 기사로 떴기 때문에 유심히 지켜보느라 버스도 놓친 수완은 버스가 오는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깐만요! 아직 안 탔어요! 버스를 향해 달려가느라 기사 속 사진에서 은재가 무당벌레 목걸이를 하고 있는 사진이 불빛에 반짝였다가 사라진 것을 수완은 알지 못했다. 

 


운명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다시 한번 사직서입니다. 


........


벌써 네 번째인거 알아요. 이제 리노베이션도 끝났고 곧 설계 시공 들어가면 우리가 하는 일은 끝이예요.


결심이 섰니?


......네.


원한다면 다른 지사로 보내줄 수도 있어. 암스테르담이 싫다면 다른 곳으로,


...그래도 결국 조이델일 거고, 계속 흔적이 남겠죠.


경유야. 


선배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상관없는 곳에 있어야 그 누구도 제 소식을 모를 것 같아서요. 


........


결심이 섰구나.


네. 



경유가 내민 사직서 봉투를 받아든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유의 결심은 실로 오래된 일이었다. 계속 은재가 거부했다가, 은재의 결심이 섰을 땐 경유가 은재를 위해 남기로 했었더랬다. 경유에게 더 할말이 많이 남았지만 은재는 애써 입을 다물었다. 그 누구보다 고심했을 사람은 경유였으니까. 사표는 수리할게. 하지만 수리는 하는데 네가 돌아오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네 자린 비워둘게. 그건 네가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말해도, 한 10년 정도는 유보할 수 있어. 그건 내 특권이지 네가 싫다고 될 일 아니야. 사람 일 어떻게 알아. 당장 내일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내가 네 사수니까 그건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은재의 말에 경유는 피식 웃고 돌아섰다. 이별도 좋고 결별도 다 좋은데 미련은 안 남게 해야 해. 그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야. 그리고 상대방 생각까지 안 해도 그래야 너도 후회가 없어. 

 


" 그렇게 하고 나면 정말로 후회 안해요? "

 


돌아보는 경유의 눈가가 부어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저 말 한마디에도 무너질 거면서. 은재가 더 말을 붙이기 위해 일어섰지만 경유는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마세요. 어디 가는지 선배한테도 말 안할래. 

 


너 그거 비겁한 거야. 결국 도망치는 거라고. 세상 끝까지 가봐. 서민제 잊을 수 있나. 

 

......그래도 도망갈래요. 


경유야. 


....그 사람이 없는 곳으로. 

 


경유가 문을 열고 나서자 은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사는 게 다 힘드냐. 너도, 나도. 경유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 은재는 지금은 아무리 경유를 잡아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사무실 의자에 앉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나 싶어서 봤더니 익숙한 번호였다,. 이제 똥줄이 타실 타이밍이 되셨지. 은재는 피식 웃었다. 핵폭탄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렸으니 안 움직이실 수 없었겠죠. 은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천천히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서은재입니다. 그러자 다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상대방 목소리가 울렸다. 은재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천천히, 차분히 대화를 이어나갔더랬다. 

 


" 생각보다 빨리 샴페인을 터트렸더구나. "


" 그랬던 가요. 서수철 대행 회장님. " 

 


상대방은 서 회장이었다. 서 회장의 껄껄 소리내어 웃는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지만 은재는 천천히 미소지으며 의자에 어깨를 기대었다. 그렇게 여유부릴 시간이 있으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지금쯤 온갖 법망을 동원해 날 어떻게 아작낼 것인지 밤새도록 토론하고 연구하실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은재의 말에 입술을 앙다문 서 회장은 눈 앞에서 수많은 고문변호사들이 법전까지 들고 회의실을 꽉꽉 메우고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한 표정처럼 일그러졌다. 내가 말했잖니. 네가 어떤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17년 전이었으면 모를까 지금 대원그룹에 미치는 영향이 네가 클 것 같니, 내가 클 것 같니. 

 

아무리 바보라도 그건 알겠지. 내가 허투루 17년을 대원을 일궈낸게 아니다. 내가 대원을 거대한 왕국으로 만들었어. 오직 내가. 넌 절대로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해. 그러니까..서 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재의 단호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부터 지켜보시면 알게 되겠네요. 제 영향력은 지금은 미미하겠죠. 모래의 알갱이처럼 아주 작겠죠. 하지만 지금 리노베이션의 수많은 브랜드가 우리 가족 사진으로 도배가 되고 그게 전 세계적으로 팔려 나가고 나서도 그런 표정일 수 있을까요?

 


뭐?


계약서에 있다시피 모든 브랜드의 네이밍은 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진 도안으로 나갈 겁니다.


무슨 소리! 누가 그걸 용인하기나 한다든?! 내가 그걸 용납할 것 같아?


아무리 천하의 서수철 회장님이라고 하셔도, 계약서를 위반할 순 없으실 텐데요. 


그깟 계약서 종잇조각에 불과해! 내가 안된다면 안 되는 일이라고!


....그 계약서를 꼼꼼히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시지 않은 회장님의 실수죠. 


이건 계약 사기야!


직접 멀쩡한 모습으로 직접 준공식에서 싸인하신 건 회장님이세요.


서은재!!!


네. 저 서은재예요. 아버지 딸이고, 엄마 딸이고, 작은 아버지의 하나뿐인 조카딸이죠. 


........네가 이러면 수완인 무사할 것 같니? 나한텐 수완이가 있어.



서 회장의 한 마디에 기다렸던듯 은재의 눈에서 레이저처럼 눈빛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 제가 17년 전에 말씀드렸죠. 당신 목줄 따러 서울 갈 거라고. 다 가져올 거라고. 그나마 남은 시간 숨이라도 쉬고 싶으면 내 동생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 후....수완이가 내 품에 있는 한 넌 아무것도 못, "


" 이번 리노베이션 실검이나 보고 투자자들 바이어들 반응, 예상 판매량 실적 추이나 보고 그런 말씀 하시죠. 대행 회장님. " 


" ..............!!!!!!! "


" 하실 말씀 있음 직접, 암스테르담으로 오세요. " 



전화를 끊은 은재는 처음으로 맛본 승리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드디어 시작이야. 목에 걸린 무당벌레 팬던트를 꺼낸 은재는 팬던트를 꼭 쥐었다. 기다려. 얘들아. 누나가 꼭 찾을 거야. 반드시 다 찾아서, 저 집에서 다시 행복하게 살고 말 거야. 꼭.

 

그녀라고 서 회장이 무섭거나 겁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100퍼센트 정도 겁났었다면 이젠 그 무서움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제 은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도일이 있었다. 사랑하는 그와 함게라면 더 무서울 게 없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쓰다듬은 은재에게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방금 그 추잡한 악마도 아니었고, 경유도 아니었고 도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은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전화 한 통이었다. 

 


- 서은재 씨? 여기 암스트롱 보육원입니다. 동생분 찾는 일에 좀 진척이 있을 것 같아요! 





 

 






* * * * * * * * * * * * * * *
" 동생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정말인가요?!!! "

 


연락을 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은재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동생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진척이 있을 줄이야..! 은재에게 연락을 했던 암스트롱 보육원 원장은 은재를 맞아들였다. 이런 일은 알아내기도 힘들다 하셨는데 애쓰셨어요. 뭐든 좋아요. 작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믿고 갈거예요. 은재의 절박한 표정 앞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원장도 같이 다급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17년 전 일이라서 알아내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이만큼의 정보도 얻기 힘들었어요. 

 

그때 근무했던 교사들도 다 뿔뿔이 흩어진 뒤라 겨우 찾았어요. 둘째 동생분은 오스트리아에서 실족사한걸로 판명나서 그쪽 형사과나 경찰을 찾아보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요트로 실족사한 근처에서 그때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 실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하지만 실족사라 해도 시신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하긴 하더군요. 그쪽을 알아보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여긴 암스테르담이고 아마 실족사한 곳이 비엔나라서 빈으로 가서 알아보셔야 할 거예요. 여기선 한계가 커요. 원장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마리를 찾았다는 건 뭐죠? 은재가 다급하니 손깍지를 끼고 어쩔 줄 몰라하자 원장이 가까이 다가 앉았다. 전부 동생들이 실종되었을 무렵 한인 영아들을 전문적으로 사고 파는 전문 브로커가 반짝 유행했다는 소문이예요. 특히나 인상착의가 비슷할진 모르지만 열살 쌍둥이 한국인 여자아이 둘을 유럽으로 팔았다는 제보가 보육원 사이에 소문으로 나돌았어요. 그래서 찾았습니다. 실제로 그 열살 쌍둥이 한국인 여자아이 둘을 딱 공항에 있는 두어 시간 동안만 봐준 교사가 저희 보육원에 있었어요. 

 


" 한국인 쌍둥이 여자아이라구요..? 열살...? "


" 네. 확실합니다. "

 


서류를 내민 원장의 말에 인상착의를 훑어보던 은재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인상착의 중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비슷한 인상, 그리고 똑같이 무당벌레 팬던트를 하고 있는 두 한국인 여자아이 둘. 입양 브로커 알선.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봐주다가 입양 브로커가 공항 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확인함. 아이들은 집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가 그 교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더군요. 여자아이 둘다 손을 꼭 잡고 팬던트를 손에 쥐고 서로의 손만 잡고 있는 걸 인상적으로 기억하더라구요. 

 

원장의 말에 은재의 손등으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열 살이면 재희랑 영신이예요..열살. 무당벌레 팬던트. 우리 재희랑 영신이예요. 이 아이들 어디로 갔는지까지 안대요? 알 수 있대요? 제발요. 뭐라도 알아야 해요. 은재가 오열하면서 원장의 손을 붙들자 원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17년 전의 일이라 이 일을 아는 교사도 간신히 찾은 거예요. 아이가 공항에서 픽업되는 단 두시간만. 하지만 그 입양 브로커를 확실히 기억하더라구요. 그 아이들과는 두 시간만 있어본 거지만 그 입양 브로커에게 고용되어서 아이들을 두 시간 봐준 거라 그것만은 기억하더라구요. 원장이 그 교사의 연락처와 함께 입양 브로커의 이름을 받은 듯 휴대폰 문자를 보여주었다.

 

주로 네덜란드 어를 써온 은재로서도 오랫만에 보는 한국어를 보는데 눈이 쉽게 떠지지 않았다. 믿기지 않은 얼굴로 내내 핸드폰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아야 했다. 원장은 은재가 충격을 받아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문자의 창이 계속 꺼지는 걸 켜주며 이야기를 이었더랬다. 확실히 기억을 하더랍니다. 한국어에 능숙한 네덜란드 교포였다고. 굉장히 인상이 근사하고 건달이나 양아치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확실히 뇌리에 남았다고 하네요. 이 사람이 두 아이를 직접 공항 안으로 데려갔고, 이 아이들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말을 공항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 같더랍니다. 지금 보내준 문자 이름이 그 교사에게 불러준 입양 브로커의 이름이구요. 문자를 다시 보여주자 은재의 눈은 그만 텅 비어버렸다. 

 


입양 브로커 이름
Cha Do Jin
차 도 진 








도진은 휠체어에 달린 바퀴를 자꾸 손으로 긁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리노베이션 공사까지 끝났으니 동생에게 그 프로젝트에서 이제 손을 떼고 회사로 복귀하라고 설득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이 공사를 마무리하고 은재와 같이 계속 합작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도진은 입이 바짝바짝 마른 채로 동생을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았더랬다. 여기서 제발 손 떼. 그리고 그 여자 안된댔지. 형이 너한테 손해 끼친 적 있어? 해 되는 말 한 적 있냐고. 

 

그 여잔 절대 안 돼. 그리고 회사 일 안해도 좋고 너 하고싶은 거 가고싶은 유학 얼마든지 보내줄 테니까 암스테르담을 떠나. 내가 괜히 그 여자 반대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그 짐승같은 놈과 사돈을 맺고 가족이 되냐고! 그리고 그 여자 때문에 강 대표가 널 가만 두기나 할 것 같아? 아무것도 상관 없으니 너만 행복하면 어떤 여자든 상관없어. 근데 서은재만 아니면 돼. 다른 여잔 다 돼도 그 여자만큼은 절대 안 돼. 제발 형 말 좀 들어 줘. 도진의 절절한 말에 도일은 그런 형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어떤 기시감 같은 게 있었다. 

 


혹시..설마, 이건 혹시나 해서인데 혹시 은재 만났어....?


.........!


진짜야? 진짜 은재 만난 거야?!!!!

 


그냥 기시감에 던져 본 말이었는데 거짓말 못하는 형은 그 순간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만나서 무슨 얘길 했는데. 아니 설마, 삼류드라마에 나올 만한 그런 말 한 거 아니길 바래. 내가 사랑하는 우리 형, 차도진은 그런 바닥 아니니까. 나 형을 그런 바닥으로 생각하기 싫어. 도일은 애써 실망감을 감추는 표정이었다. 점점 어두워져가는, 괴로워하는 도일의 표정을 보며 도진은 드디어 얘길 해야 할 때라 생각했다. 사실은 너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가 있어. 이 얘길 들으면 왜 서은재가 안되는지 알 거다. 사실, 형이 서은재를 그토록 반대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그 이유가 뭐냐 하면..어렵게 도진이 말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하얗게 질린 표정의 은재였다. 

 


은재 씨? 여긴 어떻게...무슨 일이예요?

 



오히려 더 놀란 표정이 도일이 먼저 일어났지만 도일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거의 반쯤 돌아버린 사람의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도진에게 다가선 은재는 겨우 숨을 고르는 표정이었다. 17년 전, 암스트롱 보육원에서 한국인 쌍둥이 여자아이 두 명을 해외로 입양보낸 브로커가 당신인가요. 차도진 씨! 그리고 실족사로 처리된 내 동생! 내 동생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동생을 실족사 처리한 것도 당신이고,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 있는 내게 지환이 사망 소식 알리고 재희 영신이가 행방불명됐다는 연락을 한 것도! 내 동생을 전 세계 곳곳에 버려 인간같지도 않은 행동으로 내게 동생들 사망소식 전한 것도! 


이걸 전부 당신이 한 건가요? 은재의 충격적인 말에 도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도진은 거부할 생각도 않은 채 조용히 앉아 있다가 눈만 내려감았다. 올 것이 오는구나. 그래. 영원히 숨길 수는 없었겠지. 언젠간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도진은 천천히 휠체어에 앉은 채로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침묵만 지킨 채로 앉아 있었다. 도진의 표정이 백 마디 말을 대신하고 있었고, 도일은 비틀거린 채로 도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도 안되는...무슨 그런 엄청난, 은재 씨 오해일 거예요. 

 

 

 

 

 

 

 

 

 

우리 형 그런 사람 아니예요. 날 생각해서 당신한테 모진 소리 한 건 알아요. 그런데 우리 형이 무슨. 우리 형 그런 사람 아니라구요. 내 형이예요. 은재 씨가 뭔가 어디선가 잘못된 말을 듣고 와서 이러는가 본데, 우리 형 절대로..변명하다가 은재와 도진의 온도차를 번갈아 바라보던 도일은 도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빨리 말해 아니라고. 아니라고 말하라니까. 이거 아니잖아.

 

형이, 형이 그럴 리가 없잖아. 도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진의 어깨를 흔들었다. 도진은 휠체어를 탄 채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노력하다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반신 마비였으니 그대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고 도일은 형의 이름을 외치며 도진을 부축해야 했다. 도진은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은재 앞에 고개를 숙였더랬다. 

 


미안합니다. 그때가 내 생애 최악의 실수였소..


형!

 

.......


강진형 대표가 이를 내게 사주했고 내가 그걸 받아들였어. 미안하다 도일아. 


........!


여자애 둘을 유럽으로 입양 보내고 요트사 실족사로 처리한 것도 나였소. 


.......!!!


어딘가로 가서 잘 살겠거니..아니, 그런 생각도 않았소. 그때는 내가 먼저 살 길이 급했기에. 


....


강진형 대표, 그러니까 당신 외삼촌이 내 사업상 약점을 잡았지. 우리 회사는 이제 막 일어서려고 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회사를 잃으면 살 기반을 완전히 잃는 것이었소. 부모님이 남겨준 유일한 회사, 그 회사를 이렇게 무너뜨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회사가 어려울 때라, 강진형이 내미는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환이는 고작 열 여섯살이었어요. 그 애를 그렇게 길거리에 내버렸다구요...


.....


내 동생 재희, 영신이...그 애들을 공항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해외로 팔아넘겼을 때 고작 열 살이었어요. 


........


당신이 사람이야..? 그렇게 가족을 끔찍히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얼마나...살아있겠지, 이번에는 찾겠지, 이번에는 찾을 수 있겠지..어딘가에 제발 잘 살고 있겠지. 아니, 혹여나 고통스럽게, 비참하게 살았으면 어떡하나. 아니, 하루에도 수십번씩 그 애들이 고통스럽게 괴로워하다 죽어가는 악몽을 꾸는 심정을 알기나 해요...?


..........은재 씨.


당신은 그러고도 잠이 왔어? 밥이 넘어갔어...? 어떻게 사람이 그런 끔찍한 짓을 하고도 숨이 쉬어졌냐고!!!! 용서 못 해. 절대로 용서 못 해!!!


은재는 독기오른 눈으로 악을 쓰며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갔고, 은재를 차마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도일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휠체어에 간신히 한 몸을 의지한 채로 도진은 도일의 손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도일은 그런 도진의 손을 힘없이 놓았다. 도일아! 도일아 제발. 형을 이해해 줘야 해. 그땐 아버지 회사를 살려야 했어. 그 회사가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었어. 

 

너도 아직 어렸고, 그래서..도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일은 우는 눈으로 형을 돌아보았다. 그때 은재 나이 나랑 동갑이었어. 열 일곱..은재는 밤마다 악몽을 꿨어. 동생들을 잃고 놓치는 꿈. 그래서 베개가 젖도록 울지. 내가 달래줘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했어.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동생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고 또 견뎌온 애야. 형이 길바닥에 버렸다던 애는 열 여섯살이었어! 형이 공항에 사람까지 사서 유럽으로 보냈다던 그 애들은 고작 열 살이었어. 열 살...! 그 어린 애들을 팔아넘기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었어? 그 짐승같은 강진형의 손을 잡고도 밤마다 잠이 왔어? 그러고도 은재 얼굴이 제정신으로 봐졌어...? 그러고 그 진실을 숨기려고 은재한테 나랑 헤어져달라고 한 거야? 

 


도일아...


아니지? 형 아니잖아. 우리 형이 이럴 리가 없잖아. 오직 나를 위해 살아온 형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우리 형이 이럴 리가 없잖아! 이건 우리 형 아니잖아...!


...........



무너져서 주저앉은 도진을 보며 도일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은재야........










* * * * * * * * * * * * * *

 


성경유는 사표를 냈고, 회사에 있을 땐 미친듯이 일만 하고 아예 시은의 연락도 받지 않고 수신 거부 해놓은 민제는 만날 수도 없었다. 거기다 병원엔 진짜 사람을 붙여둔 건지 아예 출입도 거부당했더랬다. 거기다 집에서는 왜 돌아오지 않냐는 성화에..

 

시은은 풍전등화였다. 민제가 자주 가는 바에 민제가 나타났다는 바텐더의 연락을 받은 건 최고의 행운이었다. 시은도 민제와 함게 자주 들렀던 바였다. 그러다 보니 민제가 만취했다는 바텐더의 연락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더랬다. 소식을 듣자마자 택시를 타고 날라갔더니 민제는 인사불성이 되어 아예 고꾸라져 있었다. 바텐더의 도움을 받아 라운지 바와 가까운 호텔 스위트룸에 민제를 눕힌 시은은 아이처럼 잠든 민제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민제는 시은의 손길을 잠결에 거부한 채 돌아누웠다. 인사불성이 되어 완전히 곯아떨어졌을텐데도, 아예 시은의 손길도 거부했더랬다. 어떻게 끝까지 이럴 수가 있어.

 

 

 

 

 

 

 

 

 

이런 내 마음은 얼마나 비참한 줄 알아? 그 여자는 민우 오빠 여자야. 얼마나 미쳤으면 형의 여자를 갖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넌 미쳤어. 넌 그 여자한테 빠져서 앞도 뒤도 안 보이는 미친 놈이 된 거라고. 그 여잔 민우 오빨 이미 배신했어.

 

너라고 또 배신하지 말란 법 있어? 아, 그 여자 사표내고 회사도 그만둘거니까 널 버린 거네. 어떻게 늬들 형제는 그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 성경유 밖에 모를 수 있어? 그 많고 많은 여자들 중 왜 하필 똑같은 여자냐고! 시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민제 가까이로 다가 앉아 등을 껴안으려 했지만 아예 민제는 시은의 손길을 또 거부했더랬다. 그냥 무의식중에 경유가 아닌 다른 여자인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시은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 여자가 무조건 피를 철철 흘리면서 울었으면 좋겠어. 

 

 

 

 

 

 

 

 

 

 

지금 그 여자가 하고 있는 갈등보다 더 수천배로 아프고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아픔만큼 수천배로 더 아팠으면 좋겠어. 시은은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 둘씩 뜯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몸으로 천천히 민제의 등을 끌어안았다. 수치스러웠고, 스스로가 혐오스러웠으며, 비참함이 온 몸을 휘감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년에게 널 뺏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겠어. 
평생 오빠만 보고 살아왔어.
오빠가 내 인생의 전부야. 

성경유만 여자가 아냐.
나도, 오빠에게 여자야. 
이런 비참한 짓을 하면서까지 오빠한테 유일한 여자가 되고 싶어.

 


민제의 등을 끌어안은 채 눈을 꼭 감은 시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고, 뒤척이던 민제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 경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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