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Romance 




 

 


은재에게 솔베이지의 노래는 가족이었다. 동생들과는 달리 열 여덟의 나이로 외국에 보내졌던 은재는 동생들과 가족을 잊기엔 너무 자라버렸기 때문에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살아있는 동생들을 찾고 뺏긴 아버지의 회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마음을 너무 오래 억누르고 살아왔더랬다.

 

하지만 그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동안 삼촌인 강 대표 때문에 제대로 된 남자와 데이트 해본 적도 없었지만 몇몇 거쳐간 남자들에게 제대로 말해본 적도 없었다. 은재의 미모와 재능만 보고 만났던 남자들은 쉽게 은재가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보통 가정이 있거나 은재가 원하는 평범한 가족을 가졌거나 해서 은재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은재가 마음을 열지 못하니 남자들과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질 수 밖에 없었더랬다. 또한 강 대표 때문에라도 남자들이 조금만 은재와 가까우면 강 대표의 엄청난 린치가 있었다. 점점 은재는 소외되어 갔고 그럴수록 일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일만이 은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에 몰두할 때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 시공을 맡으면서 가족들을 다시 찾을 수 있고, 강 대표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은재에게 도일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밀어내고 마음의 문을 닫았는데도 어느 순간, 그에게 반쪽짜리 문을 열고 있었다. 그 역시 강대표로 인해 불행한 가족사를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재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더랬다. 도일을 따라 간 곳은 빈 소극장 공터였다. 

 

저녁인데다 한산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이 아예 없었다.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예 아무도 없었다. 꼭 그가 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낯간지러운 이벤트를 준비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은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거랑 전혀 안 어울리는 사람이 준비하자니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게 귀여워서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듯이 무대 정 중앙에만 빛이 반사되어 보이고 있었고, 은재는 꽃다발이라도 주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며 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쑥스러워서인지 얼굴이 경직되었던 도일은 천천히 장막을 거두었다. 

 


" ....!!!!!!! "

 


웃을 준비를 하던 은재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휘장을 걷어내자 휘장 아래에는 손을 맞잡고 활짝 웃고 있는 다섯 아이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긴 여자 아이, 여자 아이보다 키가 크지만 여자 아이보다 조금 더 어린 듯한 남자 아이,

 

그리고 더 어려보이는 동생들...또 아직 태어나기 전인 듯 부모님 사이에서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온 엄마 사이에서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는 풍경들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은재는 참을 생각도 않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인자한 아버지, 곧 태어날 막내 수완이를 배고 있는 아름다운 엄마..유독 은재를 따라다니던 껌딱지 같은 동생 지환이, 이제 겨우 티격태격하고 싸우기 바쁜 연년생 여동생 재희랑 영신이..너무 보고싶은 내 가족들. 사랑하는 내 가족...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는 있는 건지, 힘들진 않은지. 부모도 잃고 형제들과도 헤어져서 누구한테 구박이나 멸시는 받지 않는지.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더더욱 은재는 두 손이 다 젖도록 울었다. 힘들 거라고 했잖아요...

 

이 길은 아무나 가는 게 아냐. 눈이 벌겋게 부어오를만큼 운 은재가 퉁퉁 부은 눈으로 겨우 다가온 도일의 어깨를 젖은 손으로 만졌다. 얼마나 힘든 길인데.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인데. 난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구요. 찾아야 하는 내 동생들이, 내 아버지의 회사..그들에게 복수도 해야 해요. 나는 이렇게 몇년 동안 이 고통을 다 떠안고 살아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나 자신도 이렇게 통제가 안되는 데 생판 남인 도일 씨가 이걸 하겠다구요. 왜요. 왜 그러는 건데요. 은재의 벌개진 눈을 보고 도일은 마주 앉았다.

 

 

- 네가 왜! 네가 왜 하필 서은재냐고!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 그 수많은 여자들 중 왜 하필 그 여자야.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그 여자 가까이에 간 남자들이 왜 다 안좋은 결말을 맞은 줄 알아? 강진형 대표가 그냥 놔둘 거 같아? 자기 조카를 그냥 조카가 아니라 여자로 생각한다는 추접스러운 얘기, 내가 꼭 해야만 하냐고! 내 다리..그놈이 만든 거잖아. 그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그런데 그런 놈과 한 가족이 된다고. 가족이 아니라고 백날 네 거울 앞에서 말해 봐. 그래봤자 그 여자가 강진형 외조카라는 건 변함 없다고! 그걸 어떻게 묵과할 수 있겠어. 난 못해. 난 죽어도 못해. 난 죽었다 깨어나도 강진형과 사돈 못 맺어. 

 



형의 피토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마, 은재가 아니었더라면...그래.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을 터였다. 도일은 울부짖는 은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불가항력..그 말이 가장 적합할 듯 했다. 차라리 수완을 애타게 찾고, 수완을 찾고 무너졌던 서울에서의 은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은재의 어깨를 잡던 도일의 눈가 역시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더랬다. 

 


" 사랑하니까. "


" ............! "

 

" 네 고통이 곧 내 고통같고, 네가 웃으면 하루 왠종일 온 하늘이 다 내꺼가 된 거 같고..."

 

" .........! "

 

" 네가 동생들을 찾기 전에 절대 평온을 찾을 수 없다면, 그 고통은 나한테 좀 나눠주지 않을래? "

 

" ........도일 씨, "

 

" 불행도, 고통도 반씩 부담하면 낫다고 하잖아. 나는, 서은재 고통을 내가 좀 나눠지는 걸로 내 마음을 대신하고 싶은데. 꼭 막내까지 다 데리고 와서 서은재한테 가족을 완성시켜 주고 싶어. 그게 네가 젤 원하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거니까. 나는, 서은재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

 

" ........... "

 

" 지금은 그림일 뿐이지만, 약속할게. 반드시 너한테 모든 가족을 다 되찾아 주겠다고. 그리고 네가 잃어버린 부모님 몫까지 내가, 네게 온 세상의 사랑을 다 줄 거라고. "

 

" ...도일 씨..."

 

" 이제 그만 나한테 좀 져 줘. 나야말로, 네가 온 세상의 고통과 싸우는 거 그만 보고 싶어. "

 


그렇게 어른 같던 그가, 모든 세상의 일엔 달관하고 이성적인 것 같던 그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렀다. 그 뜨거운 눈물 앞에 은재는 도일을 와락 안았다. 한번도 남에게 의지한 적이 없던 삶이었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준 적도 없었다. 

 

모두가 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강 대표가 그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이때까지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은재 옆에 누군가 있는 꼴을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자가 아니었다. 도일은 은재의 어깨가 떨리는 걸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은재를 와락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내가 다 이겨내게 할 수 있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도일의 뜨겁고 따뜻한 품 속에서 은재는 원없이 울었다. 가족들을 다 되찾는 것은 꿈이라 생각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동생들을 찾을 수 있다니, 

 

 

 

 

 

 

 

 

 

 

 

저 악인의 품 속에서 악인을 아버지로 알고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난 내 막내동생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그가 너무 고마웠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쉬고 싶은 마음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은재로서도 그런 마음이 처음이었다.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사람도, 그렇게 의지하고픈 사람도. 하지만 강 대표 때문에, 혹시나 자신의 처지 때문에 온전히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없었더랬다. 은재도 강 대표 때문에 충격으로 다리를 잃은 도일의 형 도진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 역시 강 대표의 만행일 터였다. 자세히 모든 일을 다 알진 못하지만 외삼촌의 수만가지 악행 중 하나일 것이었다. 도일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는 은재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언제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입술이 하나로 겹쳐졌다. 서울에서도 의도치 않게 키스를 했지만 완전히 서로 미래까지 함께하기로 한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은재의 가족까지 모두 감싸안겠다는 도일의 깊은 뜻이 있었다. 뜨거운 키스가 서로의 체온을 더 뜨겁고 따뜻하게 달구었다. 도일의 품 속에서 몇 번이고 키스를 나눈 은재가 도일의 목에 매달리다시피했다. 그 자가 알아도 상관 없어요. 오늘 나랑 같이 있어 줘요. 저 먼 곳에 있는 그 자가 다 듣도록..은재가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지 너무나 잘 느껴졌다. 강 대표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그 마음을 너무도 느낄 수 있었더랬다. 고개를 끄덕인 도일은 은재를 한 번 더 와락 끌어안았다. 

 


가도 된다고 말한 적 없어.
이제부턴 그 누가 와도 서은재 안 뺏길 거니까. 

네가 가도 싶다고 해도 안 보낼 생각이었어.
사랑해. 은재야. 










*
콰앙 - !

 


언제나 은재의 소식을 보고받던 강 대표에게 은재와 도일의 소식이 전해진 건 그날 새벽이었다. 은재가 도일의 집을 나와 경유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은 오히려 강 대표에게 호재였다. 은재라면 절대 남자에게 푹 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은재 성격상 은재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일이지 남자가 아니라고, 얼마나 은재가 일에 미쳐 있는지, 남자에 관심이 없는지 누구보다 강 대표가 오랜 세월 잘 알아왔다. 물론 은재가 썸타던 남자들을 걱정 안한 건 아니었지만 굳이 꼭 그런 일이 아니라 해도 은재는 그런 남자들에게 쉽게 흥미를 잃었더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상대가 차도일이었다. 차도일이 누군가.

 

 

 

 

 

 

 

 

 

 

 

차도진의 동생이었다. 일은 더 쉬웠다. 차도진의 행적을 알면 은재는 절대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을 테니까. 차도진 역시 자신의 조카딸인 은재를 절대 동생의 짝으로 인정할 리 없었으니까 그냥 놔두기로 했던 게 강 대표의 오산이었다. 은재에게 미행을 붙여놓은 걸 은재가 눈치 못 챌리 없었다. 그런데 이미 택시 안에서부터 그들은 서로 키스하고 껴안고 또 키스하고,

 

누가 봐도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호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혀 있었다. 거기다 그 호텔은 강 대표 손아귀에 있는 시내의 한 호텔이었다. 이미 호텔 ceo와 강 대표는 막역한 사이이기도 했다. 거의 호텔은 강 대표가 잘 아는 호텔인데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텐데.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아는 것은 불가침에 가까웠지만 은재에게 미행을 붙여둔 걸로도 모자라 은재와 도일이 묶고 있는 호텔의 영상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강 대표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일이었지만 은재가 남자와 호텔에 간 것 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사실 강 대표가 그 호텔 방의 영상까지는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강 대표도 보고 싶지 않았다. 키스하던 청춘남녀가 호텔 방안에 들어간 이후의 일은 스님이 아닌 이상 뻔한 일 아니겠는가. 강 대표가 돌아서려 했지만 영상의 소리가 최대치로 키워져 있었다. 두 사람의 키스가 맞닿는 애틋한 숨소리,  서로의 옷을 벗기는 소리, 그래.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뜨거운 숨결이 부딪히는 그런 소리들까지도..강 대표가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을 도일은 너무 쉽게 넘었다. 절대로 은재의 마음이 흔들리지도, 좋아하게 될 날도 없을 거라 여겼다. 은재에게 빨리 차도일의 형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도 여파가 안 미칠 수 없었다. 분명히 영상 소리를 껐는데...서둘러 노트북으로 향한 강 대표가 마우스를 찾았지만 영상은 선명한 화질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요즘 컴퓨터는 성능이 좋더군요. 마우스를 직접 누르지 않아도 버튼 하나로도 조작이 가능하니. 낯익은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든 강 대표는 이를 악물었다. 서재 입구엔 부인인 송 여사가 노트북 조작 버튼을 손에 든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송 여사는 잔인하게 볼륨을 최대치로 키워 놓았더랬다.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 두 청춘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제서야 만났으니 얼마나 뜨겁고 애틋하겠는가. 애틋하면서도 뜨거운 소리가 적나라하게 강 대표의 귀에 들렸고, 강 대표는 그 손으로 노트북을 아예 던져버렸다. 와장창 하고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노트북은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고, 송 여사는 그런 남편의 추악한 모습을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은재는 속고 있어.

 

그놈의 비열함에 속고 있다고! 당장 정신차리게 하지 않으면 안 돼.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이런 추문이 말이나 돼?! 강 대표가 이를 악물자 송 여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 애가 옛날부터 싫었어요. 죽은 형님의 눈을 똑같이 닮은 그 애가..

 

 

 

 

 

 

 

 

 

 

당신이 은재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죠? 죽은 형님 바라보는 눈길이 달랐잖아요. 순수한 형님은 당신의 시커먼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오로지 돌아가신 아주버님만 바라본 사람이었지만. 그게 당신이, 두 사람을 배신한 결정적 이유였죠. 

 

형님이 아주버님만 사랑한 것. 당신은 쳐다도 봐주지 않았던 것. 형님과 똑같이 자라나는 은재를 당신이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세상 사람들이 모른다고 생각해요? 추문? 당신이 집을 따로 내주고 은재를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안다면 추문 소리도 못할 걸요. 저 애들은 추문이 아니예요. 오랫동안 찾고 부르다 기다리다 만난 사이죠. 

 


" 여보! "


" ....나는 차도일이 고맙기까지 해요. 은재를 해방시켜 줬으니까. "

 

" 당신 미쳤어?! "

 

" 미친 건 당신이지! 어떻게 조카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냐구요! 당신은 미쳤어. 이제서야 확실히 알았어요. 내가 어떤 괴물과 살고 있는지를요. "

 

" ........!!! "

 


송 여사는 치를 떨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궁금하군요. 당신이 그렇게 끔찍히도 아끼는 조카는, 과연 부모님의 일에 당신이 어느 정도로 연관되었는지 알면 과연 당신의 그림자도 보려고 할지를요. 그리고 꼭 보고 싶군요. 은재가 당신을 지금보다도 수백 배로 더 경멸하는 순간을요.

 

그리고 꼭 보고 말 거예요. 그애가 견뎌왔던 시간만큼, 당신이 어떻게 그애한테 버림받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말 거니까. 송 여사는 문을 박차고 나갔고, 씩씩거리던 강 대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핏발 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막아야 해.

 

 

 

 

 

 

 

 

 

 

 

은재를 그놈에게 뺏길 순 없어. 은재를 절대로 뺏기지 않아. 누나는 뺏겼지만 은재는 내 거니까. 주먹을 너무 세게 쥔 탓에 강 대표는 손에서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휴대폰을 드는 강 대표의 손에 핏물이 배어들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서림그룹 비서실입니까? 회장님과 통화하고 싶은데요. 암스테르담의 강 대표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드디어 강 대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는 미지의 순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불문율과도 같았지만, 역린을 먼저 건드린 것은 자신의 조카였다. 분명히 내 영역을 벗어나선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남자와 가까워지면 안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하지만 서 회장은 지금 출타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 했다. 집으로 전화해 보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있는 서 회장 본가에서는 비서가 서 회장 서재를 나서고 있는 걸 수완과 부딪히면서 수완의 교과서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더랬다. 안 다치셨어요? 수완이 더 크게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수완이 먼저 비서를 일으켜 세우자 이 집안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양심인 수완을 훈훈한 눈으로 바라보던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 비서님.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수완은 책을 줍다가 쪽지를 발견하고 건네었고, 비서는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아야 해서 수화기를 한쪽을 가린 채 수완을 쳐다보았다. 미안한데 이거 회장님 오시면 좀 전달해 줄 수 있겠어? 아무래도 오늘 내가 회장님을 못 뵙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두바이 준공식 때문에 가셨으니 모레 아침이나 되어야 오실 거야. 그때까지 내가 집에 있을 수는 없어서. 부부 동반 모임으로 가신 거라 사모님께 전달해드리지도 못하겠고. 한 비서의 말에 수완은 쪽지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세요. 전해드릴게요. 비서를 배웅한 수완은 쪽지를 아무 생각 없이 내려다보았다. 쪽지를 바라보던 수완의 눈동자가 한 뼘은 더 커졌더랬다. 연락 기다린다는 단순한 쪽지였지만 쪽지엔 수완이 아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암스테르담 강진형 대표 연락 기다린다셨음 
전화번호 0398-xxxx-xxxxx 긴급 연락건 
서은재 씨 처리 문제라 하심 

 

 

 

" .......!!!! "

 



기억력이 좋은 수완은 은재가 누군지 단숨에 알아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왜 이 누나를 아버지와 이 뜻모를 전화 속 사람이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거지. 그리고 '처리'라니...? 수완은 다른 일이었으면 그냥 넘겼을 일이지만 뭔가 기시감이라는 게 있었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서야 수완은 그 일을 숙명적인 '운명'이라 표현했지만, 지금은 그냥 기시감이라는 말 밖엔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냉혹한 사업가이자 유능한 비지니스를 하는 회장님이라는 건 수완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모두 온당한 방법이 아닐 때도 많다는 것 또한. 그래서 더더욱 수완은 이번 일은 그냥 넘길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한 비서님 말씀대로라면 이런 일이 사흘 뒤에나 아버지께 전해드려야 하는데, 수완은 단 한번도 아버지의 사업이나 아버지의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수완이 이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는 본인이 더 잘 아는 일이었다. 그냥 기시감이었다. 

 

 

 

 

 

 

 

 

 

 

좋은 일로 은재를 찾는 게 아닐 거라는 직감 같은 거였다. 그리고 사업적인 일에는 아버지가 가차없다는 것 또한 오랫동안 잘 알고 있는 수완이었다. 손수건을 건네 준 그 누나는 딱 한번 본 것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따스한 마음을 가진 좋은 사람이라는 걸. 

 


뭐하냐? 


.....!


뭘 그렇게 놀래. 찐따같은 게. 



쪽지를 내려다보며 한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수완을 일깨운 건 거실로 내려온 두살 터울의 형인 지완이었다. 건방진 놈 얼굴 봐서 재수없다는 식으로 지완이 쳐다보며 수완의 손에 들린 쪽지를 쳐다보려 하자 수완은 지완 모르게 쪽지를 확 구겼다. 

 

하..언제봐도 존나 수상한 새끼란 말야. 재수없으니 내 눈앞에서 꺼져. 으르렁거리던 지완이 사라지고 구겨진 쪽지를 내려다보던 수완은 이왕 구겨진 쪽지인 김에 더 구겨서 박박 찢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비서가 전달했고 비서가 다시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 감이었다. 구겨진 쪽지를 다시 펴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왠지, 그 누나가 피해를 입는 건 싫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아버지한테 안좋은 일이 될지도 몰랐지만 그냥 그 누나를 도와야 할 것만 같았다. 거의 종잇조각이 된 쪽지를 불이 소각되는 난로 안에 집어 넣어서 아예 없애버린 수완은 자신의 빈 손을 내려다보았다. 

 


- 나도 정말 좋아하는 노래거든요. 솔베이지의 노래. 

 

 

 


그 따뜻하고 단정한 목소리. 수완이 정말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진 누나였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누나한테 다시 묻고 싶었다. 솔베이지의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꼭 한번만 다시 묻고 싶었다. 뭔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느낌이지만 수완은 느껴졌다. 그냥 언제든 꼭 다시 만날 것 같다는. 종잇조각이 불타는 난로를 바라보던 수완은 점점 자신이 단단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꼭 다시 만나요. 

 


누나가 나한테 용기를 준 것 같아요. 
은재 누나. 










.......

바스락거리는 이불에서 은재가 좋아하는 레몬 향기가 났다. 얼마만에 이렇게 꿀잠을 잔 것인지 몰랐다. 햇빛이 닫아놓은 커튼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전혀 눈치도 못챘을 뻔 했다. 온 몸이 들쑤시게 아팠다. 격렬하고 또 애틋했던, 

 

오로지 서로만을 원했던 지난 밤을 떠올리니 새삼 얼굴이 발그래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시트를 볼 위까지 덮었지만 벌개진 얼굴은 좀처럼 수습하기 힘들었다. 그제서야 하얀 호텔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선 룸서비스인지 잘 차려진 정찬이 모락모락 빛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제법 유명한 호텔이라 이런 소식을 이미 강 대표가 다 알고 있었을 터였다. 자신이 도일과 함께 이 호텔 어느 객실에 묵고 있는 것까지 다 알터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어떤 짜릿함마저 느껴졌다. 

 

 

 

 

 

 

 

 

 

 

 

더 멀리, 더 많이 알게 되길 바래요. 그래야 내가 당신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격렬하게 원하고 있는지 구석구석 알게 될 테니까. 내가 느꼈던 고통만큼 당신도 천천히 곱씹으면서 느껴 봐. 그가 고통스러운 간밤을 보냈을 거라 생각하니 짜릿했다. 그리고 이젠 겁나지 않았다. 나에겐 그가 있어. 그가 나를 지켜주는 만큼 나 역시 당신에게서 지켜낼 거야. 그 누구도 차도일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야. 내 동생을 찾지 못하게 막는 거, 이젠 못할 거야. 

 

이제 서은재는, 당신이라는 올가미에서 완전히 해방될 테니까!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사이로 그제서야 룸서비스가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밥. 미역국. 새빨간 김치. 그리고 한국식 반찬들...암스테르담에서도 꽤 유명한 한국식 식당들이 많았지만 집은 물론이고 왠만해선 한국식으로 밥을 먹어본 적이 드물었다. 경유와 있을 때 몇번 챙겨먹은 정도였을 터였다. 거기다 외삼촌 집에 살 때는 더더욱 한국 음식 냄새를 외숙모가 질색하던 터라 더더욱 음식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 똑똑. 일어나셨나요? 

 

 

 

 

 

 

 

입으로 장난기 있는 소리를 내며 파자마 차림의 그가 커피 두 잔을 직접 탔는지 샤워실 입구에 뚝뚝 젖은 머리를 한 채 서 있었다. 한국식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맛은 보장 못하겠어. 쉐프가 한국사람 아니라서. 도일의 말에 은재는 귓볼이 확 붉어지면서도 베시시 웃었다. 일단 식단은 제대로 차린 것 같은데?

 


" 으음? 진짜 맛있는데? 한번 먹어봐요. " 

 

" .......... "

 

" 왜요? "

 

" 반말해 줘. 존댓말 쓰지 마. 무슨 노인네들이야? " 

 

" ........."

 

" 그냥 친구처럼, 동료처럼, 가족처럼 그렇게 말 놓아줘. 그래야 더 안심될 것 같아. "

 

" 뭐를요. "

 

" 서은재가 이제 진짜 내 꺼라는 거 그래야 실감날 것 같아서. " 

 


도일의 말에 은재는 황당한 말에 실소가 터졌다. 밤새도록 그가 물었던 질문이 그거였다. 정말 내 꺼냐고. 정말 내 여자 맞냐고. 간밤에 얼마나 많이 들은 말이었던지. 키스를 퍼부으면서도, 포옹을 하면서도. 하다못해 둘에게 처음도 아니면서 처음같은 첫날밤을 치르면서도, 절정의 신음에 달하는 그 순간에도 질문을 잊지 않았다. 

 

은재야...정말 내 꺼가 됐다고 말해 줘. 나 버리지 않는다고 꼭 말해 줘. 무조건 내 여자로 살겠다고 해줘. 은재 역시 대답하기 바빴다. 그런 그가 아침에 또 물어보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은재에게 도일은 직접 룸서비스 테이블을 가져와 먹이기 바빴고, 은재는 오랫만에 따뜻한 정찬을 먹고 기분이 좋았다. 샤워를 하고 돌아온 은재의 머리카락을 도일이 직접 말려주었다. 밥을 먹고 나니 뭘 해야 할지 확연하게 떠오른 은재는 도일의 품에 안긴 채 말을 이어나갔다. 고아원부터 알아볼래. 

 

 

 

 

 

 

 

 


지환이는 수학여행을 가서 그때부터 실종됐어. 수학여행을 파리로 갔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할거야.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실종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처음엔 어렵지만 지환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얼마 정돈 나오겠지. 지환이 또래의 외국인 학생 실종 사건이 그 때에 많긴 해도 아주 드물진 않았을 테니까. 재희랑 영신이는 입양아 브로커를 알아보는 게 빠르겠지. 지금이 제일 적기야. 이제 곧 우리가 리노베이션 최종 심사를 하니까. 은재의 말에 도일은 은재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 이제 시공 마지막 작품이 공개되면 그도 알게 될 텐데. 서은재 목표를. "

 

" ....이젠 그 자도 알아야지. 내 목표를. "

 

" .........! "

 

" 노출되는 건 나 뿐만이 아니야. 내 목표에 그 자가 흔들리고 많이 움직일수록, 더 드러나게 될 거니까. "

 

" ..... "

 

" 그리고 겁 안나. 나한텐 이제 차도일이 있어. "

 


은재의 말에 도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은재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세상에. 누구 여자가 이렇게 용기있어 졌을까. 도일의 말에 은재는 과감하게 도일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차도일 여자친구. 은재의 과감한 한 마디에 도일의 입가가 찢어질 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누구라고? 금방이라도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는 도일에게 은재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더랬다. 차도일 여자친구. 은재의 그 말에 도일은 그대로 은재를 침대로 쓰러뜨렸고, 은재는 눈을 흘겼다. 아, 금방 씻었다구요. 그리고 오늘 출근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출장도 있고 바이어도 만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은재가 볼멘소리를 하자 이미 반쯤은 이브닝 가운을 열고 있던 도일은 고개를 으쓱했다. 

 


그럴려면 애초에 날 도발시키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도일과 은재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본사에서 일이 생겼다는 공 부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호텔에서 나온 은재와 도일은 은재 회사의 본사로 향했고, 그곳에선 스튜디오 직원들을 포함한 은재 부서의 사람들이 곤란한 표정을 한 채 은재를 맞아들였다. 실장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예요?

 



기획부서 서 은 재 실장 권고사직 

 



공문이 붙어있는 걸 보자 도일의 눈동자가 커졌지만 은재는 예상했다는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빠르군. 호텔에 간 소식을 정말 빨리도 줏어들었군요. 가만히 있을 당신이 아니죠. 도일과 호텔에 갔다는 소식을 강 대표가 알았을 테고 어떻게든 은재의 발목을 잡고 싶어하는 강 대표의 술수였을 것이다.

 

은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옭아매려는 강 대표가 이젠 놀랍지도 않아서 멀쩡한 표정이었지만 도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 공고만 보더라도 은재에게 이때까지 강 대표가 어떻게 해왔는지가 보였다. 당장 분노가 드러나는 도일을 애써 만류한 은재는 도일을 마주보았다. 걱정 마요. 이젠 그 자 뜻대로 그렇게 안 될 테니까. 은재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자 도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은재 말은 곧 행동으로 드러났더랬다. 이젠 더 이상 강 대표에게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곧이야. 이젠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게 될 거야. 단순히 저 짐승같은 외삼촌 밑에서 숨죽여 살지만은 않았다는 거 알게 될 거야. 외삼촌도,

 

그리고 그 자도. 반드시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수완이를 구하고야 말겠어. 이를 악문 은재는 자신도 모르게 무당벌레 팬던트를 꼬옥 잡았다. 지켜봐 주세요, 이제 시작이예요. 엄마. 아빠. 은재가 곧 권고사직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본사 내부에 빠르고 깊이 퍼졌다. 걱정마세요. 저희가 있어요.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팀원들이 무슨 결의의 전사들처럼 나섰다. 

 


벌써 공 부장님이 움직이셨어요. 

 


팀원의 말에 은재가 이번엔 도일을 돌아보았고, 도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남친은 이런 맛에 써먹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공 부장님은,

 

나보다 널 더 염려하셔. 걱정마. 내가 총대매라고 안 했어. 살짝 주먹만 좀 들어보였지. 

 

 

 


도일의 말에 은재가 피식 웃었고, 사태를 아는지 팀원들이 은재와 도일을 둘러쌌다. 우리 회식은 언제 해요? 두 분이 이렇게 진도나가시는 거 반칙 아닙니까? 서 실장님 탐내는 남자 사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제 팀장님 공공의 적 되신 거예요. 다들 눈치로 은재와 도일의 사이를 눈치챘는지 그제서야 팀원들의 능청에 도일도 은재도 웃음이 번졌고, 은재는 미소 띈 사이로 팀원들을 독려했다. 여기서 멈춰. 총대는 나만 매면 돼. 여기까지 도와준 걸로도 충분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은재가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자 도일과 눈짓을 주고받은 팀원들이 아예 은재를 둘러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실장님. 

 


"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무일푼에 아무것도 없는 놈들 데려다가 프로젝트 일궈낸 거 우리예요. 조이델과 레이체, 합작품이죠. 누가 건드려요 이걸. " 

 

" 우리가 지켜요. "

 

" 서 회장에게 절대 뺏기지 않을 겁니다! "

 


패기 넘치던 팀원들이 더 난리였고, 은재와 도일은 서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은재와 도일의 팀원들은 물론, 다른 사원들도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이콧을 하는 데 이어 이번엔 이사진들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이델을 이때까지 이끌어온 서은재였다.

 

조이델의 모든 흥행을 책임져온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긴급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하자 강 대표는 만사 짜증이었다. 아니, 일개 실장 하나 권고사직 시키는데 이게 뭐라고 긴급 회의까지 열어? 당신들 진짜 미쳤구만. 내가 내 직원 짜르겠다는데 이것도 이사회 재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란 말야? 강 대표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 없었지만 오히려 이사회의 반응은 냉정했다.

 

 

 

 

 

 

 

 

현실적으로 보셔야 합니다. 서 실장과 어떤 안좋은 일이 있으셨는진 몰라도 최소 이번 분기에 서 실장이 우리 회사에 없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거기다, 지금 당장 서 실장만큼 유능한 인재가 들어오라는 보장도 없고, 지금 보세요. 단독 팀에다 모든 사원들이 서 실장 나가면 일 못한다고 전부 보이콧하는거. 이때까지. 다른 일을 벌렸던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서 실장은 회사를 위해 몸바쳐온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살참을 내보내니 반발이 일 수 밖에요. 대표님 개인 회사가 아닙니다. 거기다 이번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는 아시아와 유럽까지 투자한 큰 블록버스터입니다. 이번 건을 잘 해결하면 우린 유럽의 강호로 떠오를 수 있어요. 이번 리노베이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걸 해결해온 서 실장이 빠져버리면 나머지는 어떻게 채우겠습니까. 

 


" 그깟 건축 디자이너 하나 비는 거 가지고 생색은..다른 사람 구하면, "

 

" 지금 팀원들 사기도 사기지만 당장 다음주가 리노베이션인데 이걸 누가 대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요. 이사회 반응도 저렇게 유능하고 회사에 헌신적인 에이스를 왜 내보내냐고 난리예요. 저러다 다른 경쟁사에서 채가기라도 하면 우리 회사의 크나큰 손실입니다. " 

 


강 대표는 이사회의 막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앙다물었다. 분명히 서 회장의 조언은 서은재의 손발을 잘라내고 회사에서 내보내라는 조건이었다. 서 회장은 프로젝트를 아예 무위로 돌리면서까지 이 일을 은재가 손을 떼게 만들 작정이었지만 그건 더 반발이 심했다. 얼마가 들어간 프로젝트인데요. 여기서 서 실장 손을 떼게 하면 레이체에 모든 수익이 돌아갈 겁니다. 

 

이건 엄연한 공동 프로젝트입니다. 도대체 서 실장이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세 차례의 리노베이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 뿐만 아니라, 온 유럽과 아시아가 주목하고 있는 프로젝트예요. 이게 성사되기만 하면 전세계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시다니요. 거기다 서 실장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회사에 어떤 공헌을 해온 사람입니까.

 

 

 

 

 

 

 

 

 

서 실장 없이는 우리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아요. 반드시 서은재가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회사의 존폐가 달린 문제였다. 그동안 은재는 그냥 말없이 회사만 다닌 게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조금씩 회사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장악해온 것이었더랬다. 

 

여기에서 좌초되자 강 대표는 이를 악물었다. 한국에 있는 서 회장 역시 그랬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서은재를 반드시 포기하게 만들 것. 그렇다면 당신이 하는 일의 모든 걸 지원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은재에게서 차도일을 떼어내야만 했다. 

 

 

 

 

 

 

 

 

 

 

서 회장의 원조라면 뭐든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강 대표의 생각과는 달리 서 회장에게선 하루고 이틀이고 연락이 없었고, 서 회장에게 간 연락을 수완이 삭제했다는 걸 알 리가 없으니 더더욱 애가 탈 노릇이었다. 심지어 사원들이 모두 은재 아니면 안된다고 보이콧까지 하고 나선 데다 리노베이션이 끝나고 바이어들을 상대로 한 최종 기획발표회가 다음주였다. 

 

이제 마지막 삽이었다. 강 대표는 발을 동동 굴렀고, 사원들이 손을 떼면 아쉬운 건 사원들이 아니라 회사 측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들인 공이 얼만데. 이사회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은재를 축출하자는 강 대표의 의견을 묵살해버렸더랬다. 회의실을 나선 강 대표 앞에 도일이 서 있었다. 이사들이 가고 복도엔 강 대표와 도일 한 사람만 남았다. 

 


콰앙 - ! 

 



도일의 센 주먹 한 방에 원래도 맷집 좋은 편이었으나 갑작스런 일격에 강 대표가 고개를 들었고, 지릿한 피맛이 느껴졌지만 도일은 다시 다른 쪽 주먹으로 아예 강 대표를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번엔 얼마나 주먹이 세었던지 맷집 좋은 강 대표마저도 벽에 부딪혀서 넘어져 버렸더랬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새끼가 눈에 뵈는 게 없나..내가 누군 줄 알고! 강 대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도일은 강 대표를 당장에라도 잘근잘근 씹어삼킬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분명히 얘기했을 텐데요. 은재 건드리지 말라고. 더 이상 은재 삶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내 경고가 경고처럼 들리지 않았나보죠?

 


" 이 새끼가..내가 누군 줄 알고! "

 


강 대표는 주춤거리며 일어서더니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고, 요리조리 강 대표의 주먹을 피하던 도일은 태권도 유단자답게 능숙한 솜씨로 강 대표를 벽에 밀어부쳐 목을 확 졸랐다.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고 세게 눌렀던지 도일의 팔뚝에 파란 힘줄이 돋기 시작했다. 커억...컥...이거 좀 놓...말도 채 잇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던 강 대표가 버둥거렸고 도일은 한참을 그렇게 짓누르더니 강 대표를 놓아주었다. 

 


" 커억...컥...컥........."

 

" 어때. 이렇게 당해보니 너는 기분이 어때. 엿같지? " 

 

" 이 새끼가...커억......내가 누군줄 알고.......당장 경찰불러 콩밥 먹여주겠어....! "

 

" 해 봐. 얼마든지. 난 형하고 달라. 너같은 새끼한테 굽히지 않아. 경찰에 얼마든지 고소해. 과연 넌 내 앞에서 결백하다고 주장할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 

 


목을 부여잡던 강 대표는 도일의 당당함에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덤비고 싶었지만 힘으로는 아예 근접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고, 도일의 말마따나 도일이 덤벼들던 경찰에 고소를 하건 강 대표로서는 이득일 게 없었다. 씩씩거리며 무너져서 주저앉은 강 대표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던 도일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절대 용서 못해. 이 공사가 은재한테 어떤 일인데 절대 못 막아. 

 


"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은재 앞에 얼씬거릴 생각 안하는 게 좋을 거야. "

 


내가 가만 안 있어.
이젠,

 

서은재에게 닥친 모든 위험 내가 맨손으로 다 쳐낼 테니까.

절대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

 


오스트리아라구요?

 

...예. 

 

화..확실한 거예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죠. 그때 그 해에 아동 실종, 청소년 실종 이런게 되게 많았었거든요. 한동안 떠들썩했죠. 유럽에서도 그때 당시에도 대원그룹 장남이 수학여행 도중 요트 사고로 실족사했다는 소문이 유럽 신문에 등재될 정도였으니까..

 

.....

 

아직 확실한 건 아녜요. 그 시기에 오스트리아, 리투아니아, 남프랑스 이런 쪽에 아동 청소년 실종자들이 많아서 보육원들이 일대 난리가 났던 기록도 기사도 있네요. 

 

....한..한국인도 많았겠죠?

 

물론이죠. 보통은 해외여행 와서 애 잃어버린 가족이 부지기수였으니까. 

 

....

 

그리고 거의 찾지 못했죠. 

 


은재가 먼저 계획에 돌입한 것은 동생 지환을 찾는 일이었다. 물론 도일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더랬다. 동생들을 찾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동안 안 찾고 싶어 안 찾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암스테르담에 왔을 때 은재는 서 회장으로부터 강 대표를 통해 감시 아닌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야 아직 어린 은재를 삼촌인 서 회장이 외삼촌인 강 대표를 은재에게 맡겨 기르게 한다, 은재가 성인이 되면 대원그룹의 운영권을 넘긴다 - 가 대외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은재는 성인이 되고도 한국 땅을 밟지 못했고,

 

 

 

 

 

 

 

 

 

 

여전히 서 회장은 대원그룹의 임시 회장이었지만 그 세월이 벌써 십수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올해로 17년째였다. 동생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이었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은재와 나이 차이가 별반 나지 않는 아랫동생인 지환이 오스트리아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요트 여행 도중 실족사되었고 아예 거기서 이미 화장까지 다 마친 상태였으나 은재는 믿지 않았다. 

 

수완의 정체도 숨긴 저들이다. 지환도 죽였을 가능성보다는 어딘가에 버리고 감시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서 회장은 은재의 형제들이 가진 회사의 지분 때문에라도 그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기다렸을 것이었다. 지금 서 회장이 가진 회사의 지분은 임시 회장으로서 가진 20프로 뿐이었다. 

 

 

 

 

 

 

 

 

 

 

 

나머지 80프로는 은재의 부모님이 유명을 달리했을 경우 자식들에게 상속된 유산과 자식들이 모두 가진 지분을 다 합친 80프로를 가지려면 은재 형제들이 성인이 되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여야 가능한 것이었고, 아직 수완이 성인이 되지 않았고 수완을 데리고 있으니 서 회장은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은재도 강 대표에게 맡긴 채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은재가 회사에 관심이 없는 채 암스테르담에서 처박혀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않을 것이었지 은재가 애시당초 동생들을 찾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기를 썼다면 절대 서 회장은 은재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터였고, 수완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은재가 그동안 동생들을 찾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서 회장 몰래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서 회장 역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은재가 찾을 거라는 걸 모를 인물이 아니었다. 지환의 경우만 해도 오스트리아에 뿔뿔이 흩어진 고아만 수백이었다.

 

보육원 담당자만 해도 각 보육원마다 담당자도 많았고 그 때를 기억 못하거나 유명을 달리했거나 은퇴한 담당자는 더 많았다. 이렇게 찾다간 한명 한명 다 대조할 수도 없고,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정확한 사실도 아니었으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전화를 끊은 은재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시작인데..은재는 목에 걸린 무당벌레 팬던트를 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시작이잖아. 순탄치 않을 거 예상 못한 거 아니야. 찾을 거야. 무조건 찾을 거야. 찾아서, 이때까지 우리가 힘들었던 거, 울었던 거 전부 다 보상해 줄 거야. 지환아, 재희야...영신아...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막내 수완이. 전부 다 찾고 말거야. 팬던트가 뜨거울 때까지 만지작거리던 은재의 휴대폰에 전화가 울리는 불이 켜졌다. 

 


발신자 
013413401032
차 도 진 








커피전문점에 들어서면서 은재는 오랫만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라 그의 형..목소리가 너무 정중하여 은재는 아예 서서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커피숍에 들어선 은재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도진을 차마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지만 용기를 내었다. 

 

한적한 커피숍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휠체어에 앉아있는 도진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오히려 도진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미리 나와 계셨는 줄 알았더라면 더 서둘렀을텐데 죄송합니다. 은재의 말에 도진은 매너있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집이 가까워서 오히려 제가 더 서두른 감이 있죠. 정중한 그의 말에 은재는 헛기침을 했고, 웨이트리스가 나오자 도진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메리카노요. 은재도 같이 주문했더랬다. 같은 걸로 부탁합니다. 웨이트리스가 가고도 한동안 은재와 도진은 물 한잔을 두고 말이 없었다. 내가 은재 씨 만나는 걸 도일이는 모르게 했으면 합니다. 도진의 딱딱하고 굳은 말투에 미소를 머금던 은재의 시선이 천천히 어두워졌고, 도진은 어려운 말인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더랬다. 

 


- 네 동생이 그렇게 끔찍히 생각한다던 서은재는 내 조카야.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네 동생이, 

네놈이 은재네 집에 한 일을 알게 된다면, 서은재는 고사하고 네 동생은 네놈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될까?

 

" ........... "

 

- 과연, 그 이후로도 네 동생은 널 사람의 눈으로 쳐다볼 수 있을까? 

 

 

 


강 대표의 한 방은 데미지가 컸다. 강 대표의 가장 뼈아픈 흑역사이기도 했다. 안 돼. 도일이가 아는 것만은 안돼. 은재를 반대하는 것은 그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강 대표의 조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자신에게 이런 데미지를 입힌 강 대표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도 반대할 이유는 있었지만 오직 그것만은 아니었다. 동생 도일이 누구던가. 도진의 전 생애를 다 바쳐서 지켜온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부모님을 일찍 잃은 그 자리에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동생을 번듯하게 키워온 형이었고, 

 

도일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래, 좋아하는 마음은 잠깐이야. 안 보고 있으면 이런 일은 쉽게 지나갈 거야. 자신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은재를 쳐다보던 도진은 커피가 나오자 웨이트리스가 커피를 내려다주는 걸 보면서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웨이트리스가 가고 나서 도진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고,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에 은재 역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더랬다. 

 


어짜피 길게 얘기하면 서로 피로하니 본론부터 말할게요. 난 서은재 씨가 우리 도일이와 만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안 만났으면 해요. 

 

.......!

 

도일이한테 얘기했지만 아예 듣지도 않는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은재 씨를 만나자고 한 겁니다. 

 

대표님...

 

그 이유는 은재 씨도 아마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구요. 

 


도진의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은재는 고개를 숙였다. 강 대표와 도일의 형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은재도 다 아는 이야기였다. 레이체 건축사무소의 차도진 대표가 은재의 외삼촌인 강 대표 때문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암스테르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은재가 강 대표의 조카인 이상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겠지. 

 

애초부터 아는 이야기였으므로 은재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도진을 보면서 더더욱 은재는 그가 이해될 수 밖에 없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어떻게 해서, 얼마나 어렵게 도일의 마음을 받아들였던가. 이제는 그 만큼이나 은재 역시도 도일 없이는 이 모든 걸 헤쳐나갈 수 없었다. 시공도 시공이었지만 동생들을 찾는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리고 서 회장과의 싸움도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마음이신지는 제가 더 잘 알아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반대하신다고 해도요. 하지만, 어렵게 손을 잡은 터라 절대 놓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지켜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은재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더더욱 어깨 끝이 떨렸다. 스스로도 모멸감이 느껴졌지만 상처가 더 컸다. 이제 겨우 도일의 마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강 대표 때문에 다리를 잃은 도진을 보자 더욱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더랬다. 도일이 은재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힘든 지경인데, 은재마저 이러니 도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끝까지 두 사람을 축복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강행할 겁니까? 내 동생이 얼마나 힘든 시련을 이겨내는지 잘 알면서, 강 대표가 은재 씨한테 갖는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나한테 한 것처럼 강 대표가 또다시 내 동생에게 마수를 뻗친다면 그건 누구 책임입니까. 당신 외삼촌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입니다. 내가 괜히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겠어요? 

 

 

 

 

 

 

 

 

 

 


그리고 그런 불미스러운 일 때문만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위인과 이상한 소문이 도는 은재  씨를, 내 동생의 짝으로 인정할 수 없구요.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 해도 할 수 없어요. 내게는 도일이가 전붑니다. 다른 거 바라지 않아요. 그냥 내 동생을 사랑하고 저희들끼리 의좋게 살아가면 그걸로 족합니다. 하지만 은재 씨는 아니예요. 은재 씨를 보면서 내 스스로를 비관할 수 밖에 없고, 강 대표가 내 동생을 해치지 말라는 법도 없잖습니까. 나로 족합니다. 내 동생에게 강 대표가 위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은 단 하나죠. 도일의 말에 은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강 대표가 어떻게 나올지 은재 씨가 더 잘 알리라 생각해요. 도진의 말을 모두 수긍할 수 밖에 없다는 게 더 가슴 아팠다. 은재는 금세 눈물이 맺혔더랬다. 

 


포기할 수 없어요. 저에게도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예요.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은재 씨가 강 대표에게서 도일이를 지켜주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예요. 

 

.........

 

헤어져 주는 거죠. 강 대표는 은재 씨한테 도일이가 있으면 절대 멈출 인간이 아니예요.

 

......대표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한다면, 은재 씨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군요. 

 


도진은 독하게 말하면서도 은재를 쳐다보지 못했다. 도진이 눈짓을 하자 밖에 있던 도진의 비서가 다가와서 인사를 했고, 도진은 휠체어에 앉아 그대로 목례했다. 비서가 휠체어를 끌고 도진이 커피숍을 떠났지만 은재는 커피숍에 우두커니 앉은 채 망부석이 되었더랬다. 은재는 좋은 사람이었다. 더욱이나 동생이 선택한 사람이니 더더욱 안목은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강 대표가 악랄한 짐승인만큼 은재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도진이 왜 모르겠는가.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타기 전 도진은 다시 커피숍의 창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우두커니 앉아있는 은재가 보였다. 앉아있는 것만 보였지만 살짝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진이라고 좋은 마음일 리 없었다. 단순히 강 대표의 조카라는 것 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이 나서지 않았을 터였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동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런 희생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차에 탄 도진은 눈을 내려감았다. 단순히 은재가 강 대표의 조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 대표 말대로, 그 비밀을 동생이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 비밀을 알게 된다면 영원히 안 보려고 할지도 몰랐다. 완전한 흑역사..도진이 할 수 있다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지우고 싶은 최악의 순간들이 있었다. 

 


넌 알아선 안 돼.
그리고 서은재가 옆에 있으면,
넌 날 평생 증오하게 될 거다.

 



형을 원망하지 마라. 
모든 건 널 위해서야. 

 



차 문이 닫히고 도진이 탄 차가 출발했지만 커피숍 안의 은재는 한동안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풍파를 짐작하지도 못한 채로. 









...........

 

 


회사에 본사 출근으로 돌려놓았지만 곧 시공식이 코앞에 닥친 프로젝트에서 경유가 계속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원하는 만큼 쉬고 와라, 회사에 출근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또한 은재는 지금 동생들 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 자신까지 그 부담을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경유에게 있어 은재는 친자매 그 이상이었으니까. 은재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니 자신이 빨리 방황을 끝내고 돌아가는 방법밖엔 없었더랬다. 이제는 그 종착역이 왔다 생각한 경유는 천천히 히아신스 꽃다발을 한아름 안은 채 납골당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휴대폰은 아예 꺼두었다. 끄고 나면 어디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휴대폰을 끌 수는 없는 상태라 아예 번호만 바꾸고 은재에게만 연락처를 오픈했다. 의외로 회사에 나가기만 하니 그와 마주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그 역시 일을 안하면 안 될 것이었으니 그의 연락을 피하고 회사에만 있고, 그는 레이체 스튜디오 소속이니 조이델로 오고 싶어도 올 수는 없을 것이니 그를 피하기는 최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었다. 


납골당에 도착한 경유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면서 초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심장 한가운데에 폭풍이 들이붓는데 스산한 바람이라니 당치도 않았다. 납골당 입구에 꽃다발을 내려놓은 경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납골당에 안치된 환하게 웃는 민우의 사진을 보았다. 

 


서 민 우 
1990~2018
서민우 안드레아 여기 평안히 잠들다 

 



그의 얼굴이 어찌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경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너 진짜 그렇게 웃고 있는 거 반칙이야. 그렇게 웃지 않기로 하고선...이젠 신기하게도 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는데도 민제와 다른 사람 같았다.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경유는 천천히 다가가서 납골당 입구문을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민우가 옆에 살아있을만큼 생생히 느껴졌지만, 

 

경유는 눈을 감은 채 입구 가까이로 다가갔다. 미안하다는 말 이젠 안할게. 나를 위해서만 살게. 이제 그만 너를 놔줘야 할때가 온 것 같아. 하지만 난 바보야. 못생겼어. 비겁한 등신이고 나약한 바보야. 그래서 네 어머니로부터 고아라는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살아갈 용기는 없나 봐. 목각으로 뒷통수를 두드려 맞은 것 같더라. 그게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 같은 거겠지.

 

 

 

 

 

 

 

 

 

경유는 품 속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난 이걸 가지고 있을 자신이 없어. 아니,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야. 널 배신했다는, 널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도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어. 이제 전부 다 그만하고 싶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네 동생을 사랑한다는 그 열망에서도 그만 벗어나고 싶어. 바닥으로 추락한 민우의 반지를 보며 경유는 눈물을 닦아내렸다. 사랑해 민우야. 정말 사랑했어. 내 인생을 구원해준 널 정말 사랑했어. 가능하면, 널 따라서 가고 싶었어. 나만 남겨둔 세상에서 살기 싫었거든. 그러다가 네 동생을 만났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어.
민제는 그냥 민제야. 닮아서 사랑한 게 아니었어. 그냥..

민제를 사랑한 게 전부야.
그애는,
날 사랑한 죄밖에 없어. 

지옥은 나만 갈게.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민우야....

 


그대로 납골당에 주저앉은 경유는 히아신스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소리없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불던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몇시간 후, 경유는 스튜디오에 연락을 넣었다. 

 


" 내일부터 팀에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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