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Poison






민제 오...아니, 서 대리님 어디 가셨어요?

 


2차로 간 술집에서 무대 매너를 선보이고 내려온 시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에 앉아있던 민제가 보이지 않자 주변을 둘러보았고, 화장실 간 거 아니겠냐는 주변 반응에 예전과는 달리 불안한 표정이었다. 다른 테이블을 살펴보던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공 부장의 어깨를 흔들었더랬다. 부장님! 공 부장님! 정신 좀 차려보세요. 부장님!

 


" 으응? 아아..우리 신입! "

 

" 성경유 부팀장님 어디 가셨어요? 조금 전까지 같이 계속 계셨잖아요. "

 


시은의 말에 살짝 취기가 오른 공 부장이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화장실 간다고 한 것 같은데...어? 시은 씨 어디 가? 공 부장의 외침을 뒤로 하고 회식 자리를 빠져나온 시은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곳 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동시에 없어졌다는 건 우연히 생긴 사고일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경유가 누군지 잘 알면서. 둘은 그냥 친한 사이일 수도 있었다. 둘 사이라니..시은은 자신이 황당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여자의 직감이었다. 민제가 경유를 쳐다보는 시선이 잊혀지지 않았다. 자신의 기우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설마, 아무 일 없겠지. 

 


도대체 어디로 간걸까...










Rrrrrrr......

 

비상구 계단 옆은 술자리에서도 가장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래서 키스 타이밍 장소로 잘 제공되는 곳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민제의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격정적이고 요란하게 잡아먹을 듯이 키스하고 있던 경유와 민제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들리자 입술을 뗀 경유는 민제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그런 경유를 다시 품으로 끌어들인 민제는 눈을 흘겼다. 경유는 입술 화장이 번진 얼굴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 전화 오잖아! "

 

" 상관없어. "

 

" 상관은 내가 있거든? "

 


민제를 노려봐 준 경유는 민제의 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고, 민제는 자신을 관리하는 경유가 싫지 않아서 핸드폰을 확인하는 경유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민제 휴대폰을 열어본 경유가 휴대폰을 내밀었더랬다. 비밀번호 있어. 경유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민제는 아무렇지 않게 말로 전했다. <성경유>. 경유는 눈을 흘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두드렸고, 기분 좋은 음악과 함께 휴대폰 잠금 장치가 펼쳐졌더랬다. 화면 안에는 경유가 환하게 웃는 얼굴이 메인 화면에 떠 있었다. 경유는 기가 막혀서 민제를 돌아보았지만, 경유를 등 뒤에서 안고 있던 민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뭐가 문제냐는 듯한 말투였다. 부재중 통화 38건..모두 시은이었다. 시은의 문자가 계속해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오빠 어디야? '

 

' 오빠 어디 쯤이야? '

 

' 회식 거의 다 끝나가는데 나 집에 데려다 줘. '

 

' 예전처럼 집 안까지 데려다 줘. '

 

' 난 오빠 마음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 

 


구구절절 시은의 마음이 드러나는 문자를 보면 안될 것 같은 마음에 불편해졌다. 민제 역시 시은의 문자를 보았고, 경유는 돌아서서 민제를 바라보았다. 

 

그만 돌아가자. 사람들 기다린다잖아.

 

...내 마음은 아니야.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했던 거고. 시간이 필요하대서.

 

....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

 

신경 쓰여. 하지만 돌아가자.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려 줘야 해. 그게 예의야. 

 


경유의 말에 민제는 대답 대신 경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해. 어떤 일이 있어도, 꼭 너야. 반드시 너일 수 밖에 없으니까 나는 네가 아니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민제의 진심 어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지 경유 역시 민제를 와락 끌어안았다. 시끄러운 록큰롤 음악이 묻혀있는 사이, 경유와 민제는 다시 끌어안고 깊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앞으로 닥칠 고난과 험난한 시련을 예상도 못한다는 듯이..








 

 

 

 

 



* * * * * * * * * * * * * * * * *

 

회식 자리 입구 앞에서 초조하게 민제를 기다리던 시은은 입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초조해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는 그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라고..그 여자가 정말 있는 걸까. 몰래 숨어서 민제를 기다리던 시은은 민제가 나타나자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민제를 와락 끌어안았다. 

 


" 오빠, 아니 왜 연락도 안되고..... "

 

" ......."

 

" ....!!!! "

 


표정이 밝아지며 민제의 안색을 살피던 시은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아는 민제가 아닌 것 같았다. 입술 주변이 립스틱 자국으로 번져 있었고, 와이셔츠 깃 사이엔 여자의 메이크업 자국이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은 아니었지만 뭘 하다가 온 것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민제를 안았을 때 느껴지던 여자 향수..어디서 느꼈더라. 이 익숙한 향기. 

 

분명히 아는 향기였는데..민제는 멍하니 서 있는 시은을밀어냈고, 시은의 시선에 민제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여자가 보였다. 성경유...또 그 여자야. 멍하니 있던 시은을 지나쳐 걸어온 경유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 설마..그래도, 설마...시은은 민제와 경유를 돌아보며 눈이 캄캄해졌다. 하느님. 제발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말해 주세요. 제발 부탁이예요. 








 

 

 

" 여기 자리 있습니까, 부팀장님? "

 

" ..... "

 

" ...없나요? "

 

" 아니, 앉아도 돼. 괜찮아. "

 


업무 마치고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식판을 들고 눈앞에 서 있는 시은은 유달리 오늘따라 성숙해 보였다. 머리도 칼단발로 잘라서일까. 보지 못했던 새로은 모습이 느껴졌더랬다. 식사 하는 내내 경유는 자신을 탐색하는 시은의 시선이 느껴졌다. 반면에, 

 

시은은 이렇게 가까이서 경유와 같이 있어 본 적이 처음이라 낯선 한편, 친해져야겠다 생각한 탓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우의 약혼녀였다. 어쩜 가족이 되었을수도 있었을 터였다. 민우가 평소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서 경유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분명, 지난밤에 시은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탐색하기로 결정하고 뜯어봐서인지는 몰라도 경유는 누가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림으로 빚으면 경유처럼 아름다울까. 조용조용하고 여성스럽고 봄 햇살처럼 따스한 사람이었다. 

 

 

 

 

 

 

 

 

 

누구라도 금세 사랑에 빠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 자리 내내 경유를 지켜보던 시은은 질투를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경유가 완벽하다는 걸 알면 알수록 더 미칠 것 같았다. 허황된 개꿈이라고만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이 이상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더랬다. 그 이후로도 시은은 내내 경유에게 붙어다녔다. 며칠 째 식사도 같이 할 무렵, 시은이 먼저 경유에게 물었다.

 

팀장님, 아직 남친 없으신 거 맞죠? 팀장님 같은 사라이 남친 없다는 게 말이 돼요? 내가 소개시켜 줄게요. 시은이 선을 넘는다 생각했지만 티내지 않던 경유는 조용히 타일렀더랬다. 괜찮아. 아직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서..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말한 경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점 시은의 붙임성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경유를 보고 집요하게 파고든 시은은 일부러 살가운 척 경유의 팔짱을 꼈다. 그러지 말구, 제 성의를 생각해서 한번만요. 팀장님 사진, 제 sns에 올라온 거 보고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예요! 시은의 말에 경유는 기분이 확 상했지만 싹 굳어지는 표정으로 불편함을 드러냈더랬다. 

 

" ...... "

 

" 죄송해요, 팀장님,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

 

" 시은 씨, 이건..."

 

" 팀장님이 너무 인기가 많으셔서요. 아줌마도 도와주시겠다 하셨는걸요? "

 

" 어머니께서요? "

 


시은은 환히 웃으며 더 살갑게 굴었다. 시은은 강적 중의 강적이었다. 민제는 시은을 포기시켰다고 했지만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분명했다. 민제를 좋아해서 회사에까지 입사를 할 정도의 마음이라면 쉽게 포기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민제의 어머니인 조선주 여사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 자신과 미제의 사이를 아는 게 아닐까? 민제와 함께하기로 한 경유였지만 선주가 알게 되는 것이 겁이 안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또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시은과 헤어진 경유는 선주의 전화를 받았다. 시은이 전화했겠지. 

 

 

 

 

 

 

 

 

너무 타이밍이 딱딱 들어맞는 것이 느껴졌다. 예전이었으면 전화를 피했겠지만 경유는 이젠 피하지 않고 부딪혀 보기로 했다. 레스토랑에 나타난 선주는 경유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지었고, 자리에 앉고 주문을 받은 후 선주는 진심으로 경유의 손을 맞잡았더랬다. 왜 이렇게 격조했어. 같은 암스테르담 안에 살면서 이러기야? 자주 놀러와서 밥도 먹고 나랑 데이트도 하고 그러자니까. 선주가 왜 자신을 굳이 만나려 하는지 이제는 알아버린 경유는 쓰디 쓴 얼굴로 선주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민제가 잘 들르지도 않아서 얼마나 서운한데. 아들놈 하나 있는 게 맘에 안들어 죽겠어. 

 


잘하고 있어요. 염려 마세요. 

 

그럼, 누구 동생인데. 누구 핏줄인데. 그리고 못하면 내가 경유 볼 면목이 없지.

 

어머니. 

 


선주는 다시 경유의 손을 잡았다. 시은이 알지? 시은이가 그러더구나. 너한테 좋은 인연을 소개하면서 자기랑 민제가 잘 될 수 있도록 잘 좀 말해 달라고. 너한테는 상사라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더구나. 선주의 말에 완전히 뒷통수 맞은 얼굴로 경유는 기막혀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여우가 아니었다. 꼬리 아홉개 달린 구미호가 분명했다. 선주를 완전히 구워삶고 민제에게 동정표를 산 얼굴로 자신에겐 웃는 얼굴로 소개팅을 주선한다지 않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시은의 여우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경유는 자신을 물로 보는 둘에게 단호한 입장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했더랬다. 그렇게 시은 씨가 절 생각하는 줄 알았다면 진작 나가는건데 그랬나봐요. 나갈게요. 경유가 산뜻하게 대답하자 선주는 마음에 쏙 드는 표정이었다. 역시 너구나. 내가 시은이한테 그랬지. 

 

 

 

 

 

 

 

 

경유 그런 아이 아니라고. 내가 아는데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선주는 함박웃음을 짓는 한편, 경유를 따뜻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선주의 인생계획은 죽은 아들 민우 대신에 자식이라 여긴 경유도 좋은 짝을 찾아주고, 둘째 아들인 민제와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시은을 맺어주는 것이었다. 경유가 선뜻 소개팅에 나간다고 하자 고마웠더랬다. 선뜻 나가겠다 한 경유를 선주는 고마워했지만 경유는 그것이 너무 큰 족쇄처럼, 감옥처럼 느껴졌더랬다. 자신이 끊어야 했다. 경유는 웃음기를 거둔 채 선주를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하지만 이게 마지막인 걸로 해 주세요. "

 

" 경유야.." 

 

" 좋으신 분인 것 알고 저를 위한 길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 마음을 감히 어떻게 잊겠어요. 하지만.."

 

" ...."

 

" 제 삶은,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러 나왔어요. 제 행복도, 제 삶도요. 시은 씨에게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알아서 혼자 하게 놔 두라구요. "

 

" 경유야...!"

 


딱 부러지는 말에 선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경유를 쳐다보았다. 경유는 선주를 쳐다보는 시선이 더욱 또렷해졌다. 지켜봐 줘. 아직 힘이 크거나 많지는 않아. 세거나 강하지는 않아. 흔들리는 일도 있고, 약해서 가지가 부러질 수도 있어. 하지만 약속해. 너를 향한 마음은 결코 작거나 약하지 않다고. 설령,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해. 성경유가 서민제를 사랑하니까. 











 

 

 

* * * * * * * * * * * * * * * *

확실히 민제는 달라졌다. 회식 이후 시은의 눈엔 눈에 띄게 그의 변화가 피부로 느껴졌다. 오늘도 틈틈히 핸드폰을 보며 웃음이 떠나지 않는 민제를 지켜보며 시은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제의 성격은 시은이 잘 알았다. 저돌적이고 직진이었다. 

 

말리면 말릴수록,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어떻게 움직일지 너무나 잘 알았다. 민제를 건드리면 어쩔지 잘 알았고, 경유를 건드리는 방법 뿐이었다. 다행히 선주는 시은의 말에도 계략을 눈치채지 못했고, 일은 시은의 계략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민제는 경유를 찾아다녔다. 요 며칠 일이 바빠 데이트도 하지 못해 삐져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문자나 메신저도 확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딜 갔길래 연락도 안 돼? 핸드폰만 들고 쫓아다니는 민제를 보며 공 부장이 껄껄 웃었다. 토끼가 따로 없네. 대체 뭔일이길래 이렇게 뛰어댕기는 거야? 뭔일이라도 있어? 공 부장이 놀리자 민제는 손사래를 쳤고, 공 부장은 민제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 알았다. 시은 씨 찾는 구나? 여하튼, 짐승같은 놈. 

 

뭔소리유. 뜬금없이요. 

 

그렇게 튕기더니 너도 시은이한테 마음 있는 거지?

 

부장니이이임! 

 

시은이 지금 없어. 

 

누가 궁금하대요? 아, 얼른 비키세...

 

임마, 젊은 놈이 왜 솔직하질 못하냐.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얘길 할 것이지. 

 

어휴, 내가 부장님하고 무슨 소릴 해요. 

 


민제는 손사래를 치며 돌아섰고, 여전히 헛다리만 짚고 있던 공 부장이 말해 주었다. 시은이 아까 외출하고 나가던데? 성 부팀장이랑 같이. 공 부장의 헛다리 같은 말에 정지화면처럼 천천히 민제가 돌아섰더랬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시은이, 좀 전에 나갔다고. 

 

아니, 그 말 다음에. 누구랑 나갔다고요?

 

...성 부팀장이랑. 경유 씨 소개팅 시켜준다 그러던데? 몰래 대화하는 거 들었지. 하하...그러니까 임마, 그만 튕겨. 경유 씨 소개팅 해준다고 얼마나 신나 있던지. 진짜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쁘고 착하...야, 어딜 가? 서민제?! 민제야!!! 

 


공 부장의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미 민제는 미친 듯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 반갑습니다. 성경유 라고 합니다. " 

 

" ...아, 네. 송지석입니다. "

 


레스토랑 한쪽에서는 경유의 소개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대는 유명 증권 애널리스트이자 바이런 그룹 사주의 차남이기도 했다. 시은의 말은 사실이었다. sns에 올린 경유의 사진을 보고 소개시켜 달라는 몸살을 앓은 것 역시 사실이었다. 

 

선주의 안면도 있고 해서 가장 뛰어난 스펙의 능력남을 추천해야만 했다. 또한 좋은 남자여야지 경유의 마음도 흔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미팅남이라 소개받은 지석은 사진상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쩔고 아름다운 경유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지석의 상기된 표정을 본 시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건 다 된거나 다름 없었다. 거기다 경유가 싫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었고, 경유의 소개팅을 위해 선주를 끌어들인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성경유는 절대 선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테니까. 이대로 결혼까지 밀어부칠 작정이었다. 유럽 최고의 코스메틱 회사인 바이런 그룹의 차남이니 경유에게도 절대 밑지는 결혼은 아닐 것이다. 지석의 악수에 경유가 악수를 받아들였고, 지석은 경유를 가까이에서 보니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악수하고, 경유가 손을 빼려 하자 지석은 순간적으로 손을 꽉 잡았더랬다. 그 손 안 놔? 놓으랬지.

 


....!

 

민제 오빠! 

 

.....!

 

누구십니까. 

 

...이 여자 남편 될 사람입니다. 

 

....!

 


얼마나 빨리 달려왔던지 온 몸이 땀으로 다 젖었던 민제가 불같이 화를 내는 중이었고, 기막힌 시은은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황당해하는 지석을 보며 경유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해서인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지석 씨, 미안해요. 사실은 여긴 나와선 안됐었는데, 원래 이 자리에 나온 건 거절하기 위해서였어요. 이 상황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씁니다. 경유의 정중한 사과에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절하기 위해 나왔다는 경유의 말에 민제는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시은은 기가 막혀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반전은 멍하니 서 있던 지석이었다. 좋군요. 솔직해서요. 사실은 경유 씨 사진에 반해서 나온 거라고 저도 솔직하게 말하죠. 그 쪽이 제 이상형이거든요. 첫눈에 반했단 소립니다. 지석의 말에 뜨악한 민제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갈길 태세였다. 민제를 필사적으로 막아선 경유가 씩 웃었다. 그러니까 전 아직 소개팅 생각이 없어서요. 경유의 말에 지석이 웃었다.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죠. 

 


저 자식이...

 

딱 보니까 서로 교제 중인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저에게도 기회는 있는 것 같은데요. 

 


지석은 확실히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재벌 그룹 차남이라 그런지 우아한 매너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가보겠습니다. 전화번호는 제가 알고 있으니 연락드리겠습니다. 지석의 말에 민제는 금방이라도 활화산처럼 폭발할 기세였다. 지석이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민제는 경유의 손을 잡아 이끌었고, 당황한 경유는 민제를 살짝 노려보았으나 민제는 단호한 표정으로 시은 앞에 섰다.내가 분명히 입장 밝힌 걸로 알고, 너는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믿었어. 

 

정말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었어. 민제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하고 무서웠다. 언제나 자신에게 따뜻한 민제 오빠가 아니었나. 저런 민제의 표정은 처음이었다. 시은은 차마 대꾸도 못한 채 얼은 그대로 서 있어야 했고, 민제는 금방이라도 시은을 절대로 봐주지 않을 기세였다. 이제 알았지? 내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정말로 내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겠니?

 


" 오빠 미쳤어......... "

 


나지막히 고개를 숙인 시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왔다. 당혹스러워하는 경유와 시은 사이에서 민제는 차갑게 시은을 쳐다보았다. 

 

내가 널 배려하는 것만큼 넌 날 배려한 적이 없어. 그랬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겠지. 

 

오빠, 다시 생각해. 이건 미친 짓이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이게...이걸 아줌마가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 사람들은 이걸, 이해해줄 것 같아?

 

내 일이야.

 

오빠!

 


악을 쓰던 시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애교가 많던 유시은의 진짜 민낯이었다. 시은의 벌개진 눈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경유를 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 여자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아줌만 어떡하라고. 

 

이제 오빠 하나만 보고 의지하시는데. 소리를 지른 지은은 경유를 독기어린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당신이..양심이 있기는 있어? 인두껍을 쓰고 어떻게 이런 짓을 해? 시은의 붉어진 눈빛 앞에 민제가 경유 앞을 가로막았지만 시은이 더 빨랐다. 당신은 민우 오빠 약혼녀잖아!! 그런데 어떻게 민제 오빠를 만나? 당신이 인간이야? 시은의 폭언 앞에 경유의 눈동자가 커졌고, 민제는 이를 악문 채 시은 앞을 가로막았다. 

 


" 너..그만 못 해? " 

 

" 오빠도 알고 있잖아. 저 여자가 민우 오빠 약혼녀라는 거 알면서 어떻게 저 여잘 만나냐고! "

 

" 유시은! "

 


쿵...! 

 


그 말에 경유의 놀란 시선이 민제를 향했고, 민제는 결국 경유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을 나섰다. 혼자 남겨진 시은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 했었다. 회식 자리에서 오로지 성경유만 볼 때도 혹시나 했었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을 때도 설마 했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성경유일줄은 몰랐었다. 

 

주저앉은 시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여자에게 오빨 내주려고 포기하겠다고 한 게 아니야. 성경유라면 내가 포기할 이유가 없어. 내가 아니더라도 아줌마가 절대 용납 못할 테니까. 오빠도, 그 여자도 한번 느껴봐. 얼마나 버려진 기분이 처절한 건지 한번 느껴보라고. 온 세상에 버림받고 손가락질 받고도 괜찮은지 어디 한번 지켜볼 거야.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시은의 눈은 벌겋게 독기로 충혈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튼을 누른 시은의 얼굴에선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 시은이니? 그래,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 "

 

" .........."

 

" 시은아...? "

 

" 오빠가 만난다는 여자,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았어요. 성 경유예요. "

 


우당탕탕 - ! 

 


선주의 기이한 비명소리를 들으며 시은의 붉은 눈에선 독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경유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같이 달려나온 민제는 경유가 쓰러지지 않도록 어깨를 붙들어야 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경유는 멘탈이 나간 얼굴로 차마 민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깨를 덜덜 떨고만 있었다. 

 

어떻게...이걸 어떻게...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어깨만 떨구는 경유를 보며 민제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이럴까봐 그랬지..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이럴까봐. 이렇게 내 앞에서 울기만 할까봐. 시은이는 본사로 보내던지 내보내던지 할 테니까 걱정할 거 없어. 엄마 전화는 당분간 받지 마. 전화는 왜 받아서 이런 일이 생기게 만들어. 맘 다칠 일 있을 거 몰랐어? 

 

 

 

 

 

 

 

 

엄마 전화받지 마. 민제의 따뜻하고 다정한 말투에도 경유는 멘탈이 나간건지 한동안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민제가 어깨를 당겨오자 경유는 그런 민제를 밀어냈다. 왜 말 안했어..나한테는 말했어야지. 나는 알았어야 하잖아. 왜...아니, 

 

언제부터 알았어? 알고도 어떻게..말을 채 잇지 못하는 경유를 보며 민제가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나한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민제의 말에 경유는 민제의 팔을 붙들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기만 했다. 내 죄야. 내 잘못이야. 

 

 

 

 

 

 

 

 

 

너한테 말했어야 하는 거 알아. 너한테 말했어야 했어. 하지만 겁이 났어.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어. 경유가 부들거리자 민제는 그런 경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 내 형이 서민우야. 성경유 약혼자 서민우 맞아. 하지만 나 봐. 

 

내 얼굴 좀 봐. 나야. 나는 서민제야. 성경유를 사랑하는 서민제야. 형이 다시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넌 내 여자고 내 꺼야. 아무한테도 뺏기지 않을 거야. 온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듣지 마. 내 말만 들어 줘. 날 사라한다고 말해주기만 하면 돼. 민제가 경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온몸이 부서질 정도로..경유가 흐느끼가 민제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사랑해. 정말 너밖에 없어. 세상에서 널 가장 많이 사랑해.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은재는 내내 눈물을 쏟았다. 일찍 기숙사로 떠난 수완 때문에 은재는 내내 침울해 있었다. 또 언제 만날 수 있겠느냐고,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한 거냐고. 은재는 비행기 안에서 도일의 품에서 펑펑 울었다. 

 

은재를 안아준 도일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 이렇게 약한데, 이렇게 잘 무너지면서 그동안 어떻게 버텨왔던 걸까. 얼마나 힘겹게 참아왔던 걸까. 도일은 펑펑 우는 은재를 안아주며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은재는 짐을 풀지도 않고 멍하니 있다가 아예 짐을 도로 싸기 시작했다. 그런 은재를 보며 도일은 황당한 얼굴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실장님. 

 

..지금 뭐하는 거냐고!

 

짐 싸고 있어요. 

 

왜? 당신 그 잘난 외삼촌이 암스테르담 떴대?

 

아니요. 

 

그런데?

 

언제까지고 실장님께 폐가 될 순 없어요. 경유와 당분간 같이 지내기로 했어요. 

 


공항에서 집으로 오자마자 은재는 짐을 풀지도 않게 짐을 더 싸고 있었다. 도일은 마저 짐을 싸는 은재에게서 큰 가방을 뺏듯이 받아 안았다. 성 팀장 혼자 사는데 그 집엔 폐 안돼? 여자 둘이서 살면 얼마나 힘든데. 성 팀장 생각은 안 해?

 

성 팀장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생각 안 해? 도일의 말이 맞다고 여기면서도 은재는 도일 앞에 섰다. 그만 약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일 앞에선 강해질 수가 없었다. 수완을 보고나서야 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아직 싸움은 시작도 안했는데도 적에게 자신은 노출되어 있고, 수완을 구하려면 하루하루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웠다. 수완이 그 짐승들의 손에서 하루하루 구박받고 냉대당할 걸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버지,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 제 잘못이예요. 저 때문이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막내를 구했어야 했는데..아버지를 향해 사죄한 은재는 천천히 도일에게 돌아섰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이제 더 이상 팀장님께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더 이상 절 위해 뭘 하지 마세요. 은재가 짐과 슈트케이스 몇 개를 들고 나서자 도일은 짐과 슈트케이스 앞을 막아서서 팔을 벌렸다. 그건 안 돼. 네가 어디 있든 울고 있을까봐 너무너무 신경 쓰이고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너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 해. 나 필요하면 밟아. 밟고 이용해 봐. 복수하고 동생들 찾아야지 뭘 망설여. 

 


" 팀장님! "

 

" 자 봐. 내가 서은재 서울까지 데려왔잖아. "

 

" 그만해요. 팀장님이 왜..."

 

" ....... "

 

" 팀장님이 내게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그럴 이유가 없다구요. 말했잖아요. 나는 지금 내 동생들 찾을 생각밖에 없다고. 서수철은 내 위치까지 다 알았고, 난 아직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단 말예요. " 

 

"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겠다고. 네 복수. "

 

"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 아니예요. 도대체 그러니까 팀장님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구요. " 

 


은재가 울컥하자 천천히 다가온 도일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더랬다. 그걸 모르면 바보지. 

 


내가 널 사랑하니까, 서은재. 

 


몰랐지. 
나도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한테 미쳐있는 놈일 줄. 
네가 뭐라고. 네가 뭐 얼마나 예뻐서. 
네가 예뻐서. 네가 내 앞에만 있으면 진짜 아무것도 못하고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까. 
널 너무 사랑해서. 

 


바보 서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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