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직 너뿐인 나를(Only You to me)
민제의 품을 뿌리치려 노력했지만 경유는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다시 가슴에서 바람이 새는 걸 느꼈다. 더 샐 바람도 없을 텐데 가슴의 바람은 아마도 끝없이 남아있는가 보다. 민제 앞에 시은을 소개시켜 놓고 경유의 마음이 온전할 리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민제와 시은을 놓고 보면 얼마나 예쁜 그림인지 경유가 모를 리 없었다. 저렇게 연결시켜 주고 나면 완전히 흔들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너무 억지로 주입시켜서일까, 시은을 민제에게, 민제를 시은에게 소개시켜 놓고 돌아서는데 발걸음을 억지로 떼느라 고생하여야 했다.
시은은 경유가 보기에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였다. 거기다 어리고. 이미 민우의 어머니인 선주는 경유를 민우의 짝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그 점이 경유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안될 일이었다. 그의 마지막 영상을 보고 나니 더욱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죄를 짓고 있어. 죄인이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흔들린 것만으로도 그에게 충분히 죄를 지은 거라고. 더이상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고. 민우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죄책감이 경유를 짓눌렀지만 그것은 곧 내가 서민제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기도 했다.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멈추면 멈출수록,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그 마음은 더 용솟음치는 거였다. 민제의 품 안에서 경유는 눈을 질끈 내려감았다. 그의 베이비 샤워 냄새였다. 경유가 늘 상큼해서 좋다고 했던 라즈베리 향기. 어쩜 이런 것까지 닮은 형제란 말인가.
- 너라서 좋은 거야. 경유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은 거라고. 바보야. 그걸 몰랐어?
언제였던가. 그에게 프로포즈를 받은 날, 비좁아터진 경유의 집에서 그들은 그렇게 처음으로 첫날밤을 보냈었다. 키스할 때도, 키스를 받을 때도, 남들 눈을 피해 비밀연애를 하며 대학교 기숙사 앞에서 찐한 키스를 했고, 헤어지기 싫어서 아무도 없는 동아리 밀실 안에서 뜨겁게 애무하며 그렇게 마음을 확인했었다.
동아리실에서 영화를 보는 밀실은 가끔 그렇게 사람들 눈을 피해 연애하는 학생들이 서로 밀월의 데이트를 나누는 명소로도 유명했지만 경유는 자신이 그곳을 사용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그 때의 영화도 기억났다. 그랑 블루를 몇 번이나 돌려보면서 여주인공이 키스를 하니 민우가 먼저 볼에 키스를 했고, 그걸 신호로 경유와 민우는 하나가 되어 그 곳에서 처음 스킨쉽을 허락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소리가 나오지 않았던들 그곳이 그들의 첫날밤 장소가 될 뻔했었다. 경유는 민우가 처음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데이트하는 남자, 썸 탄 남자, 하다못해 몇 번 소개팅 한 남자도 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늘 공부가 바빴고, 건축디자인에 미쳐 살다 보니 남자는 늘 뒷전이었다. 항상 하얀 맨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채 버스에 건축도면을 줄줄이 꿰고 무겁게 이고 지고 나르기 바빴다. 석사를 준비하는 내내 365일 잠자고 먹는 시간 제외하면 남자를 진지하게 만나고 다닐 시간조차 부족했던 것이다. 민우는 경유에게 뭐든 처음이었다. 첫 사랑이고, 첫 남자였고, 첫날밤을 보낸 사람이었고, 첫 프로포즈를 한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그에게 배웠더랬다. 사랑하는 법도, 환하게 웃는 법도, 그리고 뜨겁게 사랑받는 법까지도. 민우를 두고 이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난 활활 타오르는 유황불에 떨어질 거야. 그래야만 해. 그리고 넌 절대 날 용서하면 안 돼. 경유는 애써 민제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민제는 몸을 돌려 경유를 더욱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쉽게 온길 아니거든요. 얼마나 노력하고 또 참고 참은 길이었는데.
" 나 쉬운 사람 아니예요..이렇게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
" ............! "
" 그런데 하나는 알아야겠어요. 내가 포기하든 죽든 당신이 돌아서는 한이 있어도 하나는 솔직하게 말해 줘요. 이건 거짓말도 하지 말고, 돌려 말하지도 말고, 내 눈 보고 정확하게 솔직하게 말해줘야만 해요. "
어느새 포옹에서 벗어난 민제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져서 볼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경유 씨를, 사랑해요.
......
정말 많이 좋아해요. 당신은요...?
사실 해야 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미 암스테르담 기차 안에서 몇 번이고 연습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시은에게 소개시키기 않았던가. 하지만 답이 정해져 있는 것과는 반대로 시은에게 보내고 난 후의 마음은 절대, 한 순간의 흔들림 때문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뼈아프게 깨달은 이후이기도 했더랬다. 답은 정해져 있고 그 길로 걷기만 하면 되었다. 민우를 생각하자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민우와 얼굴이 같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끝이었다. 그러고 돌아서면 더 이상 그도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었다. 민제와 눈이 마주친 경유의 눈에서는 말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민우 씨.
사랑하는 민우 씨....
나는 참을 수 있어. 충분히 견딜 수 있어. 나 자체가 지옥이라는 걸 아니까.
그런데...
그런데 민우 씨.
있잖아 그런데.....
말을 채 잇지 못하던 경유는 대답을 원하는 민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진짜 마음이었다. 얼마나 참았던지 천천히 흐르는 말 속에서 쉰 목소리처럼 떨림이 전해져 왔다. 나도요. 민제 씨를 사랑해요. 하지만 함께 할 수는 없어요. 그 이유는,..
경유가 말을 잇기 위해 망설였지만 채 이어지지 못했다. 달려온 민제가 경유를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갑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도 아니었고, 기습 키스는 아니었다. 안자마자 그의 뛰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경유는 민제의 품 속에서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민우와 같은 체온과 같은 향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눈 앞의 사람은 서민제였다. 민우의 얼굴을 한 민제였다. 난 아마 활활 타오르는 유황불 속에서 산 채로 집어던져질거야. 그래. 그래도 좋아. 그래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이렇게 살고 내일 지옥불에 던져지지 뭐. 모든 한계를 벗어던졌다.
민제의 등허리를 껴안은 경유가 키스를 받아들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뜨거운 체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유럽인지라, 주변에선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두 연인을 훈훈하게 바라보면서 박수를 치는 구경꾼도 있었지만, 경유도 민제도 오래 견뎠던 만큼 그리움이 응축된 키스가 길고 뜨거웠다. 서로의 허리를 완전히 감싸안은 채로 거리 한복판에서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 진짜라니까요, 아줌마. 거짓말 아녜요. "
" 말도 안돼. 민제가 그럴 리 없어. "
" 진짜라니까요. 오빠가 직접 얘기한 거예요.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세트르 헤보(Concertgebouw) 근교 레스토랑
국립박물관 남서쪽에 자리잡은 하얀 건물로, 음향 효과가 훌륭한 오케스트라 전용 콘서트 홀이다. 1888년 첫 연주를 시작한 이래 100여년의 역사가 흘렀다. 해마다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정기 연주회가 있으며, 모던 재즈, 샹송,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 연주회와 페스티벌이 이곳에서 열린다. 콘서트 프로그램은 관광 안내소 vvv나 호텔 프런트에서 구할 수 있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선주와 시은은 내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바빴다. 전 간단하게 할래요. 그라브락스(Gravlax with Avocado 저온 숙성시킨 달달하고 짭쪼름한 신선한 연어와 아보카도 무스)와 볼로네제(Bolognese 이태리 볼로냐식 라구소스로 맛을 낸 파스타)로 주시고 오레노 모스카토(Rialto Moscato 파인애플, 망고 등의 신선한 열대 과일향의 스위트 와인)로 주세요.
시은의 주문에 선주도 메뉴판을 덮고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전 감바스 알 아히요(Shrimp Ajillo 스파이시 오일에 새우를 넣어 푹 끓인 팟요리)와 트러플 스테이크(Tenderloin Steak with Truffle Sauce 볶은 버섯과 블랙 트러플 슬라이스를 올린 트러플 소스의 안심 스테이크)로 주시고 와인은 트라피체 핀카스 샤르도네(Trapiche Fineas Chardonnay 2017 잘 익은 사과향과 계피, 허니 등 다양한 풍미가 뛰어나며 한국인을 위해 생산한 와인)로 주세요. 주문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 식사가 마무리되자 풀이 죽은 시은을 보며 선주는 고개를 저었다. 민제는 내 아들이야. 내가 더 잘 알아. 거짓말 할 애가 아니야.
네가 뭘 잘못 알았을 거야. 그리고 누군갈 만나고 있다면, 거기다 결혼할 여자라고 했다면 보통 사이가 아니란 얘긴데 아직 엄마인 나도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돼? 너, 경유 못만났니? 내가 왜 전화해 줬잖아. 선주의 말에 와인 글라스를 내려놓은 시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만났죠. 소개 받았어요. 내가 아무리 전활 해도 안 나오더니 글쎄 경유 언니가 나오라고 하니까 10분만에 튀어나오는 거 있죠. 시은의 볼멘소리에 선주가 피식 웃었다. 그건 경유가 민우 약혼녀니까 그러는 거겠지. 나도 그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랬다구. 선주가 와인 잔을 들면서 시은을 다독였다. 아직 널 여자로 안 봐서 그러는 걸꺼야. 믿고 기다려 봐. 같은 공간에 있으면 분명히 민제도 생각이 달라질 테니까. 이제 경유 도움 받아서 만났으니 아줌마가 해결해줄 테니 기다려 봐. 시은보다 더 신난 선주를 보며 시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더랬다.
" 민우 오빠 약혼녀인거...민제 오빤 몰랐는데...??? 두 사람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한국에 있는 도일이 선주의 전화를 받은 건 다음날 밤이었다. 리노베이션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바이어들과의 미팅이 줄줄이 잡혀 있어서 이제 겨우 한숨 돌릴 찰나에, 도일은 선주의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시은을 인턴쉽에 넣어달라는 얘기였다.
사실상 청탁이나 다름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은이 아닌가. 시은은 명문대 졸업생으로 어느 대기업에 들어가더라도 원활한 성적이었다. 지인추천이 있었으므로 도일은 일단 면접엔 추천하겠다고 했지만 시은은 무난하게 면접을 통과했더랬다. 시은이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도일은 아무 생각 없이 시은을 오케이했더랬다. 지금 한국에 출장을 와 있는 것도 그렇고 이제 점점 일손이 부족할 텐데 인턴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 일을 도와주면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으니까.
새 메시지 01
잘 잤어요?
오늘 아침은 따뜻한 밀크티 한 잔 어때요?
나중에 봐요 ♡
- 민제
경유에게 문자를 보내고 출근 카드를 찍고 들어서던 민제는 스튜디오 안에 있는 시은을 보자 눈이 커졌다. 민제를 보자 눈이 반달눈썹처럼 휘어지며 웃던 시은은 달려와서 민제의 팔짱을 꼈다. 어 따뜻한 밀크티? 이거 내 꺼지? 시은이 손을 가져갔지만 민제는 밀크티를 내려놓으며 시은의 손을 치우게 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내가 분명히 얘기한 걸로 아는데. 여기 회사고,
사적으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어. 민제의 말에도 불구하고 시은은 휘파람을 불었고, 직원들과 함께 마침 개별 회의를 지시하고 들어서던 공 부장과 공부장의 뒤를 따르던 경유가 눈에 보였다. 경유와 눈이 마주친 민제의 눈동자가 커졌고, 경유는 민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 가 앉았다. 공 부장은 민제 옆에 있는 시은을 보자 미소지었다.
" 월요일부터 출근해도 되는데 뭘 벌써 왔어요. "
" 헤헤. 회사 분위기도 미리 익힐 겸. "
" 그동안 많이 드나들어서 다 알 것 같은데요? "
" 헷...그래도 예쁘게 봐 주세요. "
공 부장의 말에 민제는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공 부장이 말을 이었다. 유시은 양, 오늘부터 스튜디오 인턴쉽이야. 면접도 무사통과고, 사실 스펙이 너무 훌륭해서 우리 스튜디오에 모시기 어려운 인재 같은데 우리가 더 황송하지 뭐. 시은이 인턴쉽을 통과했다는 얘기에 민제가 거의 반쯤 소리를 질렀고, 자리에 앉던 경유 역시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야 했다.
경유와 눈이 마주친 민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경유와 사귀기 시작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당장 떨어지지 않으려는 민제를 겨우 집으로 보냈던 경유였는데, 아직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잘한 일인지 내내 마음속으로 고통스러운 경유는 어젯밤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 같아 적어도 민제에게 민우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우리 스튜디오 잘 부탁해요. 공 부장의 말에 시은은 방긋 웃으며 민제의 팔짱을 다시 꼈다. 우리 민제 오빠한테 잘하면 생각해 볼게요.
시은의 애교에 공 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웃음보 터지는 소리가 온 스튜디오를 맴돌았다. '우리' 민제 오빠? 집마다 하나씩 '우리 민제 오빠'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요? 어느 직원의 우스갯소리에 다시 한번 터졌고, 이미 시은이 민제에게 관심이 많아 회사에 드나드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 터라 잘 어울린다, 언제 국수 먹여 줄거냐는 등 축하 인사가 줄을 이었다.
그 곳에서 표정이 굳은 사람은 민제와 경유 뿐이었다. 내내 경유만 쳐다보던 민제는 아예 시은을 데리고 스튜디오를 나갔고,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벌써 사내 연애냐며 박수를 치기까지 했다. 자리에 앉은 경유는 고개를 숙인 채 낮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도 모르게 사고는 쳤는데. 진짜 앞날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몰랐더랬다. 시은은 민제가 자신의 손을 잡고 스튜디오를 나서자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아줌마 말씀이 맞았어. 역시 직진밖에 답이 없었던 거야! 시은은 방긋방긋 웃으며 민제를 쳐다보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민제는 시은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엄마가 알려주셨나본데 당장 그만두는 게 좋겠다.
오빠!
너 도일 형에게 전화 했지.
........아니야. 내가 무슨,
그럼 엄마시겠네.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줄 도일 형이 아니고, 엄마밖에 없겠네.
........
그 말엔 대답을 찾지 못하고 시은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공 부장님껜 내가 말씀드릴테니까 없던 일로 하고 학교로 돌아가. 너 방학 시즌 지나면 곧 대학원 가기로 했잖아. 근데 대학원 진학 포기하고 여기 인턴쉽 입사하는 거 부모님이 아셔 봐.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너 당연히 석사 따고 박사 학위까지 가는 걸로 아실 텐데. 민제의 훈계에 시은은 오히려 안색이 밝아졌다. 오빠 나에 대해 언제부터 그렇게 잘 알았어? 우리 부모님은 오빠 옆에 있는 걸 딴 짓 안한다고 더 좋아하실 분들이셔.
오빤 우리 부모님을 그렇게 몰라? 오빠 껌딱지인거 다 아시는데 뭘. 오빤 어짜피 아줌마랑 같이 안 사니까 내가 아줌마 집으로 옮겨도 된다셨어. 어짜피 아줌마 집이 스튜디오랑도 가깝잖어. 시은의 첩첩산중 말에 민제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겨우 경유의 마음을 얻었는데 시은을 자극해 봐서 좋을 것은 없었다. 당장 회사부터 정리해. 그리고 내가 했던 말은 변함없어.
엄마 카드 내세워서 이러는 모양인데, 내가 널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것과,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네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렇게 내가 철벽치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더 힘들어. 민제의 말에 시은은 포기하지 않고 민제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건 내가 아직 어리고, 오빠가 날 동생으로만 생각해서 그럴거야. 나 좋은 여자야. 괜찮은 사람이야.
오빠 옆에 여자로 서기 위해 진짜 무척 노력했어. 오빨 정말 좋아해. 오빠가 어떤 사람이든 내게 서민제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우리 아빠 회사 때문에, 오빠가 회사 보고 나랑 친하게 지내는 줄 다 알잖아. 하지만 아니야. 난 오빠가 전부야. 얼마나 오빠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노력이 필요하다면 지금보다도 더 노력할거야. 할 수 있어. 아줌마도 얼마나 좋으시고 우리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그리고 경유 언니도.
성경유를 만났단 말야?
언니가 먼저 전화온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해 아줌마가 전화주신 거지만. 언니가 민우 오빠 약혼녀인거 오빠도 몰랐잖아. 언니가 먼저 알고 전화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빠와 날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오빠도 그러니까 나한테 마음 좀 열어 줘. 내가 싫은 건 아니잖아..?
.....이건 경고야 유시은.
!!!!
다시는, 다신 성경유 만나지 마.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
오빠...!
내가 돌아왔을 때 회사에 네가 없었음 좋겠다. 네가 이러면 난 널 동생으로도 대할 수가 없다.
.......!
이렇게 독하게 말하지 않으면 네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오빠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내가 그렇게 싫어?
........
내가 노력한다고 했잖아. 오빠도 그러니까 나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
분명히 그 얘긴 예전에도 얘기했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날 무시한다거나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얘긴데. 내가 배려하는 것만큼 너는 날 배려해줬니? 그런 적이 있었는지 네 스스로 판단해 보길 바래.
예전의 민제와 사뭇 달랐다. 시은은 그때 몰랐다. 경유를 언급하는 자신 때문에 민제의 한계가 풀리고 있었다는 걸 그땐 미처 모르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그럼 그 여자가 어떤 여잔데? 어떤 여잔데 아직 아줌마까지 모르고 계셔? 여친이 있긴 있어? 그런 회사 사람들 왜 아무도 모르는 거냐고! 시은이 참다 못해 소리지르자 민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겨우 확답받았어. 오랫동안 혼자 좋아하다가 이제서야 겨우.
" ............! "
"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생각이야. 때가 되면 다 얘기하겠지. 나는 너와 예전처럼 오빠 동생으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네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
" ..........! "
" 당분간 서로 얼굴을 안 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 "
" 오빠아!!! "
" 회사 일은 내가 정리하마. "
" ....아니. 그럴 수 없어. 오빠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도 한번쯤 해보고 싶은 일이었어. 그건 오빠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거야. 이건 내 문제니까. 하지만 오빠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니까 나도 달리 생각할게. 시간을 좀 줘. 오빠 말대로 노력은 할게. 하지만 시간이 걸릴거야. 회산 안 그만둘거야. 오히려 오빠와 같이 있으면서 날 정리하는 시간이 더 도움될 거라 생각해. "
" .........."
" 월요일날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차 대리님. "
고개를 꾸벅 숙인 시은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스튜디오를 나섰고, 시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제는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뒤돌아서 나갔고, 민제가 문을 닫고 떠나는 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시은은 눈가를 훔쳤다. 그렇다고 저렇게 단호하고 차갑게 얘기할 게 뭐람. 사실 선주를 만났을 때 어느정도 일말의 기대를 한 건 사실이었지만 저렇게 차갑게 나오니 시은 역시 민망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선주의 말을 들었을 땐 그냥 자신이 여자로 느껴지지 않아 애둘러 하는 거짓말쯤으로 생각했지만 마음이 달라졌다. 그 여자에 대한 말을 입에 담았을 때 민제의 표정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더랬다.
아니 도대체 누구길래 서민제가 겨우 마음을 얻었다고까지 표현하는 걸까. 누군지도 모를 그 여자에 대한 질투심부터 먼저 일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겠어. 회사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여자가 누구든 오빠랑 내가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걸. 절대 포기 안해. 오빨 내걸로 만들고야 말 거니까. 일보전진을 위한 백보후퇴를 하기로 결심한 시은은 울분에 찬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경유 언니는 혹시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대체 오빠가 겨우 마음을 얻었다는 그 여자가 누구냐고. 시은은 스튜디오를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여자가 누구든 내가 오빠를 오래 좋아한 기간이 더 길어.
절대 뺏기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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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하셨습니다. "
" 부팀장님두요. 한국에 가신 분들은 연락 왔어요? "
" 바이어 미팅 이제 끝나고 비지니스 센터 중간 점검 들어갔다고 하네요. 다다음주 쯤엔 귀국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아시아 투자자들이 많아서 간 김에 확실한 홍보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
" 캬~역시 은재 씨네. 우리 경유 씨 든든하겠어요. "
" 뭘요. 공 부장님도 오늘 애쓰셨어요. "
경유가 빙긋 웃자 공 부장이 그런 경유를 돌아보더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웃으니 참 좋네요. 그동안은 늘 서늘해 보여서 뭔가 말 걸기도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웃고 다니시네요. 공 부장의 말에 경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은 너무 경유 씨가 우울해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었는데, 요즘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공 부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경유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공 부장을 배웅하는 길에 멈칫 선 경유는 스스로 손을 뻗어 볼을 만져보았다. 내가 그렇게 행복해 보였었나. 그 애는, 그렇게 어느 샌가 날 웃게 해왔다는 거지. 내가, 그 애로 인해 그렇게 점점 웃게 되었단 거지...?
경유는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네가 날 다시 행복하게, 웃게 해주고 있나 본데. 어쩌지. 나도 이제 행복해지고 싶은데 괜찮을까..? 경유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꺼내 용기있게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 하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바로 맞은편에서 그가 핸드폰을 든 채 손을 흔들고 있었더랬다. 다가오는 경유가 활짝 웃고 있자 민제는 오히려 깜짝 놀랐다. 어떻게...늘 자신만만한 직진남이었던 민제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너 기다렸지. 경유의 말에 민제의 광대가 폭발하고 있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걸, 진짜 사람 마음 문드러지게.
...예쁘니까 안 웃었지.
와, 오늘 성경유 진짜.
...이제 맘 고생 안 시킬게. 미안해. 반성했어.
나 오늘 생일이예요?
그럴래?
경유답지 않게 농담까지 받자 민제의 얼굴은 금세 홍당무로 물들었다. 그렇게 평소 자신감 넘치고 직진하는 것밖에 몰랐던 민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서 경유를 와락 끌어안았더랬다. 놀란 경유는 주변을 돌라보며 민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쳤어.
여기 회사야. 차민제! 경유는 결국 민제의 손을 잡아 끌고 엘리베이터 측면 기둥 옆으로 끌어와야 했다. 누가 볼세라 잔뜩 긴장한 경유와는 달리 민제는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내껀데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 웃을 때 얼마나 이쁜지. 민제의 두 뺨이 복숭아빛으로 물들자 경유는 차마 민제는 쳐다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더 이상 기만해선 안 돼.
설령 그를 잃는 한이 있어도..
아니, 이게 마지막이 되어도 더 이상 속일 수는 없다.
경유는 민제에게 고백했을 때 이미 결심한 일이었다. 잠시 동안의 기쁨이었지만 더 이상 민제를 속이는 건 죄책감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할 말이 있어. 손이 떨리던 경유의 촉촉히 젖은 눈빛을 본 민제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더랬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지만 민제는 경유의 어깨를 붙들었다. 경유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민제는 대답 대신 경유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성경유 정말 사랑해. 그리고 경유 씨가 나한테 와 줘서 정말 행복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없어. 그냥, 성경유만 있으면 돼. 민제의 말에도 경유는 민제에게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말하려는 경유를 와락 끌어안은 민제는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줘. 민제의 말에 타이밍을 놓친 경유가 매달리듯 민제의 품에 쏙 안겼다. 그의 품은 뜨거웠다. 아주 잠깐, 해사하게 웃던 민우의 얼굴이 잠시 스치듯 지나쳤지만 경유는 눈을 꼭 내려감았다. 알아. 널 만날 자격조차 없다는 거. 너한테 어떤 죄인인지도. 난 네 동생을 원해. 그 애 대신 온 세상의 비난은 내가 다 짊어질게. 하지만 그동안 날 좀 봐주지 않을래? 다른 사람이 그러는데 내가 웃는대. 내가 행복해 보인대..
민우야, 그러니까 이제 난 널 놓을게. 미안해..민제의 품에 안긴 경유는 민제가 찾아드는 입술에 몸을 맡겼다. 첫 키스는 온 몸을 물보라가 일어나듯 숨이 막혔고, 두 번째는 자신의 마음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키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경유는 민제의 목을 끌어안았고, 경유와 뜨겁게 키스를 나눈 민제는 경유를 와락 안았다.
사랑하는 우리 형.
민우 형. 민우야...
널 위해 목숨도 걸 수 있어.
네가 못다한 꿈은 내가 완성할게.
네가 하고 싶었던,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내가 완성할게.
그러니까 나 한번만 봐 줘.
용서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경유를 이제 그만 놔 줘.
경유는 이제 내 여자니까.
형이 살아돌아온다 해도 경유를 뺏기지 않을 테니까.
지금..뭐랬어. 다시 한번 말해 봐.
......
민제랑 어쩐다고?
선배.
그러니까, 민제가...아니, 네가 민우를...아니 민제를...?
보통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은재는 민우와 민제를 모두 아는 사람이었으니 은재에게는 말을 해야 했다. 서울에 있던 은재는 갑작스런 경유의 전화에 놀랐지만 그 내용에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유의 목소리를 듣던 은재는 산뜻하게 결정을 내렸다. 네 목소리 들으니 이제 좀 사람같네. 민우도 이해했을 거야. 그 애는 누구보다도 네 행복을 바랬을 애니까. 죄책감 오져서 죽기 직전까지 괴로워할 것 없어. 은재는 역시 은재였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바로 알아본 것이었다. 선배는..그 애 만났어요?
" 응. "
" ...선배. "
" 한 눈에 알아봤어. 같은 이름...그리고 아빠 손수건을 갖고 있더라. "
" 세상에..선배. 정말 잘 됐어요. 정말..."
" 그래. 이제 시작이지. "
" 걱정 마요. 우리가 정말 오래 준비해왔잖아요. 이제 곧 아시아 리노베이션이죠? "
" 응. 거기서 터트릴거야. 준비 잘 하고 있지? "
" 그럼요. 모든 준비가 다 되어가요. "
" 그래. 디 데이 얼마 안남았으니 보안에 특별히 신경 써. 아무도 몰라야 해. 아무도 믿으면 안 돼. "
" 네. "
전화를 끊은 은재는 생각에 잠겼다. 비록 리노베이션 자체는 민우와 도일이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이 프로젝트에 아시아 클라이언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원그룹 서 회장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은재에게는 이 프로젝트가 최상의 목표로 탈바꿈했더랬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복수의 기회였다. 암스테르담에, 그것도 외삼촌 강 대표의 마수 아래에서 서울에 가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야심 많은 강 대표는 다행히 떡밥을 물었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시작이었다. 절대 서 회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형인 은재 부모님을 사고사로 몰고 아직 어린 은재와 동생들을 전 세계에 다 버렸으니.
은재가 돌아왔으니 그도 반격을 준비할 것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얼른 당신의 그 가증스런 가면을 드러내시지.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으니까! 내 부모님과 내 형제들의 것을 빼앗고 누려왔으니 하나씩 가져갈거야. 그리고 내 동생들, 우리 수완이..
당신에게서 데려갈 거야. 당신이 전 세계에 내다 버린 내 동생들..다 찾아오고 말 거야. 은재는 핸드폰을 끊고 응접실로 향했고, 도일이 턱시도 차림으로 서 있었다. 은재는 도일의 손에 들려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라임색 파티 드레스가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은재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일은 은재의 손을 잡고 끌었다. 바이어들이 다 모이는 리노베이션 기념 리셉션이예요. 안 갈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죠. 이제 나와 은재 씨가 우리 프로젝트의 얼굴이예요. 수많은 바이어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고, 다른 경쟁업체들이 지금도 우리 프로젝트가 실수하거나 엎어지길 고대하고 있죠. 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죠. 도일의 말에 은재가 고개를 들었고, 도일은 다가와서 은재에게 드레스를 내밀었다.
뭘요.
조이델의 서은재가, 이 프로젝트의 총괄 팀장이 능력만큼이나 아름답다는 걸요.
도일 씨.
알아요. 겁 나는 거.
겁 안 나요. 도일 씨가 지켜줄 거잖아요.
은재의 용기있는 말에 도일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도일의 미소에 은재는 드레스를 받아들었다. 드레스를 입으러 들어간 은재를 기다리기 위해 호텔 응접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기다린 도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재가 바로 눈 앞에서 라임색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은재는 이런 드레스가 자신과 맞지 않는 듯 어색해하는 표정이었지만 광대가 폭발하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도일의 표정이 그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리스 신화 속 여신이 강림했다면 이런 얼굴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은재만 보이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이번 한번만 입고 다신 이렇게 입혀 보내지 말아야지. 은재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도일은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당장 리셉션이고 뭐고 은재를 안고 격하게 뽀뽀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미친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도일은 목젖까지 빨개져 있었다.
근데 신기한데요..내 치수는 어떻게 안 거예요?
눈대중으로.
....!
그걸 어떻게 몰라. 누가봐도 황금비율인데,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느라 애쓴 도일은 화이트 쇼올을 은재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말라서 금방이라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모습에 도일은 은재를 향한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썼다. 그래 알아. 너 이쁜 거.
네가 화를 내고 있어도 누더기 옷을 입고 있어도 진짜 넌 미치게 예뻤을 거야. 근데 네가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서 예쁜 게 아니야. 내가 옆에 있어서 겁이 안난다는 그 말이 너무 예쁜 거지. 드레스를 어색한 듯 내려다보던 은재는 전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목을 보더니 무당벌레 팬던트를 만졌더랬다. 이 드레스엔 어울리지 않는 팬던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태어나서 단 한번도 그 팬던트를 몸에서 놓아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학굘 다닐 때 다이아몬드가 빛나는 팬던트를 탐내는 불량학생들 앞에서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절대 놓지 않았던 목걸이였다. 은재가 갈등하는 걸 바라보던 도일은 천천히 다가와서 연하늘색 스카프를 은재에게 둘러주었다. 스카프를 예쁘게 두르니 예쁘기도 했지만 팬던트가 가려지니 더욱 보기 좋았다. 은재가 도일을 올려다보자 도일은 빙긋 웃었다. 뭘 해도 예쁘긴 하지만 오늘 진짜 예쁘단 말 안하곤 못 지나가겠네. 도일의 말에 눈을 흘긴 은재는 이 팬던트를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아 하는 자신의 마음을 도일에게 들킨 느낌이었지만 미소를 지었다.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제서야 도일을 향한 뭉클한 마음이 느껴졌다.
당신은 왜 이제서야 나한테로 왔죠...?
도일은 파티에 갈 준비가 끝나자 은재에게 손을 내밀어 팔짱을 껴 주게 했고, 서 회장을 만나러 가는 공식적인 자리여서 더더욱 자신에게 신경을 쓴 도일이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서 회장 일에 집착하고 서 회장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구는지 도일은 이유를 일절 묻지 않았다. 만일 도일이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얘기해줄 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구는 은재에게도 도일은 일절 그 일에 대해선 묻지 않았더랬다. 도일을 향해 미소짓던 은재는 도일을 향해 움직이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나한테 과분할 만큼.
아니. 나한테 과분해요.
그래서,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상처와 비극으로 얼룩진 나한테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 가야 할 길이 너무 멀고 가시투성이라서.
나한테 그만 다가오지 그랬어.
나는,
이렇게 강하질 못한데.
미련투성이라 이렇게 의지하고 손을 잡을 수 밖에 없는 걸.
도일이 내미는 따뜻한 손을 맞잡은 은재의 눈가가 반짝였다. 호텔의 응접실을 나서는 두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혼자 아니야.
이제부턴 둘이 걷는 길이야.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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