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서울에서(At Seoul)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Rijksmuseum) 근교 레스토랑 

 



1885년에 개관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은 빨간 벽돌로 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카이퍼스의 설계에 따라 건축하였다. 250개에 달하는 각 전시실에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회화만도 5000점이 넘는다. 1층 왼편으로는 네덜란드의 역사에 관한 전시물이 있고, 오른편에는 판화와 데생, 조각,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에는 한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의 미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12세기 남인도 작품으로  추정되는 청동상 <춤추는 시바 신>은 한눈에 보아도 대단히 가치 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한편 2층에는 네덜란드 회화 5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no 201~no.237이 15~17세기 네덜란드 회화 전시관이다. 렘브란트의 <아경>은 no.229에 있으며, 

 

 

 

 

 

 

 

 

그 밖의 렘브란트 작품은 no.217, no.229, no.223 등 여러 곳에 전시되어 있다.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는다면 <아경> 앞에서의 사진 촬영도 가능하다. no.218에 있는 <식사준비, 우유 따르는 여인>으로 유명한 베르메르의 작품은 이곳 외에 전시된 곳이 없으며, 델프트 도자기 컬렉션, 민속 컬렉션도 눈여겨 볼만하다. 시은이 급하게 꼭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민제는 이제야말로 할 얘기가 있다 생각해서 시은을 만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요즘 시은이 엄마인 조선주 여사를 만나는 일도 빈번하고, 자신에게 계속 전화하는 횟수도 늘어서 이번에야말로 시은에게 제대로 말할 때라 생각했다. 시은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고른 민제는 시은이 한껏 차려입고 나타나자 낮은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누가봐도 자신을 만나기 위해 한껏 꾸미고 나온 것이 분명했으니까. 자리에 앉고 반짝반짝한 시은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민제는 얼른 웨이터부터 불렀다. 메뉴판을 들자마자 민제는 바로 주문했더랬다.



" 에그 베네딕트(Egg Benedict 잉글리시 머핀)와 바질 아란치니(Basil Aranchini 바질 리조또를 튀긴 볼)로 주시고, 와인은 샤토 르 포르 레드로 주세요. " 


" 네. "


능숙하게 주문하는 민제를 반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은도 같이 따라서 주문했다.

 


" 전 브뤼셀 스프라우트(Brusel Sprout 구운 미니 양배추 샐러드)와 비프 카르파치오(Beef Corpoccio 와인에 부드럽게 졸인 비프 라이스)로 주시구, 화이트 와인은 샤토 루피악 고디에 있죠? "


" 네. 바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



웨이터를 보낸 시은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민제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내 전화에 만나자고 얘기해 준게  처음인 거 알아? 그래서 아침부터 샾에도 갔다오고 옷도 새로 사 입고 메컵도 새로 받고. 너무 기뻐서 아줌마한테도 전화 드렸더니 오빠한테 맛있는 거 사 달라 그러시더라. 우리 여기서 맛있게 먹고 요 앞에 진짜 맛있는 케익 집 있거든. 거기서 케익 사서 아줌마 갖다드리자. 

 

아줌마 케익 좋아하시잖아. 시은이 조잘조잘 떠들자 민제는 애써 웃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웨이터가 날라온 식사 자리가 끝나고, 와인을 한잔씩 하니 시은은 더욱 기분이 좋아보였다. 급한 얘기라는 게 뭐야. 민제의 말에 시은은 베시시 웃었다. 

 

 

 

 

 

 

뭐 그냥..이런 김에 오빠 얼굴 보구 데이트 하고 싶어서 내가 서둘렀지 뭐. 그리고 미국에 계신 우리 부모님, 이번 가을에 암스테르담 오신다니까 오빠 한번 봤으면 하시더라. 시은의 말에 와인 잔을 내려놓은 민제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동생 같은 아이였지만 시은의 부모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시은의 부모님은 미국의 건설회사 대표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문가에 준재벌급 회사의 상속녀이기도 했다. 시은이 여자로 안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런 배경 때문에 더 부담스러웠다. 아마, 시은을 자꾸 민제와 붙여두는 엄마 선주의 속내도 그런 비슷한 것일 터였다. 한숨을 내쉰 민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은은 이미 오늘은 작정한 바 있는지 민제에게 더 가까이 다가 앉았다. 

 


오빠도 알잖아. 내 마음.

 

시은아.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렸어. 오빠와, 올해 안에 결혼하고 싶다고. 

 

........!

 

그동안은 일이 많았잖아. 민우 오빠도 그렇게 가고, 아줌마 힘들어하시고..아줌만 날 딸처럼 생각하셔. 민우 오빠 일로 힘들어하는 아줌마 지켜보면서 옆에서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어. 너무 외로워하시잖아. 그리고, 오빠가 민우 오빠 때문에 더 일에 매진하려는 것도 알아. 오빠 옆에서 더 힘이 되어주고 싶어. 내가 오빨 얼마나 사랑하는지 오빠 모른다곤 못 하겠지. 내가 어릴 때부터 오빠 뿐이었다는 거 알잖아. 

 

시은아, 오빤...

 

알아. 오빠 마음. 나 여동생으로 생각해왔다는 거. 여자로 느껴본 적 없다는 거 이해했어. 그래서 기다렸던 거야.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오빠가 날 여자로 봐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오빠가 다른 사람들과 연애하고 사귈 때도 속상했지만 참고 기다렸어. 언젠간 나한테도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어. 

 

..........!

 

그동안은 민우 오빠 일 때문에 오빠가 내게 마음 열어주기까지 기다렸고. 여기까지 왔어. 이제 더 미루지 않을래. 오빠가 날 동생으로밖에 생각 안한다면 내가 오빠한테 다가갈게. 이제 그만 나한테 와 줘. 

 

......

 


민제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시은의 마음을 귀엽다고 내버려둔게 문제였다. 시은은 오랫동안 자신의 여동생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민우가 살아있을 땐 다같이 어울려 동생처럼 지낸 사이였고, 민제가 누군가를 만나고 사귈 때에도 그냥 동생처럼 지내온 아이라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생각했다.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은을 보며 민제는 오히려 이 시간이 오길 잘했다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자리에 내 마음 솔직하게 말할게. 늘 그랬지만 난 너한테 여지 준 적 없다 생각해. 네가 나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동생일 뿐이라고 했고, 넌 그 마음을 계속 믿지 않고 나한테 네 마음만 강요했어. 

 

그 부분을 딱 잘랐어야 했는데 그건 내 실수야. 우리 가족하고 너무 잘 지내서 그냥 내버려뒀던 게 내 실수였던 것 같다. 그 부분은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민제의 난데없이 강한 말투에 시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꼭 여자 남자 사이로 돌아가자고만 하면 민제는 이런 철벽이었다. 다른 여자와는 썸도 타고 데이트도 하고 잘만 사귀면서 왜 자신에게는 꼭 여동생 취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같이 알아온 사이라지만 자신에겐 늘 이런 문제에서만은 차가웠다. 

 

 

 

 

 

 

 

하지만 민제가 자신을 여동생으로라도 생각한다는 게 어딘가. 너무 소꿉친구로 동생 오빠로 알아온 세월이 많아서 그런 거라 생각한 시은은 민제의 손을 덥썩 잡았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이태껏 오빠 옆에 있었던 세월, 난 하나도 안 아까워. 나보다 누굴 더 오빨 잘 알 수 있다 생각해? 여동생으로 가까이 지내온 시간도 시간이야. 날 좀 봐줘. 난 이제 여자도 봐 달라고. 시은의 말에 민제는 결국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여자 있어.

 

........!!!!!

 

그래, 그동안 사귄 여자도 있고 썸탄 여자도 있고 연애해본 여자도 있었지. 근데 이번엔 아냐. 

 

.......여자가 있다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

 


그 바람에 시은은 민제의 손을 잡았던 손을 스르르 놓아버렸다. 잠깐 충격받은 얼굴이었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하려 노력했다. 민제의 지나온 썸녀들을 다 모른 것도 아니고, 시은은 다시 씩씩 발랄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괜찮아. 오빠 지나간 애인들 내가 다 몰라? 오빠 스타일 내가 몰라? 난 그런 애들하곤 달라. 

 

" 시은아. "

 

" 괜찮아. 걔들 정리될 때까지 내가 기다리면, "

 

" 나는 그 사람 사랑해. "

 

" ............! "

 

" 결혼할거야. "

 


어떤 일에도 절망하지 않던 시은의 얼굴이 순간 충격으로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민제 역시 이 방법이 잔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이젠 더 이상 시은을 희망고문에 시달리게 해선 안된다 생각했고, 민제 자신에게 경유 이상의 그 어떤 사람은 있을 수도 없었다. 이미 경유와 평생을 함께 하겠다는 결심은 변치 않았으니까. 하얗게 질려가는 시은을 바라보며 민제는 천천히 일어섰다. 

 

미안하다.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체 광장(Leidseplein) 근교 차민우 납골당 

 

 

 


싱겔(Singel) 운하 옆에 조성된 광장으로 이전에는 구시가의 마차 주차장이었다. 옛날에는 암스테르담 시내로 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끼 때문에, 광장에는 마차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광장 주변으로는 시립극장(Stadsschouwburg), 

 

레스토랑, 카페 테라스 등이 들어서 있으며, 특히 파라디소(Paradiso)는 젊은이들이 모여 팝을 즐기는 팝 뮤직의 메카이다. 그가 좋아하는 히아신스 꽃 한다발을 들고 납골당을 찾은 경유는 한 줄기 바람을 맞으며 납골당 위를 천천히 올라갔다. 분가루 같은 안개 방울이 경유의 어깨로 연기 스며들듯 스며들어와 축축하게 얼굴에 내려앉았다. 얼마나 짙은 안개인지 눈물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경유는 히아신스 꽃다발을 납골당 위에 올려다놓았더랬다.

 


차 민 우


1985~2018


영원히 여기에 잠들다 

 



꽃다발을 내려다놓은 경유는 납골당 유골 사이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박제된 얼굴로 환하고, 화사하고, 밝고, 활기찬 얼굴로. 그는 어둡거나 찌푸리는 법을 몰랐다. 항상 긍정적이었다. 뭐든 늘 자신이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었다. 늘 한발자국 앞에서 경유를 기다려 줬었다. 널 어떻게 잊을까. 널 잊는 건 차라리 죽는 것과 같다 생각했어. 

 

넌 날 용서하지 말아야 해. 죽어도, 내가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넌 매몰차게 날 야단쳐 줘야만 해. 그래야만 그나마 내가 네 앞에 덜 죄인이니까. 처음엔 닮아서 끌리는 거라 생각했다. 습관, 말투, 버릇, 그리고 그 목소리, 뜨거운 눈빛..모두가 민우를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직진하는 것까지도. 그를 떠올리지 않게 되는 법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새 민우가 아닌 민제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닮아서가 아니었다. 닮아서 단순히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모든 것이 신경쓰이고 그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까지도 내내 신경 쓰였더랬다. 그에 대한 막연한 욕구가 꺼져가는 잿불처럼 미지근학데 맴돌다 말곤 할 줄 알았더랬다.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면, 흐르고 나면 꺼져버릴 줄 알았다. 이렇게 충동적이고 야비하고 원시적이고 뾰족하고 격렬하게 유혹적일 수는 없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 민우를 만나러 온 길인데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경유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 경유...? 경유 맞지? "

 

" ......!!!!! "

 


히아신스 꽃다발. 그가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꽃. 

 


- 경유야 사랑해. 결혼하자. 

 


그에게 꽃다발을 받고 프로포즈를 받던 날.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약속을 한 그날,

 

그렇게 그와 첫날밤을 보내고 처음으로 차민우의 여자가 되었던 날. 
첫날밤을 치르고 어머니께 곧 간다고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며 운전해 오던 찻길에서 그렇게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을 만나 3중 추돌 사고가 났고, 그렇게 엄청난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그 히아신스를 껴안은 그의 어머니가 눈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어머니.
그의 엄마.
나의 예비 시어머니가 되었을 사람.
나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어머니가 되어주겠다며 결혼을 축복해 주었던 그 사람. 

 


그리고,
또 그의 어머니였다.
그...
차민제의 어머니. 






 

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잘, 지내셨어요...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대로 견딜만 해. 둘째가 최근에 암스테르담으로 왔거든. 

 

.....!

 

생전에 민우한테서 동생 얘기 들은 적 없니?

 

간간히 듣긴 했었던 것 같아요.

 

그 애가, 운동 선수로 있었는데 형 죽고 나선 아예 건축학으로 전향해서 조경 쪽 일을 하고 있어. 암스테르담에 아는 선배 회사에서 일하고 있단다.

 

..........

 

자주 좀 찾아오고 그러지. 너한테 몇 번 연락했었는데. 살던 곳도 이사갔다 그러고...민우 짐은 잘 받았어. 네가 보냈니?

 

네. 그 사람과 살던 집이라, 제가 살기엔 좀...

 

왜. 너희 둘이 신혼 살림으로 살려고 했던 집인데 계속 살아도 괜찮은데. 그게 민우도...

 

괜찮아요. 

 

이젠 어머니라고 안 부르는구나.

 

..........

 

네가 어머니, 하고 다소곳하게 물어볼 때가 정말 좋았는데. 

 

........!

 

네가 민우 짝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네가 좋았어. 아들 둘 있어서 며느리는 진짜 우리 애들하고 반대되는 그런 애 였으면 했는데. 민우가 사랑해서가 아니라, 민우가 처음 너 데려오던 날 아직도 기억나. 얼마나 예쁜지 민우가 안 한다 했으면 내가 밀어부쳤을거야. 그만큼 넌 너무 예뻤어. 내 맘에 쏙 들었어. 

 

........절 원망하고 계셨을 줄 알았어요.

 

그건 사고야. 누구 탓도 아니었어. 그냥, 그 애 명이 거기까지였던 거지. 

 


민우와 민제의 어머니인 선주는 그 말은 차마 견디기 어려웠던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선주는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경유 앞에 내밀었다. 사실은 민우 납골당에 두고 오려고 했는데, 너한테 주는 게 더 의미있을 것 같아서. 

 

그 애가 너 소개시켜 주겠다고 나랑 얘기하고 이걸 우편으로 보냈어. 그때 늬들은 뉴욕에 있을 때였으니까. 아마 먼저 이걸 나한테 보내서 점수를 따고 싶었던 모양이더라. 민우를 보내고 이게 늘어지기 직전까지 계속 보고 또 보다가..그렇게 또 울다가, 

 

 

 

 

 

 

 

 

또 잠들다가 하니까 도저히 어떻게 할수가 없더라. 이대론 내가 민우를 못 보낼 것 같아서. 너한테 간직해 달라고 안 해. 너한테 민우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사고 나고, 민우 그렇게 보내고 너 나쁜 마음 먹었다는 것까지 듣고 내가 얼마나 가슴을 쳤는데. 얼른 혼인신고부터 하게 해줄 걸 하고 내가 얼마나 가슴을 치고 후회했는지 몰라. 이거 네가 버려 줘. 차마 내 손으론 못 버리겠으니까 네 손으로 버렸다는 말을 들어야 안심 될 것 같아. 선주의 말에 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받아든 경유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선주를 쳐다보질 못했다. 이게 뭐예요..? 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열어보니 USB였다. 영상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선주가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오열했다는 거 보면 민우의 영상이 담겨져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아니예요 어머ㄴ...어머니라고 부르려던 경유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선주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경유의 손을 붙들고 결국 엉엉 울며 무너져 내렸다. 네가 어머니라고 부르면 꼭 민우가 옆에 있는 것만 같다면서. 그렇게 납골당 앞에서 오열하는 선주의 어깨를 감싸안은 경유는 천천히 눈을 감아내렸다.












- 엄마, 우리 경유 예쁘죠? 지금 옆에서 자고 있어요. 차에서 머리만 닿으면 자는 애예요.

 


2016년 2월. 

 

지금처럼 매서운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민우는 차를 잠깐 세워놓고 캠코더를 열었다. 아버지의 유품이기도 한 캠코더는 민우의 보물 1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건축가였고 그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민우는 건축학도가 되었다. 아버지 역시 한평생 건축업에 몸을 담으신 분이라 처음 건축학과를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장남바라기인 조선주 여사를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었다.

 

어짜피 동생은 축구선수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우는 쉽게 건축과의 길을 갈 수 있었더랬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 뉴욕에서 세계건축대전을 준비하고, 동갑내기 같은 과 친구였던 차도진과 같은 건축사무소를 차릴 예정으로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음엔 무명에 불과했지만 하나 둘씩, 작업이 쌓이면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원래 몸이 허약했던 도진 대신에 도진의 하나뿐인 동생인 도일과 같이 일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세계건축대전의 상금을 목적으로 적은 양이 아니었던 상금을 받아 건축사무소를 개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세계건축대전은 한국 재벌 그룹인 대원그룹 총수 부인의 동생이자 암스테르담 건축회사 조이델의 대표인 강 대표 소속 인턴이 따내기에 이르렀다. 모두들 뉴 페이스가 나왔다고 좋아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대원과 손잡은 조이델에서 손쓴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이름도 듣지 못한 여자 인턴이 무슨 자격으로 세계건축대전에서 그랑프리를 따내겠냐는 얘기였지만 소문으로만 그쳤고, 결국 상심과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도진은 시름시름 앓더니 몸져 누워 자리보전한지 몇 개월째였다. 어짜피 일은 동생 도일과 해왔던 터라 상심을 이기고 암스테르담 새 시공 리노베이션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일은 동생 도일과 더 잘 맞았다. 형인 도진은 마음이 약했지만 도일은 야무지고 독한 데가 있어서 같이 일하기엔 오히려 수월한 부분이 컸다. 일도 잘 끝났겠다, 도일과 의논한 끝에 뉴욕에서의 일을 청산하고 암스테르담에 회사를 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 덕택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사를 결정한 게 컸다. 어머니도 암스테르담에 살고 계시고, 곧 프로로 전향할 동생도 유럽 구단에서 뛰게 될 테니 한 가족이 같이 모여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민우가 경유를 만난 것은 한참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던 그 때였다. 도일은 형의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치료를 도맡느라 잠시 뉴욕을 떠나 있었고, 조만한 암스테르담에 회사를 차릴 요량으로 이곳 저곳을 알아보고 견문을 넓히던 그때, 뉴욕의 허름한 빌라에서 유학하던 민우는 동생인 민제가 있는 뉴욕의 대학교를 찾느라 장미덩굴을 헤치며 덩굴나무 앞에 서 있었더랬다. 

 


" 잠깐만요. 축구 구단을 찾고 있는데 축구장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

 

" 이곳은 여자 기숙사예요. 반대쪽으로 돌아가시면 푯말이 있는데, 이길로 쭉 가시면 장미 덩굴 때문에 가시가 찔리긴 해도 지름길이예요. 반대쪽으로 가시면 좀 길이 멀어서요.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

 

" ........당연히 장미 덩굴이죠. "

 

" ...........! "

 


책을 몇권 들고 긴 흑발의 생머리에 흰 셔츠, 물 빠진 청바지를 입고 돌아보던 학생이 민우의 그 말에 웃기다고 생각했는지 환하게 웃어보였다. 어젯밤 비가 온 것 같더니 장미덩굴에선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비온 뒤 밝게 개인 햇살 아래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성경유가 맑은 하늘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동생을 보러 간다는 명목으로 경유를 계속 보러간 건. 경유는 건축학과 마지막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기숙사에 머물고 있던 대학원생이었다. 

 

같은 건축학도라는 걸 알고 나니 더욱 경유와 공유하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처음엔 식당 앞에서, 다음엔 기숙사 앞에서, 또 다음엔 도서관 앞에서, 학교에 간다 그러면서 동생은 보러 가지도 않고 경유를 보러 가는 날이 허다했다. 그렇게 우연을 가장한지 1주일 만에 경유에게 고백을 했고, 밀고 당기기를 몇 번을 하고 쪽팔리게 기숙사 앞에서 쌩쇼를 해서 전교생이 다 알게 부끄럽게 만들어 놓은 다음, 겨우 경유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짧은 연애 기간이었지만 곧 예비 신부가 될 경유가 차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캠코더를 연 민우가 활짝 웃으며 경유를 슬쩍 비춰 주었다. 엄마. 엄마 예비 며느리 진짜 이쁘죠? 오늘 웨딩드레스 가봉하고, 반지 맞추고 오는 길이예요. 조금 전에 스키폴 국제공항에 내려서 차 타고 가는 중이예요. 

 

 

 

 

 

 

 

한 두시간 있음 도착해요. 엄마 음식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공항에서 간단히 뭐 먹었으니까. 우리 경유 진짜 이쁘죠 엄마. 결혼식 하고 암스테르담에 살면서 엄마랑 가까운 곳에 있다가 나중에 결혼하고 애기 생기면 같이 살아요. 좀 큰 2층 집에서 2층은 민제 살고, 엄마랑 우리랑 민제랑 다같이 살면 진짜 좋을 것 같아요. 그쵸? 이거, 미리 선수치는 거니까 경유 보고 나중에 좀 이뻐해달라고. 엄마 경유 사진 처음 보고 예쁘다고 했던 거 기억나죠? 얼굴만큼이나 마음씨가 더 이뻐요. 나 봐서라도 우리 경유 진짜 많이 이뻐해줘야돼, 알죠? 곧 신호 받네. 엄마, 그럼 집에 가서 뵈요. 엄마, 사랑해요!! 캠코더의 영상편지는 끊겼지만 신호를 받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경유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목 받침대를 뒤로 젖혀준 민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많이 사랑해. 
평생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경유야. 사랑해...

 


빠아아앙 - ! 



민우의 목소리로 부드러운 사랑 고백을 끝으로 거기서 끝이었다. 저 소름 돋는 견적 소리..아직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차 안에서 USB가 나오고 있는 핸드폰을 떨어뜨린 경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민우야.
민우야.......

 


내 사랑하는........
나는 어떻게 널 잊을 수 있다고, 잊어버렸다고 단언했을까.

 


이렇게 내 가슴에, 심장에 영원히 박혀 있는데.
너만 생각하면 이렇게 심장 한구석이 너무 아프고 아직도 피가 흐르는데. 
네가 밝혀주던 내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민우야..........

 


미안해, 민우야.........
정말 미안해.........

 

주저앉아 오열하던 끝에 경유는 스스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이건 안 잊을래. 내가 혹여나 흔들리더라도 마지막까지 오직 나만 사랑했던 널 향한 내 마지막 마음은 끝까지 남겨둘 테야. 잊지 않을래. 혹여나 잊거든 그땐 성경유가 아니라 내 거죽만 뒤집어 쓴 누군가일거야.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래. 그리고 잠깐이나마 흔들렸던 나는 영원히 지울게. 미안해, 민우야..

 

눈이 새빨개진 채 USB를 품 속에 간직한 경유는 결심했다. 민제가 그 어떤 고백을 하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결심했더랬다. 결심의 끝은 행동이어야 했다. 경유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다시 반색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경유는 눈에 힘을 주었다. 민제를 포기시키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제에게도 이젠 기만할 수 없었다. 경유가 살아가야 할 몫은, 자신을 대신해 먼 곳으로 떠난 민우를 대신해 살아남은 이유는, 민우의 삶까지 대신하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었다. 눈을 질끈 내려감은 경유는 이를 악물었다. 민제를 향한 떨림과 이끌림이 여전히 경유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자신에게 철퇴를 내려꽂는 한이 있어도 아니었다. 민제가 아니라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민우를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그만 민우를 보내주라던 은재의 말도 잊었다. 반색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경유는 눈을 떴다. 눈을 뜬 경유의 눈에서는 참아도 참아도 계속해서 눈물이 멎질 않았다.

 


저예요. 어머니.....드릴 말씀이 있어요. 











*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Rijksmuseum Vicent Van Gogh) 근교 레스토랑

 

 


1973년에 개관한 하얀 색의 고흐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개관했지만, 암스테르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그것은 고흐라는 인물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고흐의 200여 점에 달하는 회화와 500여점의 데생, 그리고 고흐와 동시대 화가의 작품 60여점, 편지 600여통이 전시되어 있다. 

 

1층에는 1887~1888년까지의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본격적인 화가 생활을 시작한 1880년부터 1890년 죽기까지의 작품이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으며, 3층에는 데생, 4층에는 고갱의 작품과 더불어 고흐의 작품이 테마별로 전시되어 있다. 고흐 미술관 옆 제일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시은은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민제에게 거절 당한 이후로 침울해있던 시은에게 걸려온 민제 어머니인 선주의 전화 한 통도 시은을 들뜨게 만들 순 없었더랬다. 시은은 멀리서 경유가 걸어오자 손을 흔들며 반가운 척을 했다. 아무리 선주가 도와준다고 해도 민제를 움직일 순 없다 생각한 시은은 퉁퉁 부은 눈으로 오빠한테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걸 왜 얘기 안해줬냐고 도리어 선주를 원망했지만 선주는 민제로부터 아직 아무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고 하고선 시은을 달랬다. 

 


안녕하세요. 유 시은 이라고 합니다. 선주 아줌마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성 경유입니다. 

 

입니다는 무슨,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제가 아직 한참 어린데요.

 

앉아요. 천천히, 편해지면요. 

 


시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경유를 쳐다보았다. 지금 민제 오빠와 일하고 있는 파트너가 민우 오빠 약혼녀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안그래도 민제가 이젠 회사엔 방해되니 오지 말라는 철벽까지 들은 터라 더더욱 상심하고 있던 차였다. 

 

선주는 어머니라 부르며 직접 전화를 준 경유로부터 들은 얘기가 더 놀라웠다. 지금 민제와 같은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는 얘기..선주는 민제와 경유에게 닥친 상황은 알 리 없어서 이번 프로젝트가 민우가 시작한 프로젝트라서 민제와 경유가 만나게 되었다는 말에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더랬다. 경유가 민제 얘기를 한 건 자신의 마음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지만 일이 일이니만큼 선주나 시은은 민제와 경유가 얽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민제와 경유가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한다는 걸 경유로부터 들은 선주는 이때다 싶었는지 민제에게 시은을 소개시켜주는 일을 경유에게 부탁했더랬다. 스튜디오에 드나들던 시은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일이 여기까지 오자 경유는 흠칫했다. 아무것도 모를 민제에게는 다소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민제를 포기시킬 길이었다. 

 


" 근데 민제 오빠가 저 안 보겠다고 했는데..이 자리에 나올까요? "

 

" .........."

 

" 민제 오빤 아직 언니랑 민우 오빠 사이 몰랐던 거잖아요. 아무리 회사 상사가 나오라 그런다고 나오겠냐구요. "

 

" ...차 대리가 그렇게 좋아요? "

 

" 네! 그럼요!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지 언닌 모르실 거예요. " 

 


반짝반짝 환하게 웃는 시은을 보니 처음 민우를 만났던 대학 초년생 시절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 일인 것만 같았는데..민제에게는 이런 시은이 훨씬 더 잘 어울릴 터였다. 자신을 향한 끌림은 금방 잊겠지. 지금 잊지 않는다 하더라도 잊게 해줄 것이었다. 민우의 영상편지까지 본 마당에 자신에게 다른 남자는 굳이 민제가 아니라 해도 허락할 수 없었다. 

 

그건 민우에 대한 배신이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떠난 민우에게 그런 고통까지 줄 순 없었다. 경유를 볼 때마다 죽은 민우가 생각난다며 민우 대신이라고 엉엉 우는 선주에게도, 더 이상의 고통은 줄 수 없었다. 경유는 결심이 섰다. 거기다 화사하고 어리고 예쁜 시은을 보니, 민제에게 너무나 진심인 시은을 보니 더욱 마음이 굳어졌다. 자신과 민제 사이의 일은 아주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민제가 오지 않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는 시은을 보며 경유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 올 수 없을 거라고. 반드시, 무조건 올 거라고. 자신의 전화를 받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던 민제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라서였다. 

 

 

 

 

 

 

 

 

 

어, 오빠다!! 시은은 레스토랑 입구에서 환한 미소로 달려오는 민제를 보고 난리가 났다. 민제는 앉아있는 경유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경유 옆에 앉아 있는 시은을 보자 눈을 동그랗게 떴더랬다. 바로 앞에 왔다가도 경유와 시은을 보자마자 민제가 딱딱하게 굳었다. 일순 차가워지는 민제의 시선을 보고 눈치가 보인 시은은 경유의 옷깃을 잡아 끌었다. 어떡해요. 오빠 화났나봐. 역시 언니만으론 안 되나봐요. 어떡해요. 시은이 간절한 눈으로 경유를 쳐다보았고, 경유는 시은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다가온 민제를 향해 경유는 이때까지완 달리 환한 미소로 대했다. 

 


" 어서 와요. 앉아요. 민제 씨. "

 

" ............! "

 


언제나 경유는 서 대리, 라고만 불렀다. 서 대리님. 서 대리. 단 한번도 민제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또한, 저렇게 부드럽고 따스하게, 환하게 웃어준 적도 없었다. 다른 동료들에겐 언제나 화사하면서 자신에게만은 찬바람 시베리아 벌판 같았다. 

 

그랬던 그녀가 시은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에게 웃어준다. 심지어 민제, 씨 라고 부르기까지 하면서.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난감해 하는 민제를 향해 의자까지 내민 경유는 일부러 시은과 민제가 같이 앉도록 유도했고, 시은은 경유를 향해 고맙단 뜻으로 눈 한쪽을 윙크해 보였다. 경유는 민제가 무어라 말하려 하자 얼른 웨이터를 불러 말하려는 걸 막았다. 

 


" 오늘은 내가 살게요. 두 사람 만난 기념으로. "

 

" 아니예요, 아줌마가 언니한테 맛있는 거 사주라 그러셨단 말예요. 아줌마한테 카드도 받아서 가지고 나왔는걸요? "

 

" 어머니께서요? "

 

" 언니 좋아하는 음식 뭔지 알거든요. 아줌마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

 

" ..........넌 경유 씨 어떻게 알아? "

 

" 왜 몰라.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지. "

 


민제의 물음에 시은은 웃음을 띄며 웨이터를 불렀다. 









 

식사가 끝나고 후식이 나오자 시계를 들여다보던 경유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거 어쩌지?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 경유가 핸드백을 챙겨들자 시은은 금방이라도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선주의 말이 맞았다.

 

경유를 만나면 민제와 연결시켜 줄 거라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였다. 홍조를 띈 시은과는 달리 민제는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듯 같이 일어났다. 일어나요. 내가 바래다 줄게요. 그와 시선 끝이 마주친 순간 두 개의 화살이 동시에 경유의 두 눈에 꽂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유는 늘 시선을 피해왔던 것과는 달리 피하지 않고 민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경유의 눈에 못질해 놓고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깜박거리지도 않았다. 딱딱한 얼굴에서 빛나는 눈만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아뇨. 차 대리님은 시은 씨 데려다 줘야죠. 그게 매너구요. 전 차도 갖고 왔고 약속 장소로 바로 가야 하니 시은 씨 챙겨주세요. 경유의 말에 민제가 다시 나섰다. 할 말이 있다는 말투였지만 경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고, 못박힌 듯 서 있는 민제에게 다가온 시은은 둘 사이는 짐작도 못한 채 행복한 표정이었다. 

 


역시 아줌마 보는 눈이 보통 눈이 아니셔. 사람 하난 진짜 기가 막히게 보신다니까. 저런 사람이 오빠 주변에 있었다니..나한테 이런 구원군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경유 언니 말이지.

 

......저 사람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야? 

 


시은을 돌아보는 민제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민제와 단 둘이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시한폭탄을 터트렸다. 몰랐어? 나도 아줌마 소개로 언니 알게 된 건데. 죽은 민우 오빠 약혼녀잖아. 시은의 말에 몇 대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뜨악한 얼굴로 민제가 천천히 시은을 돌아보았다. 

 


" 지금 뭐랬어...? 성경유가.........누구라고..........? " 










- 이거 놔요! 우리 수완이 내놓으란 말예요! 우리 수완이 어디로 빼돌렸어! 이거 놓으라구요!!!

 

- 은재야. 빼돌리긴 누가 빼돌려. 말했잖니. 병원 측의 실수로 아기를 잃어버렸다고.

 

- 말도 안돼. 그럴 리 없어! 

 

- 그 아기는 죽었다고 판명...

 

- 거짓말하지 마! 당신이 빼돌렸잖아! 우리 막내 어디로 빼돌렸어 이 파렴치한 살인자야!!!!!!!

 


띠링...♬

 


대한민국 서울. 드디어 17년만에 이곳을 밟게 된 은재는 낭랑한 한국말로 떠드는 소리에 겨우 잠에서 깼다. 옆에서 보니 도일이 걱정스런 눈으로 은재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곧 인천공항이예요. 다 왔어요. 도일은 은재의 어깨를 흔들려다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은재의 어깨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호텔 펜트하우스로 숙소를 정한 것도 도일의 결정이었다. 

 

어짜피 강 대표가 지원해주지 않을 테니 은재는 자신이 챙겨야겠다 생각했다. 강 대표에게 은재가 묵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은 물론, 단단히 강 대표에게 일러둔 셈이었다. 절대 서은재를 건드리지 말라고. 아닌게 아니라 은재가 걱정이었다. 

 

 

 

 

 

 

 

서울행에 집착해온 것도 그렇지만 공항에 도착하는 내내 손에서 목걸이인 팬던트를 놓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뭐길래..그런 은재가 신경쓰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유독 악몽에 시달리며 내내 하얗게 질린 은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도일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은재를 쉬게 한 도일은 침대에 누워 비행기에서 내내 악몽에 시달린 것만큼 깊은 잠에 빠져드는 은재를 보며 도일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당신은 여기 왜 오고 싶어한 거지.
저렇게까지 괴로워하면서........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서은재. 












* * * * * * * * * * * * * * * * * *

 

분명히 은재가 서울에 도착했을 시간인데도 뿌려놓은 정보원들은 이렇다 할 소식을 물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와장창...손에서 커피잔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대표실 안에서 강 대표는 위악을 떨고 있었다. 은재와 도일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아냈어도 철통 보안이라 아예 들어가는 것조차 무리였다. 서울에 있는 왠만한 호텔은 다 뒤질 수 있었으나 호텔 손님, 

 

특히나 vvip 펜트하우스 손님 정보는 알려드릴 수 없다는 게 한국의 법이었다. 거기다 은재가 범법자도 아니었으니 더욱 까다로워진 셈이었다. 경고하면서 서울로 떠났으니 강 대표가 약이 올라서 무슨 짓이든 할 거라는 건 당연한 예상이었고 도일은 단단히 대비를 해 두었다. 거기다 한국 프로모션에 참여하기 위해 온 암스테르담 건축회사의 귀빈이었으니 당연히 vvip였고, 

 

 

 

 

 

 

강 대표가 은재가 머무는 곳을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강 대표는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쓸어버렸다. 은재를 잃을 순 없었다. 은재에 대한 욕심은 둘째 치고서라도, 은재는 그냥 조카가 아니었다. 지금 강 대표가 이뤄놓은 자산의 기반은 은재의 유산이었다. 그리고 아직 은재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뿐이지 은재가 물려받아야 할 대원그룹의 유산도 엄청났더랬다. 은재가 아직 힘이 없어 대원그룹 총수인 서 회장에게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지금의 서 회장은 엄연히 회장 대리인이었다. 죽은 선대 회장의 다섯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맡고 있는 임시 총수일 뿐이었다. 

 

그 기간이 어언 17년...장녀이자 첫째인 은재가 벌써 서른일곱이었고, 아직도 땅에 묻혀 있고 밝혀지지 않은 대원그룹의 유산이 엄청나다는 것을 강 대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유명을 달리한 강 대표의 누나이자 은재의 어머니이며 대원그룹 선대 회장 사모인 강진영 여사가 물려받은 유산만 해도 어딘가. 누나인 진영은 결혼할 때 이미 막대한 유산을 받은 바 있었다. 

 

 

 

 

 

 

 

 

 

 

분명히 자신이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 대표의 아버지는 장녀라는 이유로 진영이 결혼할 때 엄청난 유산을 안겼고 강 대표의 부인이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았었다. 그것은 강 대표가 이를 악무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누나에게만 모든 것을 지원해줬던 부모님..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더랬다. 반드시 다 빼앗으리라. 전부 다! 

 

은재가 독립한다는 건 단순히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 그 이상이었다. 하나씩 준비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히 서울행을 고집하는 것은 서 회장의 양자로 되어 있는 막내동생을 찾으러 가는 것일 터. 은재에겐 동생이 죽었다고 알렸지만 막내동생이 살아있다는 걸 기어이 알아차렸더랬다. 막내동생을 찾으러 가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왜 굳이 지금일까. 그것도 17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왜. 강 대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은재의 행보가 왜 지금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에 빠진 강 대표는 어질러진 대표실을 치우러 들어온 비서에게 손가락지를 하며 불러세웠다. 은재가 이번 프로젝트 준비한게 얼마만이지. 

 

 

 

 

 

 

 

 

강 대표의 말에 비서가 아이패드를 뒤적이더니 보고했다. 처음 프로젝트를 준비한 건 레이체의 차도진, 차도일 형제와 유명을 달리한 건축 디자이너 차민우 씨가 처음 리노베이션을 기획했습니다. 서은재 실장님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건 지난 세계건축대전 에서 1위 수상을 한 뒤부터구요. 그때 차씨 형제와 서민우가 직접 기획한 리노베이션이 아쉽게 2위를 차지했거든요. 

 

그 기획을 본 뒤부터 이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비서의 말에 강 대표는 더욱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프로젝트에 뭔가 있어. 갑자기 이렇게 모든 걸 준비했을 리 없어. 은재라면 내가 잘 알아. 서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까지 계산에 넣었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단순히 리노베이션 기획을 중간에 훔친 것 그 이상이라는 얘긴데. 도대체 이 기획에 무슨 비밀이 숨어있는 거지. 넌 도대체 뭘 오랫동안 준비하느라 이렇게 꽁꽁 숨겨둔 거야. 강 대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은재의 독립, 리노베이션 준비, 서울행..서 회장과의 조우..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보긴 힘들었다. 강 대표는 비서에게 지시했다. 이 기획을 준비한 게 차도진 대표라 그랬지? 그 대표와 이 리노베이션 기획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봐. 그리고, 서울에 있는 대원그룹 서 회장에게 전화를 넣어. 은재가 그곳으로 갔다고. 그럼 내게 연락을 해줄 거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섰고, 주먹을 꽉 쥔 강 대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제 와서 다 빼앗길 순 없어. 암. 

 


안 되고 말고. 
은재도, 회사도...아무것도 뺏기지 않을 거다. 











조식을 먹기 위해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호텔 라운지로 내려온 도일은 말끔한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있는 은재를 보고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뿔테 안경에 부스스한 머리의 서은재는 온데간데 없고, 바늘 틈 하나 들어갈 수 없는 올빽 긴머리에 세련되고 화사한 메이크업에 단정한 수트 차림의 서은재 실장만이 있었다. 웨이터가 먼저 들어오자 은재와 도일이 먼저 주문을 했더랬다. 은재가 먼저 메뉴판을 닫았다. 전 멕시칸 콥 샐러드(Mecian Cobb Salad)와 크로크무슈(Crozue Monsieur 프렌치 샌드위치)로 주세요. 은재의 주문이 끝나자 은재의 표정을 내내 살피던 도일도 마지못해 주문을 했다. 

 


" 전 아보카도 샐러드(Arcoado Salad)와 스페니쉬 오믈렛(Spanish Omelet)으로 주시고, 후식은 따로 필요없이 그냥 물로 하죠. "

 

" 네, 고객님. " 

 


웨이터가 물러가자 냅킨을 정리하는 은재를 보며 도일은 결심을 굳혔다. 아침 먹고 서 실장은 내가 얘기해놓을 테니 병원에 다녀오도록 해요. 오늘 사전 브리핑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도일의 뜬금없는 말에 은재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전 브리핑을 차 팀장님 혼자 가다뇨. 그게 무슨 말이예요! 은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금세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리는 은재의 팔을 도일이 잡아주었다. 은재는 신경질적으로 도일의 팔을 쳐내며 흥분 상태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어떻게 온 자린데 사전 브리핑을 안 가요?! 감정적으로 부들거리는 은재를 보며 도일은 더욱 결심을 굳혔다. 그건 서은재 씨가 더 잘 알겠죠. 도일의 말에 은재는 무슨 뜻이냐는 듯 더 가까이 다가섰다. 서울행 결정되고 지금까지 잠은 몇 시간이나 잤어요. 

 

충분히 휴식 취했다는 거짓말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신경질적이고 감정 컨트롤이 안 되죠. 서울에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오려고 했는지는 지금 묻지 않겠어요. 어짜피 내가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할 서 실장도 아니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 이 프로젝트는 서 실장만 모든 거 다 바친 게 아니예요. 내 전부를 건 자리예요. 처음 서 실장이 끼어들었을 때도 어쩔 수 없이 용납했던 건, 나와 함께 했던 건축 디자이너 파트너까지 캔슬하면서 당신을 받아들였던 건 그만큼 이 리노베이션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에, 죽은 내 친구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해서 완성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예요. 

 

그만큼 내게는 이 리노베이션 완공이 절실하니까. 사적인 마음도 감추고 뛰어들었던 거죠. 이번 서울행도 마찬가지예요. 서 실장을 데려가는 건, 이번 기획의 최종 파트너니까이지 당신이 서울에서 할 모든 일에 감정적 컨트롤이 안되는 걸 알면서도 끼워넣진 않겠어요.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식은땀에 젖어 몇 번이나 악몽을 꾸고, 이젠 서울에 오니까 아예 먹지도 자지도 않았잖아요. 브런치 시켜놓고 몇 숟가락이나 뜰 건데요. 당신 마음은 온통 사전 브리핑 가서 대원그룹 서 회장을 만날 생각 뿐이죠? 

 


" 도일 씨! "

 

" 그걸 알면서 데려가진 않겠어요. 지금도 휘청거리고 몸 상태도 안 좋은데 더더욱 데려가진 않겠어. 가서 무슨 사고를 칠지 어떻게 알고. "

 

"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예요 난, " 

 

" ..당신이 감정적으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어요. 그 전엔 절대, 내 허락 없이 서 회장을 만날 수 없을 겁니다. "

 

" 도일 씨!!!!!! "

 


도일은 은재의 비명을 뒤로 한 채 돌아섰다. 아직도 파르르 떨려서 감정적 멘붕이 온 은재를 보고서 도일은 눈을 감아내렸다. 널 위해서야. 넌 분명히 서 회장을 만나면 제대로 반격도 해보기 전에 무너질 게 뻔해. 그 자는 우리가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야. 얼마나 거대한 야심을 가진 자인데 너 혼자서 어떻게 하려고. 오히려 네가 가진 수를 다 들킬게 뻔하고 네 모든 약점이 노출될 게 뻔한데 그렇게 놔둘 순 없어. 

 

널 지키기 위해서야. 
절대로, 더이상 그 누구도 널 해치게 둘 순 없어. 

 


널 지키기 위해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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