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Toghther love
털썩..
빗속에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떨고 있어서였을까, 은재는 도일의 품 속으로 힘없이 쓰러졌고, 은재를 받아 안은 도일은 동공이 커지면서 은재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것 보세요, 서 실장님. 서 실장님, 정신 차려요! 서 실장! 서은재!!! 은재의 어깨를 흔들며 안아든 도일의 손바닥엔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상처였다. 온 몸과 얼굴에 이 멍자국과 피투성이는 뭐란 말인가. 강도라도 당한 거야? 결국 도일은 은재를 얼른 병원까지 옮겨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은 말이 안됐으니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안네프랑크 하우스(Anne Frank Huis) 근교 대학병원 응급실
독일 태생의 유대인인 안네 프랑크가 독일 점령하의 암스테르담에서 쓴 <안네의 일기>는 그녀와 가족들이 독일 병사에게 연행되기 3일 전인 1944년 8월 1일에서 끝나고 있다. 전쟁과 인종 차별에 대한 가장 우수한 기소장이라고 하는 이 일기는,
가족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에 의해 1947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되었다. 이후 각국어로 번역되어 50여개국에서 출판, 지금까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이 건물은 1635년에 세운 상점으로, 프린센(Prinsen) 운하를 따라 서 있다.
사무실이 있는 앞건물과 안네가 숨어 있던 뒷건물은 회전식 책장으로 위장되어 있으며, 안네가 일기를 썼던 다락방도 그대로 있다. 앞건물은 현재 나치의 잔혹상을 보여 주는 자료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많아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다.
은재는 응급실에 누워 진료를 받고 있었고, 의사로부터 내려진 진단은 뭔가 뾰족한 유리 같은 걸 들이받아 등과 온 얼굴에 파편이 튀어 그런 것이라는 소견이 나왔더랬다. 누군가한테 얻어 맞거나 뾰족한 걸 들이받았단 얘긴데, 아니 이 철벽같은 여자한테 무슨 그런 일이 생겨. 도일은 아는 곳도 없고 하여 경유에게 일단 급한 대로 연락을 했고, 30분 만에 경유가 뛰어왔더랬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은재를 보고 사색이 된 경유는 어쩔 줄 몰라했고, 도일은 의사의 소견을 경유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정을 듣게 된 경유는 금세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는지 입술을 깨물었더랬다.
나쁜 자식...
무슨 일이예요. 서 실장한테 무슨 사고라도,
분명히 그놈 짓이예요.
그놈이라니..?
외삼촌이요. 실장님 외삼촌이 그랬을 거예요. 인간같지도 않은 짐승같은 놈들..어떻게 사람을 저 지경이 되도록 팰 수가 있어..
.......지금 부팀장 말은, 서 실장이 외삼촌한테 저렇게 피떡이 되게 두들겨 맞았단 소리예요?
도일은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입이 쩍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경유는 은재가 저렇게 된 것까지 봤는데 뭘 숨기겠나 싶었다. 곤란해하는 경유를 보며 도일은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외삼촌이 조카를 저지경이 되도록 패요? 그것도 여자를? 아니,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저렇게까지 팬단 말예요. 당장 경찰에 신고합시다. 도일이 핸드폰을 꺼내들자 경유는 그런 그를 만류했다.
" 실장님이, 아니 선배가 몰라서 저렇게 당하고 있는 게 아녜요. "
" 아니...저렇게 개패듯이 사람을 패는데 왜 신골 안합니까! "
" ........거기까지는 아직,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는 사정도 있구요. "
말하고 있는 사이 의사가 나와서 경유와 도일 앞에 섰다. 서은재 씨 보호자 분 되십니까? 의사의 말에 경유가 나섰다. 네. 직장동료예요. 의사는 경유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파편들이 너무 깊숙히 파고들지 않아 다행이지만..조금만 시간이 지났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둔탁하고 뾰족한 것에 부딪히면서 머리를 많이 부딪혔어요. ct상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입니다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환자분 몸 상태도 그리 건강하지 않아도 앞으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살펴보셔야 합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당분간 편안히 쉬게 해주는 게 중요해요. 의사의 말이 끝나자 경유는 곧 택시를 부를 기세였다. 일단 우리 집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아요. 한시라도 바삐 그 집에서 나오게 했어야 했는데..경유가 눈물을 글썽이자 눈치가 빠른 도일은 금세 이 사태를 알아차렸다.
외삼촌네와 기거한다는 거 보니 부모가 일찍 죽었거나 그랬을 터.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외삼촌네에서 괄시 아닌 구박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사정이 나름 있었겠지. 이때까지 두꺼운 철갑마냥 사람들에게 딱딱하고 까다롭게 굴던 은재의 모습을 떠올린 도일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고슴도치처럼 누가 가시부터 세우랬나. 일단 상처부터 보호하고 절대 드러내지 않는 게 꼭 자신 같았다. 조이델 대표의 조카라고 하기에 금이야 옥이야 온순한 양처럼 자란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핸섬하고 매너있어 보이던 강 대표의 모습을 떠올린 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와 명예까지 거머쥔 자가 조카를 학대하는 인간 말종이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번 일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을 터. 도일은 경유를 쳐다보았다.
" 부팀장님 집에 데려가면...그 집에서도 알지 않을까요? "
" 네? "
" 그 강 대표네 말이예요. 서 실장님 저렇게 만든 게 외삼촌네라면서요. 그럼, 평소에 서 실장이랑 부팀장 친한 사이인 것도 알테고. 집 드나드는 것 알테니 연락처 아는 건 껌일 거 같은데. "
" 아....."
"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때요? "
" ...어떻게요? "
의견을 내는 도일의 눈빛이 반짝였고, 경유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도일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서교회(Wester Kerk) 근교 펜트하우스
1631년에 건축된 프로테스탄트 교회,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높은 85m의 종각 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막시밀리안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황금관이 빛난다. 교회 안에는 이곳에 렘브란트 잠들다, 라고 쓰인 렘브란트의 묘가 있으며 헤모니의 작품인 크고 작은 47개의 카리용의 종소리는 매주 화요일 12시에서 1시까지 들을 수 있다. 링거를 맞고 잠들었던 은재는 온 몸이 쑤시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겨우 눈을 떴다. 낯선 샹들리에와 모던한 느낌의 차가운 천장과 벽을 본 순간 겨우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은재는 팔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을 보고 홱 일어나려다가 통증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아야 했다. 아직 파편을 제거한지 얼마 안돼서 움직이면 힘들 거예요. 부분 마취긴 했지만 살을 찢고 유리조각이 몸에 박힌 곳도 많아서.
링거도 맞고 마취도 했으니 당분간은 꼼짝 없이 누워 있는 게 좋을 겁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은재는 살포시 고개만 들었다. 천천히 걸어오던 도일을 발견한 은재의 눈동자가 커졌더랬다. 차 팀장님...? 은재의 파리한 모습을 보자 컵이 담긴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도일은 헛기침을 했다. 기억이 잘 안나나본데, 그냥 빗속에 냅둘까 하다가 우리 프로젝트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이상한 생각은 절대, 절대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금방이라도 이불을 걷었지만 도일이 더 빨랐다. 다가앉은 도일은 이불을 끝까지 덮으며 가까이 앉았다.
여기가 그럼 팀장님 집이예요?
그럼 숙소겠어요?
...그럼 병원까지 옮긴 사람이,
워낙 싸가지 없이 굴길래 그냥 빗속에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길가는 사람 모른척하지 말자, 라고 가정교육 받았기 때문에 데리고 온 거라니까. 성 팀장한테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누가 그랬는지.
....!
거짓말할 필요 없어요. 강진형 대표 인품이 어느정돈지 모를 만큼 바보 아니니까.
...가겠어요. 민폐 끼쳐서 미안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거예요.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본대도 그냥 모른 척 지나가셔도 돼요.
.........실장님!
은재는 주사 바늘을 빼려고 안간힘을 주는 중이었고, 그런 은재의 손을 막아선 도일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깡이 세. 실장님...아니 지금 서은재 씨 얼마나 마음이 혼란스럽고 멘붕 상태인거 모르는 바는 아닌데 본인 몸 상태를 좀 봐가면서 얘길 하라구.
온 몸으로 유리조각을 들이받았어요. 아직 안 나온 파편이 있을 수도 있고. 당분간 집에서 요양하면서 병원에 통원 치료 해야 하는 몸이라구요. 발견했을 때 등에 파편 다 박힌 건 둘째치고 머리도 들이받았는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뇌수술까지 할 뻔했다구요. 그런데 그 호랑이굴로 다시 들어가겠다구요? 서 실장 지금 제정신입니까? 도일의 말에 은재의 눈이 커졌다.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성 팀장이..경유가 뭐라 그랬어요? 은재는 도일이 뭘 알아냈을까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은재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 차갑고 무뚝뚝하고 까다로운 것은 그냥 보여지는 이미지고 이 모습이 진짜 서은재였다. 도일이 뭔가 알아냈을까봐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경유가 뭐랬건 사실이 아니예요.
은재는 억지로 주사바늘을 빼고 일어났고, 급하게 일어나서 억지로 움직이다 보니 다시 풀썩 쓰러지려는 걸 도일이 안으면서 받쳐 안았다. 도일에게 안긴 은재가 너무 놀라 몸을 빼려 했지만 오들오들 떠는 은재를 도일은 꽈악 껴안았더랬다. 금방이라도 저렇게 뜨겁게 불타오르다가 혼자 부서질 것만 같았다.
" 누가 서 실장 걱정되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
" .........! "
" 실장님이랑 내가 메인탑인데 중심부터 무너지면 이 프로젝튼 누가 책임질 거예요. "
" 책임은 내가, "
" 온 몸이 피투성이인게 왠 잔소리야. "
" .............! "
은재의 몸 떨림이 잦아들었다 싶을 즈음, 도일은 은재를 안아들고 침대에 다시 눕혔다. 의사가 절대 안정하라 그럽디다. 몸으로 뭘 부딪혔는지 조금만 늦었음 뇌에 문제 생길 뻔 했다고. 프로젝트 백지화 만들 일 있어요? 중간에 프로젝트 뺏은 서 실장도 절박하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와 내 형이 처음 시작한 리노베이션이예요. 그걸 뺏을 용기로 덤볐으면 적어도 체력 관리에서 뒤지진 말아야죠. 절대 남에게 민폐 안 끼친다, 가 서 실장 신조 아닌가? 도일의 하나하나 맞는 말에 은재는 할 말을 잃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우유를 가리킨 도일은 말을 이었다. 따뜻하게 데워왔으니 먹고 푹 자도록 해요. 어짜피 난 일은 1층에서 다 보니 2층에서 할 일이 없어서.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프로젝트 끝날때까지만이예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입이 쩍 벌어졌다. 여...여기서 지내라는 말이예요? 미쳤어요, 제정신이예요?
너무 제정신인데. 그럼 그 집에 다시 돌아가겠단 소립니까?
내 집이예요.
당신 외삼촌 집이지. 당신을 그렇게 만든.
.....누가 그런 소릴 해요? 경유가 그래요?!!!
성 팀장이 얼마나 입 무거운 사람인데 그런 얘기까지 다 하겠어요.
아니, 경유도 말 안했다면서 당신은...
당신 눈빛이. 눈이. 울기 직전의 당신 눈.
....
은재의 부어오른 눈동자를 가까이서 쳐다보던 도일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난 너한테 절대 흔들리지 않아.
당신이 내 프로젝트에 끼어들어 망치는 걸 두번 다시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당신한테 놀아나는 건 이번 한번이 끝이야.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야.
절대 너를 동정 따윌 해서가 아니고!
머리에서 하는 생각과는 달리 귓볼이 확 달아오른 도일은 잠깐 숨도 쉬기 힘들었다. 그냥, 지나가던 개가 맞고 있어도 신경 쓰이는데 심지어 가족이라는 작자가 연약한 여자한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게 너무 개차반 같아서 잠깐 욱한 것 뿐이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도일은 은재를 쳐다보지 않은 채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유나 마셔요. 그리고 이렇게 핏대 오르게 싸울 정신 있으면 잠이나 자 둬요. 힘 아낄 때 아니야. 자기 몸이 얼마나 피투성이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잔소리예요.
도일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팀장님 집에서 신세지진 않을 거예요. 경유에게 전화를 걸겠어요. 은재는 도일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핸드폰을 찾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으로 경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고집불통이라니까..도일은 은재가 저렇게까지 날 싫어하나 싶어서 이만큼 부아가 올랐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경유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재는 등을 돌린 채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성 팀장..아니, 경유야! 경유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던 은재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수화기 너머의 경유는 피식 웃었다.
- 분명히 자존심 강한 서 실장은 반드시 내 집이 아닌 성 팀장한테로 가려고 하겠죠.
- 그야 당연하죠. 선배가 팀장님 집에 있으려고 하겠어요? 미치지 않고서야. 영영 남인데다가 남잔데.
- 성 팀장과 서 실장 가까운 사이라는 거...강 대표도 알고 있죠?
- 네? 아, 그럼요. 네. 집에 초대된 적도 있어요.
- 저 상태로 뛰쳐나왔고 저렇게 만든 주범이 강 대표라는 가정 하에, 성 팀장 집에 서 실장이 있다는 거,
강 대표가 바로 알지 않을까요? 알게 되면, 그 담은 뭘꺼 같아요.
- 당장 선밸 집으로 데려가려고 할 거예요...안 돼요! 아..어쩌죠??
- 우리 집은 비밀리에 부쳐져 있고,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드나드는 사람도 제한적이죠.
연락처를 안다고 해도, 쉽게 서 실장을 빼내진 못할 겁니다.
- 그래도 어떻게 팀장님 집에...
- 호텔이나 다른 집을 구한다고 해도 강 대표가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고, 여자 둘이 살고 있다면 더 빼내기 쉽겠죠.
서 실장 뿐만 아니라 성 팀장도 문제가 될 수 있구요.
- .......선배를 지켜주겠다는, 보호해 주겠다는 뜻이죠?
- ..........
- 부탁 좀 드릴게요. 절대로, 그 강대표의 마수에 선밸 넘겨선 안 돼요. 그놈은 악마예요. 짐승이예요.
프로젝트 스틸한 것 때문에 선배에 대한 감정 안 좋은 거 알아요. 아는데..정말로 절박한 이유가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를 끝으로 외삼촌의 마수에서 빠져나오려고 그랬던 거예요...
- 하나만 더요.
- 뭐든 말씀만 하세요.
- 서 실장은 남에게 민폐끼치는 걸 죽도록 싫어하니 당분간 내가 그 이유를 안다는 걸 비밀로 하세요.
도일과 완전히 말을 맞춰 놓았던 경유는 입가에 미소를 애써 감춘 채 시치미를 뚝 떼었다. 지금 너희 집으로 가겠다는 은재의 말에도 경유는 어떡하냐며 지금 동창들이 집에 다 와 있어서 당분간 묵고 간다는 거짓말을 보태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집에 손님들이 와 있어서 병원 갔을 때도 팀장님한테 말했던 건데. 어짜피 프로젝트 일 하려면 팀장님과 제일 많이 붙어있어야 하는 거고. 오히려 잘된 일 아냐? 경유의 뜬금포에 은재는 팔짝 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경유의 연기가 물이 오를대로 오르자 듣고 있던 도일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질 못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이야. 그게 말이 돼?
- 안 될 건 뭐유.
" 야, 성경유! 동창들 집에 있단 말 거짓말이지. 니가 동창들이 어딨어. 대학 다니던 동창들하고 연락 싹 끊고..."
- 어머, 무슨 소리야. 동창이 대학만 있어?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 당장 니네 집으로 갈 거니까 알아서 해. "
- 아 진짜라니까. 이것 봐. 소리 들어봐 선배. 소리 안들려? 애들 술판 벌리고 난리난 거. 그리고 차 팀장님 사람 좋고 파트너고 뭐가 문제야. 1, 2층 나눠져 있어서 거슬릴 일도 없겠두만. 설마, 차 팀장님 남자라서 혹시 그러는 거야?
" 미쳤어, 그 인간이 무슨 남자야!!! "
'
옆에 도일이 있다는 것도 잊고 은재는 소리를 질렀지만 수화음이 안좋다는 둥 말도 안되는 핑계를 갖다붙이며 경유의 전화가 끊어졌고, 끊어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은재는 기막힌 표정이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목소리가 커서 전화를 듣게 된 도일은 뭐 씹은 듯한 표정으로 은재에게 다가왔다.
남자가 아니라니, 아니 그럼 내 성별은 여잡니까?
아니 무슨 남자가 전화나 엿듣고 있어요?
옆에서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른 사람이 누군데 어디서 엿들었대요.
비켜요. 경유한테 갈 거예요.
방금 못 들었어요? 동창들이 집에 와 있어서 안된다고 했던 말.
진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서로 불편할 일을 왜 사서 만드냐구요.
.......
네? 제가 여깄으면 팀장님 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텐데,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걸 알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이게 말이 안되는 상황인건 팀장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민폐 끼치기 싫으니까...병원에 데려다 주신 건 감사히 생각할게요. 그러니까...
" 강 대표가 서 실장 집 연락처 아니까. "
" !!!!!!!! "
이 말까진 안하려 했는데..도일의 한 마디에 용광로처럼 끓던 은재가 일순 조용해졌다. 도일은 천천히 은재를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친한 거 강 대표가 잘 알테고, 그럼 같이 살고 있는 서 실장한테도 피해가 가겠죠. 여자 둘..지금보다 더 위험하면 위험했지 덜 위험하진 않을 거고.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솔직히 내 알바 아녜요. 이 집에 같이 머물게 하는 거 나라고 편하기만 한 일인 줄 알아요? 하지만 어쨌든 일은 터졌고, 성 팀장이 나한테 sos를 쳤고, 당신은...당신은 비는 오는데 그 피투 성이를 하고서 내 눈 앞에서 쓰러졌고! 그걸 보면서 경유 씨 집이든 그 외삼촌 집이든 보내는 게 내 마음은 편할 것 같습니까? 이건 사람의 도리 문제지 당장 내 눈 앞에서 자존심 시위할 때가 아니잖아요!
제기랄.
그렇게 소리도 못 내고 울지나 말든가.
사람 심장은 천갈래 만갈래로 다 찢어놓구서.
자긴 울지도 못하는 철갑 행세 좀 그만해.
서은재는 숨어서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거 다 들켰으니까.
그냥 니가 울면 짜증이 나는 것 뿐이야.
" 프로젝트 끝날때까지만이예요. 여자 둘이서 무슨 일 생겨서 난리나는 것보단 내가 낫잖아요. 강 대표도, 차마 나나 내 집에까진 어떻게 못할 겁니다. "
" ........! "
" 몸 관리도 해야죠. 지금 이 상태로 프로젝트 완주하는 것도 무린데. "
" 팀장님. "
" 지금은 저 따뜻한 우유 마시고 푹 자요. 전쟁은 내일부터 치뤄도 늦지 않으니까. "
" ..........."
" 또 할 말 있어요? 싸울 기운 있어요? 나 진짜 피곤하고 졸린데. "
돌아서는 도일을 향해 은재는 더 이상 시비를 걸고 싶어도 자신 또한 천근만근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문제가 정말 어이없는 과제라는 걸 잘 알았지만, 그의 말마따나 경유가 강 대표로 인해 다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자신이 가출했으니 지금쯤이면 강 대표가 눈이 뒤집혀서 자신을 찾느라 난리가 났을 터였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우리 외삼촌이 당신한테 뭔가를 요구하면, 그래서 그쪽이 불리해지거나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그땐 무조건 날 내보내요.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당분간 프로젝트가 마무리 될때까지만이예요..부탁이예요. 외삼촌이 당신에게 뭘 요구하면 반드시 나한테 얘기해 줘요. 내가 해결할 테니까.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여자가 여전히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 말은 분명히 했다. 어지간히 민폐가 지독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도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일의 허락을 받고서야 여자가 우유를 다 마시고는 천천히 침대에 누웠더랬다. 오늘 말도 안되는 하루를 보냈고 아직 마취도 덜 풀린 상황이라 여자는 아기처럼 금방 유순하게 잠이 들었다. 정말로 위험할 뻔 했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채 아기처럼 조용히 등을 보인 채 쪽잠을 자는 은재를 바라보던 도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은재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아직 아픈지 열이 끓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그렇게 너를 숨기고 너를 감추고 네가 아플때까지 달리면서..
네가 감추고 있는 그 아픈 건 도대체 뭐야.
서은재.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렘브란트의 집(Rembrandthuis) 근교 차민제 본가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거장 렘브란트가 1639년부터 1658년까지 머물렀던 집이다. 1911년부터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렘브란트 자신이 인쇄한 250장의 오리지널 에칭을 소장하고 있다. 회사 근처의 빌라를 얻어 혼자 생활하고 있던 민제는 제발 집에 좀 오라는 엄마 조선주 여사의 성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엄마 혼자 있는 게 영 마음 쓰이기도 하던 때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선주와 함께 앉아 있는 시은이 보였고, 겉옷을 벗으려던 민제의 눈이 한순간에 동그래졌다. 오빠! 시은이 친한 척을 하며 손을 흔들었고, 선주도 일어나 민제를 반겼다. 시은이 집에 있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민제의 손을 잡은 선주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놓은 식탁으로 안내했더랬다.
시은이는 왜 불렀어. 난 엄마만 있는 줄 알고,
얘. 우리 둘이서 무슨 재미로. 그리고 이 큰 식탁을 나 혼자 다 어떻게 정리했겠어. 시은이가 요리도 얼마나 잘하던지, 난 숟가락만 놨다 얘.
헤헤..아줌마가 거의 도와주셨어. 그냥 나 생각해서 하시는 말이야. 오빠 온다고 온갖 산해진미는 다 준비했다지 뭐야. 내가 일부러 아줌마 꼬셨지 뭐.
시은이 올때마다 내가 아주 호강한다 후후.
...오래는 못 있어요. 회사 일이 바빠서요.
민제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선주가 아예 시은 옆자리에 강제로 앉히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렸다. 식사가 마무리되자마자 민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섰고, 풀죽은 시은이 신경쓰인 선주는 시은 몰래 민제의 팔을 잡고 끌었다. 너 만나러 온다고 시은이가 오늘 얼마나 신경써서 왔는데. 선물도 가져오고 너 빌라에 혼자 사니까 찾아가기도 그렇고 네가 시은이한테 집 주소도 안 알려줬다면서. 쟤가 너 따라다닌지 벌써 햇수로 올해가 6년째야. 고등학교 때부터 너 좋다고 얼마나 따라다녔니.
내가 아주 시은이 엄마한테 미안해 죽겠어. 시은이 부모님이랑도 친하고, 널 그렇게 좋아하는데 데이트 해주고 그러지.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안그래도 대기업 인턴 자리도 때려치우고 니네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간다 그러더라. 선주의 말에 민제는 대뜸 짜증이었다. 지금 이 프로젝트가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데. 엄만 이게 그냥 하는 일처럼 보여요? 처음 이 프로젝트 조감도를 누가 만들었는데. 형 꺼야. 형이 만든 거야. 형이 디자인 한 거라고. 도일 형이 그랬어. 도일 형과 우리 형이 처음 디자인하면서 준비한 리노베이션이라고. 나한테, 도일이 형한테, 우리 회사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하는 프로젝튼데.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야. 시은이가 아무렇게나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가고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아니라구요.
" 그 얘기도 좀 해야겠어서 너 일부러 부른 거야. 너 이 프로젝튼가 뭔가 하지 마. 엄마 안내켜. "
" 엄마. "
" 네 형이 하던 거라 더 싫어. "
" .........! "
" 이 프로젝트 하는 거 볼때마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민우 생각이 나는 줄 아니...? "
" 엄마아..."
" 하지마. 관 둬. 그리고 시은이랑, "
" 엄마. "
불안해하는 선주의 어깨를 잡은 민제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엄마에게 늘 착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아들이었던 형과는 달리 자유분방하고 솔직하여 늘 직설적인 민제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제가 해요. 형이 못마친 프로젝트를 내가 완성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큰지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시은인 너무 자주 부르지 마세요. 나 좀 거북해요. 프로젝트 때문에 당분간 집에 자주는 못 오니 그런 줄 아세요. 전화는 자주 드릴게요. 민제는 선주를 한번 안아주더니 겉옷만 챙기고 훌쩍 가 버렸다. 민제의 이름을 부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선주와는 달리 꿔다논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시은은 또다시 입이 튀어나왔더랬다.
진짜 민제 오빠 요즘 무슨 일 있나? 왜 저렇게 바빠.
집을 나선 민제는 차 안에 시동을 켜놓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엄마 선주는 기대감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형은 그 기대감에 부응하듯 모범생으로 자라왔고, 한번도 엄마에게 큰 소리 한번 내지 않은 채 올바르게만 커왔다. 그러니 형을 잃은 엄마의 상실감이 어땠을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의 부재를 극복하지 못한 건 엄마 뿐만이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은 탈출하고 싶은데, 여전히 형의 그림자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엄마를 대하는 게 너무 힘들었더랬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민제의 눈꺼풀이 떨려왔다. 그럴 때마다 형의 그림자를 더 실감하게 되는 건 민제 자신이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든지..차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내려감고 있던 민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 블루버드벨벳...맞아요?
차 안에 알싸하게 퍼지는 커피향...사실 차에 향기를 피우는 건 민제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대학 다닐 때 형이 차 안에 커피향을 심어놓았길래 뭐냐고 물었더니 어느 이쁜 언니가 이 커피를 제일 좋아하더라고 말해줬더랬다. 형이 한때 연애중인 여자친구가 해준 모양이었다. 형이 하는 거면 무엇이든 따라했었다. 형이 야채를 싫어하니 자연스럽게 콩과 당근도 싫어했고, 형이 커피주머니를 차에 매달고 다녀서 그것도 따라했다. 형이 어느순간 카푸치노만 먹길래 그것도 따라서 먹게 되었다. 형은 민제의 롤모델이자 워너비이자 아버지 대신이었다. 그런 형을 잃었으니 한동안 상실감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형..
첫 눈에 반한다는 말, 알아?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떠나질 않고,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 알아..?
매분 매초 그 사람 생각밖에 안 나는 거..그런거 형은 다 겪어 봤어..?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토요일도 일요일도 너무너무 싫은 거. 그런 적 있어...?
눈을 내려감았다가 뜬 민제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월요일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날이었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고, 나보다 상사이고, 여전히 유부녀라는 거짓말을 하는 여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민제는 성경유에게 온 마음을 다 바쳐 반해 있었다. 모든 혼이 털털 털린 것처럼.
월요일 아침부터 민제가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일찍 출근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항상 30분 먼저 도착이었다. 한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물론 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이유도 있지만 민제는 그 이유를 최근에 알았다. 일찍 와서 조용히 커피를 내리며 오늘 할 일을 찾고 신문을 들여다보는 게 그녀의 첫 일과였다. 요즘 다 핸드폰으로 뉴스 댓글 검색하지 누가 종이로 된 신문을 읽겠냐 싶겠지만, 그 원두 커피 내리는 소리에 신문을 한 장씩 넘겨가는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경유의 그 변하지 않는 고전적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신문을 들고 회사로 향한 민제는 빙긋 웃었다. 항상 회사 앞 지하철 가판대에서 신문을 산다는 걸 알고 아예 그 가판대의 신문을 통째로 다 샀던 것이다. 경유는 신문이 다 팔려서 의아한 채로 사무실로 들어섰고, 우두둑 하며 원두 커피 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섰다. 파란색 줄무늬 사이로 움직이는 넓은 등과 어깨, 경유가 좋아하는 아침 라디오 소리에 원두 커피 향이 솔솔 번지고, 그리고 경유의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오늘자 신문..
- 경유야! 성경유!! 오늘 우리 신문 읽을까? 블루버드벨벳 어때?
부서지듯 환한 미소.
금방이라도 넓은 어깨로 안아줄 것 같던 너..
저 환한 미소 때문에 부모도 버린 내가, 세상의 온갖 사랑은 다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었어..
" 좋은 아침입니다, 성 팀장님. "
어떻게 알겠어..
영원을 약속하곤 3년도 지키지 못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널 잃고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버텼는데.
이렇게 돌아오지 말지.
나는 아직도 내 심장에 네가 핏빛으로 담겨 있는데.
왜...
경유는 주먹을 꽉 쥔 손을 떨어뜨리며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는 민제를 멍한 얼굴로 쳐다보아야만 했다.
아아..
민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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