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금지된 사랑(A Forbidden Love)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구교회(Oude Kerk) 근교 기차역
암스테르담의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교회로, 1366년 성 니콜라스를 모시기 위해 건축을 시작, 1566년 아름다운 첨탑이 있는 종각을 설치하여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카톨릭 교회였으나 후에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렘브란트의 아내인 사스키아(Saskia)의 묘가 이곳에 있으며, 매주 토요일 16시와 17시에는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기차역에 오른 경유는 자리에 앉아 내내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 잔세스칸스에 가면 늘 거래하던 목재 공장이 있어.
우리는 늘 거래하던 곳이지만 레이체는 처음이니까 눈으로 보고 직접 설계 도면 스케치 자료를 가져오길 원해.
레이체에서 사람을 보낸다니 같이 출장 좀 다녀와.
은재는 여러모로 일이 바쁠 터였고 당분간은 몸 상태 때문에 집에서 요양해야 할 처지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은재가 일하는 성향을 잘 아는 경유가 다녀올 수 밖에 없었다. 빗속에서 그렇게 민제의 차에서 내린 후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내내 민제를 피해왔었다. 오히려 은재의 배려로 출장을 다녀올 수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레이체에서 보내준 직원과 기차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칸을 찾는게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팀장님. 낯익은 목소리..아니, 너무 생생한 그 목소리에 경유의 등줄기에 확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영어로 씌여진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의 그가 환히 웃으며 서 있었다.
민제였다.
" ........... "
기차가 출발하면서도 내내 경유는 자료집을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부담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민제 역시 포트폴리오북을 내려다보며 바이어들 만날 일에 대비하고 있었더랬다. 오히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니 경유는 더 안절부절이었다. 빗속에서 뛰쳐나온 이후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그날 왜 그렇게 갔냐고 묻기라도 했으면 속이라도 시원하건만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언급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말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였다.
도저히 이런 마음으론 출장 내내 불편하기만 할 것 같아 경유는 기찻칸에서 기어이 일어나야 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척 하며 회사에 전화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해줄 조이델의 직원은 차고 넘쳤으니까 출장지에 도착하기 전 바꾸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핸드폰을 쥐고 일어나려는 경유를 보고 그제서야 민제가 포트폴리오 북을 내내 유심히 쳐다보는 채로 말을 이었다. 소용 없을 거예요. 오늘 일이 일찍 끝나서 다같이 회식하러 간다고 했거든요. 출장팀은 우리 둘이고.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팀원 교체할 땐, 우리 회사와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거구요. 마치 경유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기에 당황한 경유는 민제를 쳐다보았고, 그제서야 천천히 경유를 올려다본 민제는 평소처럼 미소짓지도 않는 진지한 얼굴로 경유를 빤히 바라보았더랬다. 경유는 얼굴이 하얘진 채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럼 내가 차 팀장님한테 직접 전화하도록 하죠. 경유가 핸드폰을 꺼내들자 민제는 그것까지도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팀장님 바쁘세요.
서 실장님 문제로 집에서 아직 나오지도 않을걸요. 부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얼마 전에 있었던 서 실장님 일 때문에 두 분다 정신 없으시다는 거. 그래서 절 보내신 거고, 부팀장님도 실장님 때문에 이렇게 직접 출장 오시게 된 건데 일처리가 미흡하면 우리 두 회사 모두 이 프로젝트에 크나큰 미스가 남게 되겠죠. 부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이건 큰 프로젝트예요. 세계의 여러 기업들이 이 프로젝트와 리노베이션에 주목하고 있어요. 절대 미흡함은 있어선 안 되고요.
" 공과 사 구분은...부팀장님이 해주셔야겠는데요. "
" 그럴 필요 없어요. 절 대신할 팀원들은 많..."
" 사람이 부족해서 여기까지 놀러가는 거 아니예요. 목재공장 바이어를 만나러 가는 중요한 자리고요. 나는 팀장님 대신해서 조경팀 대표로, 부팀장님은 조이델에서 실장님이 부재중일 땐 부팀장님이 권한 대행자 아닙니까? "
" .......! "
" 그리고 난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
" ........ "
" 성경유가 필요한 거죠. "
" ....... "
" 만일 다른 사람이 여기 온다면, 난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갈 거예요. "
이때까지 환하게 웃으며 경유를 대해왔던 민제였지만 이번만큼은 웃지도 않고 진지했더랬다. 그리고 민제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기차칸에 앉은 경유는 금방이라도 폭탄이 터질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고, 여전히 말없이 기차는 달리고 있었지만 경유가 차창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경유를 빤히 바라보던 민제는 조용히 경유만을 응시했다.
당신이 나한테 말을 안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는 건 알아. 그게 부담스러워서이든 아니든, 결혼을 했다고 거짓말하면서까지 나한테 벽을 치려는 이유, 나한테 도망가려는 이유. 난 아직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게서 도망만 치려는 건지, 놀라면서 그 뒤에 가지고 있는 애틋함은 뭔지. 하나부터 열까지 성경유가 궁금해서 미치겠으니까 꼭, 꼭 그 이유를 알아야겠어. 출장지에 도착한 경유와 민제는 금방 목재 공장을 찾을 수 있었다. 목재 공장 주임은 설계 도면을 들고 경유와 민제에게 열정적으로 브리핑하기 시작했고, 경유와 민재는 직접 나무를 만져보며 꼼꼼히 살폈다.
보시다시피 여러 개의 독립적인 변수를 사용한 공식에 의해 정의되는 곡선인 파라메트릭으로 설계된 목재 파빌리온입니다.
...이게 그 세 개의 나무로 된 곡선 기둥과 기하학적인 3d 형태를 가진 목재 판넬인가요?
잘 보셨네요. 역시 부 팀장님입니다. 이 파빌리온을 덮고 있는 목재 판넬이 저희 공장 주력 상품입니다. 압출 공정을 통해 제조된 바이오 플라스틱과 혼합된 천연 섬유로 만들어질 계획입니다. 그쪽은...?
반갑습니다. 같이 협약하는 레이체 건축회사 조경 디자이너 차민제 입니다.
민제가 먼저 손을 내밀자 그동안 조이델과 쭉 일을 해왔던 공장 주임은 서글서글한 민제가 마음에 드는지 악수를 받아들였고, 일은 순조롭게 잘 풀렸다. 민제는 조경 디자이너이지만 건축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 디자인을 마치 본 것처럼 잘 아시는지..공장 주임이 원 설계도면이 압축된 3d 화면을 보고 감탄했고, 민제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게..우리 형이 직접 디자인 한거거든요. 민제의 말에 주임의 눈이 커졌다. 아하..그럼 혹시 우리 성 팀장이랑..주임이 아는 척을 하기 전에 먼저 경유의 말이 한발 빨랐다. 그..그러니까 MDF랑 비교할때 판넬의 장점이 열이나 물 처리 없이 이중 곡면을 쉽게 제작 가능한 거죠? 말이 중간에 끊기자 주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조금만 더 있었다간 주임의 입에서 설계 원 디자이너인 민우의 이름이 불리워질뻔했더랬다. 무사히 목재 공장 시찰을 마치고 바이어들을 만나고,
직접 목재 원산지까지 가서 브리핑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으로 보고할 자료들을 검토하고 또 뽑아오고 원재료까지 직접 시공해오느라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원래는 반나절 만에 기차로 돌아오는 게 목표였지만, 관광객이 많은 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볐더랬다. 원재료를 시공해 와야 설계에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직접 섬까지 들어가서 원 재료를 시공해 와야만 했더랬다. 일단 일에 착수하니 민제와 경유는 프로다운 프로 정신을 발휘해 손발이 잘 맞았다. 왜 도일이 민제를 보냈는지,
왜 은재 어시스트를 오랫동안 경유가 도맡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부분이었다. 공장 주임에게서 가공된 설계 도면을 다 가지고 나오던 민제는 땀을 닦아내리며 문 밖으로 나섰고, 마침 커다란 분수대 밑에서 아이스크림 가판대 옆에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 자, 아이스크림 여깄어. "
" 우와~~~누나 고마워여!!! "
" 맛있게 먹으렴. "
가판대 옆의 경유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스크림 콘을 꼬마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아마도 설계 도면을 가지러 간 민제를 기다리는 사이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게 된 것 같았다. 잠깐의 망중한이었지만 분수대 옆 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고, 관광지인 섬마을 답게 바람에 흩날리는 경유의 머리카락이 예쁘게 바람처럼 흩날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자신에겐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환하게 부서지는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친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람 좋고 매너 좋고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성경유면서, 오직 차민제에겐 한겨울 얼음공주지..당신은 둘 중 하나야.
날 지독히도 싫어해서 나랑 마주치는 게 너무 싫거나, 아니면 날 좋아하게 될까봐, 좋아하게 될까봐 그게 겁이 나서 내 얼굴을 차라리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거지. 경유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민제는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따라 웃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그림처럼 웃지나 말지.
그렇게 예쁘게 사람 마음이나 갈기갈기 찢지나 말지.
누가 그렇게 예쁘게 웃으래..
감당도 못할 거면서.
네덜란드, 잔세스칸스(Zaanse Scdhans) 나막신 공장(Klompenmakerij) 근교 섬
네덜란드의 독특한 나막신을 만드는 공장이다. 신발 만드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보여주는데, 단숨에 신발 한 켤레를 만들어 내는 그들의 손재주가 놀랍고도 재미있다. 공장 내에 있는 나막신만 해도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나막신은 판매도 하지만 약간은 비싸기 때문에 주머니 가벼운 배낭족에게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배 앞에 선 경유와 민제는 어부 앞에서 입을 쩍 벌린 채 차마 입을 다물질 못했다. 배..가 끊겼다니요? 아니, 지금 2020년도예요. 무슨 배가 끊겨요. 30분에 한 대씩 배가 오고간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민제는 황당했고 경유는 금방이라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배가 언제 들어오죠? 민제의 물음에 배를 관리하는 관리소 측에서는 몇 번 전화를 돌려보더니 하품을 하고 겨우 입을 열어 말해주었다.
" 아마도..내일 오후나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
" 그게 말이 됩니까, 30분마다 오는 배가 왜..."
" 관광객들 많은 거 보셨죠? 지금 섬마을마다 관광특구라 여기저기 일손이 딸려요. 그만큼 휴양철이라 전 세계 관광객들이 다 몰리는 시즌이라 이겁니다. 섬마을에 왔다갔다 하는 배들 먹고 살려면 이것 저것 다 해야 하니까요. 거기다 다음주면 열릴 세계 꽃의 축제가 암스테르담에서 열리잖아요. 안 그래도 관광객 많은 시즌인데 제대로 물 만난 거죠. 배들이 30분마다 오고 가는 건 맞는데, 이번엔 다 일손이 딸려서 좀 특수한 상황이라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
" .........! "
"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배 들어올 때까지. "
경유의 말에 민제는 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고 관리소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이고 아서요 아가씨. 지금 아직 3월 초순이라 바닷바람이 얼마나 추운데. 여기가 무슨 남프랑스나 스위스 정도 되는 줄 아쇼? 얼마나 추운데. 거기다 새벽바다?
여기서 동사합니다. 예. 이 근처에 숙소 많으니까 날 밝기를 기다리는 게 나아요. 반나절만 있으면 배가 틀림없이 들어오니까, 배 들어오자마자 연락해달라고 꼭 얘기해 놓겠수다. 그리고, 외국인이 이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면 이상한 일 당하기도 십상이고, 일거리 찾으려고 기웃거리는 노숙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시네. 그냥 안전하게 숙소 찾아서 좀 쉬고 있으쇼. 추운 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위험한 노숙자들이 많다는 말엔 경유도 덜컥 겁부터 났다. 민제는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 경유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이..이거 왜 이래요? 놔요.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요. 추운 건 참을 수 있다구요.
경유가 소리쳤지만 걸음을 멈춘 민제는 경유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여기 일 때문에 왔고, 짐도 많아요. 저 목재들, 원단들, 설계도에 조감도에 얼마나 짐이 많은데 이걸 다들고 이 추위에 떨면서 기다리래요. 거기다 뭐 대단한 건줄 알고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면. 우리가 암스테르담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힘겹게 일하면서 들고 오고 지고 오고 이고 온 건데, 그 노력이 허사가 되고 헛고생이 되면 어떻겠어요. 어짜피 지금 한밤중이라 위험하다잖아요.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니까 제발 몸 좀 녹입시다.
부팀장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쉬고 싶어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로 은재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고, 지금 은재는 아픈 사람 아닌가. 아픈 사람한테 전화해서 민우 씨랑 닮은 차민제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게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민제에게 자신이 겪는 고민을 다 얘기할 수도 없었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민제는 어느덧 깨끗한 숙소를 구했다고 했다. 관광 특수라는 말이 헛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숙소마다 빈 방이 없어 난리인데 방 하나를 겨우 구했다 했다. 방 하나라고...? 엎친데 덮친 격 아닌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경유를 위해 민제는 애써 웃었다. 괜찮아요. 내가 밖에서 시간 보내면 되니까. 성 팀장님 하루종일 수고하셨는데 쉬어야죠.
짐만 맡아주면 되니까. 민제가 일어나려 하자 경유는 키 카드를 민제에게서 받아들고 문을 열었다. 피곤하고 쉬고 싶다고 한 거 차 대리님이예요. 나만 피곤해요? 나 혼자만 일했어요? 부팀장 씩이나 돼서 같은 파트너랑 삐걱거리면 뭐라고들 하겠어요. 짐은 차 대리님이 더 많이 들었고, 같이 움직이고 같이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는데 어떻게 나만 쉬어요.
" 부팀장님. "
" 대리님 말대로 우리 오늘 하루 너무 애썼으니까 쉽시다. "
" ......... "
상사다운 면모를 뽐내며 경유와 민제는 어색하게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둘 중 그 누구도 침대에 앉거나 누울 생각은 않고 쇼파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날이 밝고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민제가 먼저 씻고 나왔고, 그 다음은 경유였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하고도 경유는 여전히 뽀얗고 예뻤다. 뭘 꾸민다고 예쁜 여자가 아니라, 그냥 성경유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근데 어깨를 쇼파에 기대니 잠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기차를 타고 오고 가고 배도 타고 공장에 들렀다 목재소에 들렀다 바이어들까지 만나느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잠은 쏟아지는데 그 누구도 잠들 생각을 않았다. 씻고 나서 쇼파에 어깨를 기댄 채 눈을 내려감았던 민제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인 듯 입을 열었다. 사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민제의 말에 언젠가는 사적인 질문을 할 것을 각오해서인지 몸이 피곤한지라 민제를 밀어낼 기력도 없어진 경유가 고개를 들자 민제는 마주앉은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 같은 건 안할게요. 정말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면 대답 안해도 되고요. 근데 도저히 물어보지 않고는 참기가 힘들어서, 궁금한 건 진짜 죽어도 못 참거든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고개를 끄덕였고 민제도 어려운 말인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돌렸다. 우리가 일한지 몇 달이 지나가는데 항상 사람들이 말하는 팀장님은 좋은 사람이예요. 따뜻하고, 매너 좋고, 다정하고, 커피도 잘 사주고. 밥 먹을 때도 항상 웃으면서 회식 자리에서도 늘 멋진 상사이자 동료죠. 저희 팀 회사 직원들이 팀장님을 얼마나 칭찬하는지 몰라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첨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또 하나 싶어 대충 넘겼으나 진지한 민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민제를 쳐다보았다. 민제는 오늘은 꼭 이 자리를 빌어 말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천천히 쇼파 끄트머리에 앉은 경유에게로 다가 앉았고, 민제와 가까워지자 경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민제는 경유의 손을 와락 잡았다.
이것 봐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도망가.
...차 대리님.
다른 팀원들에게 그렇게 상냥하면서 나한텐 왜 그래요. 내가 팀장님한테 뭐 잘못했어요?
...........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거든요. 내가 뭘 잘못했으면 고칠게요. 그래야 서로 일하는데 서로서로 편하지 않겠어요. 둘만 있으면 팀장님은 도망가기 바쁘니까. 혹시 남친 있냐는 질문 때문에 그런 거면, 그냥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얘기하고 말면 되잖아요.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철벽을 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런 거...
그런 거 아니란 말 하지 마요.
그냥 일 때문에 예민한 것 뿐이예요.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 그런 거고.
그런 거라면 왜 일적인 자리에서조차 날 피해요?
........
그런 거라면 왜 내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죠?
민제는 오늘 날 잡았다 싶게 작심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그 대답을 꼭 들어야겠어요. 그리고 할 말도 있고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겠다 하던 게, 오히려 더 예민한 부분 때문에 차갑게 철벽 쳤던 것이 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경유 역시 계속 이 상태로 지낼 순 없다 판단해서였는지 민제를 쳐다보았다.
공과 사 얘기는 그만 두고, 차 대리님도 솔직히 말해봐요. 사적인 얘기 안 묻는다고 한 거 같은데, 왜 계속 공적인 일을 빗대서 사적인 걸 자꾸 나한테 물어보고 관심있어 하는 거 같은데. 내가 틀려요? 경유의 말에 민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안 할게요. 맞아요. 하지만 사적인 얘기 하는 거 안 좋아하니까, 그 말만 하면 도망가기 바쁘니까 말 안한 것 뿐이예요.
솔직히 그 공적인 업무를 핑계로 팀장님과 함께 있고 싶은 거 사실이예요. 하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날 파트너로 받아줬을것 같아요? 안그래도 벽을 치는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 차갑게 돌아설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요. 민제는 경유가 당황해하며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내뱉자 더 가까이 다가왔더랬다. 지금 내가 우습고 장난하는 거 같아요?
" 그게 아니면요. 내가 차민제 씨보다 몇 살이나 많은지 알기는 알아요? "
" 나 미성년자 아니고 팀장님만 성인인 거 아녜요. "
" 차 대리님. "
" 왜 거짓말했어요. 결혼했다고. "
" .............! "
" 사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더이상 미련 안 뒀을 거예요. 굳이 나한테 그런 말한 건, 내가 그만큼 신경쓰인다는 거니까. "
" ........!!! "
" 솔직히 말할게요. 나는 팀장님 좋아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요. "
" ....!!!!!!! "
아,
하느님....
이건 제발 꿈이라고 말해 주셔야 해요.
왜냐하면, 이런 꿈은 내게 악몽이기 때문이예요..
하느님.
아, 신이여........
그 사람을 내게서 너무 일찍 데려가셨잖아요.
그러면 이제 이런 고통은 내게 그만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민제의 고백에 송두리째 흔들린 경유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민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머뭇거렸고, 천천히 경유에게 다가온 민제는 경유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경유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입술을 훔쳤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경유가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입술이 확 부딪히는 느낌이 났다. 그건 민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키스를 하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짜악 - !
온 힘을 다해 민제를 밀어낸 경유는 밀어내면서 민제의 뺨을 때렸다. 그 바람에 뺨이 돌아간 민제는 반쯤이나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둘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멍하니 그러고 있었고, 경유는 충격을 받아 일어나려는데 민제가 그런 경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잘했어요.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거든요. 아니, 미쳐있는 것 같거든요. 아니었으면 나는 내가 오늘 정신이 나간 채로 반쯤 돌아버렸을 거예요. 하지만 후회는 안할래요.
차 대리님, 대체...
더 확실해졌어.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거.
.........!!!
그리고 또 확실하다 생각해요. 당신도, 나한테 흔들리고 있는 거. 그래서 더 나한테 철벽친다고 생각해요.
차민제 씨!
다시는, 성경유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할 거예요. 약속해요.
......!
하지만 포기 안할 거예요.
두려움 반 충격 반의 얼굴로 올려다보던 경유를 향해 민제가 천천히 다시 뜨겁게 손을 포개었다. 그의 뜨겁고 진실된 마음이 느껴진 경유의 얼굴은 그대로 홍당무가 되었다. 그로 보였다가, 다시 민제로 보였다가, 다시 그로 보였다가..다시 민제가 되었다가,..겨우 참고 참아왔던 경유의 이성이 천천히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은재 선배...
나 어떡해요...
난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됐었는데..
절대 흔들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난 지금 누구에게 흔들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 * * * * * * * * * * * * * * * *
도일의 예상은 적중했다. 은재가 도일의 집에 오자마자 경유의 집으로 불티나게 강 대표의 전화가 왔다 했다. 거기다 강 대표가 보낸 비서인 듯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경유의 집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했다. 은재는 부리나케 다음 작전에 돌입했다.
경유를 일부러 출장지로 보낸 것도 은재의 작전이었다. 경유가 출장에서 돌아온 뒤론 은재와 경유가 같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더이상 미행이 따라붙지 않았다. 거기다 은재가 아직은 병가를 내고 회사에 출근하고 있지 않아서 회사에도 피해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은재는 한시바삐 이 집을 나가야 한다 생각했다. 언젠가는 외삼촌은 방법을 찾아낼 거야.
회사도 안전할 순 없고 언제까지나 회사에 안나가면서 피할 수는 없어. 외삼촌이 조이델에서 내 권리를 회수할 수도 있고. 여전히 강 대표는 갑이었고 은재는 을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 결재권자는 강 대표였고 강 대표를 제외하곤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수 없었다. 강 대표도 그걸 알고 은재 역시 그걸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강 대표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로운 은재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 채 집안만 서성거렸다. 어제도 새벽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탓에 오늘도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더랬다. 은재는 외삼촌 집에서 살기 시작한 후부터, 아니 동생들과 생이별 한 후부터 단 한번도 편안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특히 외삼촌 집에 살기 시작한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도일은 달랐다.
오히려 도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잠드는 타입이었다. 병약한 형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규칙적인 습관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년 전까지 형을 케어하는 것은 도일의 몫이었지만 최근에 요양 병원으로 옮기면서 생활 반경이 달라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일은 여전히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바른생활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라이프 패턴이 다르니 도일과 은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도일은 삼시세끼 꼬박 챙겨먹는 규칙적인 습관이었고,
은재는 늦게 일어나니 하루에 한끼 겨우 챙겨먹는 게 다였다. 은재를 겨우 깨운 도일은 점점 더 퀭해지는 은재를 보다 못해 식탁에 앉혔다. 내려온 은재는 아예 외출복 차림이었다. 회사에 갈 준비를 한 것이다. 기막힌 도일은 국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은재를 쳐다보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예요.
" 유리 파편 맞은 자국 아직 아물지도 않았어요. 거기다, 아직 밖에 외출해서 안된다는 의사 말 못 들었어요? "
" 회사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이대로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다구요. "
" 몸이 나아야 회사를 가죠. "
" 이제 괜찮아요. 정말로, "
" 지금 서 실장 얼굴을 보고 그런 소릴 해요. 밤마다 거의 잠도 못자고 2시간씩밖에 못 자니 당연히 몸이 말을 안 듣죠. 움직이지 말고 편히 쉬라는데 그 말은 좀 안들어요? 그러니까 회복이 느릴 수밖에 없고,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허약해지는 게 바로 티가 나는데. 거기다 밥도 제대로 안 먹죠. 사람이 하루에 한 끼만 어떻게 먹고 살아요. "
" 이때까지 그래왔어요. 괜찮아요. "
" 그러니까 병 나는 거잖아! "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가 나버린 도일은 씩씩거렸다. 아니, 내가 뭔데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야 하는 거지. 부들거리던 도일은 영문을 몰라 하는 은재에게서 돌아섰더랬다. 화를 삭히려 노력해봐도 은재가 왜 저렇게 불안에 떨고 예민해하며 잠도 못자고 밥도 한끼밖에 못 먹는지 대충 예상이 되어서 더 화가 나는 것일 터였다.
사람이나 패고 학대하는 외삼촌 집에서 눈치밥 먹고 살아야 했을 테니 은재가 제대로 못 챙겨먹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도 외삼촌이 자신을 찾아내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지 않던가. 은재 때문에라도 도일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눈 앞에서 파리한 은재가 왔다갔다 하는데 너무 신경이 쓰여 도일마저도 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준이었다. 이렇게 방 안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만은 없어요. 출장 다녀온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언제까지나 팀원들한테 민폐 될 수는 없어요. 나 도와준 건 고마워요. 근데 정말 이제 괜찮아요. 거동하기 괜찮다구요. 그리고 어디서 무슨 얘길 들었는진 모르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은재가 기어이 일어나려 하자 도일은 은재를 식탁 의자에 앉혔더랬다.
오늘은 식사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삼시세끼 밥먹고 자고 쉬고 약 먹고.
......팀장님.
그거 안할 거면 프로젝트에서 아예 손떼게 할 겁니다.
미쳤어요?!
서 실장 도움이 꼭 필요해요. 서 실장과 조이델이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한 이상, 우린 표류하지 않고 끝까지 항해를 마쳐야 해요. 그럴려면 서 실장이 중심을 잘 잡고 나가는 수밖에 없고요. 그럴려면 뭐가 젤 중요한 것 같아요?
.........
당신이 안 아파야 해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의외인 듯 고개를 들었다. 은재의 말간 눈빛을 보니 도일은 더욱 마음이 흔들렸더랬다. 하얗게 말간 표정에서 이때까지 살아온 은재의 순탄치 못한 여정이 느껴졌다. 은재가 따로 말하지도 않았고, 외삼촌 일이라는 거 말고는 경유 역시 말을 아꼈지만 눈치가 백단인 도일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도일도 형과 같이 자라면서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과 같이 의지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친척들 집을 전전했던 것도 어린 시절이었고, 형이 없었다면 도일은 어떻게 망가지고 무너졌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모가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민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도일이 회사 일을 언급하자 제대로 먹혔는지 결국 은재는 수저를 들어야 했다. 어짜피 지금 외삼촌 집에 들어갈 수도, 경유 집에 갈 수도,
갑자기 집을 구할 수도 없었다. 빨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외삼촌에게서 독립해야 했다. 그럴려면 컨디션이 좋아야 했고.
처음엔 어떻게든 도일의 집을 나와 경유에게로 옮길 생각이었는데 경유가 말한 적 있었다. 강 대표 사람들이 미행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빨리 경유를 출장지로 보낸 것이었다. 도일의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하여야 했다. 경유네 집에 갔으면 은재는 외삼촌 집에 돌아왔어야 했을 것이고 경유 역시 안전하지 못했을 테니까. 은재가 도일 집에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고 도일의 집에 있는 걸 안다 한들 레이체 대표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을 테니 당분간은 도일의 집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은재도 알고 있었다. 국물을 한 숟갈 뜨는데 놀라서 도일을 쳐다보았다. 사온게 아니라 직접 한 거예요? 은재의 동그란 눈에 어쩐지 귀여워져서 도일은 웃었다.
혼자 산지가 벌써 십수년이예요. 이 정돈 껌이죠.
와..간이 딱 맞아.
내 요리 입맛 왠만하면 안 맞다 하는 사람 별로 못봤어요.
음..그 말만 안했으면 딱일 것 같은데요.
내가 좀 잘났으니까.
...사실은 한국식 밥 먹는 거 17년만에 처음이거든요.
..........
암스테르담에 온 이후로 한번도 아침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요.
은재의 말에 대충 어떤 삶이었는지가 느껴져서 도일은 아무 말도 안하고 반찬 그릇을 옆으로 밀어 주었다. 어서 먹고 일어나요. 옷도 입고. 밥을 한 숟갈 뜨던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요양하라더니 무슨..회사 가는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은재를 보며 피식 웃던 도일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 주까지 서 실장 병가예요. 그리고 갈 데가 있어서 그러니 일어나는 거예요. 요양하라고 했지 집에서만 갇혀 있으라고 한 거 아니니까. 대신, 열심히 밥 먹겠다는 조건 하에. 도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재는 안에만 있어서 갑갑했는지 벌써 밥을 이만큼 입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씩씩하게 밥을 먹는 은재를 보며 도일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아, 진짜.
못살아.
갈수록 귀여워 죽겠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남교회(Zuider Kerk) 근교 공원
종교 개혁 후 처음으로 세운 개신교 교회로 1603년부터 1611년까지 건축가 핸드릭 케이서(Handrick Keyser)가 설계, 건축했다. 1614년에 만든 카리용의 종소리는 목요일 12시와 1시 사이에 들을 수 있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도일이 은재를 데리고 나온 공원에는 이미 사람들의 열기로 관중들이 꽉 차 있었다.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다. 도일은 멀찍이 서 있는 은재의 손을 잡고 끌었다. 처음엔 얼떨결에 머뭇거리던 은재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금방 공연에 빠져들었더랬다. 흥이 많은 암스테르담 사람들이다 보니 버스킹 공연을 잔잔하게 듣는 게 아니라 소리지르고 환호하고 박수치느라 난리였다. 같이 박수치고 호응을 해주던 도일은 슬쩍 은재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냥 듣고 있기만 하던 은재가 공연에 점차 빠져드는 게 보였다.
넌 우는 것보다 웃는 게 훨씬 예뻐.
큰일이다.
뭘 해도 다 예뻐 보이면 진짜 큰일난 거 아냐..?
도일의 환호성에 은재도 빤히 도일을 쳐다보았다. 저런 공연을 본 게 얼마만인가. 회사 일 때문에 저런 회식 자리가 있어도 직원들끼리 놀라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고, 학교 다닐 땐 축제가 있어도 내내 아르바이트하고 외삼촌 눈치를 보느라 모든 게 살얼음판이었다. 정말 공연다운 공연을 본 게 언젠지 까마득했더랬다.
- 누나, 누나 우리 공연 또 보러 가자아.
- 호두까기 인형 공연은 매일매일 하는 게 아니야. 그니까,
- 그니까 내 생일날! 아빠 그치!!!
- 우리 지환이가 신이 났구나. 영신이 재희는 자니?
- 아빠아아아!
- 아빤 너무 지환이 편 들어줘서 난리야. 서지환, 생일 때만 공연 보는 거지 매일 하는 게 아니라니까?
- 칫. 걱정 마. 다음 공연 땐 누나는 뺄거야아.
- 야, 그런 게 어딨냐?
- 여깄지. 메롱.
- 야, 서지환 거기 안서?!!! 너어어어어!!
남동생의 열 다섯 생일을 맞이하여 간 뮤지컬 공연이 은재가 기억하는 마지막 공연이었다. 부모님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호두까기 인형 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이 나던 분홍빛 뺨을 가진 남동생 지환이, 아직 어려서 엄마 품에 안겨 잠든 연년생 여동생들 재희,
영신이..배가 불러오는 엄마 뱃속에 있는 우리 막내 수완이..아직 이럴 때가 아니야. 난 무너질 수 없어. 지환이도 찾고, 지안이 영신이 수완이..전부 다 찾아올 거야. 뿔뿔이 흩어진 내 동생들, 전부 다 찾을 거고. 우리 부모님 걸 갈갈이 찢어 뺏어간 짐승같은 놈들에게서 부모님 거, 우리 회사..전부 다 싸그리 찾아올 거야. 절대 이대론 무너지지 않아. 버스킹 공연을 보던 은재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슬퍼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은재는 정말 고마운 마음에 도일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공연에 동화되어 환호하고 호응하느라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마워요. 빤히 도일을 보느라 자신이 도일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였는데, 돌아본 도일은 빙긋 웃으며 은재를 마주보 았다. 언제나 까칠하고 까다로운 그였는데, 저렇게 발그레하게 웃으니 은재의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아...
하느님....
은재의 표정을 본 도일이 빙긋 웃었다.
" 또 우네요. 웃게 하려고 데려온 건데. 이제 그만 울고 웃어요. "
" .......내가 언제 울었다 그래요? "
" 그리고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
" ......네? "
" 나 좀 그만 반하게 하라고. "
환호성과 노래와 음악이 있는 버스킹 공연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도일의 눈빛에 은재는 천천히 녹아가고 있었다. 아주 견고한 철벽같은 얼음성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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