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 인생의 콩깍지(My Life's bean pod)
2020년 조이델-레이체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준공식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베긴회 수도원(Begijnhof) 근교 준공식 컨벤션 센터
연고자가 없는 여성이 머물기에 더없이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인 이곳은 1346년 수녀들의 지역공동체로 건설되었다. 도심 속에 잇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훌륭한 뜰을 갖고 있으며, 암스테르담 최고의 목조 건물이 이곳에 있다.
준공식은 수도원 근교의 컨벤션 센터에서 이루어졌으며 조이델과 레이체의 두 대표를 비롯한 암스테르담의 건축업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였고, 유명한 투자자들까지 모두 모인 큰 행사였다. 첫 삽을 뜨기 이전에 축하하는 자리로 들끓기 바빴다.
단연, 그 와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한국의 유명한 재벌 그룹인 대원그룹의 오너 서수철 회장일 것이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를 넘어서 미국, 유럽까지 진출해 워낙 세계적으로 대단한 재벌 그룹이었다. 물론 이걸 이룩한 건 지금의 서 회장이 아니라 서 회장의 매형이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전 대원그룹 오너 서대식 회장의 공이었다. 이미 미국,
유럽 시장이 앞으로 미래가 될 걸 생각하고 미리 닦아놓은 서 회장의 공이 있었기에 지금의 부귀영화와 명예가 가능했지만 이 모든 특혜는 지금의 서 회장이 누리고 있었다. 대단하다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부분 너머에는 전 서회장의 다섯 남매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모두 쉬쉬하고 있을 뿐. 어쨌든 지금 왕좌의 주인은 죽은 서 회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서수철 회장이었으니까. 드디어 준공식장으로 오는 서 회장 일가 행렬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었다. 대리석 기둥 뒤에 숨어서 서 회장 내외와 일가, 임원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걸 보며 은재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거긴 당신 자리가 아냐. 그곳에서 당신은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을 자격이 없어! 거긴 당신 자리가 아니니까. 이를 악물고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았다.
어디에 있니.
어디에....
은재가 원하는 것은 서회장 일가를 보는 게 아니었다.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 뒤에 숨겨진 폭력적이고 비정하고 야만인의 서 회장과 아름답지만 탐욕적인 부인, 그리고 잘생기고 준수한 얼굴 뒤의 차갑고 비열한 얼굴의 큰아들..그 일가의 민낯을 아는 건 은재 하나 뿐이었다.
거긴 우리 부모님의 자리야. 거긴 우리 가족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은재를 아랫 입술이 얼얼해지도록 악물었다. 참고 또 참고 있는 은재에게 다가온 경유는 망설이던 끝에 은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경유를 돌아본 은재의 눈이 빨개져 있었다.
은재의 가족사와 은재가 이 프로젝트에 모든 걸 다 바친 이유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고아인 경유와 부모를 잃은 은재는 공감대가 컸다. 고등학교 시절 한국인이 많이 없는 암스테르담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고, 서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놀림받고 배척받던 와중 서로 감싸안고 많이 의지하고 기대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대학에 가서도 같은 전공을 하게 되었고,
은재의 가족사를 유일하게 알고 이해하는 게 경유였다면, 경유의 연인인 민우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 역시 은재였다. 은재에게 민우를 소개시킨 것도 경유는 처음이었다. 어머니를 제외한, 민우의 가족들에게도 경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인관계가 폭넓지 않았던 경유는 유일하게 민우를 은재에게 소개시켰던 것이다. 민우를 잃고 절망에 빠진 경유에게 조이델의 입사를 추천한 것도 은재였다. 평소의 털털하고 소탈한 은재의 모습과는 달리 준공식이어서가 아니라 서수철 회장 일가가 온다는 말에 평소 은재와는 달리 변신한 모습의 은재를 보자 경유는 놀란 게 아니라 짠한 표정으로 은재를 쳐다봤다. 알아봤어요.
막내 아들은 아직 미성년자라 이번 암스테르담 행에 오지 않았어요. 가족은 저 회장 내외와 대학 다니는 큰 아들이 전부라고 하네요. 경유의 말에 은재의 동공이 커졌다. 안 데려왔다고? 은재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가는 걸 보며 경유는 안쓰럽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호텔에서 확인한 사실이예요.
" ........... "
" 너무 상심 마세요.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리고..."
" 두살 차이밖에 안나는데 무슨 미성년자 타령이야. "
" 실장님..."
" 한국에 있는 게 확실하대? "
" 네. 안 데려왔대요. "
" ..........내 생각이 짧았어. 유럽 시장을 개척하는 이런 기념비적인 자리에, 저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수완이를 데려왔을 리 없지. "
" ......."
" 결국 한국으로 가야 하나. "
은재는 눈을 내려감았다. 내 동생. 이제 겨우 젖도 안 뗀 갓난아이를 두고 강제로 헤어져 외삼촌을 따라 네덜란드로 향한 것이 벌써 십수년전의 일이었다. 다섯 남매는 부모님의 죽음을 계기로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리다는 이유로 각각 다른 곳으로 맡겨지거나 입양되었다.
유일한 증표라고는 부모님이 아이들 생일날 일련번호로 맞춘,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무당벌레 팬던트가 다였다. 겨우 핏덩이였던 은재의 막내 남동생 수완은 서수철 회장에게 정식 입양되었고, 올해가 막내가 열 일곱이 되는 해였다. 17년 만에 동생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쁨에 한 달음에 달려왔던 은재였다. 이번 프로젝트가 대원그룹이 맡는다 하여 더 악착같이 수전노 소리까지 들어가며 레이체 건축회사의 차도일이 맡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상도의를 어기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면서도 은재는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이 일에 적극 뛰어들었던 것이다. 도일은 이와 같은 사정을 잘 몰랐지만 은재는 반드시 이 프젝트를 성사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서 회장이 투자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감시를 피해 서 회장의 마수에 있는 막내 남동생을 찾아야 했고 만나야 했다.
" 아직 시간이 있어요. 기회가 있다구요. 한국에 가서 만날 수 있어요. 다음 리노베이션은 아마 한국에서 하자고 할 거예요. 대원그룹의 첫 유럽 유치 프로젝트이니만큼, 다음 리노베이션은 아시아를 공략해 서울에서 열자 하겠죠. 아시아 투자자들 유치도 중요하니까. "
" ......"
" 그때 만날 수 있어요. 아직 시간은 얼마든지 많아요. "
" ........그래. "
" 만날 수 있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데요. 당장 수완이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
" 그애는, 날 기억조차 못하겠지. 아마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모를 거야. "
은재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닦아내렸다.
- 이름은 우리 사랑하는 큰딸이 지어보는 게 어때?
- 제가여? 아빠, 진짜 막둥이 이름 내가 지어두 돼?
- 그럼. 그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여보?
- 우리 은재 신나겠네. 어짜피 태어날 아기는 남자 아이니까, 우리 은재한테 맡겨야겠는 걸..?
- 수완! 수완이 어때요? 서 수 완!
- 수완이라...
- 너무 좋은데? 한자로는 빼어날 수, 아름다울 완...태어날 아기는 틀림없이 미남일 테니까.
- 헤헤헤..수완아, 수완아아아-얼른 빨리 태어나. 누나가 진짜 예뻐해줄게!
웃음소리...암스테르담에 와서 소리내어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주 오래된 기억일 뿐이었다. 경유는 금세 눈가가 그렁해진 은재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가요. 투자자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경유의 재촉에 은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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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시는 래퍼 튜어 하우스는 조용한 지역 내에 포함된 도시 스카이라인의 중단되지 않는 전망과, 개인 주택의 안락함을 연결하는 성장하는 가족을 위한 집이 될 전망입니다. 주거를 위한 개념적 프레임워크의 일부는 고객과의 관계에서 발전한 양상이구요, 움직이는 빛, 그림자..뚜렷한 기하학적 마무리를 통해 패턴과 반복을 디자인에 도입했습니다.
오오...
또 지금 보시다시피 채광 창, 부유한 천장, 독특한 기하학적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는 빛, 원의 개구부는 설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넓은 규모로 사용되어 하늘에 흩어져 있는 나뭇잎들을 액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시는 이것은 그물 난간을 통해 마으크로 스케일로 반복되었습니다.
짝짝짝...
설명하는 직원의 말을 따라 투자자들은 모던하고 섹시하며 우아하고 격조 있는 지상 복합 건물의 조감도를 매우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투자자 중 하나인 서 회장 역시 만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하지만 가장 많이 만족한 사람은 이걸 지켜보고 있는 설계 디자이너 차도일일 것이었다. 오늘이 준공식이니 이제 시작에 불과했지만 피터 때와는 달리,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것이 이렇게 빨리 청사진이 마련될 거라곤 생각 못했더랬다. 투자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기자들 역시 열띤 반응이었고,
암스테르담의 자연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공간 자체를 '소중하고 따뜻한 자연친화적인 집''으로 컨셉을 잡은 것 역시 유효한 전략이었다는 평이었다. 직원이 브리핑을 하면서 3D화면을 통해 더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브리핑하는 걸 지켜보던 도일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소로. 구멍에 대한 아이디어는 분리된 수준의 구조를 통해 다시 재생되었고,
지속적으로 가정을 통한 전망을 창조합니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움푹 들어간 LED와 욕실 천장을 부드럽게 구부리는 타일의 미묘한 사용으로, 산업적 중요성에 의해 결합되었구요. 노출된 콘트리트와 철골 본의 사용은 산업 디자인에 대한 고객의 배경과 추가적인 연결 고리가 될 예정입니다. 이 단독 조립식 상가를 위해 6개의 가볼 루프가 하나의 지붕으로 합쳐집니다.
르 꼬르뷔 제의 자유계획과 일도 프로도스의 라움플란 같은 과거의 공간 패러다임을 다시 만들기 위한 시도에서 보면 지붕 계획 건축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제안될 겁니다. 여기서 지붕 계획은 위 지붕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내부에 방, 시계 및 이중 높이 공간을 설정합니다. 이제, 평면도와 움직이는 다음 조감도 영상을 보러 가시죠. 직원의 설명은 투자자들을 만족시켰고, 프리젠테이션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공 부장은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세 사람 다 이번 리노베이션 1차 준공식을 위해 수트 차림이었지만 공 부장은 샴페인 석 잔을 들고 와서 도일과 민제 앞에 섰다.
" 자자, 일단 축배부터 들자구. 투자자들 반응이 그야말로 '핫'이야, 핫! "
" ...그러게. 이걸 다 언제 준비했대? "
민제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일부러 먼 산만 바라보는 도일의 어깨를 소리나게 팡 하고 두드려준 공 부장이 혀를 끌끌 찼다. 이 먹통이 했겠냐. 설계 디자인은 차 팀장 전공이지만 건축 3D 구현 프리젠테이션은 서 실장 담당인걸. 준공식 때 미리 1차 프리젠테이션 영상으로 보여줘야 투자자들이 더 안심하고 돈 쏟아부을 거라고 서 실장이 1주일 내내 준비한 거 아냐. 공 부장과 민제의 눈짓을 받은 도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뻔뻔하게 샴페인 잔을 받아들고 헛기침을 했다. 맨땅에 그게 돼? 내 설계 도안, 디자인, 조감도와 계획안 아니었으면 이게 어디서 나와. 다 이 차도일 님 머릿속에서 구상된걸 영상화한 거 뿐이구만. 이것도 못하면 실장 자리 내려놔야지. 어디서 암스테르담에서 건축 디자이너로 명함파고 다녀?
여하튼 참 말 달달하고 이쁘게 한다. 새끼가. 서 실장 잘했단 소리 하면 어때서.
그 성질에, 그 괴팍한 악바리가 이것도 못하면 자리 내놔야지 뭐.
으이그 이 화상아.
그리고 일은 그 여자만 해? 나는. 나도 똑같이 1주일 내내 야근한 사람이야.
......어쨌든 이번 일은 서 실장 공이 컸잖아.
형은 진짜 내 편이어야지 어떻게 1주일 만에 그 여자 편을 들어?!!!!
.........이게 지금 공과 사를 논할 때냐.
공 부장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도일은 민제가 달래는 통에 겨우 진정했더랬다. 펄펄 뛰는 도일이었지만 3D 프리젠테이션 영상을 바라보는 도일의 표정이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처럼 풀어져 있는 걸 본 민제와 공 부장은 허공에서 오케이 사인을 그려보였다. 괴팍한 완벽주의자인 도일의 눈에 아무 컴플레인이 안 올 정도면, 어느 정도로 일처리가 완벽했는지 두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 훌륭한 건축은, 사랑하는..그리고 소중한 가족이 함께 있는 집이죠.
"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던 도일은 웃는 건지 인상을 찌푸리는 건지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일만 독하게 야근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일처리를 잘 하기는 잘 하는 모양이었다. 피터 때와는 달리,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현했던 영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품에 도일 역시 한 수 접어야 했다. 지금 이 자리에 은재가 없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죽어도 서은재한테 고맙다는 인사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상을 볼 때마다 도일의 심장은 어쩐지 따뜻한 온기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여자는 도대체 얼굴이 몇 개야. 일할 때 그 딱딱하고 까칠한 거, 절대 바늘 구멍 하나 용납치 않는 거 같은 답답함, 일이라면 남이 수주 받은 일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불도저처럼 달려들어 상도의고 뭐고 다 없는 거처럼 비열하게 굴 땐 언제고 솔베이지의 노래만 나오면 울질 않나, 다리 위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사람처럼 처연하지 않나. 그리고...그리고 또,...은재만 생각하면 온 관자놀이가 욱씬욱씬거려서 아플 지경인 도일은 또 버릇처럼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단단한 뿔테 안경 너머로 그렇게 순하고 예쁜 눈을 가졌을 줄이야.
두근 두근...
제길할.
분명히 이건 스트레스야.
약을 먹던지 병원엘 가던지.
식은땀까지 나는 게 영 징조가 이상하다 여긴 도일은 고개를 홱 돌렸고, 그 곳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사로잡는 누군가가 계단을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누구야. 아니, 쟤가 도대체 누구야! 공 부장은 거의 작은 비명을 지른 참이었다.
올려다보던 민제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놀란 표정이었다. 계단을 내려서는 은재 뒤의 경유를 봤기 때문이었다. 준공식이기 때문에 둘은 드레시한 투피스 차림이었다. 경유와는 달리 은재의 평소 옷차림을 기억하는 직원들부터 공 부장은 더더욱 놀랬더랬고, 무엇보다 공 부장보다는 한 백배로 놀란 것 같은 도일은 아예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았다. 서은재라고? 저게 서은재라고?
부스스한 헤어 스타일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셔츠에 늘 찢어진 청바지 차림이던 그 서은재는 온데간데 없었다. 우아하고 화려하고 세련되고 풀 메이크업에 올림머리를 한 채로 붉은 색 머메이드 투피스를 입은 은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역시 도일이 본 눈이 맞았다. 깨진 안경 너머로 보이던 그 맑고 순수한 눈빛..화려하게 변신한 은재의 모습에 반한 게 아니라 자신이 그때 본 진짜 서은재 얼굴을 본 게 맞구나 하는 동질감 같은 거였다.
그 여자가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서 반하고 외형적인 모습 자체에 반하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가짜 마음이니까. 그리고 저 여자가 저렇게 화려하게 변신했다고 해서 첫눈에 반할 정도의 마음일리도 없었다. 서은재는, 내 형을 저렇게 만든 조이델의 후계자니까. 공 부장과 민제가 경탄하고 있는 사이에 도일은 흥 하고 돌아섰더랬다. 하지만 도일 말고도 띠겁게 쳐다보는 눈빛이 있었다. 투자자들과 인사를 나눈 서 회장은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강 사장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강진철 사장입니다.
" ........?! "
" 은재 외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한 17년만이던가요...? "
능구렁이같은 강 사장의 모습에 서 회장의 얼굴은 하얗게, 삽시간에 굳었다. 투자자들이 보고 있었고, 연이어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터지는 와중에도 아주 잠깐, 굳었던 서 회장은 노련한 사업가 답게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오랫만이시군요.
얼굴의 턱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놀란 게 보였지만 여전히 미소를 짓던 서 회장 옆에 선 서 회장의 부인인 장석희 여사는 강 사장이 아니라 먼 곳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여..여보, 저기 좀 봐요, 저기! 석희는 회장 사모답지 않게 경망을 떨며 손가락질을 했고, 그곳엔 직원들과 함께 서 있는 붉은 색 투피스를 입은 은재가 타오르는 눈을 한 채 서 있었더랬다. 강 사장 역시 석희가 가리키는 시선을 따라갔다가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계단 밑에 내려서 있던 은재가 천천히 다가와서 서 회장과 강 사장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 "
" 너는.... ! "
그 대단한 서 회장 내외조차 아무 말을 못하고 입을 쩍 벌렸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은재를 본 강 사장은 잘 차려입은 은재가 불만이었다. 눈빛으론 그야말로 왜 이렇게 잘 차려입었느냐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카메라에 기자에 방송국에 보는 눈들이 많아 아랫 입술을 다물 뿐이었다. 네가 은재라고..? 기이한 목소리로 떨림이 그대로 느껴진 석희는 은재를 쳐다보았다. 17년만이었다. 장성한 은재를 알아봤을리 만무했고, 서 회장 역시 아름답고 당당하게 자란 은재가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계속 쳐다봐야만 했다.
- 못 가! 절대 못가요!!!!!! 우리 수완이 내놔요! 우리 막내 내놓으라구요! 내 동생은 어디로 빼돌렸어요?
내 동생들...어디다 감췄냐구요! 어디로 보냈어요?! 내 동생들 어디로 입양시켰는지 말하란 말야!
- 수완아!!!! 수완아!!!!! 누나 여깄어. 큰 누나 여깄어..수완아! 내 동생 수완아!!!!
- 절대 용서 못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여!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야!
다 찾아낼 거야! 내 동생들..반드시 찾을 거야! 절대...당신만은 죽어도 절대로 용서 못해!!!!
" 회장님...? "
" ...........! "
" 바이어 투자 미팅이 있다고 하네요. 자리 옮기시겠어요? "
악을 쓰던 열 다섯살짜리 여자애의 눈에서는 시퍼런 독기가 있었다.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했던 은재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부모의 사고 때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네덜란드로 떠나야 했다. 가기 직전까지도 동생들과 서 회장 손에 있는 핏덩이 갓난아이였던 동생을 찾느라 눈이 뒤집힐 정도로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가기 직전까지도 탈출과 도망을 반복하며 반드시 내 동생을 찾고 복수를 하겠다며 목이 쉴 정도로 서 회장을 저주했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과 언론들이 조카를 입양시킨 자상하고 자애로운 아이들의 보호자로 칭송이 자자했지만 단 하나. 열 다섯살 어린 조카만큼은 서 회장을 끝내 저주했었다.
모든 사람이 알아도 나만은 당신의 가면을 알고 있다고,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악을 쓰다 떠났었다. 그 아이가 17년만에 그것도 유럽 첫 투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어 서 회장 눈 앞에 서 있는 건 정말로 우연의 일치일까. 사업에 관한 한 능구렁이인 서 회장은 어떤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어도 왠만한 사람은 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더랬다.
미소짓고 있는 조카는 하물며 환하게 웃고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마지막 모습이 복수하겠다며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기갈을 부리던 모습이라 더욱 그랬다. 눈앞에 있는 조카는 한 떨기 꽃 같았다. 소리나지 않는 인형 같기도 했다. 예쁘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고생이라곤 한번도 안해본 귀하디 귀한 귀족 같았다. 오랫만이구나. 잘 지냈니.
서 회장이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지만 은재는 여전히 그 환한 미소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곳은 프리젠테이션이 열리는 리노베이션 센터이니 공적인 질문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투자자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회의실로 저희 팀 직원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은재의 말에 서 회장은 더욱 황당한 기분이었다. 이건 꼭 무슨 로봇과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잖아.
직원들이 나서자 서 회장 일가는 움직일 수 밖에 없었고, 화려한 모습의 은재를 보며 강 대표는 눈에 힘을 주며 은재에게 낮게 말했다. 너는...네 옷차림이 그게 뭐냐.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강 대표가 자리를 떴지만 은재는 여전히 주먹을 쥔 채였다. 강 대표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한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꼭 이런 차림일 수 밖에 없었다. 강 대표도, 서 회장 일가도 바이어들과 함께 떠나는 걸 보며 은재는 아랫입술이 얼얼하도록 깨물고 있었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속내를 천천히, 아주 깊이 감추고 있느라 힘들었으니까. 그러다가 아랫입술 찢어지겠어요.
" ....? "
" 도대체 뭘 숨기느라 그렇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건지. "
" ....예? "
" 서은재 씨는 도대체 얼굴이 몇 갭니까? "
아무한테도 자신의 감추고 감춘 속내를 모른다 생각했는데 이제 막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그 파트너가 다가와서 띠꺼운 눈으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은재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당황한 얼굴로 도일을 마주보았다. 살짝 부은 듯한 은재의 아랫입술을 가리킨 도일은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참고, 뭘 그렇게 안 들키려고 기를 쓰는진 모르겠는데 난 파트너가 솔직하지 못한 거 별로 안 좋아해요.
" 무슨 말씀이신지, "
" 처음 일할 때 나한테 보여준 그 모습,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었을 때 울던 얼굴, 다리 위에서 처연하게 눈물 삼키던 그 모습, 그리고 지금 이렇게 화려하게 투자자들 앞에서 소리 없는 인형처럼 완벽하게 셋팅된 모습. 어느 게 진짜인지, "
" 뭔가 오해가 있었나보네요. 저는, "
" 뭐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겠지만..난 배신당하고 속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서은재 씨가 뭘 감추고 있건, 언젠간 나한테 꼭 들키게 될 겁니다. 난 뭘 숨기는 게 있으면 꼭 그걸 후벼파는 걸 좋아해서요. "
" ........!!!! "
" 그 여러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가면을 꼭 벗겨내서 당신 민낯이 뭔지 꼭 보고 말 거예요. "
도일의 말에 은재의 동그란 큰 눈이 도일에게 와 닿았다. 가까이 있으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페퍼민트 향기...도일은 이제 자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거 같은데. 내가 본 서은재의 진짜 민낯. 가식적으로 웃는 얼굴도, 일하느라 독기 다 감추고 악바리처럼 불도저처첨 달려드는 모습도 아닌. 진짜 사람 같은 그 얼굴.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왔길래, 앞으로 뭘 계획하고 있길래 자기 얼굴을 저렇게 감추고 살아? 도일이 뭐라 얘기하기도 전 은재는 고개를 숙이며 돌아섰다. 돌아선 은재의 등 뒤로 도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은 좋았어요. 딱 내가 구상한대로 나와서 신기했지만. 고생했어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눈이 동그래져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도일은 꽁지가 빠져라 싶게 도망가고 없었다.
" 저건 칭찬이야, 욕이야...? "
기가 막혀서 진짜.
뭐가아아.
아니, 칭찬을 해줄 거면 확실히 해줄 것이지 도대체 백가지 정도 씹고 나서 그렇게 툭 던지고 나면 상대방은 니가 칭찬을 하는지 디스를 하는지 알게 뭐야.
칭찬은 무슨. 뭔가 이쁘다고 칭찬을 해줘!
허이구.
그 프레젠테이션 그런거도 못하면 이 바닥 접어야지.
그럼 서은재 밀어내고 다시 피터 데려와?
.........미쳤어? 프로젝트 말아먹을 일 있어, 형은?!!
결국 구석진 곳으로 와서 귀까지 빨개져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도일을 보며 공 부장은 혀를 끌끌 찼다. 이 인간은 도대체 누굴 제대로 만나본 일이나 있는 건지, 그놈의 일에 미치고 형의 회사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사로잡혀 아무도 안 만나고 사람답게 살아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도일이 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공 부장은 은재를 신경쓰기 시작하는 도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차도일이 저렇게 누군가를 신경쓰고 칭찬해본 건 난생 처음 있는 일 아냐?
공 부장이 떡밥을 던지자 도일은 기막힌 표정이었다. 신경은 무슨. 내 파트너가 사고라도 치면 큰일이니까 신경쓰는 거고, 저 여자 회사가 혹시라도 우리 프로젝트 들고 튈까봐 감시하라며. 저 여자만 껌딱지처럼 따라다니라면서. 그리고 잘한 일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해주라고 한 게 누구야. 도일은 말하지도 않은 변명까지 늘어놓으며 공 부장을 흐뭇하게 만들었더랬다.
귓볼까지 빨개진 도일은 아예 얼굴이 활화산이었다. 괜히 형한테 말려들어서 저 여자한테 칭찬같은 말이나 늘어놓았다며 궁시렁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도일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공 부장은 찢어진 입가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함..그렇단 말이지?
* * * * * * * * * * * * *
출근한 은재에게 공 부장이 다가와서 모닝 커피를 내밀었다. 어제 프레젠테이션 환상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이 모두 입을 쩍 벌리고 가지 뭡니까. 모두다 서 실장 칭찬에 입이 말랐다니까요. 공 부장 말에 은재 역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 팀원들이 제 일처럼 두 손 걷어부쳐 도와준 덕분이죠. 다른 투자자들은 어때요? 그 한국에서 온 투자자 말이예요. 슬쩍 서 회장 이야기를 떠보자 공 부장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원래 1박 2일 일정으로 이번 리노베이션만 참관하고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당분간 암스테르담에 머물겠다고 하네요. 뭐 리노베이션의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좀 보고 싶다나 어쩐다나. 공 부장의 말에 은재는 모르게 살짝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그렇지..
날 보곤 절대 그냥 돌아갈 수 없겠지.
궁금해서 어떻게 참겠어.
은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 부장을 쳐다보며 슬쩍 떠보았다. 가족들이 모두 이번 행사에 참관하는 걸로 아는데...모든 가족들이 다 온 게 맞대요? 은재가 왜 떠보는지 알 리 없는 공 부장은 갸웃거렸다.
" 부인과 큰 아들...와 부인도 진짜 아름답고 아들도 정말 잘생겼더라구요. 로얄 패밀린 그래서 다른가, 한국에서 온 통역사들 얘기 들어보니까 막내 아들이 있다고 하긴 하던데.."
" !!!!!! "
" 너무 어리고 학교도 다니고 있고 그래서 한국에 놔두고 왔대요. "
" 왜요. 그 애도 그 집의 가족일텐데..."
자신도 모르게 커피가 든 종이컵을 꾹 구겨쥔 은재의 눈가가 아무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지만 공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죠 뭐. 소문에 의하면 대외적인 행사엔 그 대학생인 큰아들만 데리고 다니고 막내 아들은 아직 고등학생이니 자주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공 부장 말에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어려서가 아니라, 고등학생이어서가 아니라,
네놈 치부가 드러날까봐서..우리 수완이한테 그 어떤 특혜도 주고싶지 않아서였겠지. 마음 속으로 서 회장의 속내를 읽은 은재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왜 준비했는데. 남의 것을 뺏으면서까지 어떻게 내가 준비한 건데. 반드시 내 동생을 찾을 거야. 내 동생을 찾고, 그리고 반드시 내 동생을 데려올 거야. 네놈들이 가져간 우리 부모님의 것들을 내가 하나 하나 다 찾아올 거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은재에게 공 부장은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채 마침 생각났다는 듯 복도를 지나가는 남자를 불러세웠다.
우리 조경 디자이너 못 만났죠? 안그래도 어제 인사시키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마침 저깄네요!
손뼉을 치자 복도를 지나가던 남자가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공 부장에게로 걸어왔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남자가 은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은재는 남자의 인사에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반쯤 남아있는 커피가 쏟아졌더랬다. 반갑습니다. 새 조경 디자이너입니다. 민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슨 도깨비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은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선배, 인사해요. 내 약혼자 차민우.
- 안녕하세요, 경유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아니, 인사는 내가 해야지. 우리 이쁜 경유 더 이쁘게 봐줘서. 근데 넌 어디서 이런 작품 같고 그림 같은 남잘 데려왔어.
- 제가 더 감사드려야죠. 경유가 그러는데 장미꽃 좋아하시는 거 맞죠? 빨간색 장미.
" 참..꽃 좋아하세요? 인사드릴 줄 알았으면 더 큰 선물이라도 하는 건데. 혹시 장미꽃 좋아하세요? "
" .........!!! "
" 장미꽃 좋아하시는 거 맞죠? 빨간색 장미. "
" ...........민우 씨....!!!!! "
거의 넋이 나간 은재를 바라보던 공 부장과 민제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했다. 차민우..? 민우 씨? 민우의 이름을 부르짖는 은재를 보며 복도를 지나가던 경유가 멍한 얼굴로 들어섰고, 민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더랬다.
저희 형을 아세요? 민제의 말에 은재는 또 한번 놀라야 했고, 공 부장 역시도 무슨 이런 기이한 인연이 있냐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민우랑 네가 진짜 쌍둥이처럼 판박이긴 하잖아. 요즘도 이렇게 헷갈리는 사람이 있네. 얘네 형이랑 얘가 거의 쌍둥이처럼 닮았어요. 둘이 어디 나가면 진짜 일란성 쌍둥이같다고 하는 사람 많아요. 근데 실장님이 민우를 어떻게 알지? 공 부장과 민제 뒤로 경유가 보였고, 이 황당한 상황을 더 견디기가 힘든지 은재는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했다.
" 아, 미안해요. 예전에 잠깐 일한 적이 있어서...."
경유를 발견한 은재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둘러대곤 입구에 서 있는 경유의 팔을 잡고 끌었다. 너, 나랑 잠깐 얘기 좀 해.
회사 복도 비상구 계단으로 경유를 데려온 은재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문까지 걸어 잠궜다. 경유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알아도 한참 전에 안 게 분명했다. 형이라니. 아니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리고, 넌 왜 이 얘길 나한테 안했니. 네 표정 보니까 너도 오늘 안 거 같진 않은데. 이걸 왜 이제 얘기해.
" 일곱살 터울의 동생이 하나 있어요. 저도 예전에 한번 들은 거라 자세힌 몰랐어요..어디 밖에 데리고 나가면 쌍둥이처럼 닮은 동생이 있다고. "
" 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똑같아! 거의 동일인물이잖아! "
" ...실장님 눈에도 그렇게 보이세요? "
경유 말에 은재는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와, 이게 무슨 세상에 이런 일이 에피소드 같은 게...아니, 세상에 닮은 형제들 많다 많다 소리만 들었는지 이게 무슨 일이야. 아니, 형제들끼리 목소리도 닮니? 난 영락없는 민우 씨인줄...웃는 눈매며 목소리며 너무 똑같은데. 멘붕이 온 은재는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경유 표정이 어두워져 있는 걸 본 은재는 실수했다 느꼈는지 경유의 어깨를 잡았다. 이건 아니야. 이건 절대 아니야. 네 멘탈이 다 망가지고 말거야. 1년 전에 사고 터졌을 때 내가 너 멘탈 안 꺼내줬으면 넌 아직도 병원에 있을 애야. 내가 너 건져내려고 얼마나 갖은 고생 한 줄 알아? 다시 그렇게 놔둘 순 없어. 너 본사로 가.
가능하면 암스테르담 말고 딴데로 보내고 싶은데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고, 다른 지방에 자리 생기면 내가 무조건 보내줄 테니까 일단 본사에 박혀 있고 여긴 오지 마. 은재의 말에 경유는 슬프게 웃었다. 그럼 팀장님 어시스트는 누가 하구요. 제인? 플로라? 필립? 누가 하는건데요.
" 건 니가 걱정할 거 아니구! "
" 걱정 돼요. 이 프로젝트에 온갖 상도의 없다 소리까지 들어가며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시작했는데, 이제 시작이잖아요. 서 회장도, 강 대표도 모두 서슬 퍼렇게 두 눈 뜨고 팀장님...아니 선밸 지켜보고 있어요. 그 사정 다 아는 사람 이 팀에 나 하나고요. "
" 경유야!!! "
" 네. 처음엔 당황했죠. 놀라기도 했고요. 그게 다예요. 제 감정 제가 컨트롤 할 수 있어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예요. 어느 정도는 잊었어요. 잊고 있는 중이구요. "
은재는 경유의 말에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고, 경유는 애써 웃음으로 은재를 다독였다. 걱정 마세요. 저 그만한 분별력은 있어요. 팀장님이 저 어떻게 꺼내주셨는데요. 여기서 다시 돌아갈 순 없어요. 그리고 이 프로젝트 왜 팀장님의 것으로만 다 생각하고 짊어지려고 하는 거예요? 이거 제 일이기도 해요. 잊었어요? 처음에 밑그림이 될 조감도를 누가 만들어 줬는지를. 유럽 프로젝트에 반드시 서 회장 일가가 탐을 낼 거고, 이런 리노베이션이면 반드시 혹할 거라고 제일 처음 조감도를 그려준 사람이 누군데요. 그 사람이예요. 그 사람이 그린 조감도로 이루어질 리노베이션이예요. 저 뺄 생각 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과 함께 할 거예요.
흔들리고 싶어도 흔들릴 마음이 없어요..
그만큼 그 사람은 내 세상의 전부였고,
그 사람에게 전부..모든 마음을 다 줬어요.
그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아요.
내게 민우 씨가 온 세상이었으니까.
복도를 천천히 걸어나오던 민제는 생각에 잠겼다. 민우와 은재가 같이 일했을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설마 그럼 처음에 그 사람도 나를 형으로 착각했을수도 있겠구나. 서 실장님과 오래 일했다고 했으니 형과 같이 일했을 수도 있고. 나를 형으로 착각해서 처음 봤을때 그렇게 놀란 거였을수도. 자신을 처음 봤을 때 경유의 놀라고 하얗게 질린 표정을 떠올린 민제는 그제서야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침 편집실에 들어가는데 경유가 무거운 디자인 북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팀장님! 경유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경유의 손에서 무거운 책들이 떨어져 내리는 걸 달려온 민제가 재빠르게 받아 안았다. 괜찮아요. 제가 받았어요! 환하게 미소짓는 민제를 보며 경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 어느 정도는 잊었어요. 지금도 잊고 있는 중이구요.
방금, 바로 직전에 은재에게 자신있게 했던 말이었다. 경유는 뭐라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책을 주워 담고 있는 민제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민제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흘리는 경유의 이마를 짚었고, 그 바람에 경유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경유를 바로 가까이에서 보게 된 민제의 귓볼이 확 붉어졌더랬다. 아....순간 놀란 경유가 몸을 뒤로 뺐지만 넘어지려는 경유를 민제가 안전하게 잡아 주었다. 넘어질까봐서요. 다칠까봐.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게 된 경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아...
내 사랑........
죽어서도 잊지 못할,
내 진짜 나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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