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수의 서막(A Prelude to revenge)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Amsterdam Central Station)
물의 나라 네덜란드와 유럽의 관문이자 꽃의 도시인 암스테르담은 조이델 해로 흘러가는 암스텔 강 하구에 댐을 쌓아 만든 오랜 도시로, 세계적인 관광, 무역의 중심지다. 해양 무역의 황금기인 17세기 때의 부채꼴 모양의 운하를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옛날의 명성을 구가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은 네덜란드 및 유럽 철도망의 중추로, 역 앞에는 부채 모양의 운하가 펼쳐져 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역사는 건축가인 카이퍼스(PJ.H.Cuypers)와 반 헨트(A.L. Van Gent)가 1889년부터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한 것이다.
역 건너편 다리 옆에는 관광 안내소 VVV와 유람선 승선장이 있다. 암스테르담의 떠오르는 신성 건축회사 레이체 건축회사의 설계 디자이너인 차도일은 중앙역 근처 커피 하우스에서 작업복 차림의 파트너와 땡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올해 서른 여섯살이 되는 도일은 댄디한 스타일에 이 땡볕에도 항상 단정하고 깔끔한 수트 스타일에 지나가던 사람이 봐도 한번 돌아볼 것 같은 모델 같은 포스를 지닌 열혈 디자이너였다. 비록 CEO가 형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경영까지 겸하고 있어 도일의 24시간은 잠을 자기도 부족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더랬다. 도일은 같은 건축과지만 도일은 설계 디자이너였고,
건축의 전반적인 디자인을 맡아 줄 건축 디자이너와 같이 일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파트너였던 피터와 손발이 안맞아 폭발 직전이었더랬다. 피터는 조감도를 내려놓은 채 도일과 설전을 벌였다. 차 팀장 생각대로 했다간 이거 제대로 안 먹히기 십상야. 우리가 이때까지 하던 업체 일이랑 차원이 달라. 이건 조립식 건축이라고. 단층 조립식 상가를 설계 디자인할 땐,
화려하고 고급스러워야 하는 게 포인트라니까. 피터의 말에 도일은 아예 조감도를 반으로 접었더랬다. 피터랑 나랑 일한지가 몇년인데 아직까지 이렇게 헤매고 나랑 손발이 하나도 안 맞으면 어떡해.
" 조립식 상가든 건물이든 어떤 건물이든 포인트는 심플하면서도, 창고나 공장같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야. 인위적인 화려함은 건물의 이미지를 망친다고. 도대체 건축 디자인만 몇년짼데 아직까지 뜬구름 잡는 소리야. 그리고 내가 얘기했잖아요. 치장벽돌로 포인트를 주어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이미지로 가자고. 그런데 대리석이 왠말이고 샹들리에가 왠말이야. 이거 잘못 잡으면 얼마나 촌스러운지 알아? "
" 여튼, 업자가 이 상가 디자인은 라인메탈패널을 원해. "
" 와 - 피터, 그걸로 하면 건당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기나 해? 그러다가, 일 다해놓고 업자가 나 이거 마음에 안든다, 그럼 어떡할 건데요. 그 돈은 다 누가 책임지고? "
" 그러니까, 우리 회사가 일단 상장을 하고..."
" 피터! 우리 회사 그렇게 큰 업자들 상대로 돈부터 쏟아붓기 시작하면 절대 못 커. 우리 회사가 무슨 CJ 같은 그런 대기업도 아니고 그런 자금이 어딨어요. "
" 일단 어음부터, "
" 안된다고 했죠. "
" 차 팀장은 일할 땐 불도전데 왜 돈 문제만 엮이면 수전노야. 투자를 해야 더 큰 돈이, "
피터와 이야기해봤자 입만 아프다 싶어 도일은 손사래를 쳤다. 피터와 딱히 손발이 맞다기보단 이때까지 거의 자신이 일을 다 해왔었다. 거기다 피터와 내내 손발 안 맞고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데다 피터의 디자인이 영 내키지 않아 몇번이고 도일이 중간에서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같이 호흡을 맞춘 의리도 있는 데다가 딱히 마음에 드는 건축 디자이너도 없어서 이때까지 같이 오긴 했는데, 점점 이렇게 손발이 안맞아 도일은 고생 중이었다. 안그래도 여기저기 디자이너를 구한다고 얘기해놓긴 했으나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렇게 아이디어 회의를 하자고 하면 벌써 커피하우스에서 브런치며 커피만 몇잔인가.
분명 조금 전 케익 두조각과 빵도 먹은 것 같은데 다시 아이스 커피와 이젠 스파게티까지 주문하려 들질 않나. 도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까 회사 들렀다 왔는데, 이번 일 이상한 소문 돌드라. 우리 레이체 말고도 유력한 라이벌 회사랑 같이 공개 입찰할 모양이야. 피터의 정보에 도일은 눈이 크게 떠졌다. 이 건 맡으려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그건 무슨 소리야.
이 건은 우리가 거의 단독으로 따낸 거라 단독으로 진행하기로 얘기가 됐던 건데 어느 간 큰 놈이 우리 껄 감히 스틸하려고 들어? 누구야, 그 간 큰노무 새끼가. 도일이 입에 거품을 물자 메뉴판을 뒤적거리던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다. 니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죽여버리려 애쓰는 거기. 네 견원지간. <조이델 건축회사> 래. 피터의 말에 도일은 의자를 젖히고 일어났다.
" 뭐라고?!!!!!!!!! "
암스테르담, 눈물의 탑(Schreierstoren) 근교 레이체 건축회사 본관
중앙역에서 1~2분 거리에 있는 이 탑은 1480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망루로, 이전에는 암스테르담 시 방벽의 일부였다. 네덜란드어로 '건너다'라는 뜻의 Schrijden과 슬피 울다, 라는 의미의 Schreien이 비슷한 데서 탑의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16세기 해운업이 융성할 당시 바다 일을 하는 남편을 가진 여성들이 여기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남편을 울면서 배웅햇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회사로 들이닥친 도일은 씩씩거리며 경영부장을 불러들였다. 회사의 대표 직함은 도일의 형이 갖고 있지만 도일의 형이 요양 중인 관계로 실질적인 경영 업무는 모두 도일이 맡아 하고 있었다. 공 부장은 형과 이 회사를 세울 때 같이 도움을 준 부장이기도 했다. 커피 마시러 나간다던 도일이 씩씩거리자 공 부장은 소문을 전해들었나 싶은 얼굴로 씩씩거리는 도일을 겨우 의자로 잡아 앉혀야 했다.
진정해, 차 팀장 얼굴 누가 불로 지졌냐. 왜 이렇게 시뻘개.
공 부장님, 이거 사실이예요? 단독 입찰이 아니라 공개 경쟁 입찰이었다니, 그리고 그 상대가 뭐? 누구요?
조이델 건축회사.
부장니이이이임!
내 탓 아니야. 조이델 사장 사모가 이번에 입찰하는 건물주랑 계모임 친구래잖아. 그쪽은 워낙 발이 넓고,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신생 회사고. 급이 다르지 급이. 조이델 그룹에서 독립한게 조이델 건축회사이긴 하지만, 니가 진짜 학을 떼고 싫어하는 그 조이델 건축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건축회사가 조이델 그룹 강준모 사장 밑에 있으니까, 여러모로 운빨도 따르고 인맥도 넓은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공 부장이 어르고 달랬지만 도일의 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준비해 온 프로젝트인데. 조립 상가 건물 프로젝트는 거의 3년을 준비하고 준비하여 이제 겨우 도일의 손으로 마련된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단순히 돈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도일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큰 의미가 있었다.
어떻게 준비한 건데. 벽의 타일 하나까지도 모두 내가 다 설계했어. 이걸 그 돈만 아는 수전노들에게 줄 순 없어. 형에게 줄 프로젝트야. 형에게 바칠 프로젝트란 말야. 형을 그렇게 만든 그놈들한텐 절대 뺏길 수 없어! 도일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이를 악물었다.
공개 경쟁 입찰이면 그놈들하고 싸워야죠. 시작은 우리가 했으니 우리가 충분히 유리해요. 그놈들은 늘 그렇듯 중간에 끼어든 놈들일 뿐이예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구요. 우리가 다시 정정당당하게 뺏어오면 돼.
도일의 말에 공 부장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쉽지 않아. 조이델 건축회사에서 거의 실질적인 업무를 다 담당하고 있는 실장이 진짜 건축업계의 엄청난 에이스인 모양이야. 조이델 그룹 왠만한 일처리도 그 실장이 다 도맡아와서 그룹 이미지며 수익에 엄청난 공을 세웠다던 걸. 너 지난번에 파리 공장건, 물먹인 것도 그 여자 아니냐. 서은재 실장. 그 뿐이냐? 너 대학 졸업하고 건축대회에서 1등 뺏긴 것도 그 여자 잖아. 여러모로 너랑 악연이긴 한데 그 여자가 엄청 악바리처럼 뛰어들고 있어서 쉽지 않대. 한번 손댄 프로젝트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뺏기지 않고 성공시킨다, 가 그 여자 철칙이라던데. 뺏어오든 가로채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 껄로 만드는 걸로 유명하잖아 서은재 그 여자.
" 절대 그 여자한텐 안 뺏겨. 내가 다시 가져오면 돼. 우리가 얼마를 준비한 프로젝튼데! "
" 근데 이미 공개경쟁입찰로 돌려서인지 우리가 불리해. 거기다 피터 동원해서 1차 회의 때 그 쪽 표정 못봤어? 피터가 내놓은 조감도들이 솔직히 엉망이었잖아. 그쪽 업체 사장들 사모들 표정 봤어야 했어. 솔직히 나도 낙제점 주고 싶겠던데. 우리 회사 건축 디자이너가 엉망인 건 사실 아니냐. "
" 그럼 이제 와서 어떡해요, 지금 당장 건축 디자이너를 구할 수도 없는데! "
도일은 발을 동동 굴렀다. 피터의 미흡한 일처리는 공 부장보다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발등을 찍을 순 없었다. 이제 와서 두 손 놓고 포기할 순 없어. 공 부장은 고심하던 끝에 도일을 설득하기로 했다.
" 그 쪽 업체에서 안 그래도 제안을 해왔어. "
" ........"
" 공개 경쟁 입찰로 돌리기엔 그쪽도 당장 건물을 지어줬음 하는 눈치라, 둘이서 독점 공개 경쟁 입찰 하게 되면 다른 업체들도 줄줄이 따라붙어 피곤하니까, "
" 그러니까 애초 예상대로 우리 레이체한테 주면 되잖아요. "
" 그러기엔 조이델 눈치가 보이나봐. 얘기했지? 조이델 사장 사모랑 건물주랑 절친한 사이라고. "
" 그럼 어쩌자는 건데요! "
" ....협약을 해달래. 레이체와 조이델 공동 작품으로. "
" 뭐라구요?!!!!!!!!!!!!! "
" 그게 싫으면 다른 업체들 다 당겨서 아예 오픈 공개 입찰로 가는 거고. 다시 원위치. "
얼굴이 시뻘개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도일을 향해 공 부장이 간절히 설득했다.
" 네가 얼마나 조이델과 그 얼굴도 한번도 못본 서 실장을 싫어하는지 내가 잘 아는데. 이거 잘못 엎어지거나, 원위치 되면 우리 회사쪽 손해가 얼만지 굳이 네가 말 안해도 알지? 우리 이제 일어난 신생 회사고, 이번 맡는 프로젝트 물론 네 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메이저로 가는 처음으로 큰 블록버스터 건수 맡은 거야.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성공시키느냐 따라서 우리가 암스테르담 건축계에 어떤 이름을 남기느냐가 달렸어. 네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에 지금 레이체 전 직원들의 생계가 달렸다, 도일아. "
" ........... "
" 어떻게 할래. 앞날을 위해 당장 적과 손을 잡을래, 아니면 다같이 침몰할래? "
" .........! "
" 어짜피 이 건은 너무 커서 피터가 감당 못해. 우리가 무리하게 끌고 갔다간 그 쪽에서 피터 조감도 보고도 경악을 했는데, 피터 때문에 일 그르칠 순 없다. 도일아. 네가 결정해야 해. "
공 부장의 말에 도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바람에 손등에 핏줄이 돋아났지만 도일은 눈을 내려감았다.
형...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담 광장(Dam) 근교 조이델 건축회사 시즌 건축쇼
담 광장은 시내 중심부를 TY자형으로 지나는 암스텔 강(Amstel)을 막으려고 여기에 댐을 건설한 것이 지금의 광장이 되었다. 중앙에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 위령탑(Nationaal Monument)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왕궁과 신교회 등 오래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항상 시민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 곳 광장은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중앙역에서 출발하는 트램은 모두 담 광장을 지난다. 야외 건축쇼라니, 진짜 역시 돈이 돈을 부른다더니. 지금 네가 피터 대타로 맞아들여야 할 조이델 건축회사의 서은재 실장이 조이델 그룹 강 회장의 외조카딸이래. 방금 들은 소식이야. 공 부장의 말에 도일은 뾰루퉁하게 부어있던 얼굴로 공 부장을 돌아보았다. 결국 공부장은 어려운 설득 끝에 도일에게 공개 경쟁 입찰 대신 조이델과의 협약을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도일이 이에 선뜻 응했을 리 없었다. 그 돈만 아는 수전노의 외조카딸이라고? 그야말로 화염병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격이구만. 조이델 회사 식구라는 것도 싫어 죽겠는데 조카딸이라 이거지.
이를 바득바득 가느라 공 부장 귀에 다 들릴 정도였지만 도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걱정마세요 공 부장님. 우리 형을 위해서라도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시킬 테니까. 협약을 위한 협약이 아니라 협약을 해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조이델이 아니라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죠! 도일의 악만 남은 말투에 공 부장은 애써 미소로 땀을 닦아내려야 했다. 쇼는 성공적이었다.
조이델 그룹은 암스테르담에서 꽤 유명한 회사였지만 조이델 그룹 자회사인 조이델 건축회사는 도일의 회사인 레이체 건축회사처럼 이제 막 성장하려고 하는 신생 건축회사였다. 조이델도 레이체처럼 공개 경쟁을 해서 성장하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받아들인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완벽하게 성공시켜서 우리 팀의 성공으로 만들어야 해. 그렇게 조이델을 눌러야 해! 그게 조이델을 물먹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처음엔 조이델과 손잡아야 한다는 게 끔찍하게 여겨졌지만 도일은 다시 생각을 바로잡았다. 이건 기회다. 쇼는 도일이 보기에도 화려하고 웅장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도일은 냉담하기만 했다. 쇼가 끝나자 공 부장의 소개로 조이델 건축회사의 대표이자 건축 디자이너인 서은재가 온다는 소식에 둘은 쇼가 이뤄지는 컨벤션 센터의 커피하우스에서 서은재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쇼를 성공리에 마친 건축 디자이너인데다 조이델 그룹 대표의 조카딸이니 얼마나 화려하고 삐까뻔쩍하게 하고 올 것인가. 공 부장은 도일의 넥타이를 바로 매주며 잔소리중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대표가 금이야 옥이야 금지옥엽처럼 키운 조카딸이래. 강 사장 부부한테 자식이 없잖아.
그래서 그런지 조카를 친딸처럼 키웠다는구만. 얼마나 잘 키웠는지 소문이 아주 자자한 모양이야. 분명히 럭셔리하게 하고 올 테니 기죽으면 안돼. 공 부장 말에 도일은 이를 악물었다. 걱정 마. 스타일이라면 나도 뒤지지 않는다고. 명품 두른다고 다 똑같은 로얄패밀리인가? 남의 수주나 가로채는 그런 몰염치 몰상식 무식한 여자한테 뒤지지 않을테니 걱정마쇼!
도일과 공 부장이 긴장하고 있는 사이 소개를 받은 서은재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리자 도일은 어떤 명품을 휘감고 와도 절대 긴장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안녕하세요. 조이델 건축회사 건축 디자이너 서은재 실장입니다. 고개를 아직 들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 "
" !!!!!!!!!! "
입을 꾹 다문 공 부장도, 고개를 들고 서은재를 바라보던 도일도 순간 말을 잃고 눈을 껌벅거렸다.
서 은재...실장님 맞습니까?
네. 일찍 오셨네요. 쇼는 잘 보셨나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도일은 상대가 서은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뿔테 안경, 부스스한 머리에 이제 막 공장에서 나온 것 같은 때묻은 작업복에 페인트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찢어진 청바지에 심지어 구두도 아니고 군인들이 주로 신는 군화를 신고 있었다. 심지어 노란 고무줄로 겨우 질끈 묶은 듯한 머리에 상대가 그 유명한 서은재라는 걸 실감하기 힘들었다.
피곤하니 다들 앉죠. 은재는 먼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조금 전에 컨벤션에서 화려하게 쇼를 끝낸 주역이라 믿기도 힘들었다. 도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은재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먼지가 풀풀 날릴 것만 같았더랬다. 일단, 전달받으셨을 테니 이번 리노베이션 공사 조감도를 가져왔으니 보시죠. 공 부장이 피터 작품인 조감도를 내밀었고, 서류와 조감도를 대충 훑어보던 은재는 건성으로 휙휙 넘겨보고 있어서 도일은 더욱 더 화가 났지만 애써 꾹꾹 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레이체 건축회사라 기대가 컸었는데..
" 조감도가 엉망이군요. 리노베이션에 대해 제대로 이해도도 떨어지고. "
" 뭐요?!!!!! 말이면 단 줄 알아요? "
" 이러니 크리에이터가 디자인이 마음에 안들다 했겠죠. 제일 문제되는 게 건물의 이미지예요. 대리석이 왠말이고 샹들리에가 왠말이예요. 치장벽돌로 포인트를 주어 심플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살리는 게 이번 리노베이션의 포인트예요. "
" !!!!!!!! "
은재의 한 마디에 발끈하던 도일도, 공 부장도 놀란 눈을 어찌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피터의 단점으로 꼽았던 것과 도일이 늘상 얘기하던 포인트를 은재가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었다. 조감도를 펼쳐서 포인트를 짚어나가던 은재는 도일이 그동안 구상해온 포인트를 마치 바로 내다보듯 이야기했더랬다.
건물이지만 이 조립식 건물은 집으로 생각하는데에서 구상을 출발한 것 같은데 맞나요? 대지의 사방이 트여진 개방적인 구조를 이용해 중정형 외부공간과, 필요한 주거공간을 적절히 배치하면 좋을 것 같아요. 또, 주변의 도로나 주택을 의식하기보다는 여기 이 부분을 남향에 배치함으로써 풍부한 자연광과 시원한 조망을 끌어들이는 게 낫겠고요. 손으로 가리키는 은재의 이야기에 빠져든 도일은 건축업자답게 은재와 조이델에 대한 악한 감정과는 달리 제대로 된 파트너를 만났다는 희열감에 빠져들었다.
" 그럼 이 부분은 1.5m의 레벨 차를 활용해 도로에서 진입하기 쉬운 북쪽에 입구를 배치하는 게 어떨까요? "
" 훨씬 낫죠. 전체 매스는 중정을 두고 3개의 영역으로 나누고..."
" 잠깐만요. 거긴 LDK(거실-식당-주방) 구역이예요. "
" 눈썰미가 대단하신데요? "
건축 디자인과 설계 디자인은 한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절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디자이너들이었다. 거기다 이제 떠오르는 신생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젊은 디자이너들이라. 지켜보는 공 부장은 제대로 된 파트너가 드디어 만났음을 실감했더랬다.
자자, 한술에 배부를 순 없죠. 오늘은 일단 서로 인사만 하기로 하고, 서 실장님은 어떠세요? 저희와 조인트 하시는 거요. 공 부장은 물으면서 팔꿈치로 도일의 어깨를 쳤고, 도일도 공과 사는 분명한 사람이었다. 조이델과 서은재가 싫은 거랑 별개로 그 여자가 능력자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감도를 내려놓은 은재 역시 비슷한 눈빛이었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 했던가.
은재 역시 파트너로 조인트할 거면 도일이 적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은재는 공 부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짜피 이미 협약된 사안이고, 공개 입찰 대신 조인트 파트너쉽이 저희 회사로서도 유리하니까요. 여튼 기회가 이렇게 되었는데 서로 합의되어 다행입니다. 공 부장은 은재의 쏘쿨한 제안 동의에 도일을 눈짓으로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원만하게 안 받아들이면 죽인다는 그런 눈빛이었지만 도일은 입이 이만큼 튀어나온 채 헛기침만 했고, 은재는 악수차 내민 손이 머쓱한지 어깨를 으쓱했다. 전 시공하는 곳에 한번 들렀다 가려 하는데 조심해서 가세요. 은재의 말에 공 부장은 도일을 은재 쪽으로 들이밀었다.
역시 서 실장님 일처리 빠르시단 소문 진짜였네요. 이제 두 분이 사령탑이 되어 앞으로 팀을 이끌어 가야 할 텐데 이참에 같이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진 않죠. 앞으로 할 일도 많은데 서로 친해져야죠. 서 실장님을 우리 차 팀장이 잘 안내해줄 겁니다.
공 부장의 너스레에 은재 몰래 뒤돌아본 도일은 복화술처럼 공 부장을 째려보았다. 미쳤어? 돌았어? 약 먹었어? 저 여자랑 일하는 것도 싫어 미치겠는데 내 소중한 애마에 태우라고? 형 진짜 나 각혈하는 거 볼껴? 도일이 째려보았지만 공 부장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장 첫 삽 뜨겠다고 저 난린데 그럼. 니가 협약하면서 저 여자 회사 기 누르고 싶다며. 그럼 저 여자랑 앞으로 한날 한시에 화장실 가고 자는 시간 빼고 저 여자랑 끈질기게 붙어다녀야 니가 우위를 선점할 거 아냐. 서은재 실장 만만히 보지 마.
아까 조감도 쓱 훑은 것만으로도 청사진 그려내는 거 봤지? 악바리에 독종에 포기한 적 없는 인사야. 너 이렇게 유유자적하게 나왔다간 이번 프로젝트 서은재한테 다 뺏겨. 저 여자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니가 옆에 따닥따닥 붙어서 계속 감시하고 따라다녀야 할 거 아니냐! 공 부장의 말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재를 향해 도일은 참을 인자 세개를 이마에 새겼다.
" 제가 바래다 드리죠.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왕궁(Koninklijk Paleis)근교 공사 지역
네덜란드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655년 당시 예술의 우수성을 집약해 시청사로 만들었다.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만 3659개의 나무 말뚝을 사용했다. 프랑스 점령기인 1808년 나폴레옹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처음 궁전으로 사용한 후, 프랑스가 물러간 다음 네덜란드 왕실에서 접수하여 현재는 왕실 영빈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곱 개의 출입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결정한 일곱 개의 주를 상징하며, 돔에는 아틀라스 신상이 있다. 특별 행사 때를 제외한 매년 여름, 건물 내부를 일반에게만 공개한다.
공 부장의 말에 이끌려 나오긴 했지만 도일은 하루아침에 조이델과 서은재에 대한 마음이 호감으로 바뀔 리 없었다. 반드시 이 프로젝트로 조이델과 저 여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말겠어. 은재가 조감도를 보고 한눈에 모든 장단점을 파악하고 자신과 일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사장을 한바퀴 둘러본 뒤 도일은 은재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집을 모르니 회사 근처까지 태워다 드리죠. 타세요. 도일의 말에 차로 향하던 은재는 멈칫 그 자리에 섰다. 공사장이긴 했지만 주변이 상가 근처라 어디선가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주변 상가에서 틀어놓은 노래인 모양이었다.
♬
등을 돌린 채 흘러나오는 멜로디 때문인지 몸이 굳은 채 아무 표정도 말도 하지 않던 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차 문을 열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도일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돌아보는 은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도일의 말에 고개를 든 은재가 자신의 목을 만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은재의 셔츠 안에서 팬던트 목걸이를 꺼내서 보는 것 같았다. 무슨 문양이 깃든 목걸이 같았는데..목걸이를 한번 만지고 고개를 든 은재의 눈에서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할 말 다하고 한 마디도 질 것 같지 않은 깡만 남은 악바리가 눈물이라니. 도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은재를 쳐다보았고,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은재가 눈을 내려감았다.
솔베이지의 노래....
예?
아세요, 솔베이지의 노래요.
그야 유명한 민요 아닙니까. 그 음악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황당하다는 듯 도일은 은재를 쳐다보았지만 금방이라도 건드리면 소리내어 울 것 같은 여자여서, 도일은 쉽게 은재에게 말도 붙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애틋한 표정을 지어보인 은재는 도일을 향해 돌아섰다. 울다가 웃는 애틋한 시선으로. 조금 전의 그 악바리 일벌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표정으로.
저 음악만 들으면 주체할 수가 없어요..
너무 슬프고.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거든요.
그래서 눈물 한 방울도 참을 수가 없어져요..
황당해하던 도일은 천천히 은재의 떨리는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고, 은재는 등을 돌린 채 셔츠 속에서 팬던트 목걸이를 꺼내 만져보았다. 무당벌레 모양의 팬던트 목걸이를 열자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똑같은 솔베이지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팬던트를 소중히 손 안에 넣은 은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깨를 떨구는 은재를 바라보던 도일은 그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일에게 등을 보인 채 목걸이를 소중히 품 안에 넣은 은재의 감은 두 눈에서는 계속해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다 와 가..
얘들아.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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