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복수남 vs 복수녀(Revenge&Revenger)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사박물관(Amsterdam Historisch Museum) 근교

 

 

 

 



13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암스테르담 역사에 관한 고지도, 회화, 고문서류 등의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하여 17개의 방에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은 1420년에 건축되었는데, 최근까지 시립고아원으로 사용되었다. 박물관 안뜰과 베긴회 수도원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17세기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 조경 조감도를 가져오던 민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 조감도! 

 

조감도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민제는 겉옷을 벗어 조감도를 둘둘 싸맸다. 조감도가 젖어선 안 되니까.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데 조감도가 젖을까봐 겉옷으로 싸맨 민제는 몸이 비에 젖을까봐 주차된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비를 피하기 위해 박물관 앞에서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보슬비 사이로 손으로 이마만 가린 채로 머리카락이 긴 것으로 보아 여자였다. 전화통화를 끝낸 여자가 옷깃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귓 뒤로 넘겼다. 

 

보슬비에 머리카락이 젖었는지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내기까지 했다. 하얗고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천천히 보슬비 사이로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더랬다. 희고 고운 목선을 가진 얼굴 사이로 오똑한 콧날과 눈매가 보였다. 속눈썹이 길고 눈동자가 컸다. 새까만 긴 생머리의 흑발..지나가던 사람들도 더플 코트 차림의 여자를 보고 한번씩 힐긋 돌아볼 정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미인이었다. 


아..



민제는 품안에 조감도를 꽁꽁 싸맨 겉옷이 보슬비로 천천히 젖어가는것도 모른 채 긴 생머리 여자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자가 비를 피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점점 더 실루엣이 선명해질수록, 조감도를 든 민제는 계단 위에서 멍하니 여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 안에서 견학이 있었던 건지 한떼의 초등학생 아이들이 쏟아져 나와서 여자와 민제 사이에는 벽처럼 선이 갈라지게 되었고, 초등학생들이 계단을 잘 내려올 수 있도록 여자가 손우산으로 초등학생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장난치는 걸 바라보던 여자가 웃었더랬다. 

 


아...



보슬비 사이로 햇살이 개고 있었다. 잠깐의 보슬비였던 듯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따스한 미소로 바라보던 여자가 소리내어 눈웃음이 지고 있었다. 민제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초등학생들의 모습도, 손우산으로 받쳐주고 있던 여자도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어, 어디로 갔지? 민제는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여자의 실루엣을 찾아 헤맸지만 베이지색 더플 코트의 긴 생머리 여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여자는 사라진 뒤였지만 민제는 조감도를 감싸쥔 겉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구두를 적시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 하더니 구두를 적시는 물처럼 민제는 그렇게, 스물 여덟 되던 봄이 오는 어느 날, 그렇게 첫 눈에 반해버렸다. 

 


봄 햇살 같은 그녀에게. 
온통 온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더랬다. 



 

 

 

 

 

 

 



" 아니, 지금 첫날부터 이러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


"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희 실장님이 지금 오고 계시니까 잠시만.."


" 그 실장님 아픈 거 아니던데요. "


" 예? "


" 아니, 내가 아까 봤거든요. 아픈 게 아니라... "



도일은 펄펄 뛸 지경이었다. 조금 전 다리 위에서 울고 있는 서은재를 봤다고는 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눈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경유를 대상으로 짜증만 폭발하고 있었다. 그냥 확 말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냥, 누군가의 치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서은재를 다리 위에서 불과 몇 분 전에 봤는데,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니, 

 

그것도 아파서 잠깐 시간이 걸린다 하니 도일만 답답할 노릇이었다. 일단, 먼저 어시스턴트인 제가 조경 디자이너 분을 만나고 있으라 하시니 금방 오실 겁니다.  경유의 똑부러진 말에도 이미 은재를 보고 온 도일은 찌릿 하며 경유를 노려보았다. 

 

 

 

 

 

 

파트너 회사끼리 이렇게 첫날부터 호흡이 안 맞으면 무척 곤란하겠는데요. 금방이라도 경유를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도일은 폭발 직전이었고,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소문만 들어온 경유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 순간, 경유의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 프로젝트 새 조경 디자이너입니다. 저랑 얘기하시면 되겠네요.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경유는 나는 살았다는 듯이 휙 뒤돌아보았고, 돌아본 남자의 눈이 커졌다.  남자의 눈 앞에 있는 여자는 긴 생머리에 더플 코트 차림이었다. 

 

그리고 보슬비에 머리카락이 젖었는지 어깨 밑 머리 부분이 조금 젖어 있었다. 도일은 멍하니 서 있는 경유와 민제 사이에서 방방 뛰었더랬다. 안그래도 너 잘 왔어. 첫 회의 때 어시스턴트만 보내는 회사도 있어? 나 이거 완전 컴플레인 요청할 거야. 

 

 

 

 

 

 

 

 

서은재 팀장 빨리 전화 걸어 오라 그래요. 이건 도저히 경우도 아니고 매너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민제 넌 가만 있어. 도일은 얼어버린 표정의 여자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하얘졌지만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을 봐서 놀랐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남자의 얼굴은 놀란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늘 비가 많이 왔죠? 비에 젖으셨네요. 인사드리죠. 이번 프로젝트에서 레이체 소속 새 조경 디자이너인 차민제입니다. 

 


" .......... " 

 


경유를 향해 민제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이건 운명이야. 이건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어. 안 그래도 회의 마치고 다시 박물관에 가서 자주 오는 여성인지 문의해볼까 하던 참이기도 했다. 민제 성격상 한번 목표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직진 끝판왕에 직설적인 민제의 성격이라 돌아갈 줄 모르는데, 이렇게 떡 하니 눈 앞에 나타날 줄이야. 

 

초등학생들 사이에, 보슬비 사이에서 여자를 봤을 때와는 또 달랐다. 눈 앞에서 본 더플 코트의 그녀는 더욱 더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뭐에 놀란 건지 얼굴이 경직되고 새하얘 보였지만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그런 거겠거니 생각했다. 놀란 것은 이쪽이 솔직히 더했으니까.  민제와 경유 사이에서 도일은 왔다갔다 하며 서은재 팀장 빨리 오라고 하라고 개거품을 물고 있었고, 

 

 

 

 

 

 

민제는 자신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경유에게 손을 재차 내밀었지만 경유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좀처럼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 제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맞춰 볼까요? 저희 프로젝트 팀에서 같이 일하게 된 조이델 성경유 부팀장님이시죠? 같이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새 조경 디자이너이니 저와 먼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시는 차 팀장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번 일이 워낙 사이즈가 크니까 예민하셔서 그런 거니. 그쪽 실장님은 천천히 볼일 보고 오시라 그러세요. 민제의 환한 목소리에 도일은 방방 뛰었더랬다.  너 미쳤냐고, 난 하나도 안 괜찮다고 방방 뛰었으나 민제는 자신의 손과 악수할 생각은 않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경유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 변함없던 너의 눈빛, 네 미소..

 


" 아...아니예요. 성경유...입니다. "


" 네. 반갑습니다. 차민제입니다. "

 


너를 보면 내겐 야릇한 슬픔..그만큼의 또다른 느낌 하나.
어쩌면..행복이라 이름할 수도 있었을까?



손을 잡는데 경유는 놀라서 금방 손을 빼버렸다. 민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경유는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잠깐...실례하겠습니다. 제가 실장님께 다시 전화해볼게요. 민제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하기도 전에, 경유는 얼른 두 남자 사이를 벗어나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벗어났고 민제는 도일의 어깨를 밉지 않게 두들겼다. 형이 너무 불도저처럼 나오니까 놀란 거 같잖아.

 

도대체 왜 이렇게 앞뒤 안가리고 덤벼들어? 사람한테 급한 일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안 온다는 것도 아니고 아파서 잠깐 늦겠다는 건데.  대체 처음 만나는 사람 무안하게 형은 왜 그러는 거냐고. 민제의 잔소리에도 도일은 입이 튀어나와 있었다. 

 

 

 

 

 

 

 

 

 

 

여하튼 오기만 해 봐. 아프기는 무슨. 아프기는 커녕 세상 팔팔해 보이더라. 도일이 뭐라 하건 말건 민제는 뭔가에 크게 놀란 것 같아 보이는 경유를 걱정해야 했다. 민제와 도일이 티격태격 이야기를 나누는 걸 문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경유는 손으로 입을 가린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벽기둥을 간신히 잡아야 했다. 

 


그대로 네 꿈 속의 천사로 남고 싶은 욕심과 
어이없는 네 기다림을 깨버리고 싶은 충동. 

나는 너를 풀어주어야 했었다. 어린 날의 그 약속으로부터..
아니..아니야. 나는 이리 만신창이가 되어있는데
여전히 변함없는 네게 질투를 느꼈어. 
네가 지닌 네 환상에게도. 

 


경유는 온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경유의 하나뿐인 첫사랑이자 연인이 눈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웃고 있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손의 온기, 그리고 똑같은 눈빛과 목소리를 한 채로. 차민제..이름이 차민제라고 했다. 그제서야 떠올랐다. 그에게 일곱 살 차이나는 동생이 있었다는 걸. 

 


- 동생?


- 지금 한국에서 유학 중이야. 제작년까지 대학 축구 선수로까지 활동했었는데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선수 생활 접고 나처럼 조경 디자인 전공하고 있어.

 
- 오호...형의 뒤를 이은 같은 전공의 동생이라, 왜 이때까지 동생 얘기 한번도 안했어?


- 내 동생이 너무 매력 있어서 자기가 보고 첫 눈에 반할까봐.


- 그렇게 잘 생겼어?


-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일걸. 

 

 


일곱 살 차이나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고, 부모님이 느즈막히 낳은 늦둥이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말까지 들은 적 있었다. 얼굴이 쌍둥이처럼 닮았다더니 경유는 문 뒤에 숨어서 숨소리마저 새어나갈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조금만 있었다간 하얗게 질린 자신의 표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의 동생.  그의 하나뿐인, 일곱 살 터울의 동생..그의 체취를 가지고, 그와 똑같은 체온과 그와 똑같은 눈빛, 목소리를 가진 하나뿐인 그의 동생. 차민우의 동생 차민제..주저앉은 경유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상처와 아픔이 다시 생살을 찢는 중이었다. 첫사랑이자 옛 연인을 사고로 떠나보낸지 이제 겨우 1년 남짓이었다. 일에 미친듯이 몰두해야만 겨우 잊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이제는..이제는 좀 무뎌질 때도 되었다 생각했는데. 그랬는데...그와 같이 일하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똑같은 얼굴을 가진 그의 동생을 보고 일할 용기와 자신이 없었다. 무조건 불가능이었다. 하지만...이번 프로젝트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할 만큼 중요하니 꼭 도움이 필요하다는 은재의 눈빛을 떠올렸다. 은재가 왜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경유는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거기다 그는 아예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살아 생전에 민우의 집에 자신의 존재를 아는 건 민우 어머니 하나였다. 장례식도 멀리서만 봤지 직접 조문하지는 않았다. 민우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얼굴을 보면 민우가 살아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니 다음에 괜찮아지면 보자고 했었더랬다. 그의 동생이 경유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그가 미국 유학생이었을 때부터 만나기 시작한 여자친구인게 다였다. 네번째 약지에 낀 돌고래 모양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경유는 손을 품에 가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민우 씨..
자기 동생을 만났어.
자기와 똑같은 눈빛을 한..

난 이제 어쩌면 좋지...












* * * * * * * * * * * * * *

 


늦게 합류한 은재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의를 끝내고 일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가동될 팀원들은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고 일하기 시작했고, 마헤레 다리 위에서의 은재 모습을 기억해낸 도일은 볼펜 뒷부분을 이빨로 잘근잘근 씹으며 어떻게든 은재의 콧대를 억누르겠다 다짐했더랬다. 첫 출근에 지각을 하셔? 거기다 어시스턴트를 보내? 지가 벌써 이 프로젝트 대장이야 뭐야. 자기 안오면 시작도 안하겠단 소리 아냐. 진짜 웃기고 자빠졌어. 그 다리 위에서 우는 모습이건, 

 

래를 듣고 우는 모습이건,  그 가식적인 가면을 내가 한 순간에 벗겨주고 말 테니까. 반드시..이 프로젝트는 내가 승리하게 되어 있어! 우리 형을 그렇게 만든 네 회사, 반드시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일하는 은재를 노려보던 도일은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팀원들은 오히려 두 회사가 같이 합쳐도 빨리 어울리며 일하고 있는데, 도일과 은재는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에서 반드시 사활을 걸고 이겨야 한다!  라는 게 둘 다 너무 강했다. 서로 이유는 달랐지만. 

 

 

 

 

 

 

 

 

 

조경 디자인을 맡은 민제는 누굴 찾는건지 하루종일 왔다갔다 바빴고, 경유는 은재에게 오늘은 외근을 나가서 둘러보고 필요한 자료를 본사에 가서 조달해 올 테니 프로젝트 팀은 오늘 은재에게 맡기겠다 해서 오늘 하루종일 스튜디오에 보이지 않았다. 

 

점심도 거르고 일하는 은재에게 열이 받았는지 도일 역시 점심도 걸렀고, 그 둘 사이에서 죽어나는 건 공 부장이었다.  두 팀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두 사람이 점심도 거르고 첫날부터 저렇게 불꽃이 튀니 주변 사람이 죽어날 밖에. 도일은 이미 청사진을 준비해 왔다는 듯 포트폴리오 자료를 은재에게 내밀었다. 이때까지 준비한 설계예요. 이번 인테리어에서 유해물질이 적고 자원을 절약할 수 있는 환경마크 인증자재를 사용하는 법을 선택했죠. 또 친환졍 인테리어 자재 취급 의향이 있는 업소에 친환경 건설자재 정보제공, 매장 내 친환경 건설자제 노출빈도 향상, 친환경 건설자재 시공관련 광고 등의 지원 사업을 통해 건설자제 분야의 친환경 제품 보급 촉진과 국민건강 보호도 도모하기로 했구요. 청산유수같은 도일의 말에 은재는 빤히 쳐다보았다. 

 


' 절대 당신은 날 못 이겨. 이번 프로젝트를 얼마나 공들여 코피 쏟아가며 준비했는데. ' 

 


조이델 그룹의 이때까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이라던지 화려한 상류층의 사업만 맡아왔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도일은 더욱 더 조이델 그룹을 좋게 보지 않았다. 특히나 자신의 형과 관련해 안 좋은 기억이 있어 더욱 그렇겠지만 절대 조이델 그룹같은 오직 상류층만 위한 사업을 해온 자들은 절대 건축계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은재가 아무 대꾸가 없자 도일은 의기양양한 채 한술 더 떴다. 조이델이 이때까지 해온 작업과는 정 반대되는 작업이라,  아마 서 실장도 꽤 힘들 겁니다. 건축은 그런 게 아니예요. 건축의 출발점은! 은재의 기를 팍 죽여놓기 위해 도일이 운을 떼자, 포트폴리오를 쭉 읽어보던 은재가 팔짱을 낀 채 도일의 말을 이어받았다. 건축의 출발점..

 


" 건축의 출발점도 도달점도 사랑이다. 프랭크 게리의 말이죠. "


" ...........! "



기를 죽여놓으려던 도일의 눈이 이젠 커질 차례였다. 포트폴리오 파일을 덮은 은재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도일을 쳐다보았다. 도일은 이대론 질 수 없어서 은재를 노려보았다. 서 실장은 건축이 과연 뭐라 생각합니까. 이때까지 조이델이 해왔던 방식과는 전혀 달라요. 그러니 이쯤에서 손털고 나가시는 게 좋을 거요! 

 


" 집이죠. 사랑하는, 소중한 가족들이 모여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 


" ........... "


"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 건축으로 하여금 사람이 공감하고, 감성을 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따뜻하고 소중한 집. "


" ........! "


" 겉치레식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 환경을 생각하고 배려한 공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비로소 완벽한 건축이고 인테리어가 될 수 있겠죠. 행복은, 건강한 삶에서 시작하는 거니까. " 


" ........ "


" 아마, 차 팀장님도 같은 견해일 거라 생각합니다. 맞죠? " 

 


이젠, 아예 놀라움의 벌어진 입이 다물줄을 몰랐다. 
말도 못하게 완벽한 마무리를 해버린 은재를 보며 도일은 기어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공 부장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도일은 은재 따라 첫날부터 야근하기로 결정했다. 야, 내가 말했지. 저거 보통 악바리 아니라고. 너 저러다가 조이델한테 잡아먹혀. 내가 누누히 얘기하지만, 서은재만 따라다녀.  쟤가 뭐하고 뭘  생각하고 뭘 추진하고 뭘 준비하는지 시시콜콜 껌딱지처럼 옆에 딱 붙어서 감시하고 보고해. 그 길만이 살 길이야! 공 부장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맞은편 캐드 책상에서 프린트를 뽑는 은재를 노려보며 도일은 또다시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짜증나. 짜증이 나서 미치겠어. 모든게 다 거슬려 죽겠어.  은재가 대답한 건축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사는 집이라는 대답도 너무 마음에 드는 자신의 가치관이라 더욱 싫었다. 자신과 형이 처음 건축 사업을 시작할 때 내세웠던 마인드이기도 했다. 소중한 집..

 

 

 

 

 

 

 

 

부모님을 잃고 형과 단 둘이 살아온 도일은 소중하고 화목한 집을 만들기 위해 건축 디자이너라는 꿈을 꿨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집을 만들어 행복을 되찾아 주기 위함이었다. 그걸 은재가 얘기하고 나니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피터한테 얘기할 때도 얼마나 이 부분을 강조했었나. 하지만 파트너인 피터는 단 한번도 도일의 가치관을 따라주질 않아 더욱 손발이 안맞고 애를 먹었었다. 도일은 새 파트너인 은재가 자신과 가치관이 놀랍도록 정확하게 맞다는 사실이 너무 짜증이 났다. 하나를 얘기하면 열이 맞았다.  잠깐 맛배기만 보여줘도 자신과 소울메이트처럼 마음이 통하는 게 너무 싫었다. 

 

 

 

 

 

 

왜 조이델이야 왜. 왜 이 악마같은 악바리 여자냐고. 이 여잔 믿을 수 없어. 절대 안 믿어. 신뢰할 수 없는 여자야. 나한테 보여주는 저 띠꺼운 모습과 혼자 있을 때 처연한 모습 둘다 가짜야. 분명히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거야. 조이델 그룹을 배경으로 가졌고 곧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리노베이션에 목을 매.  보통 상류층 여자들은 그냥 시집 잘가는 게 꿈이라던데 무슨 여자가 이렇게 야망이 커. 도일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점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첫날부터 야근이라니 도일도 질 수 없었다. 하필 자리도 맞은편일 게 뭐람. 공 부장 말이 맞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껌딱지처럼 붙어다니리라 결심한 도일은 지지 않기 위해 눈이 빠져라 일에 몰두했다. 은재가 캐드 앞에 서자 재빨리 도일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캐드 제가 먼저 쓸 겁니다. 도일의 말에 은재는 황당하다는 눈빛이었으나 도일은 눈이 큰 은재에게 질세라 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뭐 문제 있어요? 도일의 유치한 선제공격에 은재는 기막힌지 돌아섰고, 캐드 앞에 선 도일은 유치원생처럼 비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캐드를 다 쓰고 돌아서는데 막 돌아서는 은재와 부딪혔고, 그 바람에 은재가 항상 분신처럼 쓰고 다니는 뿔테 안경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은재와 부딪힌 반동으로 반사적으로 도일의 구두가 안경을 밟았더랬다. 

 


빠직 - 

 


" !!!!!!!!!!!!! "


" 아, 미..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

 



은재는 주저앉아 완전히 박살이 난 뿔테 안경을 보고 어쩔 줄 몰라했고, 안경을 부숴버린 도일은 더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은재의 안경을 어쩔 줄 몰라했지만 은재는 부숴진 안경을 두고 도일을 확 노려보았다.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녀요! 그러게 캐드 다 쓰지도 않을 거면서 먼저 밀고 들어오는 유치한 짓 하더니, 이젠 일부러 내 안경도 부러뜨려요? 도대체 속셈이 뭐냐구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 은재가 다다다 쏘아붙이자 안 그래도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있던 도일은 머리만 긁적였다. 불의의 사고였잖아요.  내..내가 다시 안경 사다주면 될 거 아닙니까! 도일은 부숴진 안경을 두고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안경이 없는 은재의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희고 큰 눈이 시선에 들어왔다.

 


저 고칠 수 없는 질병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이경교, 꽃노을

 


두근 두근 두근...



거의 화장기 없는 얼굴로 부스스한 옷차림에 머리카락도 한번 질끈 묶어버린 게 전부인, 그 뿔테 안경 너머의 모습은 말간 눈빛 뒤로 하얀 얼굴에 큰 눈, 고운 피부에 그리고 알싸하게 퍼지는 페퍼민트 향기..은재의 맨 얼굴을 바라보던 도일은 이마부터 목 부근까지 체온이 확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은재와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순간, 숨을 쉬기도 어려웠더랬다. 아..내가 왜 이러는 거지? 깨진 안경을 두고 인상을 확 찌푸리고 있던 은재는 깨진 안경을 쓰려고 얼굴 가까이에 가져다 댔고, 깨진 안경을 쓰려는 은재의 눈을 손으로 갑자기 확 막은 도일의 눈이 커졌다. 쓰지 마. 다치잖아.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자신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간 도일은 손으로 깨진 안경을 확 나꿔채버렸다. 놀란 은재가 도일을 쳐다보자 깨진 안경을 쥔 도일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알 수 없는 화학작용이 두 사람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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