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옛사랑의 그림자(Old Love's shadow)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문트 탑(Munttoren) 근교 레스토랑 

 

 



1490년에 만들어진 시가 방벽의 일부였던 첨탑이다. 문트는 주조라는 뜻으로, 1670년대, 한때 여기서 화폐를 만들었던 일로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탑 위에는 헤모니(Hemony)의 작품인 28개의 종으로 만든 카리용이 있는데, 화요일과 금요일 12시 30분부터 1시 30분까지 종을 울린다. 일찍 일이 끝나고 팀원들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점심 겸 회식이 있었다. 

 

팀원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은 경유의 맞은편에 밝은 에너지를 뿜으며 민제가 앉았다. 자리 없는 것으로 알고 앉겠습니다. 민제 목소리에 경유는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팀원들 옆자리가 많았고 다행히 팀원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식사하느라 바빠서 여기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팀원들 자리도 많은데 그쪽으로 옮기는 게 어때요. 경유의 차디찬 목소리와 쳐다보지도 않는 눈길에 민제는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저도 조용한 걸 좋아해서요. 

 


" 남는 자리가 많은, "

 

" 부팀장님이랑 같이 앉아서 먹고 싶어서요. "

 

" .....차 대리님! "

 

" 이제야 쳐다봐 주시네요. "

 


민제의 도발적인 발언에 경유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들자 그제서야 민제가 힐긋 웃으며 손으로 턱받침을 해왔다. 처음 만난 이후로 모든 팀원들, 직원들이랑은 인사하면서 나랑은 눈도 안 마주쳐서 제가 부팀장님한테 대단히 실수한 게 있던지, 

 

아니면 날 왜 그렇게 안 좋아하는건지 이유가 궁금했거든요. 민제의 밝고 생기있는 목소리에 경유는 입을 다물었다. 여긴 회사예요.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은 것 뿐이죠.  경유가 또 말을 끊는 사이 준비된 식사가 날라져 왔다. 스테이크를 능숙하게 써는 동안에도 경유는 민제를 쳐다보지도 않고 식사만 했지만 민제는 먹지는 않으면서 경유를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먹는 것도 저렇게 예쁜 거지. 완전히 경유한테 뻑 가버린 민제는 경유의 얼굴만 보아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경유가 쳐다보자 그제서야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하는 민제가 고개를 숙이자 그제서야 경유는 고개를 들었다.  스테이크를 썰면서 먹던 민제가 당근과 콩을 골라내면서 먹고 있었다. 그걸 본 경유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간, 숨을 쉴 수 조차 없어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 아, 진짜 애도 아니고 왜 야채를 다 골라내.


- 소스에 묻혀진 야채는 흐물흐물해서 싫어. 먹으면 두드러기 돋을 거 같고. 


- 시끄럽고 빨리 당근이랑 콩 잘 먹어야 키 크는 거 몰라?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 와, 이런 어린애 식성이랑 같이 결혼해야 한다니. 나 어떡해?


- 그니까 성경유 평생 나 책임져야지 뭐. 성경유가 입에 넣어주면 먹어볼게.


- 어후.

 



" 부팀장님...? "

 

" ............ "

 

" 부팀장님...?! "

 

" .........아, 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식사하는 도중에. "

 

" .....콩이랑 당근은 원래 안 먹어요? "

 


고기만 먹고 야채가 비워져 있는 그릇을 보고 경유가 입을 열었다. 경유가 처음 꺼낸 말이기도 했다. 민제는 신이 나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소스에 묻혀진 야채는 흐물흐물해서 싫어. 먹으면 두드러기 돋을 거 같고요. 원래 식성이 어린애 입맛이어서요. 민제가 약간 부끄러운 듯 쓴 미소를 짓자 경유는 포크를 떨어뜨렸다. 묻는데 한참이나 걸려야 했다. 금방이라도 목이 메어서 쉰 목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뭐라고요..?

 


" 예? "

 

" 지금 방금 뭐랬어요...? " 

 

" 아, 어린 애 입맛이라고.."

 

" 아니 그 전에..그 전에 했던 말요. "

 

" 소스에 묻혀진 야채는 흐물흐물해서 싫어서 먹으면 두드러기 돋을 거 같다고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순 없어. 어떻게 하는 말마다 똑같고, 닮은 목소리도 지금 참기 힘들어 죽겠는데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 눈가가 뜨거워진 경유는 안간힘을 다해 포크를 쥔 손에 다시 힘을 주어야 했다. 손이 아플 정도로 힘을 주지 않았다면 민제 앞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민제는 다행히 경유의 그런 사정은 모른 채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 아녜요? 지난 번에도 그러더니..병원 가요. 아니, 같이 병원에 가요. 민제가 일어나기 위해 호들갑을 떨었지만 경유는 차분히 숨고르기를 했다. 스스로 자제하자고, 

 

 

 

 

 

 

얼마나 다독였던가.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 경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일어나는 경유를 따라 일어난 민제는 팀원들을 지나 식당을 나서는 경유를 따라잡았다. 제가 뭐 그렇게 부팀장님한테 잘못한 거 없는 거 같은데, 뭐 제가 실수라도 했어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요. 

 

그런데 왜 저한테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죠?

 

착각이겠죠.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거 뿐이예요.

 

지금은 회사 아니잖아요.

 

팀원들과 같이 밥 먹으러 왔으니 엄연히 공적인 자리죠. 

 

........

 

더 할 말 남았습니까?

 

네. 

 

.....! 

 


보통 이럴 땐 할 말 없다고 하고 비켜주는 게 순서인데, 대놓고 할 말이 더 있다고 하니 경유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까이서 본 경유는 더욱 눈부시게 예뻤다. 맑고,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스물 여덟의 민제는 그렇게 온 마음을 경유에게 다 뺏긴 채 하루 하루 숨쉬기도 힘들었다. 

 


" 남자친구 있어요? "

 

" ........... "

 

"  그냥 궁금해서요. 사적인 질문인데, "

 

" 있으면 어쩔 건데요. "

 

" 그래도 상관 없긴 한데. "

 

" ...........결혼했어요. 이제 됐습니까? "

 

" ........! "

 

" 방금 한 무례한 질문은 잊어줄게요. 이 대답은, 더 이상 날 사적인 질문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답으로 해석해 주길 바래요. "

 

" ........! "

 

" 가능하면 면대면해서 이런 무례한 질문으로 애매한 사이 이어나가지 않도록 하죠. 할 말이 있으면 조경팀 팀장님을 통해서 나한테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공식 회의에서 분담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

 

경유는 차갑게 돌아섰고, 경유가 결혼했다는 얘긴 처음 들은 터라 민제는 낮은 한숨을 푹 쉬었다.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이었으니까. 와, 이 창피함을 어떻게...얼마나 내가 무례하고 볼썽사납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던 민제는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더랬다. 아니, 근데 왜 나는 결혼했단 얘기 못 들었을까. 결혼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저 먼 곳으로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모든 것이 조급했다.
그냥..

 


홀리고, 헤어나올 수 없고 그런 마음들이 옅어질까봐.
그녀는..
왜 그렇게 나를 칼 같이 거절하는 내내,
더 아름다웠는지. 





" 오빠! 민제 오빠!!!! "

 

" 유..시은.......?!!!! "

 


회사로 들어오는데 회의실 복도에서 누군가가 민제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경유와 팀원들을 앞세우고 굉장히 의기소침해 있던 민제는 고개를 들었고, 민제를 향해 달려오던 귀엽고 깜찍한 여자애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것처럼 앳되고 어린 여성이었다. 민제를 향해 달려오던 여자는 금방이라도 포옹할 것 같이 달려왔고, 팀원들이 야유와 환호를 보내는 내내 경유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걸음을 멈추었지만 금세 걸음을 빨리 해서 복도를 벗어났다. 경유의 뒷모습만 내내 응시하던 민제는 당황해서 시은이 달려오지 못하게 손으로 막았고, 복도 회의실 입구에서 시은을 통과시켜 준 도일은 구겨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마주보았다. 

 


" 적당히 좀 해. 여기 회사다. 견학시켜달래서 데리고 들어왔으니 딴 생각이 있었구만. "

 

도일이 인상을 팍 쓰자 시은은 도일을 향해 메롱 처럼 혀를 내밀었다. 그야 도일 오빠가 민제 오빠랑 일하는 거 진작 가르쳐줬으면 이런 고생 안하잖아. 암스테르담에 이사 온 것도 얘기 안 하고. 진짜 차도일 내 인생에 도움 하나도 안되고 말야. 

 

시은은 단단히 삐진 얼굴이었고 도일도 기가 막혀서 웃는 통에 민제는 눈 앞에서 사라진 경유의 뒷모습을 찾느라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시은은 도일의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이었다. 시은은 도일과 친한 민제를 어릴 때부터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현재 대학을 휴학하고 유럽 어학연수 중이었다. 일이 시작되었는데도 시은은 사무실에 눌러앉아 민제를 따라다니기 바빴다. 도일은 여긴 일하는 곳이니 왔다갔다 하지 말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으나 시은은 지금 아니면 민제 오빠 만날 수나 있냐며 땡깡을 부리면서 아예 도일을 넉다운 시켜버렸다. 어릴 때부터 부잣집 딸로 자라 부족한 것 없이 공주처럼 자란 시은은 다소 자기중심적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시은의 '민제 사랑'이 유별난 건 도일이 익히 아는 바라서, 

 

다른 것도 아지고 민제에 관한 일이라면 시은은 절대 양보가 없었다. 기어이 도일을 넉다운시키면서까지 민제에게 커피를 갖다주었더랬다. 오빠 좋아하는 아메리카노야. 시은이 커피잔을 내밀었지만 이미 민제는 어딜 다녀온건지 커피잔을 닫고 있는 중이었다. 

 


엥? 카푸치노잖아? 거품 많다고 싫어하잖아. 너무 달다고. 

 

......내가 먹을 거 아니야. 

 

응? 그럼 내꺼?

 


시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왠 횡재냐는 듯한 얼굴로. 민제는 손을 내민 시은을 지나쳐 맞은편에서 일하고 있는 경유의 책상 앞에 섰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경유가 쳐다보자 민제는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쉬엄 쉬엄 하세요. 

 

감기 걸리겠어요. 민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쳐다보았지만 경유는 흘깃 올려다보다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내려깔았다. 커피 마셨습니다. 경유의 딱딱한 말에도 민제는 다시 웃었다. 그럼 한 잔 더 하면 좋죠. 아니면 나중에 다시 데워서 마셔도 되고요. 

 

 

 

 

 

 

그럼 난 전달했으니 갑니다.  민제가 돌아서면서 사무실 입구를 나서자 시은은 자신에게 줄 커피인 줄 알았는데 경유에게 커피를 주자 좀 토라진 얼굴로 입이 튀어나온 채 쪼르르 민제에게 달려갔고, 민제와 시은을 두고 팀원들 사이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결혼했다는 말을 한게 천만 다행이었더랬다. 그러고 나니 자신도 좀 편해진 것 같았고, 시은과 민제가 서로 사귀는 사이 아니냐는 팀원들 말을 들으니 더욱 듣는 기분도 나아졌다. 상대는 일곱 살 아래였다. 괜히 닮은 목소리로, 말투로, 비슷한 식성으로 흔들린다는 게 되려 우습게 느껴졌으니까.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내려다보던 경유는 컵홀더 뚜껑을 열어보았다.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는 커피잔 위에 둥그스름하게 번진 거품이 보였다. 

 


- 짜잔! 차민우표 카푸치노가 나왔습니다아아아-


- 꺄아~역시 우리 차민우가 최고네. 내가 하루에 커피 석 잔 마시는 거 어떻게 알고.


- 거기다 달달한 거품 있는 카푸치노가 취향인 것도!


- 나 참.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아는 거 아냐? 카푸치노 취향인 건 근데 어떻게 알았대?


- 아까 은재 씨가 얘기해줬지. 은재 씨한테 네가 좋아하는 거 내가 받아적는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 어쩐지...난 나한테 관심이 진짜 많아서 마음이 통한 줄 알았네.


- 그것도 맞아. 난 이제 카푸치노만 마실 거거든. 

" .......... "

 



여전히 모락모락 김이 나는 카푸치노 커피를 내려다보던 경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민제가 말하는 것마다 모조리 그를 생각나게 하는 것 투성이였다. 은재에게는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자신 있다고 얘기했지만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을. 

 

쌍둥이도 아니고 일곱 살 차이나는 형제일 뿐이었다. 경유가 사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차민우 하나일 것이었다. 그는 민우의 동생이었다. 민우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와 똑같은 목소리로, 그와 똑같은 눈빛을 한 그가, 

 

 

 

 

 

 

 

이제 그와 나누었던 추억의 발자국마다 똑같은 자취를 남기고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결혼했다고 철벽을 치지 읺았다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경유는 떨리는 손으로 카푸치노를 입에 대 보았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그리고 시나몬 향이 나는 카푸치노...커피잔을 내려놓은 경유는 눈물 한 방울을 참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사무실 안에는 사람들이 몇 없었다. 금세 뒤돌아서서 눈물을 삼킨 경유는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민우야...
이건 꿈이지..

이건 꿈이라고 말해줘야 해.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너무 견디기 힘드니까. 











* * * * * * * * * * * * * * *


애써 삐지고 서운해하는 시은을 결국 보낸 민제는 퇴근 시간에 맞추어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퇴근하는 민제를 본 공 부장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고, 민제는 공 부장에게 깎듯이 인사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퇴근하시네요? 민제의 말에 공 부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프로젝트 팀 구성하느라 몇일 밤샘하고 야근하고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마누라가 얼마나 바가지를 긁던지, 오늘 안 들어가면 나 맨몸으로 쫒겨나야 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차도일이고, 하나가 내 마누라야. 공 부장의 뜬소리에 민제도 따라 웃었고, 퇴근 카드를 찍는 공 부장이 집사람 얘기를 하자 마침 생각났다는 듯 민제는 공 부장의 팔을 잡았더랬다. 부장님, 조이델에서 온 부팀장님 말이예요. 1주일 내내 거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남편 되시는 분이 뭐라고 안해요? 업무에서 좀 빼드려도 될 것 같은데. 민제의 말에 공 부장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 부팀장? 남편이라니?



결혼하셨잖아요. 


누가, 경유 씨가? 

 

아니예요?


뭔 소리야. 우리 예쁜 부팀장님한테 무슨 헛소문. 결혼의 결, 자도 안 꺼낸 사람한테. 너 어디가서 그런 헛소문 듣고 다니지 마. 시집도 안간 처녀 혼삿길 막을 일 있어?


............


왜 그래? 누가 그러는 건데. 


아, 아니예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민제가 손사래를 치자 공 부장은 쯔쯔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참 귀 얇아서 팀원들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소리 들은 모양이다만 절대 그럴 사람 아니야. 얼마나 경우 바르고 예쁘고 참한데. 사실 조이델에서 온 실장님은 워낙 까칠하잖아. 우리 차 까칠이가 저렇게 개거품 무는 이유가 있어. 예쁘고 일도 잘하지만 서 실장님이 까칠한 사포 같다면 경유 씨는 진짜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이지. 얼마나 사근사근 나긋나긋 예쁘고 다정다감한데. 너 어디 가서 괜히 멀쩡한 처녀 혼삿길 막히는 소리 하고 돌아다니지나 마. 아직 결혼의 결, 자도 안 꺼낸 깨끗한 아가씨니까. 민제는 공 부장의 말에 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정하다고요? 부팀장님이요? 민제는 더욱 의아해졌지만 공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밤에 야식도 사다주고 기침 한번 했더니 드링크제도 사다주고, 아침에 커피는 기본이고 배고플때마다 출출할 때마다 간식도 사주고,  모르는 거 있으면 얼마나 따뜻하고 다정한데. 우리 스튜디오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들한테도 따뜻하고 다정하게 말 거는 사람이 부팀장이야. 그 얼굴에 그 분위기에 성격까지 그러는데 누가 안 좋아해. 공 부장은 시계 들어다보니 늦었다면서 회사 문을 나섰고, 멍하니 복도 앞에 서 있던 민제는 더욱 궁금증에 휩싸였다.  공 부장이 말하는 경유와, 자신이 겪은 경유는 전혀 딴 사람이었다. 공 부장이 나간 회사 입구를 바라보던 민제의 눈에 투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가 보였다. 소나기인건지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캐드 작업 마무리까지 마치고 늘 그렇듯이 항상 마지막에 나온 경유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 일기예보라도 보고 나올걸. 요즘 티비랑 뉴스 볼 시간이 나야 말이지. 이 늦은 시간에 택시가 잡힐 리 만무하고, 버스는 끊길 시간이고 지하철 막차가 아직 있으려나. 지하철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걸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옷을 다 버린다고 봐야 했다. 경유는 무거운 가방을 머리 위로 이고 뛸 준비를 하고 있던 와중에 경유의 캐드 가방을 누가 휙 머리 위로 스틸해 갔다. 놀란 경유가 고개를 들자 이미 경유의 캐드 가방을 다른 쪽 팔에 끼운 민제가 웃지도 않고 비를 만져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집까지 태워다 줄게요. 그쪽이 이뻐서 아니니까 절대 오해 마세요. 서은재 실장님이 전화했어요. 비 많이 올 텐데 부팀장님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외근 끝나고 집에 가다가 소나기 보고 전화하셨대요. "


" ........! "


" 공 부장님은 집에 일이 있다고 가셨고, 팀원들도 오늘 다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 저 하나거든요. "


" ..........저, "


" 버스 타고 간단 소리 마세요. 끊겼으니까. "


" 지하철 타고 가면 됩니다. "


" 30분이나 걸어가야 하는데 가다가 감기 걸려서 결근하면 팀 책임이예요. " 


" 그럴 일 없을 테니 염려 마세요. "


" ..그럴 일이 왜 없어요? 소나기를 30분이나 맞고 가는데 어떻게 감기에 안 걸려요? 부팀장님이 신이예요? 소나기 맞고 감기 안 걸린다는 자신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요? "


" ..........내가 서 실장님껜 알아서 잘 말할테니 여기서 그냥, "


" 바래다 주지도 않았는데 왜 바래다 줬다고 거짓말해야 해요? 난 싫은데. "

 


꼬박꼬박 말을 이어받으며 절대 질 생각이 없어보이는 민제를 보며 경유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경유는 더 말해봤자 말로 이길 자신이 없을 것 같아 아예 말없이 자리를 피했고, 경유 앞을 가로막은 민제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남편이 올 거예요. 

 

이거 지금 굉장히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거 알고 있죠? 경유의 말에 민제는 빙긋 웃었다. 공 부장 말을 듣기 전이었다면 물러났을 테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유가 밝히기 싫어하니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성 팀장님 괴롭히려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녜요. 

 

 

 

 

 

 

 

 

할 일 없어서 여기 서 있는 것도 아니고요. 우린 한 팀이잖아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비맞고 서 있어도, 같은 팀이면 걸음을 멈췄을 거예요. 우리 팀이니까. 우리 팀이고, 전 레이체에 이제 소속된 사람이라 사람들하고 빨리 친해져야 일의 능률이 오를 것 같아서였어요.

 

그리고 마침 실장님한테 정말 전활 받았어요.  항상 성 팀장님이 파이널로 늦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지금 소나기 오는데 집 근처까지 태워다 줄 수 있냐구요. 실장님이 오늘 외근 때문에 못 들어갈 것 같다고..항상 실장님 차 타고 퇴근했다면서요.

 

 

 

 

 

 

 

 

별 뜻 없어요.  실장님이 이렇게 배려해줬는데 내가 팀장님 태워주지도 않고 배려하지도 않고 비 맞고 갔다면 실장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팀장님은 알아서 잘 말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팀장님 시각이죠. 실장님 눈에 비친 부하직원인 나는 어떨지 좀 배려해주면 안 돼요? 집 근처까지 그냥 태워다 주는 것 뿐인데 나한테만 너무 날 세우는 것 같아요. 민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틀린 말이 없었다. 이쯤 되어서 거절한다면 경유만 이상한 사람이었다. 결국 경유는 민제의 차에 타야 했다. 차에 타자마자 고소한 커피향이 차에 감돌았다. 

 


아, 이거 커피..


블루버드벨벳(아르헨티나 커피향)이예요...?


와 어떻게 알아요? 향까지 맞추는 사람 드문데. 

 


민제가 웃으면서 차를 운전했고 민제가 이미 틀어놓았던 라디오에선 로비 윌리암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전 민우가 정말 좋아했던 노래임에는 틀림 없었다. 이젠 부인하기도 지쳤다. 어느 것 하나 그와 연관짓지 않을 것이 없었다. 

 

그냥 눈 앞에 민우가 있는 느낌이었다. 경유도 자신의 철벽이 민제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틀어놓은 커피 주머니 역시 자신의 아이디어였었다. 블루버드 벨벳은 경유가 가장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커피향이었다. 민우가 그걸 알고는 주머니로 만들어 차에 달아놓곤 했던 것이었다. 

 

 

 

 

 

 

 

은재가 왜 민제의 차를 타고 가라 했는지 경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채찍질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다 차를 타고 다녔지만 경유는 차를 운전할 수 없었다. 민우의 사고 이후로는 아예 운전대를 잡을 수 조차 없게 되었던 것이다. 커피 향까지도 겨우겨우 어떻게 참았지만 로비 윌리암스의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눈물이 뚝뚝 흐르는 걸 참질 못하겠더랬다. 팀장님...? 놀란 민제가 아예 차를 세워야 했다. 

 


왜 그래요...? 팀장님...?


미안해요. 먼저 가 볼게요. 


팀장님!!!!



민제가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벨트도 풀고 겉옷과 가방도 내버려둔 채 경유는 빗속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경유의 돌발행동에 민제는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다. 분명 울었어. 노래를 듣자마자 바로...체크무늬 반코트와 핸드백이 바로 뒷자리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었다. 물론 지금 달려가면 잡을 순 있었겠지만 민제는 참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데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잡을 순 없었으니까. 차에서 내려 온 몸이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민제는 멍하니 서 있었다. 왈칵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를 어떻게 잡지도 못한 채 민제는 뭔가 가슴에 멍이 하나씩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경유 때문에 설레여서였다면 지금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프고 아파서 내내 숨기고, 거짓말하고, 그리고 마음이 아파서 저렇게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걸까 싶어서. 

 


그렇게 우는 걸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한구석에서부터 누가 비수로 후벼파는 것 같았어.

 


울지 않게 해주고 싶었어.
소리도 못 내고 우는 걸 보니,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고 싶어서. 












* * * * * * * * * **  * **  * **

독립하겠습니다.

 


컨벤션 쇼가 끝난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외삼촌 내외를 향해 은재가 처음 말을 꺼냈다. 외숙모인 윤지선 여사는 반색하며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강 대표는 힐난하는 듯한 눈빛으로 은재를 노려보았다. 안 돼. 강 대표의 속셈을 누구보다 아는 지선은 몇 번이고 이런 시도엔 항상 남편의 반대로 끝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번엔 절대 유야무야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짜피 이 프로젝트만 완성되면 독립할 생각이었어요.  그동안 돌봐주시고 키워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은재의 말에 외삼촌인 강 대표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더랬다.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안다만은 앉거라.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도 다른 사람한테 넘기도록 하고.  강 대표 말에 외숙모인 지선은 기막힌 표정이었다. 이 좋은 기회를 왜 날려요? 회사에 얼마나 이득인데요. 그리고,

 

 

 

 

 

 

 

 

은재가 이걸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공을 넘기란 거예요. 조이델 회사, 은재 작품이예요. 얼마나 고생해서 은재가 마련한 회산데 그걸 엎어요. 독립하기 위해서 그 회사 준비한 거 몰라요?  가지고 가. 그리고 우린 괜찮으니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렴. 지선은 은재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변할까 싶어 당장 짐이라도 싸줄 기세였다. 온화한 외숙모의 얼굴로 돌아간 지선을 바라보던 은재는 왜 지선이 저렇게 나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지선을 째려본 강 대표는 은재를 쳐다보아야 했다. 

 


" 옷차림도 다시 한번 그렇게 차려입으면 혼이 날 줄 알아라. "

 

" 저도 성인이예요. 독립할 때가 되었어요. "

 

" 안 돼!! 너 혹시 남자라도 생긴 거야? "

 

" .............."

 

" 그럼 그렇지. 우리 은재만한 지성과 미모에 남자가 없을리가 없지. 있으면 당장 결혼...."

 

" 안된다면 안되는 줄 알아! "

 


강 대표가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강 대표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보통 일은 무마되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엔 지선도 지지 않았다. 이번엘 잘 넘기지 않으면 영원히 늙어 죽을 때까지 강 대표는 은재를 보내지 않을 태세였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은재 독립시킬 거예요. 이번엔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막지 못할 거예요.  은재가 원하고, 은재 이제 성인이예요. 스무살이 아니라 서른 여섯이라구요. 거기다 자기 회사도 차린 애예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 떠도는 거 나도 이제 더이상 못참겠구요. 지선의 말에 강 대표는 은재의 팔을 잡아당겼다. 너무 힘주어 세게 잡아당긴 탓에 은재의 가녀린 팔목은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 아악..! 은재가 소리를 질렀지만 강 대표는 이미 은재에게 남자가 생겼다 생각하니 눈이 뒤집힐 태세였다.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랑 사귀고 다니는 거냐.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 사귀는 것도 결혼도 절대 내 허락 없이는 안된다고! 

 


사귀는 사람이 있건 결혼할 사람이 있건 그건 제 문제예요. 

 

안 된다고 했지!!

 


짜악 - ! 

 


기어이 이성을 잃은 강 대표의 손바닥이 날아들었고 팔을 강하게 잡힌 채 거의 놔둥굴다 시피한 은재는 서랍장에 머리를 부딪히며 도자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는 바람에 도자기가 깨지면서 파편 때문에 금세 온 얼굴과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늘상 있어온 일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외삼촌, 이를 절대 두고볼 리 없는 외숙모..그 사이에서 늘 넝마가 되어 학대 아닌 학대를 받는 건 은재 자신이었다. 도망쳐야만 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도망칠 거야. 
짐승들이 없는 곳으로.

 


17년을 숨죽여 참아왔어..
다시는, 절대로...절대로 참지 않을 거야...!

 


멍과 피로 얼룩진 얼굴을 감싸안은 채 은재는 그대로 강 대표를 완력으로 힘껏 밀고는 신발도 신지 않고 밖을 뛰쳐나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의 강 대표를 쏘아보던 지선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미쳤어요. 그리고 이거 하나만은 분명히 알아둬요. 은재는 당신 조카예요. 그 사실은 변함없죠. 다른 사람들이 떠도는 소리가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전에, 난 그 애를 반드시 내 보낼 거예요! 

 

....!

 

당신이란 괴물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꽃시장(Bloenenmarkt op Singel)근교 편의점 

 



싱겔 운하(Singel)의 문트 탑에서 코닝크스(Koningsplein) 광장의 다리까지 운하변에 가득하게 들어서 있는 꽃시장은 일종의 노점상 모습이다. 튤립은 4월경부터 그 모습을 나타낸다. 컨벤션 쇼 이후로 거의 쉬지 못하고 내내 야근으로 달렸던 도일은 요즘 들어 겨우 쉬는 중이었다. 오늘 간신히 일을 빨리 마치고 맥주 한 캔 사들고 쉬기 위해 집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왠 소나기야 싶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보았다. 바로 근처에 아파트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맥주 두 캔과 안주를 사들고 편의점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맨발로 비를 쫄딱 맞은 채 편의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어디서 뛰어나온 건지 맨발인지 발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디서 맞은 건지 얼굴과 온 등이 시뻘건 핏자국이었다. 이봐요. 괜찮으세요? 
네덜란드 어로 묻자 여자가 어깨를 떠는 게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뒷모습인데..어깨에 손을 올리려는데 여자가 천천히 도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모습을 확인한 도일은 눈이 커지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 서은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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