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 신데렐라(Half Cinderella)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마담 투소 밀랍인형관(Madame Tussaud Scenerama) 근교 M 스튜디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밀랍 인형들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는 인형관은 주로 정계, 예술계, 스포츠계 인물들이 많은데 거울의 방에는 간디, 네덜란드의 여왕 베아트릭스, 대처, 미테랑 등이 있고,  렘브란트의 방과 지상의 낙원으로 화제를 모았던 보스의 환상적인 방도 있다. 

 

협약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조인트하게 된 도일의 회사인 레이체 건축회사와 은재 회사인 조이델 건축회사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모처의 스튜디오에 모여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은 조이델 식구들과 레이체 식구들이 처음 스튜디오에 모여 회의를 하는 날이었다. 처음에 조이델 스튜디오에서 진행하기로 하자고 하자 공 부장은 반색했지만 도일은 자존심상 허락할 수 없다며 박박 우기는 통에 회사에서 멀리 덜어진 곳에서 도일과 은재가 반반 부담하여 큰 스튜디오를 임대했고, 

 

 

 

 

 

오늘은 두 회사의 팀원들이 다 모이는 날이었다. 각자 기존 팀원에서 도일네 회사에서 조경 디자이너를 섭외하기로 했고,  은재네 회사에선 은재의 조수이자 일을 도와줄 토목사업과 부팀장을 데려오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은재보다 더 일찍 도착한 도일은 팀원들에게 아침부터 청소를 시키며 호랑이 교관으로 변신했더랬다.  은재와 조이델의 기를 꺾기 위함이었다. 

 

여기 먼지 쌓인 거 안 보여? 아까 닦아도 한번 더 닦으라고 몇 번을 말해. 책상은 얼른 제일 좋은 위치 선점하고, 안 온 인턴들 자리 빨리 사수해. 우리가 젤 좋은 자리여야 해! 도일은 입에 거품물고 난리가 났고, 이제서야 아메리카노를 들고 서서히 출근한 공 부장은 기가 막혀서 입이 떡 벌어졌다. 공 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아침부터 악마같은 상사 밑에서 갈려가고 있는 직원들을 내보내야 했다. 무슨 청소 용역하는 팀이 새벽에 싹 청소해놓고 간 깨끗한 새 스튜디오구만. 먼지 한톨도 없어. 

 

 

 

 

 

 

 

 

 

 

그리고 사람 들어와서 생기는 먼지 그런 거도 없으면 삭막해서 살겠니? 거기다 조이델에서 큰맘먹고 장만한 공기청정기가 몇 대나 있는데. 기계는 공으로 노냐? 늬들 나가서 브런치나 먹고 와. 스튜디오 앞에 카페테리아에서 브런치 기가 막히더라. 

 

심지어 공짜야. 조이델에서 이번에 복지에 신경도 많이 썼다 하니까 얼른 튀어갔다 와. 공 부장 말에 직원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나갔고, 공 부장을 노려보던 도일은 이를 갈았다. 아직 청소하고 손볼 곳이 쌨는데 형은 대체 누구 편이야. 도일의 볼멘소리에 공 부장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평화를 수호하는 중립이지. 너 기합 너무 들어갔어. 우리 팀원 애기들이 너 말고 서은재가 좋다 그러고 단체 이직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 

 


" 그놈들한테 절대 선수를 빼앗길 순 없단 말야! "

 

" 서은재 쫓아다니면서 감시하랬지 우리 애들 일도 하기 전에 뼈부터 갈아넣으랬니? "

 

" 혀엉!!! "

 

" 넌 서 실장이나 집중 마크해. 그 여자가 어딜 가든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껌딱지처럼 따라붙으라고. "

 

" 미쳤어? 돌았어? 난 싫댔지. "

 

" 안그러면 뒤처져. 그거 말곤 답 없다, 너? "

 

" 역시 아침부터 사이가 좋은거 보니 이번 프로젝트는 대박나겠는데요? "

 

" !!!!!!!!! "

 


마지막 말은 입구에 커피와 샌드위치 봉투를 들고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다리가 긴 남자의 목소리였다. 서로 티카티카하면서 싸우기 바쁜 도일과 공 부장은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차민제! 도일의 큰 목소리에 그야말로 모델같이 기럭지도 길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은 훈남이 양손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흔든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늘 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제 살았다. 난 아메리카노 들고 사라질 테니 얘기 좀 해봐. 프로젝트 첫날부터 독이 잔뜩 올라서 벌써부터 살벌한 기가 장난 아냐. 

 

우리 새 조경 디자이너인 차 대리만 밑고 갈게. 공 부장은 민제의 손에 들린 커피를 들고 사라졌고, 도일은 짜증을 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공 부장님, 지금 가면 어떡해! 지금부터 할 일이 태산인데에!  공 부장을 부르려는 도일을 막아선 민제는 차가운 커피를 민제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렇게 추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도 우리 일벌레 차도일 팀장님은 역시 얼.죽.아겠죠?(얼어죽어도아메리카노). 민제의 너스레에 도일은 눈을 흘기며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1주일이나 걸린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그야, 차 팀장 엄살이 어지간해야지. 연락 듣자마자 바로 티켓팅 했다는 거 아니야. 

 

대단히 황송하여이다. 집은 어쩌고.

 

유럽 빌라야 워낙 빨리 팔리는 거 몰라? 회사 근처에 얻었어. 

 

어머닌 안녕하시지?

 

늘 잔병치레지 뭐. 그래도 엄마랑 집 가까운 곳에 얻었어. 

 

같이 사는 거 아니고? 

 

아니. 

 

왜? 이왕 암스테르담으로 왔는데 같이 살 줄 알았는데. 

 

...난 우리 형만큼 엄마랑 친하진 못하잖아. 그런 재준 없어.

 

........

 

걱정 마. 그래도 맷집 하나는 우리 형보다 자신 있으니까. 

 

짜식이..

 

커피잔을 내려놓던 도일은 상념에 젖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제를 바라보았다. 사실 민제를 부를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파트너였던 피터를 은재로 교체하면서 문제가 됐던 조경 팀도 싹 새로 물갈이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는 도일에게 여러모로 사활이 걸린 일이었기에 다른 일이었다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민제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왔다갔다 하던 여직원들이 민제를 보고 요모조모 쳐다보기 바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기에도 훤칠한 스물 여덟의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20대 후반의 훈남은 도일이 가장 아끼는 후배였다. 최근에 형을 사고로 잃고 모든 일을 정리하고 암스테르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아픈 가정사가 있어 왠만하면 민제를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제는 도일의 러브콜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어짜피 빨리 일 시작할 생각이었어.  빨리 일 적응하고 바쁘게 사는 게 어쩌면 도움이 되기도 하고. 견디기는 엄마도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민제의 말에 쓰게 웃던 도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제의 형인 민우는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조경 디자이너였다. 피터의 팀과 일하기 전 도일은 민우와 같은 한 팀이었다. 대학 시절 졸업작품을 같이 준비한 것도 민우였다. 그 덕분에 건축대전대회에도 나가는 등 둘은 대학 동창이었기 때문에 함께 해온 세월이 많았다.

 

민우가 졸업을 마치고 미국 유학을 간 사이에 피터의 팀과 일하게 되었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오랜 친구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한 것이 최근의 일이었다. 민우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되긴 했지만 민우의 장례식에서 상주 노릇을 도맡아 한 것도 도일이었다.

 

 

 

 

 

 

 

 

민제와 형 민우는 쌍둥이도 아니면서 쌍둥이처럼 얼굴이 똑닮아 어릴 때부터 신기하다고 말들이 많았었다. 민제와 민우는 일곱 살 차이였지만 자라나면서 민제는 민우의 얼굴을 복사판처럼 닮았더랬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을 든든하게 받친 기둥인 큰아들을 잃은 엄마는 민우를 잃고 민제와 같이 살기를 바랬었지만 엄마의 유난스런 극성스런 성격을 형과 달리 유들유들하게 받아치지 못하는 민제는 갈등 아닌 갈등 중이었다.  하지만 형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축구 선수를 그만두고 형의 뒤를 이어 조경 디자이너로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민우는..만나고 왔니? 도일의 물음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던 민제는 쓰게 웃었다. 다녀오긴 했는데...역시 형처럼 엄마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자신은 없다, 형처럼 유능한 조경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등등 이딴 잡소리나 지껄이고 왔어. 민제의 말에 도일은 따라 웃었다. 

 


걱정 마. 민우가 생전에도 얘기했지만 감각은 자기보다 동생이 더 낫다 그랬어. 

 

...우리 형이?

 

그래. 

 


쓰디쓴 미소를 짓던 민제는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래..형은 언제나 나보다 낫지. 과연 내가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으려나. 나 조차도 아직 형의 빈자리가 너무 크고 아픈데. 쓰게 웃던 민제는 도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직 우리 같이 일할 팀은 안온 거 같은데, 형이 거품 물 그 대단한 상대는 아직이야? 민제의 말에 도일은 한 삼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내 말이 그 말이야. 오기만 해봐. 아주 그냥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신교회(Nieuwkerk) 근교 조이델 그룹 대표 강진형 대표 본가 

 


왕궁 근처에 있는 후기 고딕 양식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성녀 카타리나 교회라고도 불린다. 네덜란드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곳으로 유명하며, 1980년 4월 30일 베아트릭스 여왕이 이 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화려하고 우아한 4층짜리 저택은 수영장과 풀빌라가 딸린 저택이었고 조이델 그룹이 암스테르담의 유명인사로 자리잡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되었다.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조이델 그룹의 오너인 강한영 대표는 원래 무일푼이었으나 어린 조카를 양육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유산을 양육비로 배당받기 시작하며 갑자기 돈벼락을 맞았다는 둥, 그 조카가 한국 출신 세계적인 재벌가인 대원그룹의 전 오너인 서대식 회장의 맏딸이라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았지만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었다.

 

 

 

 

 

 

 

 

지금은 부모를 잃은 조카를 어릴 때부터 성심성의껏 기르고 양육해온 인자하고 자상한 부부일 뿐이었으니까.  외삼촌 되는 강 대표가 외조카를 양육한다는 이유로 재산을 가로챘다는 소문을 알음알음 어두운 소문 너머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대 재벌가인 대원그룹의 전 오너가 비행기 사고로 죽으면서 다섯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그 자산은 후임 대표이자 처남이 물려받고 나서 더 승승장구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실상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소문이 천천히 물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의 두 신생 건축회사가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물결의 잔해처럼 아주,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은재는 2층에서 내려오면서 신발을 신기 위해 서둘렀지만 응접실에 앉아 있던 강 대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아침 안먹고 그냥 나가는 모양이구나. 강 대표의 뱀처럼 휘어지는 목소리에 은재는 천천히 돌아섰다. 긴 생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톰보이 스타일의 가죽 재킷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이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올해 나이 서른 여섯이었으나 아직도 이십대 후반 같았다. 어떻게 보면 청순하고 어떻게 보면 독기어린 모습이었으나 잘 빚어진 조각 미인 같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얼굴 앞에 강 대표의 시선이 은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렸다. 오늘 프로젝트 첫 출근이라면서. 이렇게 서두를 필요 있니? 천천히,  나가도 되지 않니. 강 대표가 앉으라고 손짓으로 권유하자 은재가 대답할 새도 없이 주방에서 찻잔과 쿠키 세트를 가지고 나온 강 대표의 부인이자 은재에게는 외숙모가 되는 윤지선 여사가 힐난하듯 나섰다.

 


" 당신도 참. 은재가 어디 아침 거르고 나가는 아이예요? 왠 걱정이야. 은재야 알아서 잘 하죠. 어서 가방 내려놓고 앉으렴. 너 주려고 브런치 준비했단다. "

 

" 아녜요, 외숙모. 전 나가서 직원들과 같이..."

 

" 다 네가 오너인거 알텐데 직원들이 부담스럽지. 안 그래요, 여보? "

 

거부할 수 없는 강압적인 분위기로 미소짓는 지선을 보며 은재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고, 강 대표가 흑심있는 미소를 흘리며 옆 자리로 비켜주자 민희는 찻잔에 커피를 따르며 헛기침을 했다. 당신,  오늘 조찬 약속 있다 그러지 않았어요?

 

송 비서가 벌써부터 문 앞에서 기다려요. 늦출 수 없는 약속이라던데. 지선의 말에 강 대표는 눈치없이 어깨만 긁었다. 아 그거? 골프회사 양 사장하고 조찬 모임인데,  라운딩 뛰자는 약속일거야. 다음에 만나도 돼. 급한 약속 아닌데 뭘. 은재랑 같이 아침 먹는게 급하지. 강 대표의 속셈을 다 안다는 듯 강 대표 옆에 앉은 은재를 째려보듯 노려본 지선은 찻잔을 내리는 손등에 살짝 핏줄이 돋았다. 사업가한테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 어딨어요. 송 비서가 단단히 부탁했으니,  얼른 일어나요. 당신은 아침 다 먹고 차까지 마셨으니 더 볼일 없는 거니까. 은재 아침은 내가 챙기구요. 민희가 저렇게까지 얘기하니 강 대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강 대표는 나서다 말고 은재의 손을 오랫동안 잡았다. 옆에 선 지선이 시퍼런 눈으로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로. 

 


회사라고 해서 너무 명품 치장하고 화장하고 다니면 못쓴다. 그건 재벌가 멋모르고 철없는 애들이 소꿉놀이 할 때나 그렇게 다니는 거지, 넌 앞으로 조이델을 대표해야 할 몸이야. 언제나 직원들 보기 부끄럽지 않고 겸손한 모습이어야 해.

 

네. 알겠습니다, 외삼촌.

 

절대 화장하지 말고 앞으로 꾸미고 다니지도 말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강 대표가 은재에게 환하게 손을 들고 인사했지만 점점 굳어지는 은재와 지선의 표정은 왠만큼 풀리질 않았더랬다. 강 대표가 나가고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다가온 지선은 은재의 뺨을 날렸다. 

 


짜악 - ! 

 


" 가증스러운 것. "

 


지선은 금방이라도 한 대 더 때릴 태세였다. 조금 전의 우아하고 자상한 외숙모는 온데간데 없었다. 은재는 평상시 모습이었던 것처럼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늘상 있어왔던 일이었다. 자신을 생각 이상으로 편애하는 외삼촌, 자식 이상으로 변태처럼 쳐다보는 외삼촌, 그런 외삼촌의 시선을 못견뎌 은재를 학대하고 구박하는 외숙모, 자식이 없기 때문에 이 화려하고 우아한 집의 모든 것은 은재 것이었다.  은재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은재를 키워준다는 명목 하에 강 대표 부부가 꿀꺽했고 그것이 조이델 그룹의 원천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조이델 건축회사의 수익이 조이델 그룹의 수익이 된지는 오래 되었었다. 

 

지선은 이 모든 걸 알면서도 은재가 여전히 이 집에 붙어있는 것이 징그럽고 끔찍했다.  약속했었지,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나가서 독립하기로! 조이델 건축회사를 맡은 것도 싫어 죽겠는데, 그걸 빌미로 왜 계속 이 집에 붙어 있는 거니? 내 남편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뻔히 잘 알면서! 이제 협약식인지 뭔지도 했다면서 제발 이 집에서 좀 나가! 설마..내 남편이 널 건드리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차라리 그 꼴 보기 전에 널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 꼴은 절대 볼 수 없지! 외숙모의 잔인무도한 언어학대에도 은재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지선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 잘못했어요 외숙모..앞으론 가능하면 절대 외삼촌과 부딪히지 않을게요. 그러니..."

 

" ........ "

 

" 제발 나가라는 말씀만 하지 말아 주세요. "

 

" 이거 놔. "

 

" 이번 프로젝트만요..이번 프로젝트만 성공할 때까지 이 집에 있게 해 주세요. 부탁이예요..가능하면 외삼촌과 절대 마주치지 않을게요. 그러니 이번 한번만 봐 주세요. 제가 그냥 나가버리면 외삼촌이 더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외숙모..."

 

주저앉아 지선의 다리를 붙들고 울부짖는 은재의 모습에 지선은 질린다는 듯 은재를 밀쳐내고 응접실을 나가버렸고, 어깨를 떨면서 소리없이 울던 은재는 지선의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애처롭게 떨면서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차분히 눈물을 닦아내리고 있었다. 갈수록 눈물 연기가 느네. 무미건조하게 말하던 은재는 뺨을 맞아 터진 입술의 핏자국을 닦아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나가. 내가 어떻게 무일푼으로 아무것도 없이 나가겠어? 

 

여기까지 어떻게 참고 기다렸는데. 내가 저 변태같은 놈과 니 학대를 얼마나 당하고 또 당하면서 기다렸는데. 이 회사는 반드시 찾고 나갈거야. 내 돈. 내 부모님이 나한테 물려주신 유산이야. 절대 늬들 게 아니라고. 이걸 고스란히 늬들 손에 넘겨두고 갈 순 없지. 내가 어떻게 버틴 세월인데, 절대 지지 않아.  주저앉았던 은재는 지난 시간과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춥고 외롭고 힘겨웠던 모든 시간들이. 천천히 옷을 챙겨들고 나서던 은재의 핸드폰에 누군가의 번호가 찍혀 뜨기 시작했다. 수신자를 확인한 은재는 집에서의 처절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따뜻하고 맑은 목소리로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성경유...? 





 

 

 

 


- 아직 출근 전이세요?


왠 존댓말이야. 우리 사이에. 좀 늦어질 거 같아 안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 괜찮아요. 제가 먼저 왔어요. 


역시 내 어시스턴트가 최고야. 오늘 일정은 뭔데?

 

- 일단 팀원들은 자리 다 잡았고, 이미 실장님이 어제 현장 보고 오셨다면서요.


그랬지. 


- 협약하게 될 레이체 팀장님은 좀 어떠세요? 얼굴은 완전 근사하던데. 


야, 아서라. 세상 그런 꼰대가 없더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아마 단독 리노베이션 할 수 있는 거 공개 경쟁 입찰로 갈뻔하다가 우리랑 협약하게 돼서 짜증나서 그러는 거겠지. 당분간 좀 애 먹겠어. 깐깐하고 까칠하기로 유명하다던데.


- 그래도 그 팀장님이 설계론 업계 1위래요. 


그러던지 말던지. 우린 우리 일 잘 챙기고 우리가 빨리 마무리하면 돼. 알지?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해. 



입술이 터져서 약국에 다녀오겠다던 은재에게 걸려온 전화는 자신의 조수이자 토목과 부팀장이며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인 성경유 대리였다. 걱정 마요.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 작정이니까요. 오늘은 간단히 인사하고 레이체에서 준비했다던 새 조경 디자이너랑 미팅만 일정에 추가되었어요. 제가 먼저 만나고 있을 테니까 실장님은 천천히 오세요. 든든한 조수 경유의 말에 은재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전화를 끊은 은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가가 찢어져서 약국에 들러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는 상쾌하게 출근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마음을 정리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마헤레 다리(Magere Brug) 



암스테르담에 있는 두 개의 목조 개폐교 중의 하나로, 워털루 광장 근처에 있다. 1671년 건축가 마헤레가 만들었는데, 밤에는 다리 전체에 빛나는 조명으로 환상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도일은 마헤레 다리 앞 4차선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있었다. 

 

오늘은 프로젝트 출근 첫날이다 보니 긴장을 하고 있었더랬다. 거기다 1주일 후면 온다던 민제도 일찌감치 도착했으니 도일의 회사에서 준비한 새 조경 디자이너와 조이델에서 준비한 토목과 부팀장과 맞대면 인사도 해야 하고 첫 아이디어 회의도 준비되어 있었다.  마헤레 다리 근교에 있는 스테이크 집이 유명하여 도일은 민제를 데리고 아침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민제는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아 있으니 조경팀 조감도를 가지고 가겠다고 먼저 빠진 다음이었고, 도일은 먼저 회사로 가 있기로 했다.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공사다망하셔서 아침 브런치 시간도 건너뛴대?  공 부장 말에 의하면 회사엔 서은재가 아니라 서은재 어시스턴트가 먼저 와서 일처리를 하고 있다 했다. 옳지, 감 잡았어. 첫날부터 지각이라 이거지? 도일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마헤레 다리 앞에서 신호에 맞춰 차를 대기중이었다. 신호가 길어지자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어떻게 서은재를 물먹일 것인가 연구 중이었더랬다. 고개를 들어 보는데 백미러 사이로 비치는 그림이 있었다. 어, 저 여자 혹시..



뭐야. 저 여자가 왜 저깄어.



비록 어제처럼 누더기 같은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늘상 허름하고 그냥 쭉 일자로 묶은 긴 머리하며, 그 재수없는 면상을 절대 잊어버릴 래야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운명의 숙적 서은재가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아침 브런치 시간도 놓쳤나 싶더니,

 

저기서 왠 똥폼이야. 재수 옴 붙은 날이다 생각하며 도일은 이를 갈았다. 여튼 저런 데서 분위기나 잡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여자야. 절대 상종할 수 없는 여자라고.  하지만 도일의 눈에 비친 은재의 모습은 사뭇 엉뚱했다. 어제처럼, 품 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떽떽거리고 시끄럽게 말하기 좋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목걸이를 쳐다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더랬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시력이 양쪽 다 2.0인 도일은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여자, 어제도 저러더니..누가 옛 애인이라도 주고 간 목걸이인가. 옛 애인이 차버린 거 아냐? 그래서 저런 목걸이를...아냐, 누구한테 차일 것 같진 않은데.

 

 

 

 

 

 

누가 차더라도 그 찬 남자 면상을 갈겨줄 그런 여자잖아. 도대체 뭐가 그렇게 섧고 애닲프기에 저렇게 목걸이만 보면 하염없이 울고 있는 거냐고.  신호가 바뀌어 차들이 출발하는데도 도일은 은재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빵빵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뭐랄까. 저 우는 얼굴이 너무 애처로워서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저렇게 계속 우니까..
발길을 못 돌리겠잖아. 

 


안 어울려.
우는 거와는. 

 



도일이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무당벌레 모양의 팬던트 목걸이를 하염없이 만지던 은재는 눈이 부어터지도록 울고 또 울었다. 미안해. 이제 걸어야 할 길이,  시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랬어. 

 

아직 멀었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다 와가. 이제 시작이야. 그리고 약속하고 또 맹세할게. 전부 다 찾아올거야. 그게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이유니까. 은재는 목걸이 팬던트를 잡은 손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오랫동안 스크랩해왔던 사진인 듯 핸드폰 메인 화면에 화사하게 웃고 있는 가족 사진이 있었다. 다섯 남매와 함께 웃고 있는 순박한 부모님의 사진을 만지던 은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걱정 마세요, 엄마. 아빠. 이제 시작이예요. 이젠, 전부 다 찾아올 거예요.  엄마 아빠에게서 빼앗아 갔던 것들, 

 

 

 

 

 

 

우리한테서 가져갔던 것들 전부 다 하나도 남김없이요. 그리고, 꼭. 우리 동생들 찾을 거예요.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요. 믿어주세요. 제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 도일이 멍한 얼굴로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은재는 벌개진 눈으로 팬던트 목걸이에 입을 맞추었다. 

 


얘들아..
이제 시작이야.

이제 곧 너희를 만나러 갈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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