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Mind Control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워털루 광장(Waterlooplein) 근교 까페테리아
네덜란드 오라니에공의 군대가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을 무찌른 워털루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름 붙여진 광장이다. 이전에는 새계적인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했지만, 신시청사 건축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규모가 축소되어 벼룩시장은 지금의 팔켄부르게르 거리(Valkenburger Str.)로 이전, 축소되었다. 은재가 도일의 집에 머물기 시작한지 3주가 지나서야 은재는 외삼촌인 강 대표와의 만남을 허락했더랬다. 강 대표가 은재가 어디 머무는지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도 다녀갈 판이었고 이런 저런 소문이 도일에게까지 번질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 이것 때문이었다. 은재가 먼저 연락을 했고 강 대표는 집으로 오라, 했지만 은재는 회사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관광지의 카페테리아로 강 대표를 만나자 했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데 주말에 만나니 더욱 사람들로 북적거렸더랬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만나면 허튼 짓을 못할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역시, 강 대표는 은재가 나타나자마자 반색하는 반면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도 많은데 집에서 보자니까. 아니, 집으로 들어오면 좀 좋니. 그땐 나도 좀 지나쳤었다. 네 외숙모는 내가 잘 타일렀으니 그런 일 없을 게다. 퇴원했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외삼촌의 말에 은재는 커피를 마시며 일부러 시간을 벌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집보다 더 편한 곳은 없단다. 강 대표가 은재를 말로써 이렇게 타이르면 은재는 어쩔 수 없으니 집에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은재는 예전과는 달리 이제 더 이상 강 대표 집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다 도일 덕분이었다. 도일과 함께 있으니 일하기도 편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지금은 회사 일이 급해요. 회사 일이 아니면 외삼촌 보자는 말도 안했을 겁니다. 은재는 품 속에서 서류를 내밀어 강 대표에게 건넸다.
강 대표가 서류를 열어 보니 출장 기획서였다. 강 대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드니 은재는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얼굴을 마주 앉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이델의 대표는 강 대표였으니까. 한국에 가야 합니다.
곧 서울에서 두번째 리노베이션이 있어요. 다음 주부터 출장이예요. 은재는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은재를 어디 멀리 보내기 싫어하는 강 대표는 이때까지 출장 보낼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보냈고, 해외에 보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수학여행조차 불참시켰었다. 한국이라면 더더욱 강 대표가 보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은재는 반드시 가야 했다.
이것 때문에 시작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강 대표는 은재가 순순히 나오자 빙긋 미소지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네가 날 두고 어딜 가겠니.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달래는 말투였지만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허락할 것 같았니? 외삼촌의 말에 은재는 모든 자존심도 다 버리고 그 자리에서 덥썩 무릎부터 꿇었다. 오며 가며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당황한 건 강 대표였고, 은재는 외삼촌 앞에 무릎을 굽혀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생각이 짧았어요. 제발 한국 출장에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라는 거 외삼촌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은 보낼 수 없어요. 제가 가야 해요. 은재의 간곡한 말에도 강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한국에 왜 가려는지 이제서야 알겠구나. 왜 그렇게 이 프로젝트에 목을 맸는지, 집에서 그 취급을 받고도 왜 그렇게 회사를 고집했는지,
회사 욕심 없는 네가 이 프로젝트엔 왜 그렇게 있는 욕 없는 욕 다 들어가며 사활을 걸었는지..이것 때문이었지? 서울에 가려는 거. 두번째 리노베이션 하려면 서울에 무조건 가야 하니까. 이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만이 서울에 갈 수 있으니까. 다른 출장은 다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는 네가 이렇게 무릎까지 꿇을 정도면 뭔지 대충 짐작이 간다.
" 외삼촌! "
" 그애가 올해...열 여섯이든가? 17년 전이면, 그래. 이제 고등학생 쯤 됐겠네. "
" ........... "
" 맞지? 네 막내동생. "
" ........!!! "
이를 악문 은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바람에 주먹 쥔 은재의 손등에 파란 힘줄이 돋아났지만 강 대표는 악마답게 웃었다. 보내줄게. 우리 조카가 그렇게 원한다는데 내가 안 보내줄 수야 있나. 이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 지분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데.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우리 회사도 암스테르담 업계 1위로 올라서는 거 아니겠니. 우리 회사 좋은 일에 내가 왜 거절하겠어. 강 대표가 순순히 나오자 은재는 얼떨떨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어서 일어나렴. 보는 눈이 많다.
강 대표가 손을 내밀자 은재는 얼결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은재를 의자에 앉힌 강 대표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강 대표 말에 은재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 생각한 강 대표는 지그시 미소지었다. 어디에 머무는지 묻지는 않겠다. 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내가 집을 따로 구해줄 때까지 집에 있다가 내가 따로 구해주는 집에 들어가 살거라. 강 대표의 말에 은재는 순간 영문을 몰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외숙모 보는 눈도 있고, 네가 그 집에 있기 마땅치 않다는 거 알아. 지금 당장은 집에 들어와 있고. 네 외숙모 잠깐 눈돌리고 너 서울 출장 간 사이에 내가 집 한채 구해놓으마. 거기 들어가 살도록 해라. 집에 들어오는 걸 제안하는 건 예상했는데 집을 구해준다니. 그 집에 가둬놓으려고 별 짓을 다해놓고 집을 구한단 말에 은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을 구해주신다뇨..?
은재의 물음에 강 대표는 은재의 손을 와락 잡았다. 순식간에 잡은 손이라 은재는 차마 뺄 생각도 못한 채 눈이 동그래졌고, 강 대표의 탐욕스런 눈이 은재의 얼굴을 천천히 훑고 있었다. 내가 진작 왜 그 생각을 못 했나 몰라. 집에 있으면 너도 외숙모 때문에 힘들고, 어짜피 회사 일 때문에 집에 안 오는 일도 많은데 집에 있어봤자 외숙모 때문에 자주 보지도 못할텐데,
집에 들어와봤자 너나 나나 동선 엇갈리는 건 똑같을 거 아니냐. 그렇다고 네가 외숙모한테 계속 맞게 놔둘 수도 없고.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우리 스위트 룸을 만드는 거지. 외숙모는 절대 모를 거다. 내가 비밀리에 추진할 거니까. 너는 집이 생겨서 좋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우리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건 오직 나 뿐.
뭐라..구요...??????
- 선택은 네게 주마. 내일 서울 출장에 아마 도장을 찍어야 겠지? 하루밖에 시간이 없구나. 네가 요즘 회사의 남자 직원들과 자주 어울리는 거 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프로젝트 팀에 누구와 지내는지 시시콜콜 알 순 없는 노릇이니..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딨겠니. 이왕 외숙모 눈밖에 난 김에 집을 구해주겠다는 거다. 이걸 네가 승낙하면, 바로 내가 서울 출장에 도장을 찍어주마. 네 주변 사람들도 괴롭히지 않을게. 걱정할 거 없어. 이것만 승낙하면..넌 네 동생을 보러 서울로 갈 수 있단다.
악마가, 악마가 환생하면 저런 느낌일까.
사탄도 당신보다 더 착할거야.
짐승만도 못한 인간..
아니, 조카에게 첩이 되라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
이때까지 나한테 한 짐승같은 짓으로 부족해서...?
네깟 놈이 우리 엄마 동생이라니 정말...
지저분한 악마 같은 놈.
카페테리아를 나선 은재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기다린 기회인데, 강 대표가 순순히 물러나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건 거의 포기하라는 것과 같았다. 외삼촌이 따로 내준 집이라.. 말이 집이지 그 다음 수순이 무엇인지는 은재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무당벌레 팬던트를 꺼낸 은재의 팬던트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팬던트를 여니 솔베이지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빠가 직접 다섯 남매가 태어난 걸 기념해서 만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무당벌레 팬던트 목걸이였다. 뒷면에는 직접 금으로 새긴 글씨가 있다. 1987. 3. 12. 서 은 재. 동생들의 목걸이에도 모두 새겨진 이름이었다.
까페를 나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은재는 누가 보던지 말던지 입을 틀어막아도 자꾸만 터져 나오는 눈물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 했고, 서울로 가서 리노베이션에 참석해야 했다. 그걸 하기 위해선 그 어떤 희생과 고초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그 댓가는 너무나 컸다. 팬던트를 손에 꽉 쥔 은재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아아..
하느님....
오늘은 은재가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근데 아침부터 외근이라더니 하루종일 은재가 회사에 보이지 않자 도일은 내내 은재 책상 주변을 맴돌아야 했다. 중간에 또 어디로 샌 건가. 아니면 그 외삼촌이라는 작자가 찾아내서 어떻게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여자가 문자도 씹고 전화도 안해. 아니, 어디면 어디다 연락이라도 좀 하지. 불안한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도일은 일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경유한테는 외근이 있으니 오늘 외근 갔다가 퇴근하겠다, 그 전화가 전부였다 했다. 그렇다고 경유한테 따져 물을 수도 없고.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도일은 휴게실을 지나가다 레이체에서 온 직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에 그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진짜야? 아니 서은재 실장이 진짜?
" 그렇다니까. 이미 조이델에선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대. 지난 번에 회식 있을 때 조이델 팀원이랑 4차까지 갔다가 들은 얘긴데 진짜 그렇대. "
" 어머머머..이거 무슨 사랑과 전쟁, 뭐 그런 내용도 아니고 진짜 추잡스럽게 뭐하는 짓이래. "
조이델의 강 대표와 은재가 외삼촌과 조카 사이지만 심상치 않은 사이라는 소문이었다. 예전부터 그런 소문 파다해서 그래서 그 집 사모님이 실장님 완전 어릴 때부터 쥐잡듯이 잡았대는 거 아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거지.
친자식도 없겠다, 조금만 있음 조이델이 전부 자기꺼 될 수 있는데 그 외삼촌을 얼마나 꼬드겼겠어.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서 실장 얼마나 예뻐. 아직 서 실장 애인도 남친도 없는 거 보면 알잖아.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고 서른일곱 다 되도록 누가 외삼촌 부부랑 같이 살아. 결혼을 해도 했고, 나와서 독립하는 사람이 더 많지. 서 실장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법적 보호자 필요할 나인 아니잖아. 아무리 봐도 수상하고 이상해. 서로 눈 맞아서 그 집 사모님이 쫓아냈단 얘기가 파다해. 은재의 사생활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직원들 앞에 나타난 도일은 아예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뿌려버렸다. 깜짝 놀란 직원들이 벌떡 일어났고, 도일은 매서운 눈으로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 프로젝트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아요?
티..팀장님!!!
오 대리, 강 사원, 그리고 최 팀원은 내일부터 프로젝트에서 제외합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냥..소문이 그렇다고,
무슨 소문이든 어떤 이야기든 없는 일처럼 입을 무겁게 해야 한다는 거 몰라요? 그리고 할 얘기 안할 얘기가 따로 있지, 당신들 없는 자리에선 나도 그렇게 뒷담화 하고 있겠네요.
티..팀장님, 아닙니다. 저희는..
그리고 빨리 이름 대요. 서 실장에 대해 말한 그 조이델의 직원이 누굽니까.
......팀장니임...
누구냐니까!
도일은 단칼에 말조심을 안 하는 세 명의 직원을 해고시켜 버리고 경유를 대신 불렀다. 조이델에서 일하고 있는 윤 사원을 해고시키길 원한다고. 놀란 경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유를 묻자 경유에게는 이야기 해주었다. 윤 사원이 술자리에서 은재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를. 은재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이자 조력자인 경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장 그 사원을 잡아 족칠 기세였다. 입에 담지도 못할 육두문자를 내뱉어가며 더 난리였다. 걱정 마세요. 제 선에서 바로 해고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다신,
이런 불미스러운 소문 흘러나오지 않게 할 테니 염려 마세요. 이건 선배가 용서해도 제가 용서 못해요. 경유의 든든한 모습에 도일은 조금 안심이었다. 오늘 하루종일 서 실장님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 아무래도 아픈지 얼마 안 되어서 무리하면 안되는데. 도일의 물음에 경유는 애써 웃음으로 일관했다. 사고 이후로 경유는 은재로부터 도일에게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던 터였다. 또한 은재는 경유에게도 왠만한 사생활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이었지만 경유는 눈치가 백단이었다.
곤란해하는 경유를 보고 도일은 사생활을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버스킹 공연을 본 이후 은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강 대표가 노리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지금 서 실장 집 나와서 숨어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어딨는지 모른다면 돕고 싶어서 그래요. 같은 팀이예요. 우린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한 팀이고. 도일의 거듭되는 설득에 경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요. 진짜예요. 그냥 저한테도 외근 있으니 있다가 퇴근한다는 말만 했어요. 그런데..경유가 말끝을 흐리자 도일은 가까이 다가섰다. 아마 대표님 만나러 갔을 거예요. 모기만큼 목소리가 작아지는 경유 말에 도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강 대표네에서 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청해서 만나러 갔다구요?
" 서울에 꼭 가야 했거든요. "
" 무슨 말이예요? "
" 곧 서울에서 2차 리노베이션 간담회가 있잖아요. 아시아 바이어들 대상으로 하는. "
" 그런데요. "
" 아무래도 조이델의 대표는 강 대표니까 강 대표가 허락해줘야 갈 수 있는 거구요. "
" ........."
" 보셨다시피 강 대표는 절대 선배를 해외로 보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꼭 서울행은 이번에 선배가 가야 하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어서..이번 프로젝트를 몸소 준비해서 꼭 본인이 가고 싶어해서 아마 설득하러 갔을 거예요. "
" ...경유 씨가 보기엔 어때요. 강 대표가 허락해줄 인간 같은가요? "
도일의 말에 경유는 고개를 저었다. 낯빛이 어두운 게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놈은 악마예요. 절대 선밸 놔주지 않을 거예요. 선배가 서울에 가야 한다는 걸, 가고 싶어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그걸 빌미로 다시 선배 발목을 잡을려고 할 거예요.
.....서은재는 그걸 알기 때문에 강 대표한게 목이 조일 수 밖에 없구요..?
점점 하얘져가는 도일의 표정을 보며 경유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집을 나가고도 강 대표가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건 그것 때문이예요. 언제가 됐든 은재 선배가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강 대표가 이길 거예요. 언니가 무슨 일을 하건 대표가 반대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경유의 말에 도일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경유를 내보낸 도일은 생각에 잠겼다. 다시 회사에 나가자고 하니 아침에도 은재가 얼마나 기뻐하고 행복해하던지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내가 말했지.
너는, 웃어야 한다고. 웃는 게 이쁘다고.
우는 얼굴은 너무 못나서 봐줄 수가 없다고.
그래서,
나는 널 꼭 웃게 만들겠다고 결심했어.
경유를 보낸 도일은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결심에 찬 얼굴로.
" 형, 나 도일이야. 지금 급한 일이 좀 있어서, 나 좀 도와줘야겠는데. "
* * * * * * * * * * * * * *
" 이제 와요? "
" ........ "
" 빨리 앉읍시다. 국 다 식겠네. "
" 아, 전 별로 생각이..."
" 없겠지만 앉아요. 서 실장 기다린다고 난 아직 점심도 못 먹었거든요. "
" 아니 왜..."
" 서은재가 이렇게 점심도 저녁도 거를 거 알고 나 안먹었다고 하면 불쌍해서 먹어줄까봐서죠. "
" .........."
도일의 말엔 진짜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은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시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밥을 다 먹는 걸 본 도일은 커피까지 완벽히 대령했고, 도일이 밥을 안 먹었다는 말에 먹긴 했지만 입맛이 있을 리 없었다. 경유의 말이 있어서인지 뭣 때문에 저렇게 풀이 죽다못해 평소의 팔팔한 서은재가 아니라 시들기 일보 직전의 은재를 본 도일은 더욱이 화가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는 은재에게 다가온 도일은 어떻게 하면 이 여자의 자존심을 안 상하게 하면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아니,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걸 얼마나 싫어할텐가. 자신이 은재였어도 그럴 것이었다. 도일은 이제 은재가 짜증나거나 힘들거나 그 여자가 무자비한 폭탄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저 여자가 맨 얼굴에 화장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아도 세상에서 서은재가 제일 예뻤다. 그날 버스킹을 안 나가는 거였는데. 아무리 봐도 당신한테 코가 꿰인 게 분명한데 차마 그 말을 차도일 입밖으로 내뱉기는 싫었다. 저 여자 머릿속엔 지금 한 가지 생각 밖엔 없을 테니까.
멍하니 앉아있던 은재는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옆에 도일이 앉아 있다는 것도 몰랐다. 서울에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난관을 뚫어야 했다. 아니, 자신이 서은재라는 것도 잊어버려야 했다. 버려야 했다. 강 대표의 집에 들어간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아아...
내 동생.
우리 막내..
아직 고사리 같은 손도 잡아보지 못한 우리 막내...
이 프로젝트를 맡은 것은 물론, 앞으로 일어날 계획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이 프로젝트를 맡아야 그 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를 만나야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출장에 합류할 수 있었다. 대원그룹 서수철 회장. 은재의 원수. 내 부모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은재가 모종의 결심을 했을 무렵,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국으로 안 갈 수는 없었다. 일단은 제안을 수락해야만 했다. 악과 싸우려면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했다. 괴로워하는 은재 앞에 도일은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비행기 티켓이었다.
은재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들었다. 도일은 옆자리에 앉아 은재더러 티켓을 확인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티켓을 열어본 은재의 눈동자가 커졌더랬다. 서울행 왕복 티켓 두 장입니다. 다음주 월요일 출발이니 간단한 짐은 싸두는 게 좋겠죠?
" 팀장님..."
" 다음주에 있을 서울 리노베이션, 우리만 오는 게 아니예요. 아시아 바이어들이 모두 참석하는 크고 대단한 자리죠. 우리 프로젝트가 아시아 바이어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구요. 이젠 홈 그라운드가 아닌 만큼, 출국할 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쯤 모를 서 실장이 아니겠지만. 그동안 A팀은 우리와 함께 서울 행에 합류하고, B팀은 여기 스튜디오에 남아서 나머지 일을 진행할 거예요. 어짜피 섬에 갔다온 성 팀장과 우리 회사의 차 대리가 B팀을 이끌 거니까 서로 계속 연락할 거구요. 짧은 일정이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아요. 낼부터 일단 새 프리젠테이션 준비도 해야 하고, "
" 자..잠깐만요. 서울이라뇨. 이건, "
" 리노베이션 조감도, 바이어들한테 보여줘야죠. 그게 다음 플랜이잖아요. "
" 우리 대표님 허가 없인 안되는 걸로 아는데요. "
은재의 눈이 휘둥그래지자 도일은 빙긋 웃었다. 역시 그거였군. 경유의 예상이었지만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였다. 도일은 은재를 쳐다보며 안심하라는 듯 미소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알아서 하니까.
" 팀장님, 그건...."
" 당신은 출장 준비에 올인해요. 나머진 나한테 맡기고. 그래야 파트너니까. "
" 하지만..."
" 서은재. "
" ......! "
갑자기 도일이 은재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란 은재가 토끼눈을 하고 도일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말갛게 쳐다보는데.
진짜 내가 뭐라도 다 해 주고 싶잖아. 바보야.
" 그냥 당신은 서울에 간다고만 생각하면 돼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
" ........."
" 당신은 내 뒤에 서 있기만 하면 돼요. "
" 하지만 강 대표님은 우리 회사의, "
" 내 파트너의 회사이기도 하죠. 나 믿어요? "
" 네? "
도일의 따뜻한 말투에 생소하기도 하여 은재는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따뜻하고 뜨거운 눈빛이던지. 잠깐이나마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얼굴로, 저렇게 믿어달라고 말해준 사람이 살아 생전 몇이나 되었던가. 은재는 이유 모를 울컥함이 밀려왔다.
나 이제 유치하게 굴 거거든요. 내 모든 걸 다 걸고 들이받아 버릴 거니까 그냥 뒤에 서 있기만 해요. 나 믿어주면 더 좋고. 도일의 말에 은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물었다. 뭘 위해서 그렇게 달리는 건데요? 은재의 눈시울이 젖어드는 걸 보며 도일은 빙긋 웃어주었다.
" 그야, 당연히 회사를 위해서겠죠? "
바보.
어떻게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유대 역사박물관(Joods Historisch Museum) 근교 레스토랑
요나스 다니엘 메이에르 광장(Jonas Daniel Meijerplein)에 있는 4채의 시나고그(유대교회) 안에 있다. 박물관 견학은 신시나고그(Nei Shul)에서 시작하는데, 이곳에서는 유대의 역사와 종교에 관한 자료를 전시, 가장 오래된 대시나고그(Grand Shul)에서는 예배용 재례 기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밥 한끼 먹자는 도일의 전화에 강 대표는 거절하려다 안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에 서울행이 걸려있는 걸 알고 만나자 했다. 은재의 파트너였다. 얘기를 들어보면 여간 까다롭고 까칠한 반면에 능력은 있어서 잘한다는 소문은 많이 난 듯 했다. 은재와도 성격이 안 맞아 자주 부딪히는 모양인데 강 대표로서는 좋았다.
은재를 탐내는 남자들은 많았다. 어쨌든 조이델의 잘 나가는 건축 디자이너인데다 조이델 대표의 조카이며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대원그룹 전 회장의 장녀였으니 어딜 가도 빠지는 스펙은 아니었다. 거기다 홀홀단신 명문대 수석 졸업에, 세계 건축대전 수상 경력까지..지금 당장 줄 서는 맞선 자리만 해도 많았다. 하지만 강 대표는 절대 은재를 시집 보낼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키운 내 보물인데. 내 보석인데. 은재가 이때까지 남자 하나 사귀지 못한 건 강 대표 덕분이었다. 은재와 썸을 타거나 사귈 만한 남자가 있으면 거의 강 대표가 보낸 사람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반쯤 실려 나갔다. 은재는 그렇게 석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에 도일을 초대해 일부러 기를 죽여놓을 작정이었다. 절대로 서은재를 만만히 봐서도, 서은재에게 접근해서도 안된다는 무언의 경고를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갖고 오자마자 도일은 능숙하게 메뉴를 골랐다.
" 전 체리 가스파쵸 참치(Cherry Gazpacho With Tuna)와 치즈 샐러드(Caesar Salad)로 주시고, 후식은 와인으로 주세요. 대표님은요? "
" 아....나는, 음....."
" 여긴 해산물이 유명하니까 드셔보시죠. 아주 잘해요. 여기 씨푸드 화이트 라구 파스타(Seafood White Ragu Pasta)와 부이야베스(Bouillabaisse : 프랑스식 해물탕)로 주세요. 후식은 같은 걸로. "
" 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차 팀장님. "
" .......... "
일부러 고급 메뉴를 시켜 기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아주 자주 오던 곳인듯 메뉴 선정이 능숙했더랬다. 웨이터가 간 뒤에도 환하게 미소짓는 도일을 보며 강 대표는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식사는 훌륭했고, 아무리 봐도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기가 죽거나 한번도 못 와서 촌티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애티튜드가 나무랄 데 없었고, 어려운 해산물 고급 요리를 능숙하게 먹을 정도로 고급 취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준수한 용모에 매너까지, 은재가 저 얼굴에 넘어가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다행히 이 놈도 은재에게 관심은 없는 것 같단 생각에 강 대표는 자유자재로 얼굴을 바꾸며 같이 와인을 들었다. 조카를 맡겨놓고 폐가 많습니다. 차 팀장이 부족한 우리 은재 많이 봐 주신다니 다행이고요. 회사에서 전문 경영인을 다시 보낼 생각이니, 당분간만이라도 불편하시더라도 좀 참아 주세요. 강 대표의 말에 와인잔을 쥐고 있던 도일의 손등이 꿈틀거렸다.
- 그놈은 짐승이예요. 악마고요. 언니를 절대 놔주지 않을 거예요...
" 한국 출장 다음주 월요일로 잡았습니다. 필요한 서류는 제가 조이델 회사 본사로 직접 보냈구요. "
" .............!!!!! "
" 무사히 리노베이션 잘 마치고 오겠습니다. 서 실장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큽니다. "
" 그게 무슨..........은재를 데려간다고????? 누구 맘대로? "
" 무슨 말씀이신지. 당연히 서 실장이 가야죠. 지난 리노베이션도 저희 두 팀이 같이 만든 작품인데 실질적인 업무자가 리노베이션에 가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
" 그 밑에 훌륭한 팀장들이 많네. 내가 본사에 직접, 아니, 그럼 내가 가지. "
" 무슨 말씀이세요. 그 리노베이션을 준비한 건 서은재 실장인데 왜 대표님이 가십니까. 대표님이 그 리노베이션 총괄 책임하에 모든 아시아 바이어들 책임지실 수 있으세요? 직접 프로그램부터 모든 걸 기획한 건 저와 서 실장인데, 그 바이어들이 서 실장과 절 믿고 투자하는 거지 기획에 참여도 안한 대표님이 뭘 아신다고. "
" 이봐!!! "
" 지금 서 실장은 짐을 싸고 있을 겁니다. 대표님은 무사히 다녀오도록 싸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
" 내가 그걸 허락할 것 같아? "
" 왜 아니시죠?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
" ........다른 팀원을 보낸다니까, 글쎄. 은재는 안 돼! 은재는 내줄 수 없네. "
" 딱히 대표님의 재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서 그래서 제가 조금 서둘렀습니다. 대표님이 너무 조카를 아끼시는 마음이 크시고 우려되는 바 있으셔서, 서 실장을 안 보낼지도 모른다는 낭설 때문에 제가 좀 미리 선수를 쳤죠. "
완전한 도일의 판정승이었다. 금방이라도 강 대표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활화산 같았지만 도일은 와인을 한 잔 마시며 더 우아한 매너를 잃지 않았다. 강 대표의 목소리가 커지자 주변 테이블에서 웅성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꼭 대표님의 재가가 있어야 서 실장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프로젝트는 조이델과 레이체의 합작품이기는 합니다만,
리노베이션 출장 자체는 지난번 컨벤션 행사를 저희 측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출장 허가는 저희 측 대표님의 재가 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 쪽 대표님이 서 실장과 제가 리노베이션에 참석하는 걸 이미 도장이 찍혀 비자가 나온 상탭니다.
고로, 대표님이 굳이 허가, 해주시지 않으셔도 저와 서 실장은 서울로 갑니다. 도일의 깔끔한 마무리에 강 대표의 입이 벌어졌다. 너 누구야. 너 누군데 은재한테 무슨 속셈이야. 은재 일이라면 물불 안가리는 강 대표였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은재와 자신 사이를 갈라놓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다. 경유 말이 맞았다. 강 대표가 하는 저속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은재가 이때까지 살아온 비극적인 삶을 충분히 가늠케 했더랬다. 공적인 일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던들 벌써 도일은 주먹이 나갔을 것이다.
강 대표를 쳐다보는 도일의 눈에 얼핏 핏빛 같은 독기가 비쳤다. 강 대표는 도일을 똑바로 쏘아보았지만 도일은 피하지 않았다. 눈길을 부딪힌 채. 아무도 피하지 않은 채로 강 대표는 기막힌 듯 따지듯 말했다. 은재는, 내 허락 없인 절대 한국에 안 갈 걸세.
고집을 피운다면, 은재를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면 돼! 강 대표의 강수에 도일은 여기까지도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듯 한데요. 서 실장이 이때까지 모든 기획과 팀을 다 이끌어왔는데 이제 와서 손을 떼시겠다면, 저희는 손해가 막심하고요. 물론 조이델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서 실장이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든, 서 실장이 완전히 그만두든, 어떤 경우에서든 이 일에서 서은재를 제외시키시면,
" ...모든 책임은 강 대표님이 지셔야 할 겁니다. 이게 어떤 기획인지 잊으신 건 아니시죠? "
도일은 미소짓고 있었지만 쏘듯이 꼭 초점을 맞춰 종이를 태우는 거울처럼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맹렬히 강 대표를 쏘아보고 있었다. 사업가로서 많은 사람을 상대해왔고 카리스마 있다던 강 대표도 순간, 너무나 맹렬한 도일의 눈빛 때문에 잠깐 움츠러 들어야만 했다. 도일의 투명하게 흰 얼굴이 겨울의 야윈 햇살에 뺨 속의 실핏줄이 보이게 할 것 같이 비치고 있었다.
도일은 그래도 강 대표를 만나기 전엔 와전된 부분도 있을 것이고, 내가 은재의 가정사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건 옳지 못하다..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저 서울행 얘기만 하고 돌아오자, 그것이 도일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 대표는 도일과 함께 서울로 은재가 간다는 말을 듣자마자 입에 개거품을 물고 흥분했더랬다.
마치, 은재 옆엔 그 어떤 남자, 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투였다. 거죽만 뒤집어 쓴 사람이지 그냥 짐승이었다. 누가 봐도, 조카를 걱정하는 외삼촌의 모습은 아니었다. 왜 집에 데려가려고 안간힘을 쓰는지 알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론 은재를 저 집에 보내면 안될 것 같았다. 아니, 안 될 것 같았다가 아니라 보내면 죽을 것만 같았다. 은재도 은재려니와 은재를 저 집에, 저 강대표와 같은 한 공간에 놔두면 도일은 그야말로 자신이 죽을 것 같았다. 저대로 보내면 안 돼. 이번에 보내면 산 송장이 되어서야 나올 거다. 저렇게 흥분하는 강 대표를 보자 더더욱 은재를 감추고 숨기고 절대 보여주면 안된다고 여겼다.
확, 보쌈이라도 할까.
황당한 생각까지 다 들었지만 도일은 이를 악물었다. 비행기 티켓을 내밀며 아무 걱정하지 말고 서울로 갈 수 있다고 하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희고 말간 얼굴로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지. 은재를 살려야 했다. 도일은 흥분해서 폭발 직전인 강 대표를 다시 쳐다보았다. 강 대표를 보는데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다 치받는 것 같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부들부들 떠는 강 대표를 놔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도일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계산서까지 챙겨 들었다.
은재를...한번만 더 만나서 그 애를 울게 만들면,
...........!
그 때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뭐야? 니가 뭔데. 내가 그 애의,
외삼촌이란 소린 하지 마세요. 후려갈기기 전에.
...........!
지금은 내가 서은재 보호잡니다.
누구 맘대로!
그야, 제 맘대로죠. 지금 은재가 누구 집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
경곱니다. 다시는, 절대로, 앞으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서은재를 만나선 안 될 겁니다. 절대로.
..........야!!!
하나 더요. 그 사람에게 자그마한 폭력이라도 휘두른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게 될 겁니다.
광분으로 난리가 난 강 대표를 자리에 두고 유유히 나서서 계산을 하고 돌아서던 도일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천천히 눈을 내려감았다. 서은재를 서울로 보내기 위해 도일이 숨가쁘게 뛰고 또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이 떠올라서였다. 사실상 은재는 조이델의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레이체의 대표인 도일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체의 실질적인 오너이자 암스테르담 건축업계의 이름난 유명인사인 형의 이름을 빌려야만 했다. 지금은 요양 중인 형에게 전화를 하고, 형의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조이델의 상무 이사들을 만나 당장 서울 출장 기획안을 재결받고, 대표의 확인이 없어도 이건 프로젝트 사업이라 조이델 대표의 승인만 있어도 가능하다는 법적인 절차까지 밟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바로 끊었고, 은재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은재의 짐을 모두 실어보내게 했다. 은재가 그 집에 있는 걸 누구보다 싫어할 외숙모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당장 은재의 짐을 모두 도일의 펜트하우스로 실어보냈더랬다. 이제 더 이상 서은재가 그 집에 돌아갈 일은 없었다. 있어도 없게 만들 참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선 도일은 그제서야 주먹을 쥔 손을 폈더랬다.
절대로.
더 이상은 네가 우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 * * * * * * * * * * * * * * *
" 그렇게 된 거야. "
" 선배, 진짜 잘 됐어요. 정말로..그 인간 허락 없인 서울 못 가는 줄 알았는데. "
" 그러게.."
" 진짜 차 팀장님이 신기하긴 신기해요.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
" ...뭐 굼벵이도 구르는 재준 있나부지. "
" 에이, 언니 그렇게 말하지 마요. 팀장님 아니었음 지금 언니가 서울 가는 비행기 어떻게 타냐구요. 서울 가서 팀장님한테 잘해 줘요. "
" 실없긴...회사 일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해. "
" ..기분은 어때요? "
" 뭐가. "
" 다시 한국 가는 기분. 그리고 그 애...."
" 심장이 뛰고 있어. 다시 우리 막내한테 가는 길이니까. "
" 잘 될 거예요. 언닌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히 잘 될 거예요. "
" 고맙다. "
전화를 끊은 경유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도일의 활약으로 은재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스튜디오의 일을 경유에게 맡겼더랬다. 은재도 도일도 없는 스튜디오에 혼자 남겨진 경유는 이마를 짚었다. 문제는 도일의 대타가 민제라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민제와 붙는 일이 없어 괜찮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경유는 도일과 은재의 출장이 끝날 때까지 민제와 함께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고통스러웠다. 서울로 떠나는 은재도 그 점을 제일 미안해했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자신있게 말했었으나 그 결심이 계속 옅어지고 있었다. 민제는 자신을 볼 때마다 훅훅 거침없이 직진해 왔다. 그 점은 더더욱 경유를 아프게 했다.
쏘아보는 시선이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처럼 경유를 찔러오는 것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버텨내기에 몹시 힘이 들 만큼 그의 눈빛은 강하고 아름답도록 차고, 그리고 매혹적이었다.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그를 꼭 닮은 민우가 생각났고,
민우를 잃은 그때의 기억이 죽도록 괴롭던 그 시간들이 다시 떠올라서였다. 민제는 밝았다. 일곱 살이나 어리더니, 이제 갓 피어나는 청량한 청춘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밝고 환한 에너지가 있었다. 청량한 과일을 생각나게 하는 웃음소리가 흩어질 때마다 경유는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냉정하게 구는데도, 그렇게 차갑게 한번도 웃어주지도 않는데도 그는 늘 한결 같았다. 처음엔 민우를 닮아 그를 보기가 싫었다. 그의 구둣발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를 닮아서. 쌍둥이처럼 그를 닮아서. 그의 목소리가 생각나게 해서. 처음엔 그래서 떨리고 숨이 멎을 것 같고 쳐다보면 온 얼굴이 불덩이가 된 것 같았다. 그를 닮아서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세뇌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민우야.
나는 죽일 년이야.
넌 날 용서하면 안 돼.
하지만 착한 너는 언제든 날 용서했겠지.
근데 나는, 이런 배은망덕하고 교활한 내가 용서가 안 되거든.
그러니까 너는 꿈에서라도 날 용서하지 말아야 해.
너한테 지독하게 미움받는다고 생각해야, 내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민우야...
나는 지독히 나쁜 년이야.
널 닮아서 네 동생에게 끌리는 게 아니야.
그 애가 안녕하세요, 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미칠 것 같아.
심장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서.
그리고 내일 또 저렇게 웃어줄 것 같아서.
이제 저 웃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경유의 독한 결심은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얼마나 그를 피했는지 모른다. 키스 이후에는 아예 민제와 마주치지도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제 은재와 도일의 대타를 하는 순간엔 달랐다. 대신에 경유는 공 부장과 함께 셋이서 늘 회의하고 움직였다.
밥을 먹을 때에도 항상 공 부장 옆에 붙어 있었다. 그가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연락을 하고 사내 메신저로 할 말이 있으니 기다리겠다고 문자를 해도 계속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도 지치겠지. 지쳐서 어딘가로 가겠지. 이 프로젝트를 얼른 끝내고 그가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목석처럼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없는 일처럼 되겠지 싶어서.
공 부장과 커피를 마시고 다시 오후 일을 하기 위해 회사로 잠깐 들어온 경유는 가능하면 외부 일은 자신이 맡을 테니, 모든 외근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 참이었다. 그렇게라도 민제의 얼굴을 안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민우의 사고 이후로 경유는 운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차장 엘리베이터만 이용했다. 1층 엘리베이터는 팀원도 자주 사용했고, 민제는 더더욱 사용을 많이 할 테니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스탭용 지하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민제와 최대한 부딪히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의 손이 와서 막았다. 민제였다. 언제부터 따라온 건지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의 손에 잡힌 경유의 손을 내려다보니 경유는 손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경유가 손을 빼내고 싶어한다는 걸 안 민제는 손을 놔 주었고, 경유는 한시바삐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계속해서 누르기 시작했다. 아예 말도 안 할 참이예요? 민제의 물음에 경유는 민제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이 연락을 멈출 때까지요. 무례하다는 걸 본인이 깨달을 때까지요. 경유의 말에 민제는 낮게 피식 웃었다. 실수 인정해요.
근데 그렇게 안하면 당신이 날 안 봐줄 것 같아서. 그리고 장난이라고 생각할까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미. 그쪽은 그냥 해보는 장난 같겠죠. 무례한 게 차민제 씨 특기니까.
경유 씨를 좋아해요.
또다시 와장창, 하고 경유의 마음 속의 빗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있었다. 그 말에는 그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눈가가 벌개져 있었다. 아 살았다. 이제 쳐다보네. 난 성경유 생각에 돌것 같은데. 그의 말에도 경유는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민우였다가, 다시 민제였다가, 다시 민우였다가, 이제는 다시 민제..낮은 이른 봄 하늘을 달리는 바람,
바깥의 마른 풀숲이 내는 바스락거리는 마른 소리. 창틀이 덜컥거리는 소리. 먼 곳 차 달리는 소리. 가까운 곳 차 멎는 소리. 그를 보지 않으려고 경유가 기를 썼던 이유는, 이렇게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온 심장이 다 헤집어질 걸 알기 때문이리라. 경유는 다시 고개를 떨구려 했지만 벽을 짚은 민제가 한 발 빨랐다. 민제는 천천히 경유의 어깨를 짚었고, 민제의 맑은 눈에서 천천히 눈시울이 붉어졌더랬다.
바보야.
이제 그만 나한테 와 주면 안돼....?
빵빵-주차장의 클락션 울리는 소리를 끝으로, 민제는 경유의 어깨에 천천히 얼굴을 묻었다. 이미 목소리를 들었고 눈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거부하지도 밀어내지도 못한 채 경유의 어깨에서 천천히 핸드백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두근 두근 두근.....경유의 심장에서도, 민제의 심장에서도 같은 호흡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민우 씨.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해 줘.
넌 철면피라고 꼭 손가락질하고 저주해 줘.
널 죽어도 용서 못하는 배신이라고 꼭 얘기해줘야 해.
그래야,
내가 당신 동생을 미치게 원한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 목을 조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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