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당벌레 팬던트(A ladybug pendant)
이번 리노베이션 책임자 차도일입니다.
반갑소. 대원그룹 서 수철이오.
날고 기는 재벌그룹의 신사옥은 다 보아왔던 도일조차도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대원그룹 본사의 가장 높은, 회장실의 위용 앞에선 굳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자를 만나기 위해 은재가 그렇게 애를 쓴 걸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대체 이 서 회장이라는 자에게 무슨 앙심을 품었기에 그렇게까지 독하게 구는 것일까. 서 회장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인자하거나 따뜻한 미소가 아니라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 위해 가식적인 웃음을 지을 때처럼. 사업가들을 많이 만나온 도일은 그 간극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파트너분은 동석을 안 하신 건가요? 서 회장의 말에 도일은 짧은 말이었지만 머리카락이 확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교활하기가 뱀 같은 자다. 내가 아니라 은재에게 관심이 있어.
도일은 악수를 끝내고 자리에 앉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제 사전 브리핑 자리인데 팀원들이 몇 명인거 까지 다 체크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본사는 암스테르담에 있으니 일에 차질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도일은 서 회장의 마수에 능수능란하게 대꾸했고, 서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미소를 지었다. 암스테르담 리노베이션 때 예쁜 파트너가 있었던 것 같아 예의상 물어본 건데 불편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리죠. 서 회장의 말에 도일 역시 미소를 지었다. 사전 브리핑을 무사히 끝내고 서 회장은 다시 도일을 불렀다. 역시 제가 암스테르담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게 영광 같습니다. 1주일밖에 안되는 짧은 일정이지만 서울에 계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제가 모시고 싶은데. 그 파트너와 함께 식사에 초대도 하고 저희 호텔에 초대도 하고 싶습니다. 서 회장의 말에 도일은 미소를 지었다. 서 회장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밑에 있는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 은재가 빨리 나오길 원하고 있어. '
" 리노베이션 때 자연스럽게 저희 팀원들은 만나뵙게 될 거고, 짧은 서울 일정이지만 저희 팀원들이 해야 할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숙소는 저희 편한 곳으로 잡고 있으니 그런 심려까지 끼쳐드리고 싶지 않군요. "
" 아닙니다. 저희 DAW호텔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호텔이니만큼 더욱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조인트하는 팀인데 당연히 저희가 편의를 봐드리는 게 맞습니다. 저희 펜트하우스로 옮길 수 있도록 조치를....."
" 저희 팀 말고도 이 프로젝트에 관심 있는 회사나 팀이나 업체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숙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혹시나 정보가 누설될 염려도 있고, 회장님의 호텔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다 암스테르담 출신이다 보니 서울에 익숙지 않은 팀원들을 배려하여 오래 전부터 물색해 둔 숙소이니 그쪽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호화 호텔에 묵으면 팀원들이 좀 낯설어하고 부담스러워할 것 같기도 하구요. "
" 아...."
" 배려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식사 초대는 리노베이션 끝나고 감사하다는 뜻에서 저희 팀원들 모두 참석한다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는 아마,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군요. "
" 그럼 그 파트너와 다시 이야기라도 했으면 좋겠군요. "
" 파트너의 입장이 곧 제 입장이고, 저희 프로젝트 팀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
" .........! "
" 사전 브리핑 끝나고 다음 스케줄이 있어 이동하겠습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서면 브리핑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그럼. "
도일은 마지막까지도 깔끔한 매너를 잊지 않았다. 서 회장은 끝내 은재와의 동석을 요구했지만 도일은 마치 준비해 둔 사람처럼 은재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히 은재를 데리고 오는 걸 알고 있다는 건 이미 조이델 강 대표와 이야기가 됐단 얘기야.
우리가 서울 간다는 걸 강 대표도 알고 있고, 은잴 데려가는 걸 극도로 싫어한 강 대표나 은재가 나오기를 굳이 원하는 서 회장이나..둘다 뭔가 있어. 굳이 서울까지 반드시 와야 했던 은재도 마찬가지고. 은재가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연했지만 도일은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은재가 위험하다는 것. 절대 은재를 함부로 노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 강 대표도 서 회장도 은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일은 이를 악물고 호텔로 돌아왔지만 조용히 잠만 자면서 기다릴 은재가 아니었다.
기어이 거길 혼자 갔다온 거죠?
말했잖아요. 아직 서 실장은 준비가 안 됐다고.
나도 이 팀의 책임자예요!
아니라고 한 적 없어요. 그러니까 여태껏 같이 해 왔지. 그걸 부인하는 게 아녜요.
그럼 뭔데요. 도대체 왜 날 배제한 건데요!
...지금 서 실장 컨디션과 마음가짐으론 그 자 상대 못해요.
....!
서수철 회장. 그 사람 만나려고, 여기 서울에 오려고 이 프로젝트에 무리해서 뛰어든 거잖아요. 나한테 상도의도 없는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면서도.
도일의 말에 은재는 부인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솔직한 성격이니만큼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결국 맞았네. 속으로 생각하던 도일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컨트롤이 안될정도로 서 회장은 독사같은 구석이 있었다.
사람의 심리를 간파해서 드러내게 하면서도 자신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 왠만한 사람들은 상대도 할 수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은재라면 서 회장앞에 모든 걸 다 노출시켰을 것이다. 또한 서 회장이 노리는 게 은재라면 더더욱 은재를 노출시킬 수 없었다. 아직 도일조차도 서 회장이 은재에게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또한 도일로써는 두 사람 사이의 해묵은 은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은재만 보여줄 순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은재를 돌아본 도일은 냉정하기가 칼 같았다.
나 서울에 서 실장 데려온 거 후회하려고 하고 있어요. 서울에 오자마자 이렇게 감정 격해지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얼마나 이 서울행을 손꼽아 기다려 왔는지는 잘 알지만 이렇게 일의 경중을 따지지 못하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면 서 실장은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나설 수도, 앞으로 서 회장을 만날 수도 없을 겁니다.
" 뭐라구요? 아니 차 팀장님이 뭔데..."
" 여긴 서 실장 상사인 조이델의 강 대표 주관으로 온 출장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대표인 차도진 대표님의 승인 하에 이 프로젝트의 리노베이션을 위해 온 자리예요. 내 말 한마디면 서 실장은 당장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야 하구요. "
" 차 팀장님! "
" 그리고 난 거짓말하는 사람 싫어요. 성질 드럽고 나쁜 사람은 참아도 거짓말하는 사람은 못 참아. 나한테 왜 이렇게 격해졌는지 은재 씨가 다 오픈하기 전엔 더더욱 서 회장 만날 수 없어요. "
" ......차 팀장 도움 없이 나 혼자 만날 수 있어요. "
은재의 눈이 불처럼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은재에게서 볼 수 없었던 독기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차 팀장님 도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여기 놀러온 게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공적인 자리에 내 마음이 어떻고 내 컨디션이 어떻든 사업적인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자리에 날 배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구요. 지금 당장 나 혼자서 만나겠어요. 은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일을 밀치고 가 버렸고, 은재를 따라 나선 도일은 은재가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버리자 낮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바보 서은재...
그건 널 지키기 위한 방법이란 말야.
넌 그 남자를 감당 못해.
그놈은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도대체 서 회장과 넌 무슨 사이야.
대체 두 사람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 * * * * * * * * * * * * * * * * * * * * * * *
대원그룹 앞까지 간 은재는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17년 전에 보고 처음인 회사였지만 회사 문턱을 밟기도 전 은재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변해버렸구나. 그 회사가 이다지도 커 버렸구나. 모습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더 커졌고 올려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고층 건물이 되었더랬다. 입구에 들어서지도 못하던 은재는 막상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걸음이 차마 내딛어지지 않았다. 회장님 들어오십니다. 경호원들이 외치며 달려나오자 은재는 나무등걸 뒤에 몸을 숨겨야 했다.
수많은 경호원과 호위하는 비서진들 사이로 웅장하고 거룩한 포스로 서수철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더랬다. 암스테르담에서 본게 17년만의 만남이었지만 은재는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행을 준비했을 때부터 컨디션도 별로인 것도 맞았고,
제대로 밥도 먹지도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해 퀭한 모습이었다. 거기다 바삐 뛰어나온다고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고작이었다. 그 흔한 코트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얼굴은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더랬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들어가는 서 회장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은재는 이를 악물고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도일의 말이 맞았다. 은재는 아직 서 회장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저 위풍당당한 꼴을 보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데도 은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호흡도 곤란했더랬다. 심장은 이렇게 뛰고 있는데. 주저앉은 은재의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약하다니.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는데.
바보. 서은재 바보. 네깟게 무슨 복수를 한다고...
" 괜찮으세요? "
" ..........! "
" 저..어디 혹시 불편하세요? "
" !!!!!! "
" 괜찮으세요?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
회장 일행이 들어가고 나서 주저앉아 있는 은재가 어디 불편한 줄 알고 누군가가 잡아 일으키는 게 보였다. 도일의 말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니 컨디션이 좋았을 리 없고, 초췌한 은재 손을 일으켜 세운 소년은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은재는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기 싫어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떨구었다. 헛기침을 하며 돌아선 은재를 보며 고등학생 소년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은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 닦으세요. 괜찮아요.
소년의 목소리에 은재는 멍하니 있다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잠시 닦았다. 남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영 불편해서 고개만 숙이고 있던 차에 그제서야 소년이 건네준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더랬다. 닦으셨으면 나중에 돌려주세요. 가지고 계셨다가요. 그런데 꼭 돌려주세요. 저한테는 소중한 손수건이거든요. 남자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손수건을 내려다보던 은재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이보리색 손수건엔 무당벌레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더랬다.
(주) 대 원 그 룹 창 사 39주 년 기 념
서 대 식
' 이게 어떻게..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걸 어떻게. 이...이건...! '
은재는 손수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비틀거리는 은재의 팔을 잡아 주던 소년이 걱정된다는 듯 은재를 부축하는 바람에 소년의 옷에 걸린 명찰이 눈에 보였다. 명찰에 쓰인 이름표가 그제서야 보였다.
3-2
서 수 완
" ..!!!!!!!! "
- 은재야. 혹시나, 혹여나..우리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일이 터지면, 반드시 네 동생들을 챙겨야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일이 닥쳐도 엄마는 살려야 한다. 엄마와 수완이는 꼭 네가 챙겨야만 해. 알겠니?
- 아빠, 무슨 일이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겨요. 혹시..작은 아버지가..
- 아냐. 그럴 리 있겠니. 네 삼촌은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란다.
- ......
- 수완이를 잘 부탁한다. 이제 갓 태어날 네 막내동생이야. 반드시 네가 챙겨야만 해. 알겠니...? 아빤, 우리 은재를 믿는다.
아빠의 가장 자랑스러운 큰딸이니까.
- 아빠....
아...
"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
" 예? "
" 손수건, 빨아서 갖다주려고요. "
" 안 빨아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
" 그래도 그런 게 아니예요.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
소년이 연락처를 수첩에 적어 은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고, 그 바람에 소년의 손을 꼭 잡은 은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알 수 있었다. 아..그냥 손을 잡아도 알 수 있었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저 알 수 있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을까? 은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서 수 완
010 XXXX XXXX
연락처의 이름을 보는 순간 당장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애써 참았다. 손수건이 참 예쁘네요. 샀어요? 은재가 겨우 묻자 머리를 긁적이던 수완은 씩 하고 웃었다. 전 잘 모르는데 그냥 늘 가지고 다니던 거예요. 아마 어머니가 주셨겠죠.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니까요. 아마 아버지가 선물하시지 않았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수완의 말에 은재는 엉겹결에 소리지르듯 외쳤다. 대원그룹 서.대.식 회장님이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무당벌레를 좋아하셔서요. 어릴 때부터 무당벌레를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무당벌레 노래를 들려주는 걸 좋아했고 또..막내아들이 태어날 걸 기념해서 직접 디자인한 손수건이거든요...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은재를 의아하게 쳐다보던 수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식 회장님이라구요?
지금 회장님은 저희 아버지신데..전 회장님이셨나보네요? 근데 어떻게 아세요? 수완의 물음에 은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꽉 쥐어서 손에 금세 핏물이 배어들었지만 수완에게 보일 수 없어 등 뒤로 겨우 주먹을 감춘 채로. 신문에서 읽었어요. 은재의 말에 수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손수건에 그런 뜻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런 좋은 뜻이 담겨져 있다니 더 소중히 간직해야겠네요. 그냥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손수건이라 별 뜻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어쩐지 손수건 속 무당벌레를 볼 때마다 낯이 익거나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아...
하느님.
엄마. 아빠........
우리 막내가 이렇게 컸어요..
은재는 수완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꼭 빨아서 돌려줄게요. 수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은재는 등돌려 뛰어가기 시작했고, 수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름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근데 손수건 일화 얘기하면서 왜 얼굴이 그렇지...? 진짜 이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슬프게 울고 있던 거지?
나는 왜, 그 우는 얼굴을 보는데 나까지 따라 울고 싶어졌던 걸까..
서 실장!
.........
서 실장, 지금 시간이 몇 신줄이나 알아요? 몸 상태도 안 좋은 사람이 여기가 어디라고 길도 모를 거면서, 전화는 왜 안받아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ㄷ...
.........
은재 씨...왜 그래요? 은재 씨?!!!
호텔 펜트하우스 앞을 몇 번을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서울 지리도 모르는 사람이 몇 시간째 연락 두절이라 도일은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몇 시간만에 겨우 호텔로 돌아온 은재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머리도 헝클어지고 얼마나 운 건지 눈두덩이 새빨개져서 퉁퉁 부어 오른데다 아직까지도 온 얼굴이 눈물로 젖어있었더랬다.
흐읍........
.....!
은재는 주저앉은 채 어깨를 떨기 시작했다. 도일 앞에서 단 한번도 울기는 커녕 약한 모습도 보여준 적 없는 그녀였다. 딱 그때가 떠올랐다. 암스테르담 다리 위에서 처연하게 꼭 다리 밑으로 떨어질 사람처럼, 추락할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절망에 빠져 있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은재는 말도 못하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저렇게 다 드러내놓고 소리내어 우는 것도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재의 몰골도 그랬지만 손등에 온통 핏자국이었다. 옷에도 피가 묻어있고 손수건 하나만 붙든 채 엉엉 울기 시작하는데, 많은 일에 단련되어 있던 도일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달래다 되지 않으니 도일은 은재를 와락 안아주었다.
그만 울어.
아니 어떨땐 겉으로 웃고 있어도 속엔 울고 있는 것 같더니.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누더기가 되어서 나타난 거야.
서은재.
나 좀 그만 시험해.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서 우는 거 나 너무 보기 힘들어.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게 우냐고..
* * * * * * * * * * * * * * * *
한동안 누워서 잠든 은재는 반나절 만에 깨었다. 손등을 내려다보니 반창고와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은재가 눈을 뜨자 옆에서 뜨거운 커피 포트가 끓는 소리가 났다. 깼네. 의사 다녀갔는데 피로누적이고 영양 불균형이래요. 그 몸에 다이어트 하냐는 소리까지 들었네. 커피 포트가 끓자 물을 내린 도일은 천천히 은재에게로 다가왔다. 일어났으면 밥 먹고 약도 먹어요.
정신을 차려야 메인 무대에 설 수 있으니까. 도일의 말에 은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서야 도일 앞에서 펑펑 울면서 무너졌던 게 떠올라 입을 열려 했지만 도일은 씩 웃었다. 빨리 밥 먹고 약도 먹어야 전쟁 치를 수 있지 않겠어요? 그 꼴로 이번 기획 건축 디자이너 할 건 아니죠? 바이어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은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도일이 고마웠다. 분명 뭔가 더 묻고 싶을텐데 은재를 배려해서 도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줬다. 바이어들이라면..대원그룹 임원진을 만난다는 건가요?
서 회장도요? 그건 안된다면서요. 힘이 없지만 나지막히 뇌까리던 은재의 물음에도 도일은 빙긋 웃기만 했다. 괜찮아요.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준비 됐으면 일단 밥부터 먹어요. 밥심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서, 서 회장이 보더라도 절대 은재 씨 심리도 마음도 아무것도 알 수 없게끔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자구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말로 당장 궁금한 것 투성이일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는 도일이 궁금했다. 하지만 서 회장과 관련된 일을 도일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은재는 일단 바이어 미팅을 준비하기 위해 나섰고,
준비하는 동안 세심하게 모든 걸 다 준비시켜 놓은 도일이 고맙기만 했다. 겉으론 까칠하고 차가워 보여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한번이라도 도일에게 그런 배려를 해본 적이 있던가, 새삼 부끄러운 대목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서울행을 위해 자신을 대신해 직접 강 대표를 만날 만큼 무리한 사람이었는데. 그냥 난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어.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시간은 모자랐어. 아직도 네 동생이나 찾지 못하고 있고 이제 겨우 수완이를 만났을 뿐인 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리셉션 장에 도착한 은재와 도일은 서 회장과 만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조이델 서은재 실장입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건축 디자이너입니다. "
" ...........! "
" 암스테르담에서 뵙고 두번째네요. 잘 지내셨죠? "
" 아, 물론 그렇소. 서울에 온 이후로 한번도 못 보았는데 리셉션 마치고 식사나 할까요? "
" ........... "
" 죄송합니다 회장님. 끝나고 팀별 브리핑이 있어서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
은재 대신 도일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서 회장은 식사한다는 명목으로 은재의 모든 것을 알아낼 기세였던지라, 지난 번에도 은재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은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서 회장과 은재는 자주 만나게 하지 않는 쪽이었다. 사람 심리를 읽는데 도사인 독사같은 자였다. 은재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은재 역시 자칫 잘못했다간 서 회장의 마수에 걸려들 뻔 하였더랬다. 바이어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은재와 도일은 열심히 준비를 잘 한 덕에 암스테르담 리노베이션 그 이상으로 두번째 바이어 미팅도 원활하게 잘 이뤄냈고, 암스테르담 성공이 기우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 서 회장은 미팅 내내 도일과 은재를 살펴보았지만 유럽 건축계의 라이징 업체로 떠오르고 있는 조이델과 레이체의 에이스들 다웠다. 열심히 준비했고, 꼼꼼했고, 빈틈이 없었으며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젊은 감각과 체계적인 진행을 갖추고 있었다. 바이어들은 모두 높은 점수를 주며 투자를 약속했더랬고, 수익에 민감한 서 회장마저도 모든 임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결국 대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은재의 약점을 찾으려 애썼으나 심리를 파고들려 할 때마다 도일이 막고 여유롭게 잘 빠져나갔다. 숙소도 어디 묵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팀원들과 따로 연락할 수 없고,
스파이도 심을 수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오래 일한 강 대표마저도 은재의 팀원들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포섭되지 못했다고 얘기한 적 있었다. 그 정도면 은재의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팀원들을 아우르는 실력과 인품이 어느정도인지 알만 했다. 제대로 충성스러운 자들을 뒀군.
...많이 컸구나, 꼬마야.
- 반드시요! 반드시 우리 부모님 회사 찾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데려간 내 동생도 찾아오고, 당신이 세계 곳곳에 갖다버린 내 동생들 다 찾아올 거예요. 아직 어리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나 있는 곳으로 보낸다고 해놓고 비행기에 갖다 버린 내동생 지환이, 나한테 데려다준다 해놓고 어디 버렸는지도 모르고 소식도 모르게 한 우리 재희, 우리 영신이..우리 막둥이까지! 당신이 왜 어린 나를 네덜란드에 있는 외삼촌네로 보내는지 알아요. 우리 부모님 숨겨진 유산과 회사 지분 때문이죠!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내 동생들이 모두 모여 막강한 지분과 유산을 상속받을 때까지 필요하니까...!!! 기다리세요. 당신 목줄 끊으러 내가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올 거니까!
열 일곱살의 독기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눈빛은 죽은 형의 눈빛 그대로였다. 왠만하면 은재의 외삼촌이며 죽은 형수의 동생인 은재 외삼촌인 강 대표와도 평생 연락하지 않길 바랬었다. 말이 외삼촌이지 순 깡패나 다름 없었다. 외삼촌에게로 보냈을 때가 열 일곱이었으니 꼬박 17년이 지난 셈이었고 그동안 은재는 그 떠날 때의 독기가 무색할 정도로 조용히 살아줬었다.
그래. 다 잊고 살아줬겠지 싶어서 서 회장은 그동안 은재의 일도 잊고 살았었다. 하지만 떠날 때의 은재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서 회장이 수완을 거둔 것도 그 이유였다. 정말 지독한 놈. 그 누구도 믿지 못해서 자식들을 위한 보험을 들어놓았을 줄이야.
죽기보다도 더 싫었지만 서 회장은 지금 임시 회장이었다. 그 기간이 17년이나 지속되었지만 죽은 형님의 후계자가 다시 회사를 물려받겠다고 하면 내 줘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미 1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모든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진데다 대부분 어릴 때 일이라 죽은 형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를 나이였다. 단, 거의 성인에 가까웠던 은재만 제외하고는.
이미 헤어질때가 열 일곱살때였다. 비록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이기는 했지만, 은재가 성인만 되었더라도 스무살만 넘겼더라도 대원그룹의 왕관은 장녀인 은재에게 넘어갔을 터였다. 그 생각만 해도 아직 아찔했다. 이사회의 모든 공론을 모으고 후계자인 은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임시로 넘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왔던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마음이 이러했었을까. 하지만 모든 게 다 지난 일이라 믿었다. 17년이나 지났고 지금은 전임 회장인 자신의 형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회사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 은재가 돌아온다고 해도 은재가 대원그룹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10년이 지나자 이제 서 회장도 슬슬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은재가 기억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래도 외삼촌이 지분을 가져갔으니 더이상 배는 굶지 않았을 테고, 지금쯤이면 시집이나 갔을 거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서은재는 유럽 리노베이션의 책임자가 되어 당당히 자신 앞에 섰다. 대원그룹의 후계자라는 여전한 타이틀을 손아귀에 쥔 채로. 눈빛은 형님의 단단한 눈빛 그대로였고, 미모는 아름다웠던 형수님의 자태 그대로였다. 서 회장은 악수하는 손에 진땀이 나고 있었다.
" 그럼, 또 다시 뵙겠습니다. 서. 수. 철 회장님. "
회사를 나오면서 은재는 서 회장과 있을 때의 담담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차에 타자마자 하얗게 얼굴이 질렸더랬다. 택시 안이라 아무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목선이 흠뻑 젖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더랬다. 호텔 라운지에 도착한 도일은 발코니에 있는 은재에게 맥주 한 캔을 가져다 주었다. 한 잔 마시고 푹 자요. 내일부턴 일이 많으니까. 도일의 말에 은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일을 돌아보았다. 도일 씨 말이 맞았어요.
"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었어요. 서 회장을 대면할 용기가...그렇게 오래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
" 그렇지만 잘 했어요. 그 누구도 은재 씨처럼 잘해내진 못했을 거예요. "
" ...아니예요. 도일 씨가 아니었더라면 실수했을 거예요. 도일 씨가 나가길 잘한 거예요. 그 사람은, 내 심리를 속속들이 다 파헤쳤겠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까지도..."
" ........ "
"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계획해왔던 거였는데도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 줄은, "
" 은재 씨. "
" 하지만 꼭 해내고 싶어요. 아니, 해내고야 말 거예요. 반드시..되찾아야만 해요. 꼭요. "
" ...........그게 뭔데요.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
"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지금은요. "
은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은재의 이마를 만졌다. 이미 열이 불덩이였다. 서 회장을 만난 것만으로도 저렇게 온 몸이 다 긴장할 정도라면. 그리고 은재 뿐만 아니라 서 회장 역시 은재와 단 둘이 만날 기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은재가 어디에 묵고 있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팀원들에게 듣자 하니 팀원들 한명 한명에게까지 숙소가 어딘지, 특히 서은재 실장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고 다녔다는 얘기였다. 암스테르담 본사에도 몇 번이고 사람이 오고가고 전화통에 불이 났다 했다.
다행히 은재의 팀원들이 입이 무거움은 물론, 도일의 팀원들 한 명까지도 절대 발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파리한 은재를 더 이상 무리하게 할 순 없다 생각해서 도일은 괜찮다는 은재를 애써 재웠다. 은재는 서 회장을 만나고 와서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 회장을 한번 만난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분명 서 회장을 두번째로 만나고 와선 멍하니 있는 날이 많아졌더랬다. 은재 말로는 서 회장을 만날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고만 했다.
아냐...
분명 무슨 일이 있어.
서 회장을 만나지도 못했다는데 저렇게 멘탈이 나갈 리가.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
잠든 은재는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도일을 애타게 만들었다. 의사도 왔다 갔지만 요 몇주 사이 너무 신경을 써서 밥도 잘 챙겨먹고 영양 균형이 잡혀야 주사나 약도 들을 거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링거를 몇 방을 맞고 나서야 은재는 겨우 잠이 들었고, 직접 물수건을 가져다가 은재의 이마에 덮어주며 은재의 열이 내리기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던 도일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열이 조금 내리는 듯 하던 은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고,
물수건을 가지고 달려온 도일이 침대맡에 가까이 다가 앉아 은재의 손을 잡아주었다. 서 실장 정신 차려요. 서 실장님..! 서은재! 은재야! 은재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자 은재의 입에서 뇌까리듯 이름 몇 개가 불리워졌다. 아빠, 엄마.....지환아...재희야...
영신아...! 수완아..! 낯선 이름들을 계속 부르던 은재는 도일의 손에 잡힌 채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다시 바로했더랬다. 누구의 이름인지도 모르고 부르던 은재는 그제서야 잠이 들었는지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다시 열이 오르는 은재의 이마를 짚어내려가던 도일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서은재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지. 한참 잠에 빠져들었던 은재는 이마를 짓누르는 무거운 느낌이 들어 천천히 눈을 떴다. 열이 내린 것이다.
" ..............! "
침대 머리맡에 머리가 닿인 도일이 졸고 있었다. 서울행을 준비할 때부터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불안해하는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을 텐데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도 가슴 아팠더랬다. 그가 깰까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은재는 담요를 가져와 도일의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나는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그에게 의지하게 된 건.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오로지 동생들을 찾는 일과 아버지의 회사를 찾는 일이 내 남은 인생의 모든 소명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은재였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도일에게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마음을 열어 보여준 건 경유 이후 아무도 없었다. 이런 마음을 온전히 받아도 될런지..도일을 쳐다보던 은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서 회장을 만날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당벌레 손수건을 가지고 있는 수완을 보는 순간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 회장은 태어난 아기가 죽었다고 얘기했었고, 서 회장에게 막내아들이 있다는 걸 네덜란드에 도착하고 나서 알았다.
이름이 서수완이라는 걸 듣자마자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열 일곱살의 서은재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도 없었다. 수완을 되찾기 위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서 회장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그리고 서 회장의 집에서 서 회장을 아버지로 알고 자랄 수완을 만나기 위해서 이번 프로젝트 참여가 필수였더랬다. 언젠간 서 회장을 만나면 수완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살아온 은재였지만 눈 앞에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막내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 회장과 그의 큰아들은 교활하고 비정하다고 들었는데, 주저앉은 자신을 지나치지 못하고 손수건을 내민 수완을 보자 가슴이 저며오는 것이었다. 잘 자랐어. 너무나 잘 자랐어..누난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단다.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니 먹먹한 은재는 도일이 옆에서 잠든 걸 보자 이상하게도 편안하게 잠이 오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게 당신이 어떤 의민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고마워요. 도일 씨...
잠에서 깬 도일은 침대에 아무도 없자 그대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은재 씨!!! 서은재! 서 실장님!!! 서은재! 은재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여기 저기 찾기 시작하던 도일은 파우더 룸에서 단정한 차림으로 나오는 은재를 보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금 초췌해지긴 했지만 며칠 전만 해도 고열로 끙끙 앓던 모습은 아니었다. 배고파서 방금 죽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 또 배고파요. 어서 씻고 나오세요. 순두부 찌개 먹으러 가고 싶어요. 서울에서 유명한 곳이 있는데, 제가 살게요. 은재가 수줍고 부끄러운 얼굴로 말을 걸자 도일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두부 찌개 좋아해요? 은재의 말에 도일은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고개를 끄덕였고, 은재는 순한 도일이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피식 웃었다. 저희 아빠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예요. 좋아하던 곳이기도 하고, 꼭 중요한 일이 있으시면 그 전날 순두부 찌개 집을 데리고 가셨거든요. 은재의 말에 도일은 은재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 느껴졌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도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은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뭐..뭐예요. "
" 열 있나 보려고. "
" 예? "
은재의 이마를 짚던 도일은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내렸네. 오늘이라도 열 안내렸으면 돌팔이 의사라고 고소할 뻔 했거든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어이 없다는 듯 웃어버렸고, 은재가 화사하게 웃자 도일은 씻고 오겠다며 나서다가 은재를 뒤돌아보았다. 도일과 눈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은재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근데 중요한 일이 뭐예요? 중요한 일이 있기 전에 순두부 찌갤 먹으러 간다기에. 도일의 말에 은재는 작정했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일을 쳐다보았더랬다. 아빠. 나 믿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요.
지켜봐 주세요.
나 혼자서가 아니라, 같이 시작할 거니까.
그리고 지켜봐 주세요.
수완이를 찾았어요.
이제 지환이, 재희, 영신이..모두 하나씩 찾아올 거예요.
찾아서,
아빠 회사를 꼭 되찾고야 말 거예요.
" 서대식 회장을 만나러 같이 가 줘요. "
* * * * * * * * * * * * * * * * * *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Stedelijk Museum) 근교 B 스튜디오
모던 아트가 전문인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는 회화, 조각, 판화 뿐 아니라 공업 디자인, 포스터, 사진 등도 전시하고 있다. 원래는 고흐를 비롯하여 모네, 마네, 세잔, 피카소, 보나르 등 19세기 후반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적극적인 컬렉션 활동을 벌인 결과 비구상 작품을도 다수 소장하게 되었다. 은재가 한국으로 떠나지만 않았어도 경유는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사표를 썼을 터였다. 이미 사표는 작성한 뒤였고 이번 일의 중간 리노베이션까지만 오면 본사에 있는 동료에게 일을 넘기게 이미 마음 속으로 인수인계도 다 끝난 상황이었다. 다만, 은재가 서울에 있느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유는 자신이 시은과 민제를 소개시킨 이후부터 민제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휴가에, 외근에..그의 모습을 못 본게 벌써 1주일째였다. 그렇다고 일에 지장을 준 건 아니었다. 출장을 자처했다고 했고, 외근도 모두 그가 도맡아서 했다. 부팀장에게 내내 전화가 걸려왔고, 왠만한 일은 재택근무를 하겠다 했다.
한동안 독감에 걸렸다는 말까지 전해온 뒤부터 경유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분명히 시은을 만나게 해줬으니 시은이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었다. 경유가 서민우의 약혼녀라는 걸. 자신도 충격이었는데 당연히 민제도 그럴테지. 하지만 그 방법만이 민제가 자신을 잊게 하는 방법이었더랬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경유는 회사 입구를 나서서 횡단보도 앞에 섰다. 날이 쌀쌀한지 반코트를 여미고 있는데 횡단보도 맞은 편에 그가 서 있었다. 초췌한 얼굴로, 수염도 덜 깎은 그런 얼굴로. 초록불로 바뀌자 천천히 그가 걸어왔다. 1주일 만이었다. 얼굴을 안 보면 마음에서 멀어질테니 오히려 경유는 이를 좋다 했었다.
안 보면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이 흔들림도 아주 자연스럽게 젖어들 거라고.
널 안보면 지우는 게 가능할 거라는 애닲픈 착각.
" 그렇게 입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
" .......! "
" 나 나쁜 맘 먹게 하지 말라고. "
" ......!!!! "
" 나 만날 때만 그렇게 입으라니까. 성경유 앞에 나쁜 놈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라서. "
" 서 대리님. "
" 그게 어떤 거냐고 안 물어요? 생명이 전율하는 거 같은 그런 건데. "
" .............! "
" 어때요. 이렇게 말하니까 날라리 같고 가벼운 놈 같죠? 이쯤하면 되겠어요? "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만 갸웃거리는 경유를 향해 민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은 벌겋게 퀭하고 몇 일을 굶은 건지 마음 고생을 얼마나 한 건지 온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이렇게 날라리처럼 나오면 되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내 뺨을 때릴 테고 또 날 떼어놓기 위해 온갖 독한 말은 다 할 테고. 그럼 난 모가지가 비틀린 바보처럼 또 당신한테 매달릴 테고. 우린 무한반복처럼 또 그런 걸 계속하겠죠. 당신은 날 떼어내고 날 포기시키기 위해 평소엔 입에도 안댈 독한 말을 주워담을 테니까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많이 아팠어요...? "
" .............."
" 아파서 결근했다길래. "
" .........걱정은 되나 보죠? "
" 네. "
" ............! "
" 많이 안 아팠으면 좋겠어서요. "
또다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밀어낼 줄 알았더니, 아프지 말길 바란다는 경유 말에 민제는 다시 눈을 감아내렸다. 사실은 온 힘을 다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참는 건 나거든요. 팀장님은 그 1주일간만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생각했죠? 날 시은이한테 소개시키면 그 독한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죠? 내가 1주일 동안 없어지니까 그 동안은 다른 여자한테 갔거나 시은이한테 갔거나 그쪽을 향한 마음은 너무 가벼우니까 잊기 쉬웠을 거라 생각했죠? 아니, 아예 이참에 회사까지 관뒀음 좋겠죠.
그럼 아예 영영 안 볼수 있으니까. 아니, 그건 경유 씨 몫인가요? 공 부장님께 들었어요. 이미 미리 사표 제출하려고 준비한다면서요. 지금 서울에 가 있는 팀장님들 돌아오면 바로 진행한다고 하던데. 나랑 한 공간에 있는 게 그렇게 못 견디게 싫은 거겠죠. 민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송곳이 되어 경유에게 와 박혔지만 예전이라면 송두리째 흔들렸을 마음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죄인이야.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난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해..
내가 민우 씨한테 그런 죄를 지을 순 없어.
난 그럴 자격도 없어.
" 집에 가서 쉬세요. 회사에서 뵈어요. "
경유는 더 독한 말은 생각도 나지 않아 파리한 얼굴로 돌아섰고, 성큼성큼 다가온 민제는 경유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뜨겁고, 간절하던지 그를 떨쳐내어야 마땅함에도 경유는 로봇이라도 된 것 같았다. 떨쳐내야 하고, 밀어내야 하고, 뺨이라도 올려붙여야 하는데..경유는 그대로 팔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흔들리는 게 아니었어 나는. 처음엔 닮아서 끌렸고, 겁났고, 서민우를 생각나게 하는 모든 것들이 힘들었어.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매번 내 마음을 두드리면서 웃으면서 다가오는 그를 거부하기가 너무 힘들었어.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이길 수가 없어서.
이제는..
안 보고, 못 보는 걸로는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무너진 경유를 향해 민제는 와락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경유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경유의 온 몸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던 민제의 눈에서는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리고 나한테 형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거야. 죽어서도 이 죄는 씻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정말 미안해.
나는..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됐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 그만 경유를 놔 줘.
이제 형의 여자가 아니라,
내 여자로 살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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