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mile Again
은재가 리셉션 파티에 참석한 것은 신의 한수라는 것을 이번 리노베이션 담당자들은 새삼 느끼고 있었다. 은재가 서대식 회장의 장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재에게 과거를 물은 적이 없으니 그건 도일도 마찬가지였다.
은재가 강 대표의 조카딸로 되어 있지만 강 대표가 서대식 회장의 처남이라는 걸 알기엔 도일도 깊이 파고들지 않았으니까. 아니 은재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은재의 과거나 집안 사정을 낱낱이 파헤칠 생각이 없기 때문이리라. 도일이 전해준 드레스를 입고 도일과 함께 리셉션 장에 도착한 은재는 그야말로 등장하자마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꼭 필요한 등장이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은재가 예상 이외의 주목을 받자 점점 도일의 표정은 굳어가기 시작했더랬다.
특히나, 모든 남자들의 시선이 은재를 향했다. 설계 디자이너가 이런 파티에 익숙하지 않음을 알고, 대원그룹 쪽에서 일부러 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리셉션을 준비한 것이겠으나 은재는 은재였다. 17년 전 이미 대원그룹의 장녀로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아온 은재가 아니었나. 이미 준비된 인재나 다름 없었다. 도일 역시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상류층의 후계자로 17년을 살아온 은재가 아무리 배경이나 상황이 바뀐다 해도 몸에 배인 애티튜드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아니, 뭘 저렇게까지 능숙하대요? 유럽 암스테르담에서 설계디자인만 전공한 디자이너라 하지 않았어요? 근데 상류층 파티에 거부감이 없네. 누가 보면 후계자로 수십년은 살아온 사람인 줄 알겠어요. 저 복잡하고 어려운 파티에도 손색이 없고. 주변에서 수근대는 말을 들으며 더더욱 도일은 은재를 쳐다보았다. 남자들의 왈츠 신청에도 은재는 빼지 않고 응했더랬다.
보통 왈츠는 춤 좀 춘다고 하는 식이 아니었다. 상류층 파티에 다녀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까다롭고 어려운 춤이기도 했다. 도일도 파티는 젬병이었기 때문에 아예 라운지 바에서 술만 축내고 있었지만 파티의 꽃이 되어버린 은재는 온갖 밀려드는 왈츠 요청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덜 이쁠 것이지.
입이 이만큼 튀어나온 도일은 비상구 계단에서 비상용으로 아까 웨이터에게서 받아 둔 맥주 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파티가 재밌을 리도 없었다. 대충 바이어들에게 눈도장도 찍었겠다, 대원그룹 사주만 오면 눈인사만 하고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은재가 우울해하니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면서 소소하게 밥도 사먹이고 데이트도 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었으나 도일은 귀가 처진 토끼마냥 비상구 계단 벽에 기대어 맥주를 두 캔째 홀짝이는 중이었다. 와인이고 위스키고 도일과는 맞지 않았다. 한국 소주나 맥주 두 캔이면 마시는 술로는 충분했으니까. 아마 은재가 저기 있는 남자들과 다 왈츠를 추려면 새벽 내내 달려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은재를 강제로 데리고 나오지는 않았다. 이건 은재가 선택한 삶이야. 내가 뭐라고 할 이유는 없어. 도일은 차가운 벽에 기댄 채 이제 막 취기가 오른 참이었다. 세 캔 째의 맥주를 따려고 한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벽 어귀에서 들렸다. 저도 한 잔 주세요.
" .........?! "
" 치사하긴. 내가 맥주 얼마나 좋아하는데 혼자 맥주를 두 캔이나 마셔요? "
" ..........! "
" 어서요. 한 잔 달라니까. "
은재가 라임색 드레스를 입은 채로 삐딱하게 서 있었다. 도일은 리셉션장에 은재를 데려온 것을 1시간만에 후회해야 했다. 은재는 자신의 눈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달의 여신 같은 아름다움과 매력만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춤추러 간 줄 알았는데요.
말을 꺼내는 도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 말도 자연스레 퉁명스러워졌고, 빈 맥주캔들을 바라보던 은재의 말없는 시선이 깊어졌다. 나 먹을 건 남겨놓죠. 치사하게. 은재 말에 도일은 그런 은재를 본체 만체했다. 춤추느라 바쁜 줄 알았죠. 도일의 입이 튀어나온 걸 귀엽게 쳐다보고 있던 은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은재는 빠져 있는 도일을 쳐다보았다. 파트너가 없어서 찾고 있었어요.
" 춤추던 사람들은 다 어쩌고요? 그렇게 오랫동안 추더니. "
" 어머, 어떻게 알았대? 나만 보고 있었나 봐. "
" 어. "
은재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도일이 정직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가 진지하고 정직하게 이야기하자 오히려 당황한 은재는 헛기침을 했고, 도일은 쓴 웃음을 지었더랬다. 그렇게 잘추는 줄 몰랐어. 그래도 데려온 거 후회 안해요. 서은재 예쁜거 잘하는 거, 잘 어울리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니까. 도일의 말에 은재의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단 한번도 그렇게 얘기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더랬다.
- 우리 은재 세상에서 젤 예쁜거, 잘 하는 거,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지.
" ..... "
아버지 이후로 처음이었다. 외삼촌인 강 대표는 은재의 장점을 즐기기에 급급했다. 은재가 더 유명해지고 잘나가는 것을 극도로 반대해왔더랬다. 은재를 소중하고 귀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부모님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은재는 도일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나 춤추는 것 좀 보고 있지. 차 팀장님 보라고 췄는데 안 보고 있어서 더 열심히 췄는데.
은재의 말에 도일의 눈이 커졌다. 은재가 직진하니 도일의 눈이 당황해서 갈 곳을 잃었다. 귓볼까지 빨개진 도일을 보며 은재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지 말아요. 내가 말했죠. 당신 없이는 무섭다고. 겁난다구. 그러니까 나 놔두고 아무데도 가지 말아요.
항상 강하던 여자였다. 눈물은 커녕 약해지거나 무너지는 모습도 보인 저기 없었던 여자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금세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은재는 언제부턴가 자신을 위해 물심양면 도움을 아끼지 않고 항상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이었다. 서울행 역시 도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왜 몰랐을까.
나한테 과분한 사람이었는데.
난 당신에게 아직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려나.
여자의 약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엉거주춤 일어난 도일에게 은재가 입을 열었다. 춤은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아버지가 춤을 정말 잘 추셨거든요. 그래서 아빠와 왈츠 추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죠. 아빠한테 지지 않기 위해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은재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 건 17년만이었다. 그동안은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도일은 눈물이 맺힌 은재를 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대원그룹 전 사주인 서대식 회장인가요?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도일에게 아버지가 누군지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강 대표의 조카딸로 알려져 있었지만 족보관계를 완전히 다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강 대표의 먼 친척 조카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회사에서도 경유 말고는 은재의 과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재가 말한 적은 없지만 도일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던 것이 강 대표는 작고한 서 회장의 처남이었으니 충분히 서울에 오고 싶은 건 대원그룹 서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 때문이죠? 도일은 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 서수철 회장 가족 사진 속에서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이었다.
우리 막둥이.
수완아..
사랑하는 우리 수완이.
수완의 활짝 웃는 사진을 보면서 은재는 기어이 눈물을 쏟았고, 그런 은재에게 다가선 도일은 천천히 은재의 어깨를 쓸어안았다. 은재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벌개진 눈으로 도일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경유조차 내가 말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 웃는 얼굴이 닮았어요. 은재 씨랑. "
" 닮았어요? 정말 나랑 닮았어요? "
" 네. "
무너진 은재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도일의 품에서 울기만 했다. 17년만이었다. 아버지 얘기도, 수완의 얘기도 처음이었다. 얼마나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아왔던가. 울고 또 울던 은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고마워요. 정말 평생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일줄 알았어요. 다시 이렇게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거든요. 퉁퉁 부어오른 은재의 눈물을 닦아 준 도일의 눈동자도 불거졌더랬다. 아니, 바보같이 이렇게 잘 울면서..수도꼭지도 아니고 뭘 이렇게 잘 울어. 은재가 섧게 울기 시작하자 도일은 그야말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은재의 삶을 알지 못했던 도일은 그동안 은재를 오해했던 시간들이 너무 후회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을 되찾기 위해서였다니..도일의 품에서 실컷 울던 은재는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고개를 들어 눈물을 다시 닦고 도일의 품에서 빠져나왔지만 도일은 은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은재가 그런 도일을 쳐다보았더랬다.
누가 오는 것 같아요.
은재의 떨리는 목소리에 도일은 그제서야 은재의 손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주저하는 은재를 바라보던 도일은 리셉션 장의 소란스러운 모습을 흘깃 쳐다보더니 속사였다. 서 회장이 도착했나봐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떨리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미세하게 떨리는 은재의 어깨를 쳐다보던 도일은 계단을 나서려는 은재의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와락 안으면서 입술을 찾아들었다. 뜨겁지만 부드러웠고, 은재의 놀란 가슴만큼이나 도일의 심장도 쿵쾅거리며 커지기 직전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마음인듯 은재도 도일도 서로의 입술을 찾으며 뜨겁게 포옹했더랬다. 이젠 비상구 계단의 문이 열리며 흡연자들이 담배를 하났기 물고 들어오기 시작했고, 도일은 은재의 손을 잡고 서둘러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리셉션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과 조명 앞에 선 둘은 눈부신지 인상을 찌푸렸고,
도일과 은재를 한참 찾았는지 스탭 하나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어디 계셨던 거예요. 한참 찾았는데. 서 회장님 가족분들 도착하셨답니다. 아니, 팀장님 얼굴 왜 그러세요? 스탭의 눈이 동그래지자 당황한 도일의 눈이 더 커졌고, 다가온 스탭이 손수건을 꺼내 도일에게 건넸다. 도대체 뭘 드셨길래 입이 다 뻘겋게 묻히신 거예요. 누가 보면 키스라도 하고 온 줄 알겠네.
스탭의 말에 도일은 펄쩍 뛰며 헛기침을 했고, 얼굴이 새빨개진 은재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당황해했지만 다행히 둔한 스탭은 더 이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저 멀리서 서 회장 일가가 입성하는 것이 보이자 은재는 다시 긴장했고, 그런 은재의 손을 도일이 꽉 잡았다. 은재는 주변 시선을 살피며 도일을 쳐다보았지만 도일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 앞에서 일부러 은재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때. 아직도 겁나요?
....
만일 그렇다고 하면 내가 손 잡고 뛰어주려고. 공주님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에 무조건 뛰어들 수 있거든요.
도일의 말에 은재는 도일의 손을 잡은 손에 꼭 힘을 주었다. 이제 됐어요. 은재의 말에 도일은 피식 웃었다. 서은재 너무한다. 난 키스 때문에 용기 난 줄 알았는데.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도일이 귀여운지 은재는 미소를 지었다.
" 당연히 '키스' 때문이죠. "
은재의 말에 도일의 표정도 환해졌고, 두 사람은 용기있게 손을 꼭 맞잡았다. 멀리서 일가와 함께 있던 서수철 회장은 내내 심기가 불편했더랬다. 다가온 이사진들이 몰려든 바이어들을 보며 칭찬하기 바빴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어떻게 유럽 건축업계에까지 관심이 크십니까.
..손대시는 것마다 잭팟을 터트리시니 앞을 내다보시는 천리경이라도 가지고 계신 거 아닙니까?
과한 아부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지 서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운이 좋아서죠 뭘.
" 근데 이번 일은 암스테르담의 두 젊은 디자이너가 대단한 모양입니다. 암스테르담 현지에서도 극찬이 대단했답니다. "
" .......... "
서 회장은 천천히 웃음기가 걷히고 있었고, 이사진들 앞이라 표정관리에 최대한 애쓰는 느낌이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이번 리셉션의 주역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고 있었다.
역시 젊은 피가 좋군요. 아주 환해지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그러게요. 저 젊은 설계 디자이너가 대단한 모양이예요. 일도 일이지만 아까 무대 애티튜드를 봤어야 했어요. 기껏 회사원일 텐데 상류층 매너를 꿰고 있더라니까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안 나지?
......!!!
나잇대가 있는 이사장이 안경을 치켜올리자 서 회장이 긴장한 듯 고개를 들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은재를 바라보며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야. 그래도 너무 닮았어..연세가 지긋한 이사장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돌아가신 선대 회장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사진들이 은재와 도일에 대한 평가가 치솟고 있는 와중에 서 회장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서은재가 간도 크게 이 리셉션에 올줄은 예상 못한 시나리오였다. 이때까지 강 대표 밑에서 숨죽이고 살면서도 단 한번도 서울 땅을 밟지 않았던 아이였다. 17년 전의 일..서은재가 다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재한 건 나야.
네 년은 애송이일 뿐. 17년 전에도, 지금도 넌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해. 이를 악물고 은재를 노려보던 서 회장에게 비서가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도련님들과 사모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포토월에 서시면 될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서 회장이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수완일 데려왔다고? 힐난하는 듯한 서 회장의 말에 비서가 마른 침을 삼켰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번 리노베이션 화제성이 커서 이미 집 앞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주변의 이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사 홍보팀에서는 이번이 기회 중의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하고 대대적으로 막내 도련님까지 포토월에 서서 호보하는 것이 이번 리노베이션에 도움이 된다 판단했습니다. 또한 이사회도 승인을 했구요. 비서의 말에 서 회장은 이를 악물었더랬다.
내 가족을 홍보에 사용하는데 내 승인도 없이 이사회가..? 서 회장은 진노하며 이사회를 향해 돌아섰지만 비서가 다급하게 서 회장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이사회와 이사장은 아직도 전 선대회장을 따르는 자들이 많고 특히 이사장은 선대 회장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고,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습니다. 거기다 국회의원 조성우의 친아버지이며 대통령 각하께서도 함부로 못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도 조 의원이 참석할 겁니다. 앞날을 잘 예상하셔야 합니다. 그 부인은 검찰 총장이시죠.
부인의 외가에서 오는 부유한 상류층 세력들은 어떻구요. 앞으로 회장님의 뒤를 이어 큰 도련님이 대원을 이끌 거라면 반드시 사돈을 맺어야 합니다. 그 어떤 사돈 가문도 대통령 가문보다 더 영예롭지는 않을 테지요. 지금은 화를 억누르세요.
비서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서 회장은 이를 갈면서 가족 일가의 등장을 쳐다보았으나 불안은 이제부터였다. 최대한 서은재와 수완이를 못 만나게 해. 반드시 만나려고 눈에 불을 켤 테니까. 서 회장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졌고, 남겨진 서 회장은 목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은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신하면서도 불안했다. 이 곳은 자신의 홈그라운드였지만 완전히 대원그룹의 주인은 아니었다. 뺏기지도 않겠지만 넌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을 거다.
서 회장 일가가 포토월에서 내려오자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서 회장의 장남인 서지완은 다소 평범한 인상에 화려한 명품 수트를 입고 포토월에 섰다. 서 회장의 부인인 장석희 여사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큰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만하고 평범한 인상의 지완은 처음 공식적인 포토월에 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 회장 아들이야. 생각보다 평범한데? "
" ..명품만 너무 빼입은 것 같은데? "
" 얼굴이나 피지컬이 좀 아쉬워. 빈티나는데? "
" 소문으로는 명문대 근처에도 못 가서 인서울도 간신히 턱걸이하고 공부 못하고 돈만 날리는 인물이라고 서 회장 부부가 골머리를 앓는대. "
기자들과 모여든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석희는 입술을 바드득 깨물었다. 큰 아들인 지완이 내려오고 허름한 교복 차림의 작은 아들이 포토월에 서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저게 누구야. 작은 아들? 작은 아들 이번이 첫 공개지?
와, 세상에..아이돌이나 배우인지 알겠어.
어떻게 얼굴에서 저렇게 빛이 나지? 진짜 쩌네.
저 작은 아들이 이번에 3천대 1 경쟁률을 뚫고 과학 영재고에 전국 수석기록 세운 놈이래.
기자들의 탄성과 구경꾼들의 환호 앞에 이제 열 일곱이 된 서수완은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 뽀얀 얼굴에 순정만화처럼 작은 얼굴, 오똑한 콧날과 검고 깊은 눈을 가진 배우처럼 깎아지르게 잘 생긴 얼굴이었다. 이번이 공식적인 포토월에 서는 것이었으나 허둥거리지도 않고 마치 자기 자리인것처럼 차분한 매너와 귀족같은 애티튜드로 기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더랬다.
반응이 저조했던 지완과는 달리 수완은 영재고 전국 수석이라는 완벽한 스펙이 알려져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이런 반응을 지켜보던 석희는 이를 악물었다. 저 족제비같은 자식...기어이 우리 지완이 앞길을 막는구나. 석희는 비서를 불러세웠다. 포토월 내려오거든 수완이 여기서 빨리 내보내. 당장 기숙사로 보내버렷! 석희의 말에 비서가 물러나왔다. 카메라 세례를 받아 빛나는 수완을 바라보던 석희의 시선은 쌀쌀하고 매서웠다.
* * * * * * * * *
넌 언제나 빛날거야.
누나가 항상 지켜볼 테니까.
그리고 누나가, 항상 지켜줄 테니까.
샹들리에 뒤에 숨어서 수완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은재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포토월에서 내려온 수완은 비서의 요청에 의해 리무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내려오면서 보니 소매 밑단이 더럽게 무엇인가가 묻어 있었다. 화려하고 명품만 입는 형 지완과는 달리 수완은 교복이 낡아 찢어질때까지 입어야 했다. 소매 끝이 더러워진 것을 본 수완은 걸음을 멈추었다.
화장실 좀 들릴게요. 소매가 더러워서요. 수완의 말에 비서는 남감한 표정이었다. 곧 공항 화장실도 못갈 만큼 바쁜 건 아닐 텐데요? 나가자마자 기자들이 카메라 들고 있을텐데 소매가 더러우면 어떤 기사들이 나갈 것 같으세요? 회사 홍보사가 참 좋아하겠네요. 수완의 빛나는 눈이 비서를 관통할 듯 매서웠다. 서 회장 부부에게 내내 냉대당하고 이복 형인 지완에게 괴롭힘당하고 선하고 착한, 단 한마디의 변명도 못하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막내였지만 역시 타고난 왕족은 어쩔 수 없었다.
수완은 덤덤하고 낮게 이야기했지만 정중하고 낮았다. 낮은 그라베처럼 정중한 목소리였지만 거절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결국 화장실로 향한 수완은 세면대에서 소맷단을 깨끗이 씻었다. 워낙 바느질을 많이 한 터라 단이 많이 해져 있었다.
교복도 겨우 하나 뿐이었다. 형과는 달리 단 한번도 가족 같은 대우를 받은 저기 없었다. 오늘도 기자들이 집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아예 참석할 수도 없었을 터였다. 수완은 아직 어리고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밖에 내보내지 않거나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경향이 대다수였으나 수완은 원망하거나 불만을 가져본 저기 없었다. 오늘 같은 일은 부모님이 뭣 때문에 이러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드는 슬픈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왜 부모님은 날 사랑하지 않을까.
형은 왜 나를 미워할까. 사랑받을 수 없다는 마음이 수완을 슬프게 만들었다. 수완은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고, 막 부딪힌 여자가 수완과 부딪혀서 바닥에 넘어졌더랬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여자를 일으켜 세우던 수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누나는...?!! 세수를 하고 나온 수완도, 부딪힌 은재도 토끼 눈이 되어 눈을 크게 떴다.
은재는 수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금 전까지 눈물이 차올랐던 수완은 헛기침을 했다. 조금 전까지 수완을 지켜보며 펑펑 눈물을 쏟았던 은재 역시 퉁퉁 부어오른 눈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낡은 수완의 교복이 눈에 들어온 은재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원그룹 아들로 살면서 어떻게 교복이 낡고 해질 때까지 입고 다닌단 말인가. 수완을 서 회장 가족이 얼마나 무시하고 냉대해왔는지가 느껴져서 이를 악문 은재는 티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이런 곳에서 또 만나게 될 줄이야.
누나, 이게 인연이라는 건가 봐요. 콧잔등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반가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느껴졌다. 은재의 옷차림이 드레스인 것을 보니 이 파티에 참석한 게 보였다. 은재를 딱 만난 것 뿐이었지만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못 본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다시 한번 꼭 만나고 싶었는데. 수완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들었다.
" 나를? "
" ...이거 돌려주려고. "
은재는 토트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수완의 손 위에 올려놔 주었다.
대원그룹 서 대 식 회장
손수건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너한테 소중한 물건이라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면 돌려주고 싶었어. 은재에게서 손수건을 받아든 수완은 뭉클한 표정으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족들의 냉대에 상처를 받고 가슴아파하던 수완은 은재의 따뜻한 배려 앞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꼭 오래 전부터 알아온 사람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런 운명 같은 사람. 손수건을 받아든 수완은 은재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무당벌레를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저한텐 특별한 의미가 있거든요. 수완은 왠만한 사람에겐 잘 보여주지 않는 와이셔츠 안쪽에서 빛나는 팬던트 목걸이를 꺼내어 보였다. 무당벌레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
아.
아아..
신이시여.
하느님. 신이여...
제 심장이 제발 그만 터지게 해 주세요.
은재는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에 손을 뻗었고, 수완은 당연히 목걸이가 궁금해서 그러려니 해서 직접 목걸이를 벗어서 보여주었다.
1995. 6. 서 수 완
이름을 확인한 은재는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애써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팬던트를 열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더랬다. 수완은 볼이 상기된 채 입을 열었다.
그 노래는 그러니까 솔베이..
솔베이지의 노래.
은재와 말이 겹친 수완은 놀란 얼굴로 은재를 올려다 보았다.
" 어, 어떻게 아세요? "
"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
은재의 목이 메인 목소리에 수완은 영문을 알 리 없어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은재를 쳐다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제 몸의 일부처럼 느껴져요. 어쩌다 보니 제 이름을 알게 되었네요. 서수완이예요. 누나는요...?
은재가 말하기 전에 화장실 복도 밖에서 비서가 수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잠깐만 기다려요. 수완이 밖으로 뛰쳐나갔고, 1분도 되지 않아 돌아왔지만 은재가 서 있었던 자리에는 은재 대신 텅 빈 공간 뿐이었다. 어딜 갔지? 누나...? 누나!
허공을 향해 외쳐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아쉽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어깨가 축 떨구어진 수완에게 비서가 다가왔다.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 비서가 놀라 따라왔지만 수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름도 못 물어봤는데..아쉬운 듯 돌아서는 수완에게 다가온 비서는 무슨 일이냐며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왔지만 수완은 풀이 죽은 채 말이 없었다. 비서가 수완을 데려가자 구석진 곳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은재는 너무 많이 울어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던들 비서가 은재를 발견했을 터였다. 서회장이 은재와 수완을 못 만나게 하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은재는 자신의 정체를 아직 수완에게 밝힐 때가 아니라 생각했다. 서 회장 일가를 가족으로 알고 자란 아내에게 혼선을 줄 수는 없었다. 서 회장을 처단할 결정적인 힘을 기르기 전까진 아직은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얼마나 누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우리 막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막내.
얼마나 우리 부모님이 좋은 분이었는지,
훌륭한 분들이었는지 말하고 싶었는데.
지금 수완에게 혼란을 가중케 할 수도 없었거니와 수완 때문에 서 회장이 수완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드레스 밑단이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리도 못 내고 울던 은재 등 뒤로 그림자가 지더니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서 수트 겉옷을 벗어 은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눈물로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따뜻한 눈으로 서 있던 도일은 조금 전부터 은재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 그 역시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는 은재가 비틀거리자 도일은 얼른 은재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어깨가 떨려오던 은재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오늘 너무 많이 추한데. 울고 있었던 거 아니예요.
" 잠깐 앉아있던 거예요. "
은재의 목소리는 다소 밝은 표정이었지만 일부러 과하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느껴졌다. 은재 가까이로 다가온 도일은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은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도일은 그 광경을 다 보았고,
오늘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은재의 모습도 모두 다 지켜보지 않았던가. 이제 연극은 그만해도 된다 생각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알아보니까 황급히 떠난게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그 아이 말예요. 은재를 위해서 온갖 인맥을 동원해 도일이 알아봐준 게 분명했다. 도일의 말에 은재는 방금 전까지 고개를 들고 밝게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었고, 은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롭게 혼자 안고 살아왔을까.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아픈데. 은재는 오죽했을까. 17년만에 막내동생을 만난 그 기분은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형제가 있는지라 더더욱 도일은 은재의 마음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동생을 눈 앞에서 만나고도 제대로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그 기분은 또 오죽했으려나..고개만 떨구고 있는 은재의 어깨를 안아준 도일은 천천히 은재의 온 어깨를 안아주었다. 도일의 뜨거운 체온 앞에서 무너진 은재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니, 울지 못해서 못 우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운 탓에 이미 눈물이 말라버렸다. 온 몸을 오들오들 떠는 은재를 보며 도일은 어깨를 쓸어안아주기 바빴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 서 실장님. "
" ........왜...."
" ...........! "
" 왜...도대체 왜........"
" ............."
" 난 아직도 아무 준비가 안 됐는데. 왜....왜 이렇게 나만 아프냐구요. 왜 나만 힘들지..? 나는 이렇게 아직도 아무것도 못 했는데. 우리 막내도 찾고, 지환이 영신이 재희...다 찾아야 하는데...."
" .........은재 씨. "
" 용서가 안 돼요. 어떻게 내 눈 앞에서 저렇게 웃을 수가 있냐구요. 나는 아직도 지옥인데. 난 아직도 그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서 살아나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어떻게.........! 절대 용서 못 해. 용서 안할 거예요.......서수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
드레스가 구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주저앉은 은재가 엉엉 울기 시작했고, 뜨거운 은재의 눈물을 시작으로 은재를 안고 눈을 감아내린 도일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신이여..
당신이 아프면 같이 아프고,
당신이 힘들면 난 두 배로 더 힘들고..
당신이 온 몸으로 괴로워하면 나는 내 심장이 끊어질 것처럼 숨을 못 쉬겠고..
그러니까 그만 울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복수든 되갚음이든,
칼 들고 총 들고 피 흘리는 건 다 내가 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은재야 그만 울어........
* * * * * * * * * * * * * * *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폰델 파크(Vondelpark)
암스테르담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계절마다 꽃이 만발하고 녹음이 무성하며, 좁고 긴 연못에는 물새들이 한가롭게 노닌다. 공원 근처의 자유롭고 활기찬 펍은 직장인들과 회사원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했다.
신입사원인 시은이 입사한 기념으로 공 부장은 이번 프로젝트에 참가한 스튜디오 팀원들을 모두 펍의 회식 자리에 초대했다. 술자리는 흥겨웠고 한국에 있는 리노베이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보고에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암스테르담의 리노베이션 대성공 이후로 두번째로 이룩한 쾌거였다.
리셉션도 성공적으로 끝나 암스테르담의 외신들이 아시아까지 성공시킨 이번 스튜디오 팀에 대한 칭찬기사가 줄을 이었고, 이제는 완벽히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며칠 후에 서울에서 열릴 3D 준공식 바이어 설명회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다시 공사에 착수해 건물을 지어올리기만 하면 되었더랬다.
무엇보다도 3D 바이어 설명회는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실제 모형처럼 만드는 프로젝트라 코피를 쏟고 야근을 해가며 스튜디오 팀들이 사활을 건 작품들이었다. 잘 되겠죠? 어느 팀원의 말에 공 부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걱정 마. 절대적 보안 유지에 이 작품의 컨셉이 무려 그거 아니냐.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 테마를 싫어하는 세상 사람은 없을 걸. 아시아라면 더욱 잘 통할 거라 내 장담하지. 술기운이 오르긴 했지만 공 부장 이번 성공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고, 팀원들은 그동안 고생한 걸 자축하며 다들 음식과 술을 즐겼다. 이제 막 신입으로 입사한 시은은 분위기를 띄우겠다고 앞에 나가서 귀엽고 섹시하고 발랄한 춤으로 무대매너를 뽐냈고, 신입의 패기가 귀엽기도 하고 모두들 훈훈한 모습우로 지켜보았다.
" ....!!!! "
춤을 추면서도 시은의 시선은 오직 한 곳 뿐이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가 환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춤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온 시은은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더랬다.
" ..........! "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
그런데.
누굴 보고 웃고 있는 거지?
시은이 오랫동안 좋아한, 그리고 지금도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민제 오빠. 회식하는 팀원들 사이에서 오랫만에 보는 그 환하고 시린 웃음을 한 민제 오빠가, 시은의 민제 오빠는 다른 곳을 향해 웃고 있었다. 민제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그 여자가 있었다. 민제 오빠가 환하게 웃어주는 상대는 그녀였다.
민우 오빠의 약혼녀.
성경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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