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복수의 시작(Start revenge)
도일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잘 알기에 더 괴로웠다. 진실을 알수록, 도일에게 약해지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수록 은재는 괴로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수완을 만나고 온 뒤 은재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수완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면서도 가만히 있기는 어려웠더랬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가 누나라고 밝히고 싶었다. 아버지의 손수건을 간직하고, 팬던트 목걸이를 제 몸의 일부처럼, 솔베이지의 노래를 자장가처럼 알고 살아온 수완을 보니 더더욱 울컥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더랬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고 수완에게 모든 걸 다 밝힐 수는 없었다. 수완의 세계가 모두 무너지고 부서질 게 뻔했다. 수완과 은재를 서 회장이 갈라놓으려 하고 못 만나게 하는 것 역시 수완의 아버지로 되어있기 때문에 이걸 수완이 알게 되면 서 회장도 불안하지만 수완이 가진 지분과 재산을 놓칠까봐, 수완이 모든 걸 알게 될까봐 두려운 건 서 회장이나 은재나 마찬가지였다. 고백을 받고 있는 은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표정만으로도 은재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눈물이 증거였다. 은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내 사정 다 봤죠. 나는 지금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만큼 한가하지가 않아요.
.....
하루하루가 지옥이예요. 복수? 난 지금 한가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구요. 내가 불쌍해 보이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날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거겠죠.
은재 씨.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예요.
은재 씨!
매일매일 내 동생들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죠. 지환이 손을 놓치고, 재희 손도 놓아버리고, 영신이 울음소리..내가 얼마나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지 알기나 해요? 복수가..아무나 할 수 있는 건줄 알아요?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는 것처럼 쉬워보이냐구요. 얼마나 힘든데. 얼마나 괴로운데..얼마나 하루하루 미칠 것 같은데요. 복수가..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요? 자신의 모든 것이 부서질 거고, 모든 게 망가지죠.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데 그걸 하겠다는 거냐구요!
어느새 은재는 도일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철철 우는 은재의 뺨을 어루만진 도일은 우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다행이네요. 그래도 이 미친짓을 한다는데 걱정부터 하는 거 보면. "
" 차 팀장님! "
" 당신 뿐이예요.,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미쳤는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아마 이러려고 온 것 같아요. "
도일은 천천히 다가온 은재를 안아주면서 토닥였다. 당신 동생도 찾을 거예요. 외삼촌에게서 벗어날 거예요. 당신 형제들도 다 찾을 거예요. 서울에 있는 막내 동생은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도일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던 은재는 정신이 들었는지 겨우 힘겹게 도일을 밀어냈다. 짐이 얼마 없어서 그냥 이걸로도 충분해요. 은재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섰지만 등 뒤에서 도일은 은재를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아..날 떠난다면서 날 걱정하고, 내 집을 떠나면서 내가 싫다는 말 안하잖아. 날 안 좋아해서 떠난다는 말 안하잖아.
팀장님.
가요. 언제나 기다릴 거니까.
....
어서 가요. 성 팀장 기다리겠네.
결국 도일의 차를 타고 경유의 집에 도착한 도일은 짐을 직접 내려주었다. 성 팀장님, 잘 부탁해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 겁니다. 도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유는 휘파람을 불었다. 도일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팝콘을 입에 넣고 있던 경유는 은재의 눈치를 보며 눈치를 살폈더랬다. 지금 가서 인사라도 하지? 고맙다는 말을 못하는 건, 평생 후회되는 일일텐데..경유의 말에 은재가 아파트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재의 다급하게 달리는 소리를 들으며 경유는 다시 팝콘을 입에 집어넣었다. 주차장으로 뛰어내려간 은재는 텅 빈 주차장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고맙다는 말을 못했어.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어. 아무 말도 못했어.
난 아무것도 못해 줬는데.
당신한테 아무것도 해준게 없는데...
숨을 몰아쉬는 은재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퍼졌다.
" 힘들 때 원래 잠 못자잖아요. "
" ...... "
" 요기 앞에서 코코아를 팔아서요. "
" .... "
그의 손에 들린 코코아 컵을 보는데 그저 눈앞이 뜨거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간 줄 알고..가 버린 줄 알았어요. 도일이 돌아온 걸 보고 눈물이 터진 은재를 보며 도일은 천천히 다가왔고, 은재는 달려가서 도일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 바람에 코코아가 든 종이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도일이 멋쩍은 듯 말했다. 코코아 다시 사와야겠네. 여튼 당장 떠나서 대신 안 돌아올 것 같더니..은재는 도일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도일의 따뜻하고 넓직한 품안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더랬다.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눈물이 터져 흐를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갈 수 없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요. 누구에게도 갈 수 없구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약속할게요. 당신한테로 갈 거예요. 당신한테만 갈게요. 다른 누구에게도 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은재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무섭게 도일의 입술이 은재의 입술 위를 덮었다. 뜨겁고 따뜻한 향기..입술이 열리면서 은재가 도일의 목에 매달리면서 입술을 열어주었다. 아...
왜 당신은 나한테 왔어요...?
어떻게 당신같은 사람이 내게 온거죠....?
이거 정말 사실인 거 맞겠죠...?
정말 좋아해요. 당신 뿐이예요.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 * * * * * * * * * * * * * * * *
' 서은재와 차도일의 사진이오. 이들이 다시 한국 땅을 밟지 않게 해주시오. '
쾅!
책상 위의 물건을 다 쓸어버린 강 대표는 아예 컵까지 벽에 던져버렸다. 씩씩거리는 소리에 비서들이 뛰어들어왔고, 강 대표는 아예 컵까지 벽에 던져버렸다. 씩씩거리는 소리에 비서들이 뛰어들어왔고, 강 대표는 잔인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다 나갓! 비서들이 슬금슬금 피하며 나가자 강 대표는 가장 신입인 듯한 수습 여직원 하나를 가리켰다. 넌 남아. 강 대표가 저렇게 나오는 이유는 딱 하나 뿐이었다. 또다시 은재 일로 심사가 뒤틀릴때면 수습 여직원들은 거의 죽어나가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입막음을 아니 수습여직원들이 계속해서 뽑힐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 있는 서 회장 이름으로 온 메일 속에서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은잭다 도일의 팔짱을 낀 채 도일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서 회장은 계속 은재에게 사람을 시켜 감시를 해왔던듯 은재의 모습이 이곳 저곳에 찍혀 있었다. 하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늘 도일과 함께였다. 화사하고 맑은 얼굴로. 은재를 바라보던 도일의 따스한 표정이 눈엣가시였다. 강 대표의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더랬다. 그 놈은 은재를 마음에 둔 게 분명했는데 기껏 그런 놈의 협박에 지다니..그답지 않은 패배였다고 생각하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드레스를 입은 은재는 정말 피어나는 한 떨기 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특히 남자들이 은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어떻게 지켜 왔는데. 누나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다른 자식들은 죽고 없었지만 은재는 자신의 손으로 키웠다고 자신했다. 절대 순결하게, 부서지거나 무너질 수 없ㅎ게 은재를 지켰다고 자부했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은재를 데려와야 했다. 가둬놓고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다른 사내들로부터 반드시. 얼마나 고운 우리 은재인데..그 누구와도 맞바꿀 수 없는 내 보물. 흑발의 탐스러운 머리카락..흑요석의 까맣고 큰 눈동자, 희고 환한 피부에 사슴처럼 긴 목, 얇은 팔다리, 가느다란 허리와 나지막한 목소리..은재는 강 대표의 모든 것이었다. 부인이 은재를 노리는 걸 알았다. 어떻게든 쫓아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도 마련해 두었다. 오직 은재와 자신만의 스윗한 하우스..집착도 집착이지만 은재는 이미 강대표의 눈에 은재는 조카가 아니었다.
문 잠궈.
모니터 위에 떠 있는 은재와 도일의 모습을 볼 수록 강대표의 미칠 것 같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 누구도 저렇게 자신의 은재를 저렇게 꾸며놓을 순 없었다. 두려운 표정으로 문을 잠근 채 오들오들 떨려서 서 있는 여직원의 얼굴 위로 아주 잠깐,
은재의 환한 얼굴이 겹쳐졌다. 기다려, 내가 가마! 강 대표의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서랍을 열어 약 몇알을 게걸스럽게 삼켰다. 일을 저지르기 전에 몇 알씩 먹곤 하는 발정제 약이었다. 조카를 건드릴 수 없으니 조카처럼 수수하게 입혀놓은 여직원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은재를 향한 강 대표의 감정은 징그러운 것이었다. 오들오들 떨던 여직원은 강 대표의 눈이 돌아가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 자가 보고 있는 사람은..여직원의 공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강 대표가 여직원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었다. 꺄아아아악!!! 사..살려주세요! 대표님, 제발요..대표님! 여직원의 처절한 비명은 더 이상 대표실에 들리지 않았다. 대표실에 딸려 있는 작은 방은 철제 문으로 되어 있어서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처절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한동안 들리더니, 여자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렸으나 절대 문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 손 비서입니다. "
" 들어와. "
강 대표의 비서인 손 비서는 들어서자마자 못볼 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서 있어야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강 대표의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는 있었지만 이럴 때마다 스스로 이런 일에 환멸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이 다 비치는 로브 하나만 걸치고 위스키병이 굴러다니는 빈 병들이 보였고, 열린 비밀 방의 문틈 사이로 피멍투성이의 여자 알몸이 침대 위에 걸러처럼 널부러져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옆엔 옷들이 거의 찢겨져 있고 여직원 명함인듯한 핀 명함이 굴러다녔다. 애써 외면한 손 비서를 향해 강 대표는 피식 웃었다.
은재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고?
네. 내일부터 다시 스튜디오로 출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그 새끼 집에 있나?
아닙니다. 성경유 부팀장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래?
연락해 놓을까요?
됐어. 그럼 그렇지. 우리 은재가 그깟 족제비같은 사기꾼에게 넘어갈 리가 없지. 암. 그냥 놔 둬. 그놈 집만 아니면 돼.
그놈 형에게 연락해서 보자고 해.
..차도진 대표 말입니까?
그래. 이 참에 확실히 못박아 두어야지. 절대, 은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손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례했고, 방 안에선 정신을 차린 건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 비서가 목례한 후 대표실을 나갔고, 정신을 차린건지 여자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에 개의치 않는 듯 강 대표는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은재가 그 개새끼 집을 나갔다니 이보다 즐거운 일은 없었다. 만족하고 다시 아랫도리가 뜨끈해졌다. 발정제를 먹고 나니 강 대표의 에너지는 이제 시작이었다.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나체로 누워 있던 여직원에게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 반갑습니다. 차도진 대표입니다. "
" 반갑소....아니, 오랫만이라 해야 하나. "
" 예. 세계건축대전쇼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
" 아아니, 설마 그게 처음일까. "
" ...."
" 자, 해묵은 이야기는 그쯤 해두고, 아픈 사람 오래 붙들고 있을 순 없고..본론부터 얘기할까요? "
도진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이 모멸감을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평생 다시는 근처에도 안 가고 싶은 짐승같은 놈이었다. 강 대표의 인성은 물론이고, 그 놈이 얼마나 변태 같고 지옥 같은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도일이 조이델과 합작한다는 말에 얼마나 반대를 했던가. 도진이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았을 당시에 이 개자식의 마수에 바지지만 않았어도 아버지의 회사가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의 인생에서 딱 한번, 그 짐승같은 놈과 손잡았던 적이 있었다. 도진이 양심을 팔아넘길 수 밖에 없었던 낯부끄러운 흑역사였다. 이 짐승같은 놈과 단 한번 손잡았던 일이 이렇게 도진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 동생이 자꾸 내 심기를 건드려서 말이야.
심기라니요.
우리 조카한테 신경 좀 끄라고 말 좀 전달하시오.
....!
한번만 더 건드리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으리다. 가령, 차 대표 동생이 자길 살리기 위해, 구하기 위해 어떤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
대표니임!
그러니까, 당신 동생을 외국 다른 곳으로 보내건 회사를 집어치우든 하라고!
...!!!!
명심해. 당신 동생에게 영원히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 둘을 갈라놔야 할 거다.
강 대표가 커피숍을 떠나자마자 도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가슴을 쿵쿵 쳤고, 몸을 가누지 못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휠체어가 뒤로 우당탕 넘어가버렸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들어와 쇼크를 일으킨 도진을 보고 깨우기 바빴다. 대표님, 정신 차리세요. 대표님! 대표님!
* * * * * * * * * * * * * * * * *
도진이 강 대표를 만난 후 쇼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도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조이델 건축회사 본사를 찾았다. 강 대표는 도일이 찾아왔다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응접실로 도일을 초대했다. 얼마 전 여직원에게 짐승보다 못한 짓을 하던 그 인간 쓰레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피비린내같은 역한 냄새가 확 났지만 도일은 이를 악물었다. 도일이 천천히 자리에 앉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강 대표를 쳐다보았다.
도일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던 강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눈앞의 도일은 젊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절대로 질투 같은 건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도일보다 모든 면에서 자신이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은재와 함께 알아온 시간도 훨씬 자신이 많았다. 왠일로 시간이 나서 이렇게 오셨을까. 얼굴 한번 뵙기가 힘드신 줄 알았죠. 비아냥거리는 강 대표의 말에 도일은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강 대표를 노려보았다. 감히 내 형을 건드려? 얼마나 간덩이가 부으면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건드려? 내 손에 죽고 싶은 모양이죠?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순 없을 겁니다. 이미 당신이 내 형을 자극해서 쓰러지게 만든 영상이 cctv에 다 찍혔어. 목격한 사람들도 한둘이 아냐. 증인도 있고 네놈이 내 형을 건드리면서 휠체어에 지문도 묻었어.
아무리 천하의 강진형 대표라 해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아. 지난번엔 형이 쓰러지는 걸로 끝났지만 이번엔 아니야. 칼자루는 내 손에 있어. 도일의 자신만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강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형은 날 고소 못해.
설령 내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해도 절대로 내 등에 칼 꽂을 수 없다는 이유가 있지. 네 형에게 가서 물어 봐. 날 신고하고 고소할 수 있는지. 도일에게 멱살을 잡힌 강 대표는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었고, 멱살을 쥔 손을 놓은 도일은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입구엔 강 대표의 부인인 이 여사가 굳어버린 얼굴로 서 있었다. 부인이 서 있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지 아예 손가락질을 해댔다. 당장 은재한테서 손을 떼. 은재한테 신경 끊어. 그럼 네 형..가만히 놔줄테니까. 지금처럼 은재에게서 신경 끊으라구!
강 대표의 말에 문 입구에 서 있던 이 여사의 어깨가 사정없이 흔들거렸고, 도일은 차갑고 무서운 눈으로 강 대표를 노려보았다. 오히려 아무 표정 없이 노려보니 사람이 더 무서워 보였다. 너무 화가 나 있어서 금방이라도 모든 걸 부숴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 건드리지 마. 하면 넌 바로 죽는다. "
" 뭐야? ! "
은재야. 사랑하는 내 서은재.
바라보기만 해도 너무 귀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너.
나는 심장이 찢겨질 것만 같아. 너는 이런 삶을, 어떻게 견뎌왔던 거니.
어떻게 이런 지옥을 견딜 수 있었니...
죽여버릴 거다. 살면서, 다시는 서은재에게 손을 대지 마.
네깟놈이 뭔데! 은재는 내 거다.
....!
사랑하는 내 서은재. 은재야..
어떡하지. 눈물이 날 것 같은데.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데.
은재야. 널 지키기 위해 내 전부를 장작으로 써야 한다면 그렇게 해 줘.
나 때문에 뭘 한다고 하지 마. 널 위해서 전부 다 하고 말 테니까.
은재야. 지금 울고 있는 거 아니지? 울고 있으면 안 돼. 내가 돌아. 이 짐승은 이제 내가 감당할게.
강 대표의 말에 이젠 어이가 없어진 도일은 달려드는 강 대표를 그대로 엎어치기로 메다꽂았고, 유유히 사무실을 나서는 도일을 향해 강 대표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거기 서, 거기 서라고!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거기서, 차도일! 악을 쓰던 강 대표의 눈에 광기가 돌았다. 네 형은 절대로 날 배신 못해. 네 형에게 가서 직접 들어 봐. 온 세상의 여자가 다 되어도 서은재는 안된다고 할걸? 은재 집으로 보내고 더 이상 서은재 신경쓰지 말라고. 은재는 내 꺼야! 유유히 대표실을 나서던 도일을 지나친 이 여사는 달려가서 남편의 뺨을 때렸더랬다.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만두란 말야, 이 짐승아! 언제까지..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이 여사의 비명을 끝으로 대표실을 나선 도일의 눈빛은 더욱 단단했더랬다.
쓰러졌던 도진은 다행히 잠깐 쇼크가 일었던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하루 정도 입원해 있기로 했다. 간병인이 물건을 정리하다가 도일을 알아보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형의 멘탈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입원한 도진을 찾아간 도일은 쇠약해져 있는 형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병간호하는 호스피스를 내보낸 도일은 조용히 도진의 휠체어를 잡았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형을 찾아갈 줄 몰랐어. 괜찮아? 그 다음엔 그 새끼가 찾아오거나 만나자고 하면 절대 나서지 마. 도일의 나지막한 말에 도진은 손을 잡으려는 동생의 손을 뿌리쳤다. 표정은 쇠약하지만 얼굴은 차갑고 냉랭했다.
유약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형이었다. 그런 형의 멘탈을 부쉈으니 더욱 더 강대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도진이 겪은 사고 역시 강 대표와 관련된 사고였다. 동생의 손을 뿌리친 도진은 도일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당장 그 회사랑 인연 귾으란 말 하고 싶지만 참을게. 네가 평생을 이루고 싶었던 프로젝트인게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어.
" 형.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내가 끝낼게. 다신 그놈이 우릴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 "
" 네가 어떻게 끝내겠다는 건데? 도대체 뭘 어쩔건데! "
" 그놈을 끝낼 방법이 있어. 그래야 은재가...."
" 그 여자 때문에 강진형 대표를 건드린다고? "
" 형. "
" 너 그 짐승이 어떤 새낀줄 알고 건드리겠다는 거야. 형 지금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형을 그렇게 만든 그놈을 작살낸다고? 니가?!! "
" ........."
" 그 여자가 누군데. 대체 뭔데! 그 여잔 강 대표의 조카야. 가족이라고! "
" 서은재 지켜야 해. "
" 니가 왜! "
" 내가...서은재 사랑하니까. 그 여자가 아프고 힘든 건 내가 못 보겠어서. 지켜줄 거야. "
도일의 말에 도진은 휠체어에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은 눈으로 도일을 노려보았다. 그 여잔 강진형 조카야. 그 파렴치한 놈의 가족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그놈과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건데. 내 이 꼴을 보고서도 너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냐고! 도진의 유난스럽게 펄쩍 뛰는 반응이 이상했지만 도일은 강 대표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긴 했다. 자신도 강 대표이기만 했다면 꼴도 보기 싫었을 터였다. 애초에 은재에게 까칠하게 굴었던 이유도 강 대표 때문이었던 걸 생각한다면 도진의 반응도 당연한 것이었다. 도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더랬다.
" 어짜피 그 개자식은 은재 가족 아니야. 은재 가족을 못만나게 하는 파렴치한 놈이지. 은재를 그놈에게서 구해낼 거야. 진짜 가족을 찾을 거야. "
도일의 말에 도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흙빛이 되었지만 도일도 유달리 형이 그 말에 반응한다고 생각했지만 강 대표 때문에 그런 생각하는 거라 생각했더랬다. 안 돼. 무조건 안 돼. 네가 누군데. 네가 나한테 어떤 동생인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파렴치한 놈의 조카사위가 가당해? 그리고 그 여자, 네가 그 프로젝트 하는 걸 알면서도 그 프로젝트를 뺏으려 하던 여자야. 어떻게 그런 여자한테 마음을 뺏기냐고! 도진은 생각보다도 은재에게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강 대표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 반응이 격렬했다. 그 여자 포기해. 그 여자 가족은..
강 대표는 은재 가족이 아니야. 헤어진 은재 동생들이 진짜 은재 가족이야.
...!
내가 찾을거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어.
도일의 말에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도일은 한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도진은 다급하게 도일의 팔을 붙잡았더랬다. 도일아, 절대 안돼. 그 여자는 절대 안돼! 그리고 그 여자 가족을 왜 니가 찾아!
절대 강 대표에게 맞서지 말란 말이야! 이미 다 헤어진 가족들을 무슨 수로 찾아.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 세계로 흩어진 애들을 네가 찾아서 뭐 어쩔건데. 도진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고, 실수한 걸 알았는지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이를 놓치지 않은 도일이 도진을 쳐다보았다.
"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니..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모든 일은 파도를 타고 급물살을 헤매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 * * * * * * *
집은 알아보고 있어. 이번 주까지만 신세 좀 질게. 성경유.
그 신세 좀 차 팀장한테 지면 좀 좋아?
성 경유!
대체 그게 뭔 뻘짓이야. 차 팀장 같은 사람 만나기 어디 흔해?
성경유!
나는 뭐 상관없어. 선배가 그 짐승 집에 기어들어가는 거만 아니면. 그 집에 붙어있었던 이유가 이번 회사 프로젝트 때문이었잖아. 이제 성공했으니 얼마나 좋아. 빨리 손절해.
...너야말로 얘기해 봐. 나 서울 간사이 대형사고는 네가 친거 아니야.
경유의 아파트에 머물게 된 은재는 늦은 밤 경유와 맥주를 홀짝이며 말을 했다. 이야기가 민제의 이야기로 흘러가자 경유는 무거운 얼굴로 맥주를 길게 마셨다. 그 애에게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혼자 짝사랑인데, 나보다 그 애를 오래 알아왔던 애. 예쁘고 사랑스럽고 좋은 집안에서 오로지 사랑만 받고 자라온 애. 나처럼 고아로 외롭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나처럼 약혼한 적도 없는. 경유의 쓸쓸한 말에 은재는 기가 막힌지 맥주캔을 내려놓았다. 이게 또 황당한 소리 한다. 언제부터 부모님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애가 성공한 커리어우먼 된게 흠이 되는 세상이 된 건데? 그리고, 결혼하고 이혼해도 아무 흠될 거 없는 세상에 약혼했다 파혼했던 것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너 진짜 그런 생각 하면 안되는 거야.
네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부정하는 거라고. 은재의 말에도 경유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약해지는 경유를 보며 은재는 다가 앉아서 경유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그 애한테 소외감, 질투심 느낄 필요 없어. 너랑 민제 사이 그 여자애가 민제 어머니께 얘기해서 충격받아 병원에 입원하셨다면서. 그런 파렴치한 애가 부러워? 그런 애가 사랑스러워? 걔가 그런 짓까지 해서 너랑 민제 사이 갈라놓겠다는 거잖아. 얼마나 영악하고 나쁜 년이라는 말이야. 은재의 열변에 경유는 고개를 숙였다. 날 정말 예뻐해 주셨었어. 그분을 실망시킨 게 가장 마음이 아파. 그런데 그런 마음을 받으면서도 민제는 포기할 수 없어. 이미 지옥에 떨어질 것도 예상했어.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은재는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은재의 어깨를 토닥였더랬다. 민제는 엄마가 입웒나 병원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시은은 은재에게 병원위치를 문자로 보내주었더랬다.
새 메시지 01
한번 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오빠한텐 알리지 말아야 하는 거 아시죠?
아줌마가 싫어할 거예요.
- 시 은
병실 앞에 도착한 경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은이 지옥에서의 초대장을 보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닥쳐야 할 일이었다. 자신의 일을 안 선주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는 잠도 오지 않았다. 병실 문앞에 섰던 경유는 노크를 한 채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선주와 시은은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고,
선주의 눈에 천천히 들어서는 경유가 눈에 보였다. 시은에게 웃어주던 거랑 반대로 선주는 금방이라도 하얗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시은은 차마 고개도 못 들고 서 있는 경유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지만 일부러 둘 사이를 보며 중재하려는 듯 나섰다. 제가 오라고 한 거예요. 절 탓하세요. 아주머니께서 요즘 너무 잠을 통 이루시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죄송해요. 시은의 말에 선주는 이를 악문 채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경유를 노려보았고, 경유가 천천히 다가서려 하자 선주는 손에 잡힐 것이 무엇인지 찾다가 베개를 던졌지만 힘이 약해서인지 경유의 발 아래로 떨어졌더랬다.
" 감히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
베개가 경유를 맞추지 못하자 더 짜증이 나고 억울했는지 선주는 테이블 위에 놓였던 음료수병을 보고 위험하게도 그걸 그대로 경유에게 집어던졌더랬다. 와장창...! 선주가 음료수병을 던질줄 몰랐던 시은도 놀라서 그 돌발행동엔 눈이 커졌고, 경유는 피할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음료수병은 선주를 맞춘 게 아니라 경유를 감싸안은 누군가의 등에 맞아 와장창 박살이 났다. 다행히 온 몸으로 감싸안은 덕에 경유는 다치지 않았지만 경유를 감싸안은 남자의 등이 금세 파편 때문에 핏방울로 물들었다. 민제였다.
서민제...
경유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민제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경유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들의 등이 벌겋게 피로 젖자 선주는 금방이라도 손가락질을 하며 뒤로 넘어갈 기세였다. 안 떨어져! 어디서 손을 잡아! 당장 떨어져! 민제야...서민제!!
당장 의사부터 불러, 시은아! 선주가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고, 시은 역시 당장 수건을 가져와 민제의 등을 닦으려 했지만 민제는 그런 시은을 밀쳐냈다. 거부당한 시은은 부은 얼굴로 민제를 노려보았고, 민제는 경유의 손을 꽉 잡았다.
놓지 마. 내가 지켜줄 거니까. 아무말도 하지 마. 민제가 속삭이자 경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경유와 민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며 시은은 금방이라도 속이 새까맣게 탈 것 같았고, 선주는 벌개진 얼굴로 손가락질하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떨어져! 내 아들에게서 당장 떠나라고!!! 또 이번엔 누굴 잡아먹으려고! 당장 내 아들에게서 떠나랬지!
선주의 폭언을 듣다 못한 민제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만 하세요. 경유가 무슨 전염병 환자예요? 잡아먹다니 사람한테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민제의 말에 선주는 더더욱 악을 썼다. 네 형이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쟤만 아니었어도 민우가 그렇게 될 일은 없었어! 저년 때문이라고! 선주의 악쓰는 소리에 경유는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 같은 하얗게 바랜 얼굴로 버티고 서 있어야만 했다. 경유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민제의 눈에서는 창피함과 부끄러움과 경유를 향한 미안함으로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미안해. 형.
나는 경유를 지켜야 해.
성경유 없인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이 비극을 좀 멈춰 줘. 부탁이야.
" 경유와 저, 결혼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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