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반 격(Counterattack)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경유는 이 순간이 차라리 빨리 오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어머니였고 지금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선주가 자신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달콤한 꿈에 빠져들었더랬다. 그래. 아주 잠깐 달콤한 꿈이었다. 선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눈이 시뻘개진 채 삿대질을 하며 경유에게 달려들어 뺨을 쳤다. 병자같은 행색이 아니었다. 그 평소 아름답고 단아하고 침착한 그녀가 아니었다. 마치 경유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도둑질한 사람이기라도 한것처럼 분노를 쏟아냈다. 


뺨이 돌아간 채 입가가 찢어진 경유를 보며 시은은 빙긋 웃었지만 애써 선주를 말리는 척 하고 있었다. 경유가 맞자마자 달려온 민제는 그런 경유 앞을 막아섰고, 시은을 떼어내고 다시 뺨을 때리려던 선주를 대신해 민제가 뺨을 맞았다. 민제가 어떤 아들인데 뺨을 맞는단 말인가. 비틀거리는 민제를 보며 선주는 다시 경유가 얄미워 달려들려 했지만 그런 선주를 이제는 민제가 막았다. 그만하세요. 그만요.

 


폭력은 야만의 시초이자 극치예요.

 

민제야!!!!!!!!!!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구요. 

 

오빠, 대체 무슨 소리야. 어떻게 이게 폭력이라는..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해. 

 


시은이 하다못해 나섰지만 민제는 그런 시은을 노려보았다. 일이 이렇게 된게 시은 때문이라는 걸 아는 눈치였다. 경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만 싶었다. 선주는 숨을 몰아쉬며 금방이라도 경유를 죽일 기세처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어떻게 이 자리에 나타나? 니가 무슨 낯짝으로? 네가 사람이야, 인간이야? 선주의 폭언이 쏟아지자 민제는 경유에게 이제 그만 나가자는 손짓을 했지만 경유는 민제를 밀어냈다. 

 

" 괜찮아요. 괜찮아. "

 


경유가 민제의 손을 밀쳐내고 선주에게로 다가섰고, 민제가 오로지 경유만 애닳아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시은은 그야말로 속이 반쯤은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눈빛을 안 봤다면 모를까, 시은은 오로지 경유밖에 안 보이는 민제를 보며 그야말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 경유를 안 데리고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벌써 앞이 깜깜했다. 용기있게 선주 앞으로 나선 경유는 붉어진 뺨을 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주는 당당해 보이는 경유를 보자 기막힌 얼굴이었다. 네가 어떻게 내 앞에서 고갤 빳빳이 들어?

 

 

 

 

 

 

 

 

고아 주제에. 네가 어떻게 민우를 배신해...아무 근본도 없는 계집 주제에...! 드디어 선주에게선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듣고 있던 시은마저도 놀라 고개를 들었고, 민제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경멸과 분노 때문인 것이었다.

 

말간 얼굴로 서 있는 경유를 본 선주는 더더욱 손가락질을 했다. 고아, 라는 말은 고아가 되었고 고아가 된지 십수년만에 경유가 실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경유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었고, 지금은 어엿한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간지 오래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고아를 봐도 가슴이 미어질 만큼 여전히 소화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그 단어의 아픔은 경유의 가장 절친한 은재만이 알았다. 그 말은 경유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 누구라 해도, 쉽게 발설해서도 건드려서도 안되는 말. 부모에게서 버려져서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말은 경유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상처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방황했던가. 경유의 차갑고 비정한 얼굴을 처음 본 선주는 결국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담았다. 민우는, 네가 죽인 거야. 그 사고만 아니었어도 민우 잃지 않았어! 널 데리러 간다고 차만 몰지 않았어도..차는 네가 몰았어야지! 왜 민우에게 운전댈 잡게 했니! 왜 너만 살아남았냐구! 왜 너만 살아남아 내게 이런 꼴까지 보게 하느냐고. 선주의 한계 없는 막말은 지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말엔 참고 참았던 경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만 가요. 이제 그만 갑시다. 민제는 엄마의 폭언을 견딜 수 없어 경유를 막아세웠지만, 경유는 선주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처음엔 제가 잘못하고 있다 생각했어요. 길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도 약혼자의 동생을 사랑하는 건 뉴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라고, 그래서 늘 수그리고 미안해하고, 죄책감 가지고..당신을 보러 오는 길에 얼마나 눈물을 뿌렸는지 몰라요.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어떻게 미안해야 할지, 얼마나 미안한지 그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했죠. 당신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그래서 당신이 내게 받았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으니까요. 

 


" 너...너! "

 

"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날 그렇게 깔아뭉개는 당신의 그 선한 얼굴은 위선이었다는 걸요. "

 

" !!!!!!!!!! "

 

" 이제 더는, 당신에게 그 어떤 미안한 마음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요. "

 

" 성경유!!!!!! "

 

" 안녕히 계세요. 부디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리고, 반기시진 않다 하더라도, 이젠 제 쪽에서 당신을 더이상 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

 

" ......... " 

 

" 사과는 받지 않을 거니까요. " 

 


경유가 병실을 나가자 선주는 그 말은 실언했다고는 느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당장 뛰쳐나가는 민제 뒤에서 시은은 소리를 질렀다. 오빠, 그냥 가면 어떡해. 아줌만 어떡하시라구! 시은이 뒤에서 외쳤지만 이미 민제는 경유를 따라 나간 뒤였고, 주저앉은 선주는 시은의 부축을 받으면서 파리한 표정으로 겨우 손으로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잘못했는지 몰랐고, 그저 배은망덕한 경유가 괘씸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병실을 빠르게 뛰어가는 경유를 향해 달려간 민제는 겨우 경유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펑펑 울고 있을 것 같던 여자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민제는 경유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 경유는 민제에게서 등을 돌렸더랬다. 네 잘못은 아니지만 내 잘못도 아니야.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이런 그림은 예상도 못했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경유의 말에 민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민제를 쳐다보던 경유의 표정도 점점 흙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네 엄마야. 널 낳아주신 분이라고.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 봐. 나 때문에 더 불효했다는 말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더 돌이킬 수 없어져. 우리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야. 다시는 저 분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 

 


" ....! "

 

" 너는 지금처럼, 앞으로 어떤 순간이 와도 꼭 지금처럼밖에 할 수 없을 테니까. "

 

" 경유야. "

 

" 날 대신해서 뺨을 맞는 거 정도 밖에는 할 수 없겠지. 그래도, 널 낳아주신 분이니까. " 

 

" .......! "

 

"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내 모든 걸 부정하고 내 가장 아픈 상처를 칼로 후벼파는 사람 앞에서는, 나는 절대로 웃을 수 없다는 거. "

 

" .........."

 

" 설령 내가 그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어도 나는 그 사람에게 죄인이진 않을 거야. 절대로. "

 

" .......! "

 

마지막 말을 하는 경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울지 않을 거야. 울면 이걸 인정하는 게 되는 걸꺼야. 그래서 절대로 울지 않을래. 경유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아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고, 선주의 병실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이닥치는 걸 보고 민제의 발걸음이 정지했다. 딱 경유 말이 맞았다. 경유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었고, 오직 경유뿐인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외면할 수 있을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눈을 내려감은 민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시적인 쇼크가 왔던 선주는 진정제를 맞고 겨우 잠이 들었더랬다. 시은은 민제의 팔을 붙들었다. 이제 겨우 잠드셨으니까..시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민제는 시은에게서 팔을 뺐다. 어머니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자리 좀 비켜 줘. 그리고 내일부턴 너도 어머니께 올 필요 없어.

 

 

 

 

 

 

 

 

 

 

 

 

오히려 어머니께 독이 될 뿐이니까 자제해 줘. 간병인 쓸 거고 너 여기 어머니 간병하러 온 거 알면 집에서도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집에선 너 친구들과 유럽 여행중인걸로 알고 있으시던데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그게 내가 편해. 내가 부담스럽고 불편해.

 

민제의 말에 시은은 기가 막혔다. 철벽도 저런 철벽이 없었다. 이젠 민제와 완전히 인연을 끊으란 소리나 다름 없었다. 회사에선 아예 아는 척도 안하고, 시은은 그저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성경유 때문에 오빠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본데, 성경유 때문에 왜 화살을 나한테 돌리는지 모르겠어.

 

 

 

 

 

 

 

 

 

 

 

 

아줌마나 나나 얼마나 오빨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하는지 그 노력은 안 보이고, 성경유가 마음 다친 것만 중요해? 오빠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오빠 어떻게 이렇게까지 우리한테 막 하냐구. 아줌마 생각은 안 해? 그리고 나한테 어떻게 이래. 오빠랑 내가 알아온 세월이 얼만데 성경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 시은의 서러움이 하늘을 뚫을 기세였지만 민제는 차분히 시은을 돌아보았더랬다. 네가 감추고 숨긴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야. 그저, 너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어. 그게 예의라 생각했어. 한번도 너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아서 네가 여기까지 온 거, 그것만은 내 책임인 것만 같아서. 

 


" 오빠! " 

 

" .....하지만 상대가 경유가 아니었더라도 너는 결국 엄말 붙들고 포기 안했을 거잖아. "

 

" !!!!!! "

 

" 그건 날 배려한 게 아니잖아. 내가 너한테 준 시간동안, 너는 엄마를 동원해서 날 깔아뭉개기 바빴어.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하는데도 넌 귀를 막고 그 얘기가 들리지 않았어.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너는 네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열패감 때문에 내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야. "

 

" 오빠!!!!!! "

 

" 저녁에 간병인 올 거고 더 이상 엄마 병실에선 너 볼일 없었음 좋겠다. 그게 널 위해서도 좋은 일인 것 같고. "

 

" 성경유 때문에 오빠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아줌마한텐 그 어떤 때보다 내가 절실해! "

 

" ....아니. "

 

" !!!!!! "

 

" 그 어떤 때보다, 네가 필요악인 것 같다. " 

 


곧 간호사를 부를 태세였고 시은은 결국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핸드백을 챙겨들고 나섰다. 시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때쯤 되어서야 무미건조한 눈으로 민제는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았더랬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진정제를 맞았던 선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병실에 불을 켜지도 않은 채, 어두컴컴한 의자에서 민제가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떠난 줄 알았는데 아들이 있어서 선주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럼 그렇지. 

 

민제가 나한테 어떤 아들인데. 한순간이나마 민제가 경유를 따라서 영원히 떠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랐다. 몸을 일으키려는 선주를 향해 민제는 천천히 같이 일어섰고, 민제가 자신을 붙잡아주는 줄 알고 손을 뻗던 선주는 차갑고 냉정한 아들의 표정을 보자 환하게 웃으려던 미소가 점점 걷혔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아 기다렸습니다. 딱딱한 표정의 민제를 보자 선주는 이를 악물었다. 걘 안돼. 내가 혀를 깨무는 한이 있어도 안 돼. 온 세상 사람들이 지탄할 일이야. 

 

 

 

 

 

 

 

 

남들한테 물어봐. 형 약혼녀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 엄마 말 들어. 지금은 온 세상이 걔로 전부같겠지만 곧 달라질거야. 왜 날 그때 안 말렸냐고 원망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 엄마 말이 약이다 생각하고 들어. 그리고 회사도 관 둬. 시은이 부모님이 미국에서 사업하고 계시는 회사에 들어가. 엄마도 여기 암스테르담 지긋지긋하니까 정리하고 곧 따라 들어갈 거야. 

 

우리 미국에서 새로 시작하자. 너랑 시은이랑 나, 이렇게 오손도손 알콩달콩하게 살자. 시은이가 집도 알아보고 있대. 시은이 집 주변에 호수가 널찍히 있는 예쁜 3층짜리 저택이 있다고 하니 거기서 시작하자. 시은이 말론 시은이 회사에 들어가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고, 시은이가 어떤 애냐. 그 집 무남독녀니 그 회사 후계자는 네가 된 거나 다름 없다니까. 네 옆을 오랫동안 지켜온 시은이가 있는데 왜 고집이야. 선주의 야망에 민제는 눈을 내려감았다. 자신이 이런 기분인데 그 말을 들은 경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니, 그 자리에서 울지 않고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내 어머니가 이런 사람이었는데 경유는, 

 

 

 

 

 

 

 

 

경유는 어떤 마음으로 버텼을까 싶었다. 민제는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소리도 못 내고 우는 아들을 보자 오히려 깜짝 놀란 선주가 민제에게 다가섰다. 세상에, 아들. 아들아. 민제야. 왜 그래. 선주의 말에 민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몰라서 감이 잡히지 않아서요. 기다렸어요. 엄마가 눈을 뜨자마자 실수했다고, 경유한테 어떻게 사과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까지를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죠. 순간적으로 너무 화가 나서 경유한테 못할 말을 했다 하셨다면 제가 얼마나 미안해했을까요. 조금 전까지 경유에게 했던 모든 말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길 간절히 바랬어요. 

 


" 민제야! 그 애는 악이야. 그 앤 민우처럼 너를..."

 

" 형은 사고였어요. 경유 탓이 아니었어요. 그걸 이때까지 경유 탓으로 생각하고 계셨단 말예요? "

 

" ....애초부터 네 형에게도 맞지 않는 아이였어. 부모가 누군지도 어떤 출신인지도 모르는 천애고아를 데리고 와서 약혼했다고 했을 때 얼마나 하늘이 무너졌었는줄 아니? "

 

" ......어머니! "

 

" 하지만 참았어. 네 형이 사랑한다고 처음 데려온 여자애였으니까. 민우가 너무 행복해했으니까. 날 이상한 사람 취급 마. 그 애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애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준 민우의 짝이었는데. 내가 얼마나 그 애를 예뻐하고 사랑했는데. 내 등 뒤에 칼을 꽂은 건 걔야! "

 

" ......! "

 

" 시은이가 있는데 왜 걔야. 왜 하필 수많은 사람들 중에 네 형의 약혼녀냐구!!!!! 시은이가 있어. 너한텐 시은이가 있어. 내가 이런 그림을 얼마나 바래왔었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면서, "

 


선주가 악을 썼지만 그럴수록 민제는 침착해졌다. 그건 엄마 소원이지 내 소원은 아니예요. 엄마가 원하는 삶이지 내가 바라는 삶도 아니구요. 내일부터 시은이는 안 올 거예요. 제가 오지 못하게 했어요. 그게 시은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예요. 

 

분명히 내가 시은이한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시은이를 놓지 못한다면, 결국 그건 시은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니까요. 시은이가 나를 포기할수 있도록. 민제의 칼 같은 반응에 선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네가 아니야. 

 

 

 

 

 

 

 

 

 

 

 

악마나 마귀가 씌인게 분명해. 어떻게 걔가 홀렸길래 시은일 놔두고 니가 어떻게 이래.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내가 몇 마디 했다고 지금 이러는 거니? 그러니까 고작 그 성경유보다 엄마가 못하다는 거지? 내가 엄만데. 내가 엄마라고! 

 

내가 가족이라고. 성경유는 남이야! 아무리 말을 하고 설득을 해도 선주의 마음을 되돌릴 순 없었다. 쉬세요. 곧 간병인이 올 거예요. 제 얼굴을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엄마가 원하던 삶을 살던 아들은 갔어요. 그 아들도, 생전에 행복하기만 했었던 건 아니었어요. 왜 경유를 만나 행복하다고 말했겠어요.  형이 정말 엄마가 원하는 삶을 살아 행복했다고 생각하세요? 

 

 

 

 

 

 

 

 

 

 

민제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선주의 동공이 커졌다. 민우야..민우야...! 민우가 여기 있었다면 이렇게 엄마 가슴에 대못박지 않았어! 선주의 말은 결국 민제의 가슴에도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민제는 천천히 돌아섰다. 경유를 찾으러 가야했다. 

 

혼자 외로이 남겨져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누가 잘못한 건지.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에 상처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그 상처를 혼자 감내해야만 하는지를요. 돌아선 민제가 병실 문을 닫고 사라지자 선주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우야, 내 아들. 민우야....엄마의 우는 소리를 먼 발치에서 들었지만, 민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빠르게 입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경유야! 경유야...! 하지만 이미 해가 질 무렵이라 경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니, 아예 꺼놓고 있었다. 오늘같은 상황에서 자신의 전화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병원 밖을 나와 발을 동동 구르던 민제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형.
제발 부탁이야. 

나는 경유 없인 살 수 없어.
경유를 잃을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날 한번만 용서해 줘.
제발...










* * * * * * * * * * * * * *

 

병원을 나올 때만 해도 괜찮게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집에 가까워올수록 계속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참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버겁게 느껴졌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고 나서부터는 아예 쪼그려 앉아 펑펑 울기까지 했더랬다.

 

누가 쳐다보거나 괜찮냐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낯선 스포츠카에서 경적음이 울리더니 단단히 작정한 얼굴로 시은이 차에서 내렸다. 지금 시은과 단촐하게 대화를 나눌 타이밍이 아니었기에 경유는 시은을 지나쳤고, 시은은 경유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누구와도 얘기할 기분 아니니 비켜주길 바래요. 경유의 말에 시은은 더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오래 시간 뺏지 않을 거예요. 시은과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난 경유는 시은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고, 

 

 

 

 

 

 

 

 

 

냉랭한 경유의 표정을 보자 시은은 더욱 자존심이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뭐가 이렇게 당당해.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 어떻게 오빤 콩깍지가 씌여도 이런 년한테 씌일 수가 있지. 세상이 어떻게 되 버린 게 아닐까? 시은은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경유를 노려보았더랬다.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오빠랑 시작하지 마세요. 아줌마가 저렇게까지 되신 마당에 두 사람의 마음만 강요하는 건 횡포예요. 주변 사람들이 다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거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요? 

 

어떻게 아줌마한테 그렇게 뻔뻔하죠. 시은의 대답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 그대로여서 경유는 피식 웃었다. 아, 한때나마 이런 아이를 질투하고 있었다니 싱겁기까지 했다. 경유가 웃자 자신을 비웃는다 생각한 시은은 이를 악물고 노려보았다. 내가 우스워요? 내가 우습다 이거지? 당장 민제 오빠한테서 떨어져. 

 


" 시은 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죠. 엄연히 제 3자 아니던가요? " 

 

" .....뭐예요? "

 

"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서민제 씨와의 일은 제 일이지 시은 씨가 상관할 일은 아니고, 민제 씨한테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직접 해결하시죠. 나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뭐가 있어요. "

 

" 민제  씨? '그 사람' ? 하.....진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염치라는 게 없고 수치심이라는 게 마비됐니? 어떻게 민우 오빠 약혼녀였으면서 민제 오빨 탐내? 니가 사람이야??? "

 

" ....... "

 

" 넌 민제 오빠 사랑하는 게 아냐. 사랑하는 거면 이럴 수가 없어. "

 

" ! "

 

" 민우 오빠가 그랬어.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이제서야 만났다고.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고. "

 


아...
신이여.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경유의 눈빛이 멍울지듯 떨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은 시은이 더 경유를 몰아붙였다. 그런 마음을 받고도, 민우 오빠가 떠난 뒤에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제 오빠냐고.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없었어? 

 

민우 오빠가 아른거리지도 않았어? 민우 오빠에게 미안하지도 않았냐고. 그런 마음이 일말이라도 없었으면 당신은 사람 아니야. 어떻게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어? 그것도 똑같은 마음으로?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게 사람이야? 

 

 

 

 

 

 

 

 

 

당신은 민제 오빨 좋아하는 게 아니야. 민우 오빠의 대용품으로 잠깐 갖고 노는 거지. 민제 오빠가 민우 오빠랑 얼굴이 똑같았어도 좋아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애초에 민우 오빠랑 얼굴이 똑같으니까 끌렸던 거잖아. 닮았으니까. 두 사람은 행동도 말투도 습관도 목소리도, 입고다니는 옷과 취향까지 똑같았으니까 민우 오빠가 살아돌아온 것 같았겠지. 그래서 끌렸던 거고! 그런 당신이 어떻게 민제 오빨 순수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 자신있어? 정말로 민제 오빠 보면서 민우 오빠 생각 안날 자신 있냐고! 악을 쓰며 핏대가 설 때까지 소리를 지르는 시은을 보며 주변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유는 고개를 들어 시은을 쳐다보았다. 

 


"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니, 시은 씨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

 

" ..........! "

 

" 그동안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 텐데요. 민제 씨한테 시은 씨가 여자로 다가갈 수 있는 기회. "

 

" ..........!! "

 

" 내가 그 기회를 뺏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

 

" 하........"

 

"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서 이렇게 무례할 순 없을 겁니다. 다신 당신을 안 만날 테니까요.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경유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삿대질하는 시은을 지나쳐 천천히 커피숍을 나섰다. 걸어오는 내내 누군가한테 맞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을 자신이 있었어. 오히려 이런 기회가 빨리 왔으면 했어. 

 

더 이상 누군가를 속이고 사는 삶 따위는 이제 질렸거든. 그래서 나를 좋아하게 되지 않더라도 어머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한꺼번에 받아들이긴 분명 힘든 일이니까. 이제 사람들에게 그만 미움받고 싶고 세상에 버려졌다는 느낌은 이제 안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게 내가 서민제를 선택한 이유였어. 사랑받고 싶었고 이젠 누군가에게 좀 기대고 싶었어. 그 애는, 

 

 

 

 

 

 

 

 

심지어 아이면서도 나한테 그런 느낌이 들게 했어. 널 닮아서여서 놀란 건 사실이지만 널 닮아서 사랑하진 않았어. 오히려, 널 닮아서 더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지만..내내 오면서도 울음을 허락한 길이었지만 더더욱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민우에 대한 죄책감도 죄책감이었지만 민우를 대신해 민제를 선택한 게 아니냐는 비난은 도저히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양상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경유의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반드시 참을 용기가 있었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민우에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냐는 말엔 그만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었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은..
혹여나 너는 평화롭게 잠들지 못하고 날 원망하고 있으면 어쩌지.

 

민우야.
아,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내 하나뿐인 사람. 

 


혹여나,
평화롭게 잠들고 쉬어야 할 네가,
그런 나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하나라고 깃들면 진짜 어쩌지., 

 

죽어서도 날 용서하면 안 돼.
난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런데 동생은 용서해 줘. 날 좋아한, 사랑한 죄 밖에 없는 아이야. 
그러니까 민우야...
하지만 민우야. 하나만 알아주면 안 될까. 

 


이미 조금 전부터 경유의 핸드폰은 몇 통이나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민제일 것이었다. 문자에, 카톡에, 하다못해 전화에 음성메시지까지 경유의 핸드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울려댔지만 받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 경유는 은재와 같이 살고 있었다. 분명히 경유의 표정을 보자마자 은재는 난리가 날 터였다. 집 앞에 도착한 경유는 익숙한 스포츠카와 그 앞에서 서성이는 민제를 보자 벽 뒤로 숨었더랬다. 지금은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엉망이 된 자신의 눈물로 부은 얼굴을 보고 뭐라 생각하겠는가. 그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민우에 대한 죄책감으로 무너졌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들킬까 싶어서 휴대폰도 얼른 꺼버린 경유는 민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민우. 그리고 민제. 쌍둥이처럼 닮은 형제. 말투나 목소리, 습관도, 하다못해 얼굴도. 제 3자인 시은이 저 난리를 치는 이유도 이해는 갔다. 주저앉은 경유는 우는 목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민우야. 

 

하지만 민우야.......
너무 마음이 아파. 

 

혹여라도 네가 그렇게 생각할까봐 너무 가슴이 아파. 
민우야. 
널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널 잃지 않았더라면..이런 가정은 하지 않을래.
하지만,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어.
네 동생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어.

 

민우야...

그 일로 온 세상의 미움과 지탄을 사도 좋아.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야. 
차라리 그 사고는 내가 당했어야 했어...

 

네 날개를 너무 빨리 꺾어버렸어.
민우야. 
정말 미안해....







- 네가 그걸 직접 봤어야 했어. 거의 시신마냥 들려나갔다니까. 

 

......

 

- 서은재 듣고 있는 거야? 

 

..응.

 

-경유가 글쎄 병원에서,

 

들었어. 제니퍼. 아직 아무한테도 안 한 얘기 맞지?

 

- 그러엄. 보자마자 바로 너한테,

 

너 입 무거울 거라 생각할게. 아니면, 네가 나한테 진짜 혼날 거니까.

 

- 얜, 당연하지. 근데 진짜 민우랑 얼굴 너무 똑같더라. 나도 진짜 깜짝 놀랐...

 

뚜뚜뚜뚜...

 


지인의 전화를 아무렇게나 끊어버린 은재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돌아와도 마음은 왠종일 서울에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와도 돌아온 것 같지 않았다. 또 경유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 줄이야. 경유가 민우를 잃고 나서 어떻게 지내왔는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지 않던가. 은재는 업무 스케줄표를 보더니 공 부장을 호출했더랬다. 

 

오늘 하루쯤은 푹 쉬어도 된다니까. 차 팀장은 외근 나갔어. 나가면서 서 실장 컨디션 체크하라고 얼마나 신신당부하던지. 오늘 낮 12시 전에 퇴근시키라는 명 받았으니 그렇게 알아. 그 성질머리 어떻게 이겨. 공 부장의 따뜻한 조언에 미소를 짓다가도 다시 공과 사를 구분 잘 하는 서은재로 돌아온 은재는 볼펜을 내려놓고 공 부장을 쳐다보았다. 지금 투입된 신입 인턴들 전부 본사 출근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업무 스케줄엔 유시은 씨만 이곳 스튜디오 출근에 사수가 서민제 MD로 붙었네요? 

 

 

 

 

 

 

 

은재의 말에 공 부장이 넉살 좋게 말을 붙였다. 아, 유시은 씨가 원한 일이었어요. 꼭 민제랑 같은 부서에서 허드렛일이라도 같이 돕고 싶다고. 이번 프로젝트가 갖는 의미가 크다 해서요. 또 차 팀장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공 부장의 말을 놓치지 않은 은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금 서민제 대리는 우리 이번 기획 프로젝트의 중춧돌 같은 조명 디자이너예요. 특히 조감도 3차 리노베이션이 첫 가을에 선보일 거라 할 일이 태산인데 왜 서 대리를 신입 사수같은 일을 맡기는 거죠? 똑같이 입사했으면 유시은 인턴도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죠. 모든 기회는 공평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은재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 공 부장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짓던 은재는 공 부장을 쳐다보았다. 

 


" 유시은 씨를 오늘부로 본사로 보내도록 하세요. " 

 


이 프로젝트의 공동 책임자는 은재와 도일이었다. 은재가 하는 일을 도일이 반대할 리도 없고, 일적으로 은재가 내린 공적인 분부는 절대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또한 일을 빌미삼아 시은이 계속 민제를 귀찮게 군다는 걸 도일도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에 은재가 결제하고 도일이 재가한 이 사항은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업무보고를 통해 오늘부터 본사로 출근하라는 명을 받은 시은은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시은은 씩씩거리며 은재의 사무실을 찾았고, 회사엔 경유도 민제도 없었다. 

 

시은은 민제는 아예 휴대폰을 꺼놨고 회사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라곤 없었다. 시은은 이런 마당에 민제와 떨어져서 지내라는 것이 더욱 열이 받아 도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도일은 서은재의 명령이 곧 자신의 말과 같다 하지 않던가.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버린 걸까. 도일 오빠 같은 멋있는 사람이 뭐 저렇게 FM같은 사람과 엮인담? 시은은 단단히 따질 작정으로 은재의 사무실을 찾았으나 은재는 오히려 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회사와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어떤 일이 있어도 서민제 대리는 유시은 씨의 사수를 맡을 수 없으니 그렇게 알라고. 

 

서민제 씨 본인도 찬성한 일이라는 말에 시은은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 반박하려는 시은을 향해 은재는 능수능란한 미소를 지어보였더랬다. 그런 은재를 결코 시은은 당해낼 수 없었다. 회사에서 민제와 경유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시은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저 호랑말코같은 서은재를 감당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저 서은재가 차도일을 꽉 잡고 있을 거란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반박하려는 시은을 간신히 내보낸 은재는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제 방해물은 제거했는데. 성경유, 도대체 어디에 있니..






*  * * * * * * * * * * * * * * *

 

서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오고 난 뒤 도일은 계속해서 형 도진의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도진은 계속해서 도일에게 전화를 했지만 도일은 받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수십통이 쏟아졌다. 대부분이 은재와 엮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도일은 아직 도진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분명히 은재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어. 도대체 형은 어디까지 이 일을 아는 걸까. 형이 돈이나 재력에 굴복할 만한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도일은 심란하기만 했다. 

 

 

 

 

 

 

 

지만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특히나 은재에 대한 고민이라면은. 하루종일 서울에서 돌아온 일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은재는 시은으로부터 경유를 보호하고자 경유를 당분간 자택 근무를 시키고 민제는 외근을 보냈다. 시은이 아무리 반박해도 절대 이 스튜디오엔 출근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두었다. 그리고 또 3차 리노베이션이 코앞인 상황이라 너무 바빴다. 이제 막바지였다. 그 자에게 자신의 모든 사활을 건 이 작품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었다. 퇴근하던 직원들이 은재를 보며 인사하면서 말을 이었다. 팀장님, 이번 작품 너무 끝내줘요. 분명히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반할 거예요! 인사를 놓치지 않는 직원들의 말에 은재는 미소를 지었다. 1층으로 내려오는데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그가 서 있었다.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실망한 표정인데? 

 

....보통 기다릴 거면 꽃을 준비해서 주든가. 

 


에스컬레이터 밑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손을 내밀자 은재 역시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는 내게 언제부터 이런 의미가 된 걸까.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이것 하나는 알겠어. 
이제, 나는 너 없는 삶을 상상할 수가 없어졌어. 

 


반짝거리는 미소를 짓는 은재를 바라보던 도일은 은재의 손을 꽉 잡았다. 가자. 도일에게 손이 잡힌 은재는 동그란 눈을 떴다. 가다니, 어딜요? 은재의 물음에 도일은 빙긋 웃었다. 형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반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형이 말하지 못할 사정이 무엇인지 두렵기까지 했지만 이겨내기로 했다. 

 


너를 향해 달리는 길이니까. 
서은재. 

 


" 가자. 꽃 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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