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비  극(Tragedy)

 

 

 




성경유가 다시 스튜디오에 출근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1주일 후였다. 시공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리노베이션 시사회를 위해 모두들 분주히 움직였고, 짧게 컬이 들어간 머리로 확 자른 경유의 모습에 다들 실연이라도 당했냐며 우스갯 소리를 잊지 않았다. 어짜피 경유와 민제가 썸타고 연애했다는 사실은 경유와 민제, 그리고 시은만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민제와 가까웠던 도일이나 공 부장조차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경유의 현재 룸메이트인 은재만이 아는 사실이었으나 입이 돌처럼 무거운 은재는 단 한번도 내색도 티도 내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경유와 민제가 썸타다 끝난 일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되고 말았더랬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경유가 스튜디오에 오며 화사하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함박웃음을 짓는 공부장과 도일의 뒤로 은재가 조용히 미소짓고 서 있었다. 도일의 집을 나온 뒤 은재는 여전히 경유와 한 집에 살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은재와 경유는 서로의 사생활을 알 수 밖에 없었다. 은재와 눈이 마주친 경유는 비로소 미소를 머금었다. 오래간만에 스튜디오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스튜디오 입구에서 누군가 난동을 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눈살을 찌푸린 은재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경비팀 부르세요. 특히 보안에 신경써야 할 때 아닙니까. 은재의 말에 모두들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경유가 고개를 들었다. 들여보내세요 실장님. 

 


경유야. 


저 괜찮아요. 그러니까 들여보내세요.


.........

 


은재의 우려와는 달리 난동을 부린다던 당사자가 스튜디오 입구에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경비팀 어레인져들과 꽤나 실랑이를 벌였던 건지 그 깔끔하고 도회적인 얼굴과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채로. 맘고생을 한 탓인지 얼굴이 핼쓱해져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시은 씨 아니야? 본사에 사표냈다더니. 공 부장이 먼저 용수철이 튀어오를 듯한 얼굴로 쳐다보았고, 

 

모두들 웅성거리는 사이 시은은 비틀거리면서 경유 앞에 섰다. 서로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도일이 먼저 나서려 했지만 은재가 그런 도일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경유한테 맡겨요. 우린 뒤로 조금 물러나 있자구요. 은재의 말에 도일도 걸음을 멈추었고, 

 

 

 

 

 

 

 

 

 


공 부장은 황당하다는 얼굴이었지만 시은은 비틀거리면서 경유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더랬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와. 어떻게..! 차라리 인적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처박혀 살기라도 하지! 어떻게 여길 나타나! 오빠는...오빠는 저렇게 시들고 말라가는데 당신은 어떻게 된게 아무렇지도 않아? 당신이 사람이야? 민우 오빨 잡더니 이젠 민제 오빠야? 한 사람으로도 부족해서 형제를 농락하고 다녀? 내가 가만히 둘 줄 알아? 절대 가만 안 둬. 세상 사람들은 당신의 착한 가면에 속아도 난 절대 안 속아. 농락한 건 당신인데 왜 민제 오빠만 이렇게 불행해..? 당신은 이렇게 멀쩡히 너무도 잘 사는데 도대체 왜!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유 시은 씨. "


" ..........! "


" 할 말이 있으면 조용히 밖에서 하도록 하죠. " 

 


스튜디오 본관을 나서서 비상구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마자 시은의 손바닥이 경유에게 날아들었지만 경유는 시은의 팔목을 단단하게 잡아챘다. 함부로 손 올리는 버릇 여기선 곤란해. 절대 안 참아. 퇴사했으면 당신 위치답게 굴어요. 유시은 씨. 

 

경유에게 말로써는 대항할 수가 없자 시은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라렸다. 민우 오빠 잡아먹더니 이제 민제 오빠까지? 아줌마가 지금 몇주째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줄 알아? 아예 온 집안이 파탄이 나야 정신이 들겠지? 당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겠지, 그렇지?! 악을 쓰는 시은을 보며 경유도 아무런 영향이 없다 할 순 없었다. 민우 얘기가 나오자 경유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 파르르 떨렸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라고! 악을 쓰는 시은이 또 참지 못하고 달려들려 하자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 때문에 시은의 몸이 반쯤 밀려났다. 이번엔 시은도, 경유도 놀라 그 남자의 그림자를 쳐다보아야만 했다.

 

 

 

 

 

 

 

 

 

 

 

 

거뭇거뭇한 수염을 채 깎지도 못해 초췌한 티가 역력한 그는 경유도 시은도 아는 남자였다. 남자는 시은과 경유 사이에 서서 아예 경유 앞을 막고 시은 앞에 섰다. 마치, 시은에게서 경유를 보호하듯 아예 경유를 가려버린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2주만에 보는 민제의 얼굴이었다. 시은은 반가움 반 서러움 반으로 금세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이 되어 민제를 쳐다보았다. 

 

이런 일이나 되어야 오빠 얼굴을 보네. 어떻게, 이 여자 귀환하는 타이밍에 딱 맞춰 나타나.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아줌마랑 나랑 오빠 연락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아줌마 요즘 진지도 제대로 못 드셔. 나는 그렇다 치고 아줌마한테 진짜 너무한 거 아냐? 오빠 엄마야. 어머니시라구. 어떻게 여자한테 미쳐서 오빠 어머니한테 이럴 수가 있어. 시은이 말을 쏟아냈지만 민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건 내 문제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 


" 오빠! "


" 내가 너 뉴욕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핼 못했나 보구나. 부모님께 연락 안드리고 계속 병원에 머문다던데 그거 그만 하라고 했지 내가. "


" 그런 말이 싫으면 오빠가 아줌마한테 돌아와. 오빠도 연락 안되고 아줌마가 그걸 어떻게 버텨.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 "


" 그 일 역시 어머니와 내가 풀어야 할 문제야. "


" 오빠!!! 대체 왜 이래, 대체 언제까지 망가질 건데. 오빠 얼굴을 좀 봐. 이 여잔 이렇게 멀쩡한데 오빤, 오빠만.......오빠만 이 지경이라고. 이 여잔 오빨 벌써 잊었단 말야! "



시은이 악 소리를 질렀지만 경유는 민제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았다. 민제는 경유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시은을 쳐다보았다. 네가 날 배려하는 마음이 눈꼽만큼이라도 남아있다면 뉴욕으로 돌아가 줘. 엄마 일은 나와 엄마가 해결보아야 할 문제야. 

 

그리고 우리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야. 넌 더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돼. 부모님께서 완력으로라도 너 데려오게 하라고 하시더라. 이미 어딨는지 수소문중이신 것 같은데 네 부모님 속 그만 썩이고 뉴욕으로 돌아가. 다신 회사에도 안 왔으면 좋겠다. 

 

 

 

 

 

 

 

 

경비팀에 이미 일러뒀어. 이제 너 스튜디오 출입 못하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돌아가 줘. 민제의 말에 시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지만 아예 민제는 시은을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경유의 손을 꼭 잡았다. 경유가 빼낼 틈도 없이 경유의 손을 잡고 아예 복도를 나서고 있었다. 민제와 경유가 떠난 복도에 혼자 남겨진 시은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절대 그냥 두고보지만은 않아.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만들어.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할 수 있냐고. 그것도 성경유 때문에! 둘다 절대로 용서 못해. 내가 이런 바닥까지 봤는데 서민제를 포기하라고? 그건 절대 못해. 

 

시은은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몇 번의 통화 시도 끝에 좀 지친 듯한 선주가 전화를 받는 것이 느껴졌다. 오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가 막고 있어요. 시은의 말에 선주가 거의 거품을 물고 흥분하는 게 느껴졌다. 그 여자가 있는 한, 절대 오빤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를 오빠에게서 떼어내야 해요. 시은은 전화를 끊은 뒤 피맛이 도는 입술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두고 봐. 
내가 오늘 겪었던 이 처절한 바닥은,
곧 성경유 당신이 보게 될 테니까. 






 





그동안 잘 지냈어?


....


 머리 잘랐네. 예쁘다. 


.....


우리,


이제 그만해요. 나 스튜디오로 돌아와서 일할 거예요. 이번 리노베이션은 누구보다 은재 선배한테 중요하니까. 약속했었어요. 선배를 도와 이번 리노베이션을 꼭 해내겠다고. 돕겠다고요. 약속 지킬 거예요. 나에게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일이니까. 


......!


그리고 우리 스튜디오는 이번 합작을 위해 모인 자리니까 해산되겠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요. 선배한테 이미 말해 뒀어요. 이번 작품이 끝나면 암스테르담을 떠나 있겠다구요. 


......


이 말도 사실 할 필욘 없었지만, 민제 씨한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암스테르담을 떠난다고?


......그래야 민제 씨가 더이상 나한테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성경유!


어머니 때문에, 상황 때문에, 시은 씨 때문이 아니예요. 


그럼 뭔데.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경유를 바라보았다. 2주만의 재회였다. 당장 끌어안고 품에 안고 오직 우리만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선주로부터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인지 너무 잘 알았다. 

 

그냥 내 아들과 어울리지 않으니 네가 포기해라 따위의 일이었다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었다. 절대 경유와 떨어져선 살 수 없다는 것. 경유의 마음이 추슬러질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경유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유 역시도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선주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으니까. 

 

 

 

 

 

 

 

 

누가 믿어주기나 하겠는가. 그의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누가 봐도 시은과 같은 반응일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안으려는 민제를 밀어낸 경유는 천천히, 그리고 덤덤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2주 내내 일부러, 억지로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미친듯이 노력했었다. 남들이 보고 얼굴색 좋아졌다는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민제는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경유는 절대 그런 말을 듣게 하려 하지 않았다. 민제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연습하고 또 연습한 결과였다. 할 수 있어. 절대 여기서 약해지지 마. 그를 포기시켜야 해. 민제를 올려다본 경유의 표정이 덤덤한 걸 본 민제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서 대리님. 


...결혼하자. 우리. 


...........! 


암스테르담이 싫어? 그래. 그럼 당장 오늘 떠나자. 아, 리노베이션 때문에 돌아왔다 그랬지? 그래. 그럼 그것만 끝나면 떠나자. 가고싶은 곳이 어디야. 뉴욕? 서울? 말만 해. 바로 떠날 수 있어. 가서, 우리만 살자. 다른 사람들 아무도 생각하지 말고 일단 우리만 생각해.


서 대리님.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돌아온 직후 경유는 내내 민제를 서 대리님이라고 불렀더랬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민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경유의 어깨를 잡은 민제는 이를 악물었다. 2주 내내 네 연락만 기다렸어. 어머닌 만나지도 않았어. 하지만 어머니한테도 시간을 좀 줘. 지금 왜곡된 시선으로 널 보고 있어서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풀리실 거야. 시은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시은이 부모님한테 맡겨버리면 돼. 시은이랑 어머닐 못 만나게 할게. 그러니까...민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경유는 천천히 자신의 어깨를 잡는 민제의 손을 내려주었다. 덤덤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폭발하기 직전의 민제와는 달리 경유는 차분했다. 연습했던 결과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지옥같은 나날들의 끝에서였지만. 은재 선배...

 

 

 

 

 

 

아니, 서 실장님과 차 팀장님한테도 말했어요. 이번 리노베이션이 끝나면 그만두겠다고. 이미 사표도 제출했죠. 우리는 이제 그만 여기까지 하기로 해요. 무슨 이유인지는 민제 씨가 더 잘 거라 생각해요. 그 누구때문에 그만두는 거 아니예요. 그냥,

 

내 마음이 그러고 싶어서. 당신 어머니, 시은 씨, 전부 나 때문에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돌리게 하는 건 가혹한 짓이예요. 내가 뭐라고. 우리가 뭔데. 나는 몰랐어요. 당신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나도 몰랐던 일이예요. 난 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내가 당신을, 민우 씨 대용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당신이 민우 씨를 닮아서 좋아하게 됐고, 그 마음이 여기까지 이어져왔다는 걸 이제 깨달은 거죠. 당신 어머니가 날 깨우쳐 줬어요. 

 


" 경유야! " 

 


경유의 가혹한 한 마디에 민제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은 민우 씨였어요. 그래서 닮은 당신한테 흔들렸던 거고,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거죠.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몰랐어요. 당신 어머니가 깨우쳐 준 거죠. 그걸 깨닫고 나니까 더 이상 예전처럼 당신에게 좋아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요. 현실로 돌아온 거죠. 내가 그동안 민우 씨의 허상을 붙들고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 말엔 민제도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고개는 흔들고 있었지만 이미 눈가가 벌개져 있었더랬다. 민제는 그제서야 경유의 목을 감싸쥐었지만 경유는 억지로 민제의 손을 떨쳐냈다. 

 


미안해.
날 용서하면 안 돼.

나는 그걸 다 품을만큼 뻔뻔하질 않나 봐. 
내가 아니라 더 좋은 사람에게로 가. 

 


나처럼 흠 많고 유리멘탈인 그런 사람 말고. 더 좋은 사람. 
구김살 없고 오직 밝고 행복한 그런 사람.
그래서 민우 씨도, 나도, 어머니도 생각나게 하지 않는 그런 사람. 

너에겐 그런 사람이 어울려. 
이제 널 놔줄 때가 온 것 같아. 

 


난 괜찮아. 
나는 네 사랑만으로 평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하니까. 

 



경유가 확고하다는 걸 알게 된 민제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믿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머니로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시은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을지 눈으로 봤으니까. 하지만 민제도 민우의 대용품이라는 말이 상처가 안 되진 않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을 포기시키려는 경유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아는 것도 직접 듣는 것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어느덧 민제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일부러 민제의 시선을 보지 않던 경유는 더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암스테르담을 떠나고, 회사를 그만두고, 날 떠나면 뭐든게 해결될 것 같아요? 전부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있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렇게 독하게 말하면 성경유한테 내가 속았구나 하고 분노하면서 포기하게 되는 게 지금 이야기의 수순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 서 대리님. "

 

" .......좋아요, 내가 형의 대용품이라 쳐요. 그래서 착각했다고 치자고. "


" 치는 게 아니라 그거야. "


" 그렇게 하자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더는 날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얘기잖아요. 그쵸? "


" ........... "


" 당신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다고 내가 포기한다는 가설은 누가 세운 건데. 누가 포기한대? " 



민제의 말에 경유는 입술을 깨물며 민제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충혈된 채 울고 있는 민제는 온통 상처입어 심장에 비수가 꽂힌 짐승 같았다. 내가 다 버리면 되잖아. 가족이고 뭐고 전부 다 버리고 당신한테만 간다고. 민제가 무슨 말을 꺼내는지도 모른 채 듣고만 있던 경유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악물었다. 다 버린다고. 가족을...형은 죽고 어머니 하나 남았는데 그 어머니를 나 때문에 등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경유를 향해 민제는 경유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연습했는지는 몰라도 틀렸어. 당신이 어떤 독한 말로 내 심장에 비수 꽂아도 난 절대 안 속아. 그냥 안 속게 되어 있어. 아무리 모습을 바꾸고 변신하고 온갖 준비를 다 했어도 난 당신한테 가. 나는 쉽게 결정했을 것 같아요? 절대 안 바뀌니까 당신이 나한테 져주는 게 맞아. 난 절대 당신을 포기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경유를 뒤에서 끌어안은 민제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이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경유 말에 상처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으로는 어머니를 버리겠다 하는데 그 말을 더 감당할 수 없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거야.
네가 어머닐 버리고 나한테 오면,
난 행복한 얼굴로 맞아줄 수 있을까..?


그럼 우리는 다 잊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 거야 민제 씨. "


" ..........! "


" 당신한테 남은 가족은 어머니 하나야. 나 때문에 어머닐 등지고 나한테 오면 그 다음부턴 해피엔딩일 것 같아? 당신 형을 닮아 널 좋아했다가 이제 그 마음이 식어버린 나는, 그런 널 보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당신 가족의 그림자를 다 지우고 온전히 우리만 보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


" 할 수 있어. 나는 성경유만 보고 살아갈 수 있다고. "


" 난 그렇게 못해. 그리고 안 해. 고아로 살아왔고 부모가 버린 삶을 살아온 게 내 평생의 한인데, 그 얘길 네가 사랑하는 네 가족에게서 매일 매일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그 상처를 스스로 후벼팔만큼 건강하질 못해. 그 병든 마음의 화살은 결국 내가 너에게로 쏘게 되겠지. 서로 미워하고 또 할퀴고 원망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잃어가면서. "


" 성경유! "


"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그걸 다 감내할 만큼은 널 좋아하지 않나봐. 말했잖아. 당신 형의 대용품으로 널 좋아한다고 착각했었던 거라고. 그 마음이 식어버린 지금은 그냥 모든게 다 귀찮고 질려. 더는, 너를 보면서 웃을 수도 없고. 이제 너만 보면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의 동생인 것만 생각나. "


" ............. " 



민제의 품에서 빠져나온 경유가 덤덤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돌아가. 네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네 어머니에게로. 나는 다시 네 형을 사랑한 네 형의 여자로 평생을 살아갈 테니까. 민우 씨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이제 알았어. 너도 이제 나를 네 형의 여자로 살게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서로가 불행한 길이야. 난 평생 십자가를 진 채 살아갈 순 없어. 

 

경유의 말에 참담한 표정이 된 민제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럼 우리 엄마가 모욕을 줬을 때 왜 그때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서민제가 아니라 서민우를 사랑한다. 서민제가 그냥 따라다녀서 착각한 거다. 엄마가 그 모욕을 다 쏟아부을 때 왜..? 왜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앞뒤가 안맞잖아! 엄마가 민우 형 얘기 꺼내자마자 그제서야 내가 아니라 형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고..? 엄마가 그 말을 꺼내기 전에도 난 우리 형 동생이었고, 당신은 형의 여자였는데..새삼 지금 와서 바뀔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엄마가 얘기할 때 우리가 형제지간인거 밝혀진 거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왜 이제와서 그게 문제가 되는 건데. 

 


글자로 아는 거랑 피부로 느끼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성경유! 거짓말하지 마. 너 나 사랑하잖아. 내가, 모두 버릴 수 있다고 하잖아.


버린다는 얘기 함부로 하지 마. ...가족은 버릴 수 없는 거야. 가족을 어떻게 버려? 누군 가족에게 버림받고 그 없는 가족마저도 한 명이라도 있고 싶어서 난리가 나는데.


.........! 



돌아선 경유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참았다. 다음 번에 만날 땐 공적인 업무로만 지내도록 해요. 이번 발표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래요. 그게 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니까.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경유가 멀어져갔고, 온 몸의 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민제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이 되어 자신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형의 대용품, 잔인한 어머니의 독설, 버릴 수 없는 가족..모두가 현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형의 대용품으로 생각했기에 더이상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경유의 말이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피부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민제도 스스로에게 자문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나는 가족을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비상구 계단쪽으로 향한 경유는 비상구 문을 열자마자 그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비상구 계단은 드나드는 사람이 없이 혼자였다. 경유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기 시작했다. 참았던 눈물이 터지니 봇물 터지듯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멎질 않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입고 심장이 찔려 어쩔 줄 모르고 눈물만 뿌리는 민제 앞에서 경유는 정신줄을 높고 싶은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수없이 연습했던 것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달랐다. 



널 울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내 옆에서 전부 다 마르고 시들어 버릴 것 같아서.
넌 가족 못 버려.
나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가족을 버리게 할 순 없었어.
그 가족을 버리고 나한테 와서 불행해질 너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나 때문에 어머니를 등지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을 너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차라리 내가 그 독을 다 맞고 말지. 

 


민우 씨 미안해...
나는 이제 민제 없인 살 수 없어.
그 애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 전부가 되었는지 모르겠어.

 


민우 씨,
정말 미안해...
나 절대 용서하지 마.

활활 타오르는 지옥불에 떨어져도 할 말 없어. 
미안해.........




 

 

 







* * * * * * *

은재의 남동생인 지환의 소재가 파악되는 것은 모래 사장에서 김 서방 찾기나 다름 없었다. 은재가 그동안 알아낸 것이라고는 수학여행을 떠난 지환이 실종되었고 요트 사고로 처리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 때에도 지환의 사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의 사고사, 뿔뿔이 흩어져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동생들, 엄마 뱃속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막내 수완이 살아있는 것도 최근에 안 일이었으니 그때 당시의 은재는 동생들이 모두 실종 상태거나 죽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은재의 마음 하나도 추스리기 힘들었더랬다. 

 

수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동생들을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환의 수학여행지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였고, 거기에서 실종되었으니 다른 나라는 아닐 거라 생각했더랬다. 도일과 함께 지환을 먼저 추적해 나가면 지환은 분명 동생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자신과 나이 터울이 얼마 나지 않는 지환부터 찾는 게 순서라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보육원, 고아원 자료를 모두 수집하던 도일이 서재에서 한무더기의 서류를 갖다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완이가 아니고? 일단 먼저 무당벌레 팬던트를 가지고 있는 건 수완이잖아. 수완이를 먼저 찾아야..도일의 말에 은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수완인 자기가 서회장 아들인 줄 알고 있어요. 수완이가 가진 우리 아버지 지분이 있으니 절대 그놈은 함부로 수완일 건드릴 수 없을 거예요. 자기 아들로 키운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수완이를 요리해서 최후에 인질로 쓸 계획인 거겠죠.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면 수완이가 자길 배신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계산일 거구요. 아주 교활하고 못된 놈이예요. 수완이 마음을 이용해서 혹여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수완이가 받을 상처가 더 크니까 내가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걸 미리 계산했을 테고, 또 수완이가 일을 알게 되더라도 아버지로 알고 자랐으니 쉽게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내 발목도 잡고 수완이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양심도 찌를 수 있으니 1석 2조겠죠. 은재의 말에 도일은 혀를 내둘렀다. 서 회장..정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곧 시사회 때문에 그놈이 암스테르담으로 올 텐데, 괜찮겠어? 이제 파트너가 당신이라는 것도 알았을 거고, 

 

 

 

 

 

 

 

 

절대 가만있을 놈이 아니야. 강 대표랑 접선할 수도 있고. 우리가 가진 패보다 저들이 가진 게 더 많잖아. 도일의 말에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수완이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기 힘든 건 사실이예요. 내동생이 저기 있는 한 약점인 것만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반대이기도 하죠. 그놈도 수완이가 진실을 아는 걸 두려워할 거에요. 혹여나 수완이가 자기 품을 떠나게 되면 그만큼 지분을 손에 넣는 건 어려워질테니까. 그래서 당분간 수완이를 거기 두는 거예요. 그놈도 그놈이지만 수완이한테 아직 어떻게 진실을 밝힐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나를 원망할 수도 있어요. 자기가 아버지로 알고 자란 자가 우리 가족을 파멸시킨 걸 알면 수완이는 무너질 수도 있어요.


....내가 만나볼까?


........


아니, 미래의 막내 처남이 될 사람인데. 오스트리아도 내가 가서 둘째 처남도 찾고.


.......


나랑 자기랑 결혼하면 당연히 지환이가 둘째 처남이고 수완이가 막내 처남 되는 거잖아. 

 


심각하게 말하다가 도일의 서열 정리에 은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구 맘대로 처남이래는 거예요. 아직 내 동생들 찾지도 못했는데 누가 처남이라고 한다고. 은재의 말에 도일은 웃으면서 은재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서은재가 완벽하게 내 칭찬을 해줘야겠지. 그리고 처남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동분서주하는데 그런 매형이 예쁘겠어 안 예쁘겠어. 

 

도일의 말에 은재는 기가 막힌지 웃음을 터트렸고, 도일은 은재를 끌어안은 채 은재의 가늘고 예쁜 손가락에 반짝거리는 반지를 끼워 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거 알아. 나도 채근 안 해. 하지만 나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아 줘. 내가 말했지. 

 

 

 

 

 

 

서은재의 완벽한 뒷배경이 되고 싶다고. 자기가 목숨 걸고 찾으려는 회사도, 부모님의 복수도, 적들을 향한 처단도, 그리고 동생들을 찾는 일도, 모두 하지 말라고 안 해. 하지만 내가 같이 하려는 걸 막지 말아 줘. 네가 아픈 만큼, 네가 힘든 만큼, 

 

슬픔도 고통도 외로움도 이제 항상 내가 옆에서 반씩 나눠 가지고 싶다는 말 잊지 마. 이제 넌 혼자 아니야. 항상 내가 옆에 있어. 네가 슬프면 난 두배로 슬프고, 네가 기쁘면 난 그보다 세네배는 더 기쁠 거야. 그만큼, 서은재를 사랑하니까. 프로포즈 앞에 대단한 풍선이나 꽃다발도, 그럴싸한 이벤트도 없었다. 그저 진실한 말과 커플링이 전부였다. 담백하고 진솔한 그 다웠다. 

 

 

 

 

 

 

 

 

 


그 진솔하고 담백한 말이 은재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더랬다. 반지를 내려다보던 은재는 도일에게 안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지 내 마음에 쏙 들어요. 혼자서 골랐을 거 같진 않은데? 은재의 말에 도일이 헛기침을 했다. 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분명히 경유 씨가 비밀에 붙여준다고 했단 말야. 

 


역시. 스파이가 있었구만.


그럼 어떡해. 반지 마음에 안 들어서 퇴짜맞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비장의 성경유 카드 좀 썼지. 


하하하하...

 


도일의 품에 꼭 안긴 은재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이렇게 평온한 행복을 느낀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이제 곧 시사회였다. 그리고, 자신이 철퇴를 내릴 그들과 다시 재회할 시간이었다. 불안감이나 초조함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오래 준비한 만큼, 비밀리에 준비한 만큼 모든 설계와 계획은 끝나 있었다. 이것이 복수하는 첫번째 단계가 될 것이었다. 전부 다 되갚아 줄 거예요. 그리고 전부 다 가져올 거구요. 아버지 이름, 부모님 회사, 이 회사의 주인은 아버지라는 걸 다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죠. 그리고 그놈의 마수에 있는 우리 수완이, 세계 전국 각지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내 동생들, 하나 하나 전부 다 되찾아 올 거예요. 반드시. 도일의 품에 안긴 은재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어머니.

이제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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