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가오는 위험(Approaching danger)



헤이그(Den Haag), 네덜란드(Netherlands). 비넨호프(Binnengof) 근교 모델하우스

 

 

 

 

 

 


13세기경 네덜란드 백작이 살았던 성인 비넨호프는 내성이란 뜻이다. 지금은 국회의사당, 총리실, 외무부 등 중앙 부처가 들어서 있다. 비넨호프 앞 광장에는 네덜란드 건국의 아버지 오라니에공 빌헬름 1세의 동상이 서 있다. 비넨호프에서 가장 오래된 기사의 성관(Ridderzaal)은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매년 9월 세 번째 화요일 국회 개원식 때는 여왕의 퍼레이드가 기사의 성관 앞 광장에서 펼쳐져 많은 관광객들이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단둘이 독대하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지난번엔 은재만 긴장했다면 이번엔 서 회장도 더할 나위없이 은재 앞에서 긴장하는 중이었다. 아마, 

 

은재가 이뤄낸 성과 때문이리라. 이렇게 빨리, 이렇게 단시간에 따라잡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당연히 서대식 그 인간과 함께 형제들을 다 찢어놓았으니 이제 더이상 위험을 없을 거라 판단했고, 십수년 동안 즤 외삼촌에게 보낸 것도 외삼촌이라는 작자라면 절대 서은재를 뭍 위로 내보내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고, 17년이나 지났는데도 한국 쪽엔 얼씬도 안하는 거 보니 모두 잊고 살기로 했나보다 여겼던 것이 오산이었다. 잊고 산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되기 위해 새끼 발톱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서 회장은 그점만은 높이 사기로 했다. 자신이 서은재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았다는 것을. 긴장하는 서 회장과는 달리 비록 눈에 힘은 주고 있어도 은재는 조용하게 찻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더랬다. 드세요. 

 


" ....! "

 

" 설탕 안 넣은 아메리카노예요. 늘 좋아하시던 걸로 물은 조금. " 

 

" 그걸, 기억하고 있었니? " 

 

" 그럼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요. 한국에 대한 기억이라면요. "

 

" ........! "

 

"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죠. 삼촌. "

 

" .......!!!!!! "

 

" 세월이 무색하죠? 이제 삼촌께서도 나이는 속일 수가 없네요. 하긴, 그룹을 그만큼 '대신' 이끌어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겠지만. "

 

" 대신, 이라니? "

 

찻잔을 내려놓은 은재가 빙긋 웃었다. 황 변호사 아저씨께 전해 들으셨겠지만요. 진짜 '유언장' 이 따로 있다는 건 정말 모르셨나보네요? 애써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걸 참고 또 참아왔던 서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변호사가 얘기하기 전부터 서은재는 알고 있었단 얘긴가? 

 

아무리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서 회장이라 할지라도 어릴 때부터 형이었던 서대식 회장이 자식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속속들이 다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설마 고등학교 1학년 여자애가 뭘 알겠냐 싶어서 서은재를 살려둔 것이 화근이었다. 알아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동안 서 회장이 한국에서 대원그룹을 맡고 있는 동안 정보가 샜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형이 살아 생전에 이미 서은재는 후계 수업을 받았다는 얘긴데..도대체 어디까지 대비해놓고 있었던 건가! 이를 악문 서 회장은 주먹을 쥔 손 사이로 땀이 흥건히 밸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깟 변호사 종이 쪼가리쯤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얘기야. 17년이나 지났어.

 

 

 

 

 

 

 

 

 

 

 

 

 

대원에서 쫓겨난 영감탱이가 지껄이는 소리 따위 누가 믿어주기나 할 것 같아? 17년 전에 사고사한 전 회장 따윈 아무도 관심없어. 그리고 그 전 회장이 남긴 자식이 뭘 하는지는 더더욱 관심 밖이고! 네가 지금 안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얘기야. 넌 아무것도 못할 거다. 서 회장의 말에도 예전의 은재와는 달리 똑바른 눈으로 서 회장을 응시할 뿐이었다.

 

처음에 은재에게 서 회장은 회사를 빼앗은 나쁜 놈일 뿐이었다. 하지만 동생들을 저렇게 만들게 차도진을 움직인 건 서 회장일 터였다. 지분을 인질삼아 수완을 입양한 것도 그 때문일 터. 그리고 서 회장의 의도는 맞았다. 수완이 서 회장의 품 안에 있는 한 그건 은재의 약점이었다. 서 회장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개인 변호사가 최종 유언장을 지니고 있지만 이걸 공식화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렇다면 회사를 찾을 수 있는 길은 더더욱 멀어질 터였고, 이건 알력 싸움이었다.

 

 

 

 

 

 

 

 

어쩌면 서 회장 쪽이 이길 공산이 더 컸다. 처음엔 아버지 회사를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서 회장에게서 회사를 되찾는 것으로 갚아주는 건 끝내려 했었다. 지금은 수완이와 회사를 되찾고, 동생들을 찾는 일이 급하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하지만...은재의 마음은 변했다. 동생들을 그렇게 만든 게 서 회장인 걸 확인된 이상, 절대로 그냥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다 갚아주어야만 했다. 

 


네놈 뼛조각 하나하나 전부 다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어. 
전부 다..
아파서 비명을 지를 수도 없게 만들고 말 거야. 

살아있는 게, 
숨쉬는 것조차 고통이라고 느낄 만큼 만들어 주고 말 거다. 
죽는 건 너무 쉽잖아.
회사를 잃게 만드는 건 네놈한테 너무 자비로운 결말이야.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넌 결국 네 손으로 피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은재는 점점 달아오른 얼굴로 서 회장을 응시했다. 근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신 분의 대응치고는 제가 만나자고 하니 바로 암스테르담으로 오셨군요. 은재의 말에 서 회장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하긴, 최종 유언장 공개가 핫한 이슈이긴 했을 거예요. 예전의 은재가 아니었다. 설마 뭘 알고서 쟤가 저러는 건가. 서 회장은 마치 내일도 없는 듯이 달리는 은재가 의아했다. 강 대표가 뭘 불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신중하게 몸을 납작 엎드리던 애가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까지 달리는지 의문이었으나 절대 내색할 순 없었다. 계속 도발하는 건 오히려 은재였다.

 

 

 

 

 

 

 

 

 

 

 

 

 

 

 

보시자고 한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은재가 여유롭게 나오자 서 회장은 계속 긴장모드였다. 이번 시공을 우리 대원그룹에서 맡았으면 하는데. 물론 투자자들이 다들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다른 투자자들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겠지만 우리도 투자 지분이 만만치 않으니..서 회장의 말이 끝나기에 앞서 은재는 예상했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빙긋 미소지었다.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군요. 은재의 단단한 표정 앞에서도 서 회장은 회사의 이익이 눈앞이라 굴욕과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다른 일이었으면 서 회장도 이렇게까지 굴욕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터였지만 대원그룹이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유럽 시장이 이번 프로젝트의 첫 포문을 여는 단계였다. 책임자가 서은재라는 걸 몰랐으면 아예 시작도 안했을 터였지만 은재 때문에 포기하기엔 이번 프로젝트는 부피가 너무 컸다. 이사진들도 모두 기대하는 눈치였다.

 

 

 

 

 

 

 

 

 

 

 

거기다 작고한 서 회장의 장녀인 은재가 이번 책임자인게 밝혀진 다음엔 이사진들의 감동의 충격이 더 컸다. 거기다 캐치프라이즈가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 이다 보니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었다. 그야말로 대중들의 입맛도, 평론가들과 이사진들의 마음까지 확실히 잡은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유럽 시장을 장악해야 대원그룹의 앞날에 서회장 자신이 리드하는 부분이 클 텐데 이 부분을 은재에게 고스란히 공을 빼앗길 순 없었다. 당장 현재 놓인 시점으로 보자면 딱히 서회장이 해될게 없는 부분이었으나 이 프로젝트가 누구의 공로로 돌아가느냐에 따라 향후 행방이 조금씩 흐름이 바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걸 캐치한 서 회장은 부리나케 암스테르담으로 날아올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공동 투자자인데다 은재는 여전히 조이델의 대표 디자이너였고, 강 대표가 주인이었으나 이 프로젝트만큼은 강 대표도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진척이 되었다 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은재가 손을 떼게 할 수도 없었고, 이 프로젝트를 완전히 엎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왜 그제서야 은재가 이 프로젝트에 온 몸을 바쳐 사활을 걸고, 이 프로젝트가 뭘 의미하는지 최대한 그동안 몸을 낮추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조이델만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건 아니예요. 레이체 대표님과도 상의해야 하고, 다른 투자자들이 엄연히 더 많은데 대원그룹에만 특혜를 주면 어떻게 되겠어요. 공개 입찰이 있으니 때를 기다려 보세요. 은재의 말에 서 회장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더랬다. 

 



" 네가 대원그룹과 어떤 사인데,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을..."

 

" 어떤 사인데요. "

 

" ...........! "


" 그럼 이번 기회에 대원그룹에 절 끼워주시는 건가요? 정식으로? "


" !!!!!!!! "

 



완전히 승기를 잡은 은재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떤 기회를 보더라도 이번일 만큼은 은재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은재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기에 서 회장은 안면 근육이 빳빳하게 굳었더랬다. 자신이 은재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부아가 치밀었다. 그깟 캐치프라이즈는 사람들 그림 같은 건 금방 잊어버려. 그게 뭐라고. 캐치프라이즈 신경이나 쓰는 줄 알아? 네가 아직 사업에 대해 너무 몰라서 그런 거란다. 사람들은 수익이나 돈에만 신경쓰지 그림은 신경쓰지 않아. 뭘 모티브로 했건 신경쓰지 않는다고. 서 회장의 눈빛이 점점 살벌해지고 있었지만 은재는 굴하지 않았다. 

 


적어도 컵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 종이봉투에 뭐가 그려져 있는지는 관심 갖겠죠. 


...뭐? 그게 무슨 소리지?


캐치프라이즈가 우리 가족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모두 텍스쳐화되어서 나갈 건데, 그게 그냥 단순히 그 프로젝트를 의미하는 캐치프라이즈이기만 한 거 아니예요. 모든 굿즈에 다 그 이미지가 실리죠. 머그컵, 종이가방, 화보부터 시작해서 대형 가게와 백화점, 면세점마다 걸릴 대형 화보들, 이번 프로젝트가 그냥 대원그룹에게만 있다 착각하지 마세요. 투자한 모든 기업들이 이 굿즈부터 시작하게 될 거예요. 사람들 명품 좋아하죠. 하지만 벌거벗은 이미지인것보다 가족들 매개체로 한 그림이 굿즈로 팔리기 시작하면 그건 불티나게 팔리죠. 가족이 그려진 머그컵과 종이가방을 싫어할 구매자가 과연 있을까요? 회장님은 어떠세요. 그냥 컵과 가족 그림이 그려진 컵이 있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게 기업 이미지에 플러스일까요. 아니면 마이너스일까요? 


너...!


그럼 사람들은 생각하겠죠. 이 그림은 도대체 누굴 본뜬 그림일지. 그 가족은 왜 지금 대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를요. 


......!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사람들이 물음표를 띄울때쯤 하나씩 공개할 거거든요. 


.....


말씀드렸죠. 이번 프로젝트 만만히 보지 마시라구요. 제가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데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은재의 완벽한 마침표에 서 회장은 그야말로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은재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보고 있었다. 은재의 말대로라면 이제 서 회장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질 터였고, 이 프로젝트는 서 회장이 보아도 기가막힌 프로젝트였다. 서은재라는 다이너마이트를 안고도 이 프로젝트를 승인할 수 밖에 없었던 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은 프로젝트였다. 성공이 바로 눈앞에 훤히 보였다. 죽은 형은 그야말로 은재를 철의 왕좌에 올릴 준비까지 해놓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은재보다 두 살 차이는 장남 서지환을 실족사시키도록 처리한 건 지환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장남만 처리하면 될거라 생각했더랬다. 

 

하지만 정작 모든 걸 다 준비하면서 살아온 건 은재였다. 품 속에 피묻은 칼을 갈고 간 채로. 이걸 진행시킬 수도, 이걸 진행시키지 않을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한 서 회장이었지만 마지막 한 방이 있었다. 서 회장은 고개를 들어 비서를 들어오게 했다. 

 

 

 

 

 

 

 

 

 

들어오라고 하게. 비서가 나가자 은재가 고개를 들었고, 서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어. 비서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본 은재는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궁지에 몰려 있던 서 회장은 그제서야 여유롭게 커피잔을 들 수 있었다. 

 



" 수완인 인사하거라. 이번에 회사에 중책을 맡을 아버지 파트너이신 서은재 실장님이시다. "


" ...........!!!!!!! "


" !!!!!!!!! "

 


얼마나 운명은 잔인한지,
마치 피묻은 칼을 든 채 내 손이 베이는 것도 모른 채.

 


아아.
아버지...
어머니.

 


보고 계세요...?
아버지. 우리 수완이예요...
우리 수완이가 저렇게 컸어요. 

 


수완은 허름한 교복을 입은 채로 와서 어설프게 인사를 했더랬다. 인사드려야지. 아버지 사업에 정말 중요한 분이야. 서 회장이 수완과 어깨동무를 한 채 입을 열었지만 조금 전의 여유와는 달리 상황이 역전된 은재는 굳은 채 아무 말이 없었고,

 

은재에게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당황스러운 수완의 사슴같은 눈을 바라보던 은재는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도 애써 손을 내밀었다. 서은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은재가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하자 그게 어떤 의민지 알아차린 수완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 수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완은 이런 중요한 자리에 왜 자신이 나왔는지도 모른 채 사실 암스테르담행도 보통 중요한 공식 행사 땐 형만 대동하시던 부모님이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였더랬다. 학교 행사도 아닌데 수완은 단추가 곧 떨어지기 직전의 허름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 단추가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이건 분명 사모인 장석희 여사의 농간일 것이었다. 운동화는 얼마나 더럽고 다 찢어졌는지 앞 밑창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수완이 집에서 받는 취급을 알만했다. 공식 행사 때 아르마니 재킷을 풀세팅해서 화려하게 메이크업까지 해서 나온 형 지완을 생각하니 단전에서부터 빡침이 밀려 올라왔다. 수완인 그만 나가 있거라. 일 마치고 같이 가도록 하자. 

 

서 회장의 말에 수완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도 고개를 끄덕인 채 은재에게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완이 회의실을 나서자 은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떤 압박을 하더라도 서 회장에게 수완이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계산에서 데려온 게 뻔했다. 17년만의 상봉인데, 내가 너무 서두른 감이 있지. 천천히 두고두고 보여줄 테니까 기대해도 좋아. 물론, 은재가 얼마나 나와 친밀하게 지내는지 여부에 따라 달린 거겠지. 봐서 알겠지만 수완이는 꽤 효자거든. 아버지 말 잘 듣고 가족의 화목이 최우선이지. 수완을 언급하는 서 회장을 금방이라도 패주고 싶은 얼굴로 다가선 은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 입에 수완이 이름 올리지 마. 

 


" ....! "

 

" 수완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

\

" 은재야. "


" 이건 경고야. " 



은재는 더 참지 않고 회의실을 나가버렸고, 수완이 있는 한 절대 은재와의 싸움에서 유리하다는 걸 다시 한번 입증받은 서 회장은 껄껄 웃었다. 무리해서 수완을 암스테르담까지 데려온 이유가 설명된 순간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온 이후로 미소를 지으면서 겨우 찻잔을 만진 서 회장은 자리에 앉았고, 수완을 바래다 주러 나갔던 비서가 굳은 얼굴로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수완이는 호텔로 데려다 줬나? 서 회장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 회장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날이 날이니만큼 그렇게 지완이랑 똑같이 입히라고 얘길 했건만 쯧쯔..서은재가 저만한게 다행이지 괜히 도발시킬 필요 없어. 송 비서는 암스테르담에서 젤 유명한 명품샾 퍼스널 쇼퍼들 전부 불러서라도 수완이 옷 치수 재어 명품 라인으로 다 둔갑시켜. 저 교복으로 하루종일 입고 다니게 할 거 아니면. 애들 엄마가 뭐라 하건 내 명이라고 하고. 서 회장의 말에 비서가 예 하더니 다시 서 회장 앞으로 다가섰다. 방금 서울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송 비서의 말에 서 회장이 찻잔을 든 채 고개를 들었더랬다. 

 


무슨.

 

최종 프리젠테이션에서 가족을 테마로 한 캐치프라이즈 도안이 대박이 났답니다. 

 

.....!!!!


머그컵, 에코백, 종이가방 볼펜 등등 굿즈들이 모두 품절되었고, 광고는 최고 조횟수를 기록하고 가장 비싼값에 방송 cm송으로 결정되었고 이미 다른 투자회사들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유례없은 초대박이라고,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이 프로젝트 지상복합공간에서 여러가지 세계적인 행사를 하겠다는 나라와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어요. 그리고, 첫 개관식에 대통령 부처께서 참석하신답니다. 대원그룹이 유럽시장과 조인트하는 역사적인 자리에 가족을 테마로 하셨다고 대통령께서 칭찬이 자자하시다고..


.........!!!!


대원그룹에 곧 표창장도 수여될 거라고 합니다. 

 


' 이번 프로젝트 만만히 보지 마시라구요. 제가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데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

 


이미 예견된 성공이었지만 이렇게 물밀듯이 빨리 치고 올라올 줄이야. 무엇보다 가족을 테마로 한 캐치프라이즈가 성공의 요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더더욱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좋아할 수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결국 서은재가 기적에 가까운 성공을 이끌어낸 것이었으니까. 은재가 바로 조금 전에 예견했던 성공이 바로 눈앞에 닥치니 서 회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벽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서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 이게 정말 은재가 디자인한 건축 모형이라구요?


- 그래. 다들 열 일곱살 짜리가 만든 건축 모형 아니라고 말들이 많을 정도지. 

고교생이 전국 건축대전에서 대상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군. 우리 은재가 최연소야. 


- 형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형님 장녀 답네요. 어릴 때부터 그리 똘똘하더니..


- 심지어 그 애가 대원건설을 주축으로 일을 더 배워보고 싶다 하니, 

대학 가고 첫 인턴쉽을 대원건설에서 하게 할 예정이야. 


- 대원 건설에서요...? 


- 아 참, 네 처남이 대원건설에 있지? 은재가 들어가면 일 좀 잘 가르쳐 보라고 해. 나중을 대비해서라도. 

 

 


그것이 시작이었다. 대원건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터. 대원건설은 서 회장의 부인인 장 여사의 남동생이 경제적인 것을 모두 책임지고 있었다. 서 회장의 소개로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 회장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 여러가지 비리를 축적중인 회사이기도 했다. 그런 회사에 은재가 들어오게 된다면, 모든 죄가 낱낱이 밝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원건설은 대원그룹 메인 프레임 중 하나였다. 대원건설을 장녀에게 인턴쉽을 맡긴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결국 후계자 수업의 첫 시작일 터였다. 서수철 회장은 결국 쓰다 버려질 사람이라 생각했다. 산산조각난 유리잔을 바라보던 서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다 뺏길 순 없어.

내가 뭘 버리면서까지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형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

 


내가 사랑스러운 조카를 어떻게 내 손으로 파멸시키는지를. 
이건 형이 자초한 거야. 
그 큰 거대한 왕국을 형님 자식들에게 다 준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일은 이렇게까지 안 됐어.
노른자위나 다름없는 대원건설을 은재에게 준다고만 안했어도. 

이제 와서 다시 빚에 절절 매는 수습사원으로 돌아갈 순 없어. 
대원은 내 꺼야. 
영원히 내 꺼야.
그걸 탐내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발로 밟아줄 거야. 
반드시. 



 







* * * * * * * * * * * * * * * * * * * *


헤이그(Den Haag), 네덜란드(Netherlands). 마우리츠호이스 왕립미술관(Mauritshuis Museum) 근교 스카이라운지 



비넨호프 북쪽 오라니에 왕가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으로, 규모는 작지만 일급 작품들만 모아 전시하는 곳이다. 렘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터번을 감은 자화상> 등 16점과 페르메르의 <델프트의 풍경> 등 3점, 그 밖에 로이스달과 루벤스,

 

홀바인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일이 형 도진을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자주 가던 박물관 안에 있는 스카이 라운지였다. 은재에게 모든 걸 들키고 나서 도진은 비서와 함께 휠체어에 앉은 채 도착했고, 안 본 며칠 사이 얼굴이 핼쓱해진 티가 났더랬다. 도진은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예감했는지 동생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도일은 그런 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두 형제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만 감돌았다. 술잔을 내려놓은 도진은 먼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더 숨기겠어. 그래서 내가 서은재는 안된다고 했던 거야.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단념해. 내가 허락해도, 네가 된다고 해도 이제 서은재는 널 보려고 하지 않겠지만.차라리 잘됐어. 어짜피 둘은 안되게 되어 있어. 강 대표 때문인것도 있지만 여러모로 악연이니까. 도진의 뻔뻔스러운 말에 도일은 기가 막혀 얼굴이 새빨개졌더랬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인 것이다. 

 


형은, 얼굴에 자기 모습 비춰본 적 있어...?


....


얼마나 추하고 못난 얼굴인지, 얼마나 형이 사람의 얼굴을 잃고 사는지..?


차도일!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형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나 때문이었다고 하지 마!아버지 회사 지키기 위했다고도 하지 마. 아버지가 이걸 용납하셨을 리 없어. 형에게, 나에게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내내 수없이 가르치셨던 분이야. 인간임을 포기한 일을 한 형을, 아버지가 어떻게 납득하셨겠어? 아니, 얼마나 슬퍼하셨을지 생각해 봐. 


그만해...

 


도진은 괴로운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충혈된 형의 눈을 보면서 도일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덧 도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든 도진은 휠체어를 끌고 도일에게로 와서 손을 잡았다. 형은 죄값을 치르고 있어. 지금 반 병신으로 살고 있는 게 그 증거야. 그놈에게 결국 뒷통수 맞고 이렇게 죄값 치르면서 살게. 그리고 평생 고아들을 위해 봉사하고 또 봉사하면서 내 죄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 너는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네가 서은재를 포기하기만 하면 돼. 그럼 더 이상 강 대표랑 엮일 일도, 대원그룹과 연결될 일 아무것도 없는 거야! 하지만 이 일을 스스로 밝히게 되면 형은 파멸이야. 레이체?

 

레이체는 온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구신 회사야. 이 회사가 어떤 건지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궈서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아버지의 유산이야. 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 악마랑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렇게 했어.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회사..아버지의 숨결이 묻어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어. 이 회사를 지킬 수만 있다면 악마와 거래한다고 해도 상관 없었어. 그리고 널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 너와 이 회사를 두고 협박하는데 어떻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내가 욕 먹고 비난받는 건 상관 없어. 평생 비난받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내 가족을 지켜야 했으니까! 도진의 고함에 도일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일은 도진의 손을 겨우 붙들었다. 



" 은재 동생은 겨우 열 다섯이었어.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이었단 말야. 그 애를 거리에 버리면서 어떻게 아무 생각이 안들었어..? 그 애가 얼마나 가족을 찾고 싶었을지, 누나가 얼마나 보고싶었을지 아무 생각이 안 들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게 가능했냔 말야!!! " 


" ............ " 

 


- 제 이름은 서, 지, 환 이예요. 우리 누나 좀 찾아주세요. 우리 누나 이름은 서, 은, 재. 이것 보세요. 사진도 있어요. 

우리 누나가 세상에서 젤 예쁘거든요. 이렇게 예쁜 사람은 흔치 않아요. 

그러니까 누나한테 제가 비엔나에 있다고 꼭 좀 말해주세요. 예? 부탁이예요. 저, 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요! 


" ........... "


- 누나한테 가야 해요. 우리 누나 내가 지켜야 하거든요. 부모님이 비행기 사고가 났다는데, 우리 누나 혼자잖아요. 

혼자 얼마나 무섭겠어요. 내가 우리 누나 지켜야 해요. 내 동생들, 우리 누나. 전부 내가 지켜줘야 한다구요! 


" ........... "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의 팔에 매달리던 그 뜨겁고 간절한 손을. 한동안 교복 입은 또래 중학생 남자 아이들만 봐도 숨도 쉬기 힘들었더랬다. 애써 외면하는 도진을 향해 도일은 그 때의 지환처럼 팔을 잡아야 했다. 이제 갓 열살밖에 안 된 여자애들을 유럽에 팔아넘길 땐 무슨 생각이었어. 내 가족 지키자고 다른 가족 파탄내는 게 형이야..? 이게 어떻게 형이야. 어떻게 우리 형이 이런 사람이야. 우리 형이 얼마나 상냥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데.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이런 일을 저질러. 그 애들이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겠어.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어떻게 가족들을 생이별시켰냐고!! 형이 사람이야? 형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어. 밤에 잠은 왔어..? 혼자 죄값 치른다고 스스로를 속죄하는 게 그게 어떻게 죄값이야! 은재는, 은재는 아직도 동생을 찾지도 못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도일의 오열 앞에 도진은 눈을 질끈 내려감았더랬다. 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도 하듯 자신의 손을 꼭 잡던 두 여자아이들의 손..

 


- 아저씨. 우리 언니랑 오빠한테 언제 가요?


- 아저씨, 우리 언니 전화번호 가르쳐 줬잖아요. 우리 언니한테 전화 좀 해주세요. 

우리 언니 보고 싶어요. 오빠도요. 


- 아저씨, 지금 한국에 가는 거 맞죠? 

 


다시금 악몽이 되살아났다. 단 한번도, 단 한번이라도 그 날 이후 편하게 발을 뻗고 자본 적이 있다면 차도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터였다. 그 아이들이 절박하게 잡던 손, 팔, 그 간절하고 눈물로 부은 눈빛까지도..자신을 원망하는 눈으로 노려보던 은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도일은 스스로 눈물을 닦았다. 형이 얼마나 어렵게 자신을 키웠고,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아버지의 회사를 지켜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희생의 댓가는 너무 컸다. 자리에서 일어난 도일을 보고 도진이 휠체어에서 반쯤 일어나다시피하여 도일의 허리를 꽉 잡았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서은재는 널 사람 취급도 안 할 거라고!

 

내 동생이 나 때문에 그런 취급 받는 거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비난은 내가 다 짊어진다잖아. 그냥 서은재랑 엮이지만 않으면 돼. 그럼 된다고. 그냥 엮이지 않으면 돼. 내가 받아야 할 비난을 왜 니가 다 짊어지려는 거냐고! 악을 쓰는 도진을 돌아본 도일은 천천히 눈물을 닦아내렸다. 사람이니까. 

 


" .......! "


" 그래서 더 갈거야. 은재한테. "


" 차도일!!!! "


" 하지만 어떻게 가는 길이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조차도, 형을 아직 어떻게 용서할지 준비가 되지 않았어. " 



차갑게 도진에게서 돌아선 도일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오래도록 흘러내렸다.

 


아...
하느님.

제발 절 용서하지 마세요....


 

 

 

 

 

 






이제 캐드 켜는 법도 잊어버렸나봐요? 곧 공사 시작인데 2차 투자 프리젠테이션이 코 앞이예요. 일 안합니까?


..........! 


뭘 멀뚱히 서 있어요. 전원 온오프 부터 시키고 캐드부터 뽑자니까. 

 

....


서은재! 정신 안 차릴 거야?!!!!

 


도일의 고함에 그제서야 은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운 건지, 얼마나 잠을 못자고 괴로워했는지 얼굴이 까칠한 게 엉망이었다. 도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당사자만 하겠는가. 동생이 세계 각지에서 잃어버린 채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것도 미칠 노릇인데 거기다 사랑하는 남자의 형이 내 동생들을 일부러 전 세계 각지에 팔아넘겼다,

 

거기다 원수를 아버지로 알고 있는 막내 동생 수완이까지. 은재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은재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 있었던 듯 젖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텅 빈 은재의 눈을 보는데 도일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써 이를 악물고 서류를 들이밀자 은재는 아예 도일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일어섰고, 비틀거리는 은재를 도일이 달려가서 안아들어야 했다. 은재는 그런 도일의 손을 억지로 쳐냈다. 도일은 자신을 밀어내는 은재의 이마를 다시 짚었다. 펄펄 끓는 중이었다. 병원부터 갑시다. 우리 프로젝트 중간에 망칠 일 있어요? 

 


됐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회사에 지장 줄 일 없어요. 쓰러져도 이 프로젝트 내가 지켜요. 그러니까 팀장님은 가서 일 보세요. 왠만하면 일 얘기 아니면 서로 사적인 대화 금지.


.........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은재는 다급히 뒤돌아섰지만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내내 울기만 한 일이 온전할 리 없었다. 어지러움증이 느껴지면서 쓰러지는 걸 도일이 받쳐 안았다. 당신한테 천하의 개싸가지란 욕을 들어도 상관 없으니까 병원 가야 해. 못간다, 안 간다 이런 말 안 받아요. 오늘 당장 당신한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으니까 일단 병원부터 데려갈 거야. 

 

도일의 따뜻한 말에 은재는 억지로 떼내려고 노력했지만 힘이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도일을 밀어낸 은재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을 힘도 없었다. 도일을 놔두고 일부러 복도 안으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의 문을 빠르게 닫았다. 도일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1층으로 하강 중이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저앉은 은재는 다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만 약해지고 싶어.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을래. 

그런데도,
네 따뜻한 품 속에서 그냥 무조건 펑펑 울고만 싶어.
이런 상황인데도, 이렇게 되버렸는데도..
여기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어떻게..
나는 어떻게.

 


네가 한 톨도 밉질 않은 건지. 









* * * * * * * *  * * * * * * * * *

 


민제가 본사로 완전히 옮겼다는 소식을 들은 건 1 주일이나 지나서였다. 시은은 다시 회사에 나오기 시작했고, 경유는 요즈음 컨디션이 좋지 않은 은재를 대신해 다시 어시스턴트로 돌아가 일을 하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경유의 부재 때문에 은재가 일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원그룹의 서 회장이 일의 압박 때문에 하나하나 완벽하게 체크하고 있었으니 은재는 몇 번이고 코피를 쏟을만큼이때까지보다 더 일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경유와 민제를 지켜보는 시은은 여러모로 부아가 치밀었다. 결국 경유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고 민제만 모든 걸 다 잃게 되었다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큰 각광을 받게 될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아 칭송하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차민제만 쏙 빠질 수가. 이게 모두 이 여자 때문이야. 이를 악문 시은은 자존심이고 다 버리고 부모님을 탈탈 털다 시피하여 겨우 부모님 빽으로 다시 인턴으로 재입사했더랬다. 부모님이 엄청난 거금을 투자하는 바람에 공 부장은 시은을 받아들이자고 은재와 도일에게 제안했고,

 

도일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지만 은재는 사원들끼리 도는 소문이 좋지 않아 반대하려 했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인턴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라 결국 시한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시은은 바삐 일하는 내내 경유를 노려보았다.

 

 

 

 

 

 

 

 

 

경유의 든든한 빽은 대단한 집안도 재력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유의 빽은 서은재였다. 은재가 시은이 허튼 짓 못하도록 얼마나 들들 볶고 일거리를 주는지, 민제가 있는 본사로 가고 싶었으나 은재가 있는 한 어림없는 소리였다. 본사의 ㅂ 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더랬다. 결국 시은이 믿을만한 것은 조선주 여사 뿐이었다. 이제 민제와 이어지는 일은 거의 포기한 거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민제와 경유가 이어지는 꼴도 못 볼 것 같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야해. 그 여자는 더 괴로워야 해.

 

나보다 더, 민제 오빠가 힘든 만큼 그 여자는 더 울고 힘겨워야 해. 숨쉬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될 만큼 더 아파야 한다고. 프로젝트의 완성본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는 경유를 노려보던 시은은 핸드폰을 들었더랬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어도 오빠랑 내 사이가 이렇게 최악으로 치닫진 않았어. 이제 난 오빨 만날 수 조차 없어. 오빠가 날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이게 너 때문이야. 전적으로 너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성경유! 휴대폰을 든 시은은 눈물을 닦아내렸다. 이게 내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절대로 둘을 이어지게 놔두진 않아. 

 


" 아줌마 저예요. 시은이. 저 한번만 도와주세요. " 


모두들 최종 프리젠테이션 준비와 공사 첫 시공식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이에 여사원 하나가 작업 도중 컴퓨터를 가리키며 악 소리를 질렀다. 여..여기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여사원이 가리키는 화면 때문에 사람들이 컴퓨터 가까이로 모여들었고, 웅성거리는 움직임 사이로 최신 뉴스 기사 하나가큰 글씨로 씌여 있었다. 

 


[단독] 조이델 조경 디자이너 차민제 군, 재벌 사위 되나? 유선 IT그룹 상속녀 유시은 양과 화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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