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Match Point
" 시은 씨, 결혼한다면서? 축하해! "
" 어떻게 우리 서 대리를 단숨에 채 가냐. 진짜 능력 좋아. 서 대리랑 몰래 연애중이었어? "
" 연애는 무슨. 그냥 집안끼리 하는 결혼 같던데요. "
마지막은 늘상 만사를 시니컬하게 대하던 홍보팀의 송 대리였다. 시은이 다시 프로젝트 팀에 오게 된 건 암스테르담 투자자와 손 잡고 딸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시은 아버지의 입김이 컸다. 사실 인사권은 도일이 애저녁에 은재에게 맡긴 터라 은재는 시은을 본사로 보냈던 거였는데 공 부장이 애걸복걸하다시피했다. 더욱이 지금 은재는 시은이 프로젝트 팀에 합류하느니 마느니 생떼를 쓰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런 일에 신경쓰기엔 은재가 가진 고통이 너무 컸다. 시은은 남들의 축하를 받던 말던 관심 없는 표정이다가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경유와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가 이긴 거야. 결국 민제 오빤 내게 오게 될 테니까. 자신만만한 시은의 표정 뒤로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나셨다.
와, 새 신랑 아냐? 축하해. 진짜.
.......차 팀장님은요?
동료들의 축하 러쉬에도 민제는 말을 돌렸다. 거의 석 달만에 처음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이미 기사로 소식을 접한 뒤였지만 보통 때 같았으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했을 민제가 아무 말이 없다는 건 경유로서도 그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보내기로 했고 잊으려 했고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무 자르듯 그렇게 되기는 힘들었으니까. 애써 민제를 피한 경유는 스튜디오를 나섰고, 복도를 돌아 나오는데 그 끝에 언제 나왔는지 민제가 서 있었다.
경유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지만 애써 참으며 민제 앞에서 목례만 하고 돌아섰다. 경유의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 팀장님께 결제받을 것이 있어서요. 이제 다음주면 공사도 끝나는데 본사에서 공사 마지막날 모든 팀 전체 회식 하자고,
대표님 재가가 떨어졌어요. 본사에서 주관하는 거라 조이델과 레이체 모든 팀원들이 참석하는 자리를 만들자구요. 그때 투자자들 포함 공사 후 진행 상황도 의논하는 자리이기도 하구요. 자리에 갔더니 공 부장님은 안 계시더군요. 민제의 일에 관련된 얘기에 경유는 정신을 차렸다. 아, 네..차 팀장님 어제부터 공사장에서 마무리 작업 점검하신다고 이번주는 계속 회사 안나오셨어요. 공부장님도 거기 가 계신 걸로 알아요. 제게 말씀하시면 제가 공 부장님 핫라인 통해 전달하도록 하겠어요.
경유의 말에 민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서 실장님한테 전달하면 바로 연결되는 거 아닙니까? 두 사람 긴밀한 사이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공사장엔 왜 공 부장님이 가 계시죠. 서 실장님과 같이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요? 민제의 질문에 경유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일 테니까요. 여하튼 모든 팀이 움직이는 일이니 차질없이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유는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픈 생각 뿐이었으므로 다시 돌아섰지만 민제는 경유 뒤에 서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그 기사는 나와는 상관없이 나간 기사야. 아마 어머니와의 합작품이겠지. 내가 그건 처리했으니까 상처받은 얼굴로 일부러 독하게 굴 것 없어요. 민제의 말에 경유는 못박힌 듯 그 자리에 섰다.
" 나완 상관없는 일이예요. "
" 나는 상관 있거든요. "
" 이제 이런 대화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
" ...."
" 그리고 정말 신경 안 써요. 그러니..."
" 나는 쓰여요. "
" 서 대리님. "
"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 그래도 오해한 채 내가 그쪽한테 오해 테스트당한 채로 그냥 그러기가 싫다는 거죠. "
" ......."
" 아무것도 안해요. 그 말은 해야 할 거 같았어요. "
그의 진실한 말에 흔들림을 애써 참느라 온 몸이 아우성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눈물 한 방울도 못 참겠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설 수는 없었다. 돌아서면 그냥 눈물을 참지 못할 것만 같았다. 돌아서는 경유에게 민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밥 꼭꼭 씹어먹고 커피 적당히 먹어요. 블루벨벳버드는 이제 그만 마시구요. 카페인은 작게,
당신은 칼슘이 부족하니까 우유 많이 먹고. 아프기 시작하면 바로 병원엘 가요. 소리치는 사이에 경유의 구둣발 소리가 멀어졌고 혼자 복도에 남겨진 민제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감돌았다. 도대체 저 여자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안 예쁜 날이 없네.
파리한 안색을 한 민제는 마른 기침을 삼키느라 겨우 숨을 토해냈다. 정말로 아픈 것은 민제였다. 헤어지자고 말한 뒤 경유는 공사 일에, 민제는 본사 일에 매진하느라 거의 얼굴을 한번도 못 봤더랬다. 오늘 만난게 거의 석달 만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에 파묻혀 사느라 민제는 내내 앓고 또 앓았었다. 어머니인 조선주 여사가 아무리 연락을 하고 제발 시은이에게 정착하라고 연락해도 민제는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고 휴대폰 번호도 바꿔버렸다. 어머니 연락도 받지 않는데 시은의 연락이라고 받을쏘냐.
그러니 시은과 선주가 아예 기사부터 내 버린 것이었다. 경유의 구둣발 소리가 멀어질때쯤 민제는 파리하게 웃었다. 오늘이 공사 마지막 회식 날이니 이미 경유는 사표를 제출했으니 오늘이 마지막일 터였다. 이젠 먼 발치에서라도 못 보겠네.
민제는 또다시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정말 끝인가..힘없는 표정으로 걸어오던 민제 앞에 상기된 표정의 시은이 서 있었다. 시은과 민제도 석 달만에 보는 것이었다. 시은을 그냥 말없이 지나치는 민제를 보다 못한 시은은 민제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 민제가 경유 앞을 막아섰던 것처럼. 어떻게 그 여자 앞에서는 온갖 절박함은 다 떠안을 것처럼 붙들더니 나는 투명인간 취급이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여자가 아니라 나란 거 명심해. 그 말에 그제서야 민제가 시은을 돌아보았다. 그럼 너도 명심해. 절대 어머니나 네 뜻처럼 될 일 없다는 거. 나는 내 형과 달라. 어머니라면 끝까지 착한 아들이었던 우리 형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야. 우리 형은 약혼 말고는 단 한번도 어머니 뜻을 거스른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 어떤 누구보다도 엄마의 착한 아들이었을지 모르지만 난 달라. 어머닌 나 다 모르고, 너 역시 날 다 몰라.
민제의 말이 진심임을 아는 시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고, 민제는 시은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동정도 연민도, 하다못해 인간적인 배려도 없는 지독히 차갑고 메마른 얼굴이었다. 조금 전 민제가 경유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딱 온기와 열정만 뺀 얼굴이었다.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진짜 아니 10프로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론사에 거절 기사 내고 네 부모님과도 통화했어. 지금 당장 데리러 오신다는 걸 너 스스로 뉴욕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씀드렸어.
이때까지 내 가족과 친밀하게 지내온 너에 대한 내 마지막 예의야. 네가 날 기만한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추락할 순 없어. 경유와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너한테 갈 거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안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아니라 널 망치는 길이니까.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아. 우리 어머니 때문에 너는 내가 그런 결정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틀렸어. 난 형이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내 어머니를 안 보는 것도 감수해. 경유를 포기한 건 어머니 때문이 아니야. 그 사람이 더 이상 고통받는 게 싫어서지.
" 그럼 그 여자가 원한다면 아줌말 평생 안보는 것도 찬성하겠단 소리야? "
" ........"
" 그 뜻이냐고! "
악을 쓰는 시은에게서 돌아선 민제에게선 그 어떤 미련도 없어 보였다. 포기 못해. 내가 뭘 포기하고, 내가 어떤 자존심까지 다 묵살하면서 돌아온 길인데 절대 포기 못해! 이를 악문 시은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공사도 어느덧 마지막 날이었다. 하지만 축배를 들어야 할 레이체와 조이델 사이는 모두 축제 분위기였지만 성공의 주역인 민제와 경유는 아예 본사와 프로젝트 팀으로 갈라진 데다 공사 마지막 날이 경유의 사표가 수리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거기다 내내 공사 일에 매달리느라 현장에서 숙소로, 또 현장으로 일에 파묻혀 살던 도일과 스튜디오가 집인 것마냥 일에 미쳐 사는 은재 사이도 뭔가 이상한 기류가 감지된다고 수군수군 말들은 많았지만 모두 쉬쉬할 뿐이었다. 회식이 열렸지만 다들 수군거리며 눈치만 볼 뿐이었고, 축하를 받아야 할 민제의 소식도 헛소문이라는 얘기가 인터넷 상에서 떠돌면서 전세계적인 히트를 친 성과와는 달리 팀원들 사이에서는 눈치만 보고 서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은이 도착하자 예전 같으면 결혼 축하한다는 소리를 늘어놓을 팀원들이 시은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눈도 안 마주치기 바빴다. 오늘이 경유와 마지막으로 보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경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늦은 시간에, 회식이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도 인수인계를 하겠다고 스튜디오에 고집스레 남겠다는 것이었다. 경유가 그러는 걸 알면서도 굳이 민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민제의 모습을 보면서 시은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은의 표정이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민제 앞에 나타난 은재가 천천히 민제에게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나 부탁할 게 좀 있는데 스튜디오에 다녀와 주겠어? 본사에 꼭 전달해야 하는 상황이라..은재의 말에 민제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네 그럴게요.
부탁 좀 할게, 서 대리.
민제가 떠나자 은재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시은이었다. 시은을 지나치려는 은재 앞을 가로막은 시은의 화난 눈은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태연한 표정의 은재를 보며 시은이 따졌다. 왜 하필 오늘이예요. 왜 민제 오빠냐구요. 실장님 일부러 이러시는 거 알아요. 지금 스튜디오에 성경유 씨 있는 거 알고 보낸거죠? 두 사람 만나게 해주려는 속셈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그쪽이 도일 오빠랑 잘 안됐다고 해서 성경유를 민제 오빠에게 찍어부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유유상종이라더니 어떻게 둘다 양심같은 건 집어던지기라도 했나보 죠?
짜악 - !
선을 넘은 시은의 막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차가운 은재의 손바닥이 시은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뺨을 얻어맞은 시은은 당황한 얼굴로 은재를 쳐다보았고, 은재 역시 차디찬 눈으로 시은을 노려볼 뿐이었다. 터진 입이라고 나불거리기는..내가 누군데 여기 와서 까불어. 너 그렇게 대단해?
" 실장님! "
" 넌 오늘부로 해고야. "
" 이봐요! "
" 한대 더 맞고 싶어? "
아무리 노빠꾸인 시은이라도 은재한테는 안 되었다. 내가 서민제를 보내면 보내는 거고, 내가 원하고 내가 오더 내리면 서민제는 따르는 게 이 팀의 룰이야. 그게 싫으면 나가면 돼. 니가 뭔데 가라 마라 된다 안된다야? 니가 이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야?
내가 인맥 동원하고 연줄빨 세우는 거 극도로 싫어하는데 차 팀장님 얼굴 봐서 간신히 넘어가고 있으니까 터진 입이라고 뭐? 회식날이라 좋게 넘어가주는 줄이나 알아. 한번만 더 내 눈에 띄이면 넌 영원히 국물도 없어. 알아? 은재의 독설 앞에 아무리 성격 급한 시은이라도 아무 말 못하고 뻗을 수 밖에 없었더랬다. 시은과 은재가 이런 언성을 높일 시간에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작별의 시간을 홀로 견디고 있던 경유는 그동안 같이 일해왔던 팀원들의 책상에 메세지 카드를 놓고 나오는 길이었다. 민제의 데스크 앞에 선 경유는 멈추어 섰다. 이제 본사로 거의 출근해서 스튜디오에 오는 일은 없다지만 데스크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친절하게 굴걸 그랬어. 이제 진짜 못 보는데. 이미 이삿짐도 다 옮겼고 경유는 암스테르담을 떠날 생각이었다.
프로젝트도 끝났으니 은재를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도 어느정도 벗은 뒤라 은재 역시 경유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이제 거의 스튜디오에 출근하지 않는 민제의 데스크는 어느새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위에서 흔들거리는 커피주머니 하나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블랙벨벳버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대롱거리는 커피주머니를 보는데 경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데스크 앞에서 돌아서는데 그가 서 있었다. 경유와 똑같이 울컥한 얼굴을 한 채로. 경유는 스커트에 꽉 쥔 주먹을 뒤로 숨기면서 이를 악물었다.
더이상 그에게 어떤 미련도 주어선 안 된다는 것이 경유의 입장이었다. 회식 간 줄 알았는데요. 경유의 말에 민제는 회식 자리에조차 자신과 마주치기 싫어하는 경유를 알자 차분히 가라앉았다. 일부러 자리를 피한 것이 분명했으니까. 공 부장님이 부탁한 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예요. 이제 인수인계를 다 했나보죠? 굳이 아무도 없는 회식 자리에 이렇게 몰래 떠나고 싶어서요?
민제의 물음이 계속되었으나 경유는 대답 대신 핸드백을 메고 일어섰다. 그동안 적지 않은 프로젝트하느라 애썼습니다. 서 대리님. 경유가 손을 내밀었지만 민제는 하얗게 마른 경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여기서 그만 인사해요. 경유의 말에 민제는 완전히 끝이라는 걸 느꼈다. 경유의 촉촉히 젖은 시선 사이로 웃는 웃음이 이별의 웃음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손을 잡으면 완전히 끝일 거라는 공포감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마지막 용기라는 걸 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손을 잡거나 놓치면 영원히 경유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민제는 성큼 다가섰지만 경유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택시 불렀거든요. 여기서 그만 헤어져요. 이미 오랜 준비를 해둔 탓인지 경유의 덤덤한 말에 민제는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뭐 하고 지내는지 연락은 해 줄 거죠?
.......
성경유, 아니 팀장님...
모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아요.
눈가가 젖어드는 민제를 두고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오른 경유는 누가 볼세라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빠르게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아플 정도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하강하고 누가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경유는 입구로 달려나가느라 바빴다. 다행히 불러 놓은 콜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멀리 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암스테르담에 있으면 민제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자신 또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만 같아서였다. 택시를 타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이별을 준비하는 것에 있어서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제야.
행복해야 한다는 말은 비겁한 사람이나 하는 것인줄 알았어.
내가 불행한데 상대방이 행복하기만을 어떻게 바랄 수 있겠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래.
널 너무 아프게 하고 상처입게 하고 그리고 너무 울게 해서..
그래서 넌 어디에 있든 꼭 행복하길 바래.
내 가슴이 찢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꼭.
너는 행복해야 해.
택시가 출발하고 나서도 경유는 쉽사리 오열이 멎지 않았다. 이별은, 해도 해도 단련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홀로 스튜디오에 남겨진 민제도 마찬가지였다. 먹먹한 표정으로 눈시울만 붉어진 채 눈을 내려감았다. 데스크 앞엔 정갈한 카드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서민제 대리님께. 딱 봐도 그 사람의 필체였다.
누구도 원망하는 삶을 살지 마.
오직 너였기 때문에 행복했어.
앞으로도 그 행복을 잊지 않는 네가 되기를.
" .....!!! "
몇 번을 울면서 쓴 글인지 군데 군데 눈물 자국이 번져 있는 것이 보였다. 경유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별을 선택하고, 이별을 결심하고 견디는 내내 민제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를. 자신을 포기하고 또 어머니와 절연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힐 민제를 걱정한 말이 아니고서야 이런 말을 쓸 수 없었다, 민제는 카드를 움켜쥐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다른 층에 한참을 머무르는 엘리베이터를 보자마자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내려갔더랬다. 1층 입구로 민제가 다다랐을 때는 비상구 계단을 뛰어내려오느라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로 한산한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지만 아예 꺼져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으니 어디 가서 찾을 수도 없었다. 퇴사하고 나서 어디로 갈 것인지 은재에게도 얘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헉헉거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민제는 카드를 움켜쥔 주먹이 벌겋게 젖어드는데도 오열이 멈추질 않았다.
" 성경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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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락 -
납골당 밑에 하얀 히아신스 꽃다발을 내려놓은 경유는 지그시 눈을 내려감았다.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전 민우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민우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경유에게 웃어주던 그때 그 얼굴로. 잘 있었어? 나 인사하려고 왔어.
이제 다신 못 올 거라서. 아니, 안 올 거라서. 나 미워해도 돼. 서운하다고 해도 돼. 이미 내가 많이 미워졌겠지만 이해해 달라는 말 안할게. 용서해달라고 안 할게. 하지만 네 동생은 미워하지 말아 줘. 원망하지 말아 줘. 그 애는..그냥 나한테 흔들린 죄밖에 없어. 네 동생은 사랑받을 이유가 충분하니까. 동생을 미워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나한테 다 쏟아부어 줘. 나야말로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너무 없는 여자니까. 히아신스가 바람에 휘날리듯 꽃잎이 꺾여 버렸다. 꼭 그것이 대답이기라도 하다는 듯 경유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서민우 사랑했던 거 절대 후회 안 해. 눈을 내려감았던 경유는 눈물을 닦곤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납골당 앞엔 그가 서 있었다.
" 맞았어. 내가 불행한 거. 그리고 너 없이 행복할 자신은 죽어서도 없어. "
" ........... "
" 엄마를 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네가 너무 괴로워 하니까 차마 그걸 지켜볼 수가 없어서 널 보내줬던 거야. "
" 서 대리님. "
" 서 대리 집어치워. 이런걸 써놓고 어떻게 내가 안 울길 바래? "
그의 상처투성이 손엔 구깃구깃한 카드가 손에 들려 있었다. 얼마나 운 것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이 부어 있는데다가 카드를 쥔 손엔 무슨 짓을 한 건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암스테르담을 떠났을 수도 있지만 서민제가 아는 성경유라면 떠나기 전에 분명히 형에게 인사를 하러 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훔치고 일어선 경유는 핸드백부터 주섬주섬 찾았지만 민제가 더 빨랐다. 난 후회는 안 해. 근데 성경유를 놓으면 평생 스스로 자책하고 힘들고 불행하면서 살까봐.
내가 불행한 건 누구보다 싫다던 사람이 내가 불행한 길을 자처해서 걸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왔어. 내가, 성경유 구하려고. 구원하려고. 말은 대담했지만 내내 목소리가 목이 메어 있었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성경유 만난 거, 성경유가 나 만난 것.
불행이 아니야. 우연히 만난 불행은 더더욱 아니야. 성경유는 나한테, 세상의 그 많은 불행 중 최고의 행운인 거지. 너 없이 불행한 것만 봐도 알잖아. 경유에게 말하면서도 민제는 내내 울고 있었다. 벌개진 눈을 보면서 경유 역시 안 울 수는 없었더랬다. 경유를 바라보던 민제는 천천히 경유의 우는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성경유. 어떻게 지내? 민제의 목 메인 말에 경유는 참고 참아왔던 눈물을 드디어 터트렸다. 그냥 살아. 서민제 없이 살지. 내내 불행하게.
" ...............이렇게 계속 살까? 서로 없이 이렇게 불행한 채로? "
" ..........."
"네가 없어야 행복해지지, 이런 말 말고. 그런 삶은 그동안 살아본 걸로 충분해. "
또다시 민제의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어머니를 어떻게 할 수도 없지만 있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 난 그냥 나고, 난 언제 어디서든 서민우 동생일 거고 우리 어머니 아들일 거라서. 그게 걸림돌이 되어서 널 불행하고 가슴 아프게 할 거라는 거, 그거 때문에 계속 뒤로 밀려나 있었어. 하지만 이걸 발견한 이상 그냥 못 넘어가. 민제의 손엔 반쯤 구겨져 있는 카드가 눈에 보였다. 이 카드는 성경유가 암스테르담 떠난 후에, 내가 이 카드를 찾고도 널 찾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근데 너 나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진심을 알면 난 필사적이 되잖아. 네가 눈 앞에 있잖아. 민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유가 민제의 품으로 확 파고들었다. 참고 참다가 버틴 탓이었다.
참고 버틴 후의 삶은 지옥이었다.
내가 지옥속에 살고 있는데 끝끝내 널 데리고 갈 수는 없어서 버렸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평화의 천국보다..
네가 있는 지옥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울면서 매달리는 경유를 와락 끌어안은 민제는 카드가 눈물로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유의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았다. 그리고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 뜨겁게 입술을 찾아들었다. 뜨겁고 달뜬 숨결이 서로를 온전히 지배할 때까지.
" ......! "
부스럭거리는 침대 시트 소리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잠들었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계속 잠을 못 잤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랫만에 정말 달고 달게 잠을 잤던 민제는 뭔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에 눈을 흡떴다. 조용히 개켜진 한쪽의 시트가 눈에 띄였다. 간밤의 격정적인 하룻밤은 꼭 둘 다 마지막이 아닌 마지막을 준비하는 느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초야를 치르는 내내 경유는 눈물을 달았다. 처음 남자인, 민제를 받아들이던 그 순간도 희열에 달뜨면서도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또 미안해..작고 여린 경유를 안는 내내 서러움으로 눈물이 터지는 경유를 꼭 안아야 했다.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민제 역시 가족을 버릴 수는 없었고 경유는 그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조용히 개켜진 시트를 보고서도 민제는 예감을 했던 듯 눈을 내려감았다. 언뜻 잠결에 경유가 호텔방을 떠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잡지 않았다. 돌아올 때가 되면 자연히 돌아올 사람이었다. 다만, 지금은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개켜진 시트 위로 호텔에서 나오는 빈 종이가 눈에 띄었다. 경유의 습관대로 얌전하게 접혀져 있는 종이 한 장. 새벽 내내 아이처럼 잠든 민제를 옆에 두고 눈물로 써내려간 편지가 분명했다. 몇 번을 울면서 쓴 건지 종이 반쪽은 거의 젖어있다시피 했다.
사랑하는 민제.
나 비겁한 거 아니야. 도망가는 거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어제 널 사랑할 수도 없었어.
내 생애 있어서 너는 특별한 행운이고, 또 선물이고 또 축복이라는 걸 잊지 말아 줘.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건 시간이야.
너에게 가족을 뺏고 살아간다면 우린 또 다시 불행해질 거야.
가족을 등지고 나한테 오는 너는, 반쪽은 불행한 채로 살아갈 거야.
나도 상처를 혼자 치유할 시간이 필요하고,
너 역시 너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질 시간이 필요해.
다시 정정할게.
난 단 한번도, 서민우 그림자로, 대용품으로 널 선택해본 적이 없었어.
넌 언제나 오롯이 너야.
내가 사랑하는 서민제로.
다시 돌아올게.
그때는 눈물 한 방울 없이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니까 넌 팔을 벌려주고 있기만 하면 돼.
내가 환하게 웃으면서 달려갈 때까지.
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경유로부터.
". ......"
편지를 소중히 품 안에 안은 민제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편지를 가슴에 안은 민제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천년이 지나도 반드시 기다려야지.
당신이 올 때까지.
* * * * * * * * * * * * * * * * * *
공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투자자들과 이 사업을 관심있게 지켜봐 온 사람들이 첫 시사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시기에 도일은 일벌레처럼 일만 하던 와중에 한동안 거의 연락도 하지 않았던 도진을 찾았다. 초췌한 것은 도진도 매한가지였지만 도일은 거의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일만 한 사람티가 확연히 났다. 살이 빠진 것은 물론이었고 누가 봐도 초췌한 폐인 같았다. 도진은 그런 동생에게 미안하여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공사 끝났어. 내일이 완공식 겸 시사회야. 형에게 요구할 말이 있어 들렀어.
" ....도일아. "
" 이 프로젝트의 전권을 내게 줘. "
" ........! "
" 형은 은재와 은재 가족들에게 갚을 빚이 남아 있잖아. 나는 전권을 은재에게 줄 거야. 이 일을 같이 시작한 죽은 민우도 그건 이해해 줄 거야. 죽은 민우가 가져야 할 지분은 성 팀장한테 있어. 성 팀장도 그건 이해해 줬어. 형만 납득하면 모든 전권은 은재가 가지게 돼. "
" ...그건 강 대표와의 전면전이야! 그놈이 얼마나 독사같은 놈인줄 몰라. 그놈이 서은재 포기할 것 같아? 이때까지 그 조카를..."
콰앙-!
강진형 대표의 이야기를 언급하니 초췌하여 말도 않고 있던 도일의 눈빛이 섬광이 번뜩이듯 차가워졌다. 그건 형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은재를 막는 건 내가 다 처리해줄 거야. 은재를 괴롭히는 것들은 내가 온 몸을 내던져서라도 구해줄 거야.
형은 이제 은재에게 갚을 생각만 해. 그게 내가 형을 용서해야만 하는 이유니까. 그리고 나 때문이기도 했었을 거니까. 내가 형에게 짐이 아니었다면 형이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할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도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자 도진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휠체어에서 반쯤 내려오다시피하여 도일의 손목을 잡았다.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어떻게 네가 잘못이 있어. 네가 무슨 잘못이 있어. 아냐. 잠시 내가 악마한테 영혼을 팔았던 거야. 그리고 계속 너한테 얘기한다는 협박에 시달렸고..그놈을 향한 원망으로 하루하루 내가 병들어 갔었던 거지. 은재 눈을 보는 순간 알았어. 내가 그 애와 그 동생들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네가 믿든 안 믿든, 그 일을 하고나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어. 내 손으로 속죄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게.
" 형..."
" 하지만 넌 아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책임감도 집어던져 버려. 넌 이 못난 형을 만난 죄밖에 없어. "
" .........."
" 은재에게 속죄하는 건 내가 할게.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도 나 때문에 그동안 아팠던 걸 더 하게 할 수는 없어. "
도진의 뜨거운 눈물 앞에 도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은재야.........
사랑하는 내 서은재.........
완공식 전날은 은재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경유는 자신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올 테니 그 집을 지키고 있어달라고 하면서 간단한 짐만 꾸려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원래는 아예 암스테르담을 영원히 떠날 계획이었으나 민제를 만난 후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경유와 민제는 힘든 시간들을 이어왔지만 결국 다시 합칠 것이었다. 민제 역시 본사에서 일하던 것을 관두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경유의 빈 자리를 메꾸겠다는 각오였다. 내일이 시공식이었고 그건 끝이자 시작이었다.
하지만 은재는 집에 있지 않고 오래간만에 본사를 찾았다. 스튜디오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본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늦은 저녁 회사를 찾은 은재는 큰 마음을 먹고 강 대표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은재와 안면이 있던 비서가 전달하겠다며 메모를 남겼다. 지금 회의중이라 했다. 그동안 강 대표가 꾸준히 은재가 가지고 있는 프로젝트의 지분을 뺏고 전권을 회수하려 하는 건 알고 있었다. 사실 은재는 조이델의 대표 디자이너이고 대표는 강 대표라서 언제든지 전권을 회수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분명히 대원그룹의 서 회장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서 회장과 강 대표가 공조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힌 채 은재가 오롯이 일할 수 있게 내버려둘 작자들이 아닌 건 분명했다. 은재 씨, 말도 마세요. 하루가 멀다하고 그분이 찾아오셔서 얼마나 엄포를 놓고 갔는데. 비서의 말에 은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분이라뇨.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 그분요. 그 눈 크고 목소리 좋고 잘생긴 은재 씨 파트너요. "
" ....... "
" 하루가 멀다하고 대표님 찾아와서 프로젝트 방해하면 대표님이 가진 모든 비리 까발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갔는데요. 은재 씨 방해하는 그 순간부터 지옥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매일 매일을 찾아왔었어요. "
"....!!!!! "
" 대표님도 처음에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폭언으로 치부했었는데 무슨 약점을 잡힌 건지 꼼짝을 못하시더라구요. 저 괄괄한 대표님을 말로 이기는 사람 처음 봤어요. "
" ........."
" 그 분이 원한 조건은 단 하나였어요. "
" ......... "
" 서은재가 하는 일에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을 것. "
비서가 말을 전달하는 내내 은재는 표정을 숨기려 애썼다. 아무리 덤덤해지려 노력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바보..멍청이. 멍텅구리. 호구. 도대체 당신이 잘못한 게 뭔데 모든 원죄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그게 뭐냐고. 공 부장에게 듣는 소리도 많았고 민제도 계속해서 전달해 주었었다. 미친 사람처럼 오로지 일에만 매달려서 이 완공이 자신의 평생 숙원인 것처럼 그렇게 매달려서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더라고. 그 어떤 일도 그렇게 완벽하게 해내진 못했을 거라고 했다. 이미 완성품을 보고 온 은재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대표실 문 앞에 서 있던 은재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은재 모르게 은재를 완벽 집중마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은재를 돌게 만들었다. 바보 차도일..
" 은재야! "
" .........."
비서에게 인도되어 안내되자 강 대표가 환하게 반색하며 은재를 맞아들였다. 엄마를 닮은 저 눈웃음만은 진짜였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다정하고 섬세하게 대할 때마다 속았던 저 눈빛, 엄마의 목소리와 엄마의 눈빛을 닮은 저 모습만 아니었더라도..이를 악문 은재는 용기있게 강 대표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젠 더 이상 이 자에게 속거나 두려워하지 않아. 엄마, 아빠. 지켜봐주세요. 이제 시작이예요.
됐어. 이제 왔으니 됐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자. 그럼 돼.
.........
어짜피 이 회사도 네게 물려주려고 했어. 내게 자식이 있어 뭘 있어. 다 네것이 될 텐데 왜 그렇게 엇나가서 조바심을 태우니. 그리고 집 떠나서 살면 고생이기만 하지. 집에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고 얘기하자꾸나. 그리고 이번 일은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다시 집에 와서 너 하고싶어 했던 공부를 하건 뭘 하건...
다른 사람 누구요. 대원그룹 말씀인가요? 대원그룹 서수철이 이번 지분을 다 넘겨달라고 하던가요?
.........은재야!
그럼 그렇지. 은재는 강 대표의 생각이 다 읽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람은 영원히 안 변한다니까. 그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강 대표의 회사에 남아있었던 건 오롯이 이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돈만 아는 수전노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이 프로젝트로 도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온갖 욕은 다 들어먹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은재는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 서 회장도, 강 대표도 이제 이번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인지 다 알기에 은재를 구슬리고 달래면 된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 받으세요. "
은재는 조용히 품 속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돈은 아닐 것이고, 영문을 모르던 강 대표가 고개를 들자 은재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걸 내 손으로 직접 드리게 되어 얼마나 영광인지 몰라요. 얼마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데요. 이 순간을 위해 내가 그동안 그렇게 달려온 건데.
" 사표예요. 저는 이제 조이델을 떠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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